아메리카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2016-03-31 앤드루 바체비치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 여부와는 별개로, 적어도 역사학자들은 트럼프를 지난 반세기 동안 나온 대통령 후보 중 가장 중대한 인물로 기록할 것이다. 그는 이미 미국 정치판의 분위기와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그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된다면 정치판의 구조적 토대마저 무너뜨릴지 모른다. 11월에 있을 대선에서 트럼프가 이긴다면, 미국의 정치구조는 되돌릴 수 없이 변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위대한 미국을 만들 것이다.”
트럼프가 이 공약을 지키든 지키지 못하든, 그는 벌써 미국의 민주주의를 흔들어 놓고 있다. 트럼프는 정치적 기득권층을 조롱하고 정치규범을 어기는 것에서 희열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를 반(反)기득권자로 분류한다면 그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정치판에서의 그의 존재는 빅 파르마(Big Pharma, 시뮬레이션 비디오게임)에서 마틴 슈크렐리(Martin Shkreli, 튜링제약 전 CEO)의 존재와 비슷하다. 이 둘의 과장된 캐릭터는 더 거대하고 추악한 현실보다 희석된 본질을 드러낸다. 두 사람 모두 현 시대를 냉소적으로 조롱한다.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간판이 된 셈이다.
그러나 전 지구적으로 매도당한 슈크렐리와는 달리 트럼프는 그의 잘못된 행보나 실책, 말실수에도 개의치 않는 다수의 지지자들을 모았다. 트럼프의 신념 - 그에게 자기 과시 이외에 신념이 있다면 - 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중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트럼프주의는 프로그램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처에 퍼진 분노와 소외를 먹고 더 많은 분노와 소외를 재생산하는 태도나 자세에 가깝다. 이러한 태도는 일정한 수의 미국 유권자들이 늘 고수하고 있는 것인데, 특히 오늘날에는 날카로워진 분노가 진심이기 때문에 잘 먹힌다. 트럼프는 차별적인 언행을 금지하는 정치적 정당성의 규율을 보란 듯 짓밟아 뭉갠다. 그는 이 버릇없는 악동 역할로써 분노를 입증한다. 그의 행동이 비상식적일수록 정치라는 서커스의 중심에서 그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진다. 트럼프가 다음에는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해서라도 우리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공화당 경선 라이벌인 마르코 루비오의 말을 다른 문맥으로 인용하자면, “트럼프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방송심의 규정조차 뛰어넘는 천재적 전략
여기에는 천재적인 전략이 있다. 미국 공공부문의 어떤 인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트럼프는 진지해 보이는 사람들과 노골적이고 경박한 사람들 간의 뚜렷한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1968년 대통령 후보로 나온 리처드 닉슨이 코미디 쇼 <Laugh-In>에 나와 불멸의 유행어 “Sock it to me?”(1)라는 말을 따라함으로써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트럼프만큼 이런 상황을 잘 활용한 사람은 없었다. 트럼프는 현대 미국사회에서는 유명세가 권위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력이나 자격 조건 따위는 그 다음 문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TV리얼리티 쇼의 사회자가 순식간에 미국 대선후보로 떠오른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트럼프가 천재적 전략가라는 단서는 또 있다. 조롱하는 냉소주의자에 가까운 유명 언론인들과 펼치는 그의 언론 플레이 기술이다. 트럼프는 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나르시시즘에 빠진 그들의 가면을 벗겨버린다. 그 우쭐대는 모습이 비록 자신의 거울 속 모습이라 할지라도. 방송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심의하는 문지기 역할을 자처하는 방송인들을 트럼프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뉴스속보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조성하며, 방송심의 규정을 무시하는 언행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TV토론회는 트럼프에게 그에 대한 숭배를 강화하는 이상적인 연단이 될 수 있다. 한때는 거의 최면에 가까울 정도로 엄숙했던 공공교육의 장이었던 대선후보 토론회(1960년 케네디와 닉슨을 떠올려보라)는 이제 욕설과 비방으로 상대방을 도발하고 야비한 언쟁에 휘말리며, 전쟁부터 국경보안에 이르는 모든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식 공약을 선전하는 곳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다 트럼프 덕분(?)인 셈이다.
트럼프의 성공적인 유세는 그의 경쟁자들을 결집시켰다. 점점 축소되는 공화당의 입지 내에서 생존하려면 트럼프의 괴상한 언행을 모방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테드 크루즈는 트럼프의 수제자다. 크루즈와 트럼프의 관계는 가수 레이디 가가와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관계와 비슷하다. 전자는 후자보다 덜 독창적이고 덜 자유분방하며, 짜여진 각본에 의해 계산된 버전이다.
복제인간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크루즈는 스승 트럼프가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나 화났어, 내 나라를 돌려줘” 식의 분노를 같은 방식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크루즈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명예훼손을 통한 반박이나 허황된 공약 남발에 탁월한 소질을 드러낸다. 공화당에서 크루즈 외에 유일하게 후보 경쟁중인 마르코 루비오도 비슷하다. “미국의 과거 영광을 되살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만들겠다”는 다짐만큼 강렬한 것은 없다. 이 세 공화당 후보들의 눈높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잘 맞는다. 미국 내 정책과 세계에서의 미국 역할이 그것이다.
“미국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특히, 미국 내 정책에 관해서는 트럼프, 크루즈, 루비오가 만장일치로 미국을 괴롭히는 모든 문제들의 원인을 오바마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은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던 2009년 당시만 해도 순조롭게 잘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오바마의 잘못된 정책들 때문에 지금처럼 엉망진창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오바마가 망친 모든 것들을 되살리고 오바마의 썩은 유산을 해체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선거유세 첫 날부터 공화당 후보들이 내세운 공약은 의료보험, 이민정책,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오바마가 망친 것을 되돌리겠다는 것이었다. 서명 몇 번과 손짓 몇 번이면 간단하다. 세계에서의 미국의 역할 역시 마찬가지다. 공화당 후보들은 힐러리 클린턴의 사주와 도움으로 오바마가 국외 정사도 모두 망쳐놓았다고 주장한다. 공화당이 유감을 표시한 목록은 특히 길다. 오바마 덕분에 러시아는 유럽을 위협했고 북한은 말썽을 일으키고 있으며, 중국은 군사력을 확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슬람국가(ISIS)는 날뛰고 있으며 이란은 핵무기 소유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감스러운 건은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미국의 이런 정책을 달갑지 않아 한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도 공화당 후보들은 손발을 맞춰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 모든 문제들은 군사력에 관한 것이다. 트럼프, 크루즈, 루비오 이들 셋은 모두 강력한 군국주의자들이다(힐러리 클린턴도 군국주의자이긴 하나, 이것은 따로 놓고 봐야할 문제다). 그들은 오바마가 미국의 군사력을 최대한 발휘시키지 못했으며, 그 점을 그들은 맹세코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크루즈, 루비오 셋 중 누구든 간에 공화당 대통령은 모스크바나 평양, 베이징, 테헤란에서의 어떤 말대꾸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슬람 강성 테러리스트들을 뿌리 뽑을 것이며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상자에 집어넣을 것이다. 또한 협상과정에서 테러리스트들을 고문하며, 네타냐후 총리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줄 것이다. 오바마에 대한 역설적인 찬사(단시간에 그토록 많은 손해를 가져온 대단한 사람이라는)에 더해 공화당 비평가들은 대통령의 절대 권력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무능력한 혹은 잘못된 동기를 가진 수장이 모든 일을 망쳐버릴 수 있듯, 대담하고 능력 있는 수장은 모든 일을 제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오바마를 비롯한 최근 대통령들의 공약과 공약의 실행 비중을 보면, 위와 같은 이론은 옛 이야기가 됐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위대한 대통령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환상은 존재한다. 이 환상을 이 세 명의 공화당 후보들이 선거 캠페인의 구심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저를 뽑아주세요.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저 뿐입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 버니 샌더스를 비롯한 그의 경쟁자들보다 한 가지 면에서 우위에 있다.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 신전 같은 기념 도서관을 세워주며 대통령을 신격화하는 미국인들에게, 스스로를 이미 신격화하는 병적인 자기중심주의자 재계 거물, 그보다 ‘나라를 구할 위대한 대통령’ 역할에 더 잘 맞는 사람이 있을까? 시대는 강력한 리더십을 요구한다. 한낱 인간들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수완가보다 그 리더십을 더 잘 보여줄 사람이 있을까?
상상하라! 카지노가 딸린 대통령 도서관을
트럼프의 공화당 대선후보 확정설은 현재로서 꽤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당은 아마 붕괴될 것이다. 잔류당이 살아남더라도 원칙에 입각한 보수주의를 대변한다는 주장은 몰수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트럼프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는 보수주의도 아니고 트럼프주의는 당이 필요치 않다. 만약 관습적인 진보주의의 대안으로서 새로운 당이 생겨난다 해도, 미국의 정치 판도를 오랫동안 정의해온 2당 체제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트럼프나 트럼프의 아류들이 대통령직 확보에 성공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영향은 생각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미국은 이름뿐인 민주공화국으로 전락할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그 자신만이 민의(民意)를 표현할 수 있노라고 선언한다면, 미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법치를 군사독재 체제와 맞바꾸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트럼프의 워싱턴은 후안 페론시절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비슷할 것이다. 에비타(후안 페론의 배우자) 대신 비슷하게 화려한 멜라니아(트럼프의 배우자)가, 선거 대신 적절히 매력적인 국민투표가 자리할 것이다.
미국인들의 상당수가 이러한 전망을 환영하고 있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마법에서 깨어난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 수십 년 간, 미국의 민주주의는 부패해왔다. 국민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주권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권력이라는 기구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권력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이미 개념조차 희미해진 공공의 선(善)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국민들은 무책임과 책임 불분명과 무능력, 그리고 이것들로 인한 우울한 시절을 겪을 만큼 겪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모험을 걸고 있는 것이다. 즉 트럼프가 국가라는 정치적 통일체를 발가벗겨서 더 나은 것으로 만들진 못하더라도, 더 흥미진진한 것으로라도 만들어낼 것에 기대를 걸어보고 있다. 결국,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그랬듯, 그리고 선동 정치가에게 운명을 맡긴 사람들이 그랬듯, 이러한 기대는 실망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상상해보라. 다른 모든 대통령 도서관들을 합친 것보다 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기념 도서관이 찬란하게 빛날 날을. 아마 그 도서관 한쪽에는 카지노가 붙어있을 것이다.
글·앤드루 바체비치 Andrew J. Bacevich
미 보스턴 대학의 역사학 및 국제관계학 명예교수이며, 2016년 4월 Random House에서 출간될 <더 위대한 중동을 위한 미국의 전쟁: 군대의 역사(America’s War for the Greater Middle East: A Military History)>의 저자이다.
번역·이유민 yoomineverything@gmail.com
연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1) 원래 선정적인 의미가 있는 말로, 당시 쇼에서 벌칙 같은 나쁜 일을 당하기 전에 “어디 한번 해봐!”라는 뜻으로 쓰였다.(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