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포퓰리즘의 숭배
2016-03-31 예브게니 모로조프
정신분석학에 정통한 시애틀 출신의 디자이너 마이크 불라제브스키는 2014년 8월 <공유의 숭배>라는 멋진 책을 한 권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수백만 명의 소비자가 우버나 에어비앤비 등 이른바 ‘공유경제’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기업들에 왜 그토록 열광하는지 이유를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이런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것을 일종의 종교적 숭배 현상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숭배의 대상이 그렇듯, 이 다국적기업들도 소속감, 연대감 등 인간의 내밀한 욕구에 부응한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할 새로운 세상을 약속한다. ‘박해받는 선구자’라는 낡은 레퍼토리를 꺼내들고는, 자신들을 비판하는 모든 자들에 대해 담대하고 혁신적인 신(新)경영자들을 말살하기를 꿈꾸는 후진적 인간으로 몰아붙인다. 정부, 노조, 과거의 거물급 기업가가 모든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자들을 없애려 한다는 황당무계한 음모설을 꾸며대는 것이다.
고객의 욕망을 조종하는 기업. 사실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상당수의 대기업들이 평소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를 일삼으면서, 자사 제품이 지구온난화를 해결할 특효약인 것처럼 선전해왔다. 다만 예전에 비해 마케팅의 달인들은 훨씬 더 악랄해졌다. 기존의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역주)이 “소비를 통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기괴한 생각을 퍼뜨렸다면, ‘공유경제’는 그것을 뛰어 넘어, 아예 소비자 개개인을 스스로 가장 경애하는 벤처기업교의 로비스트로 만들고 있다.
IT 기업이 정부의 모든 규제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고객까지 동원하는 현 시대에, 불라제브스키가 쓴 에세이는 꽤나 유익함에 틀림없다. 오늘날 우리는 놀랍도록 막강한 로비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다. 이 새로운 형태의 로비가 그토록 위력적인 이유는 각각의 로비 세력이 넓게 분산돼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민과 알고리즘이 하나가 돼 숭배 대상을 향한 모든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똘똘 뭉치는 것이다. 이러한 기업들은 다양한 기술 노하우와 불과 몇 초 만에 수백만 명과 접촉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겸비했다. 그 덕택에 정부당국을 상대로 막강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우버와 페이스북의 위력은 어디까지인가
아마 지난 여름, 더블라지오 뉴욕 시장과 우버 사와의 불꽃 튀는 대전을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당시 더블라지오 시장은 캘리포니아에 소재한 이 기업의 뉴욕 내 차량 등록 대수를 제한하려 했다. 이에 우버는 더블라지오 시장이 뉴욕 택시기사들의 이익을 비호한다고 비난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또한 자사의 저렴한 서비스가 소수의 집단에게 이익을 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에 그치지도 않았다. 자사 모바일앱에 ‘더블라지오’ 탭을 추가하는 묘수를 던진 것이다. 뉴욕시가 그려진 지도 위에 “차가 없다. 그 이유는 이것이다”라고 쓴 긴 배너가 뜬다. 이 배너를 클릭하면, “더블라지오 시장이 우버를 죽이려 한다. 시의회에 이를 규탄하는 메일폭탄을 보내달라”는 호소 메시지가 나왔다. 결국 뉴욕시장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는 페이스북도 그와 비슷한 전술을 구사했다. 페이스북이 전 세계 인터넷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추진 중인 무료 인터넷 서비스 ‘프리베이직’을 인도통신규제위원회가 금지하자, 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계의 공룡기업이 자사의 이 중요한 신사업을 ‘구원’해달라며 소비자들에게 호소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페이스북의 웹 중립성 위협 비판을 무마시키고자 함은 물론이다.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마크 저커버그가 사령탑을 맡은 이 다국적기업은 발 빠르게 구원운동을 위한 인터넷 플랫폼을 개설했다. 그리고 클릭 한 번만으로 인도인들이 인도정부에 탄원서를 보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글 한 번 읽었을 뿐인데 탄원서에 이름이 등록되는 황당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지난 수십 년 간 다국적기업들은 싱크탱크, 언론, 홍보업계 등을 통해 소비자가 그들의 뜻에 동참하도록 만들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버, 페이스북 등의 기업들에게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 없다. 그들은 그들 기업을 규제하는 법률이나 정책이 마련되려 할 때마다, 이를 무마할 수 있을 만큼의 대중의 지지를 결집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페이스북의 위력은 그 정도를 뛰어넘는다. 이 기업은 뉴스피드에 제공된 정보를 선별·조종하며, 소비자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치거나, 소비자가 자사의 견해에 동조하게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동원력을 고려해볼 때, 이런 종류의 기업들이 종교 운동의 모습을 띠는 것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들이 믿는 신은 다름 아닌 ‘혁신’이다. 그러니, 혁신에 걸림돌이 되는 자는 모두 이단, 사악한 무리나 돈에 매수된 자들로 간주된다. 가령 우버 사를 위해 레드카펫을 깔아주기를 거부한 시장들은 택시업계나 호텔업계와 손을 맞잡고 일하는 자들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각국의 규제기관은 통신업계, 유럽의 법원은 기존의 미디어그룹과 결탁했다는 의혹을 받는 것이다.
실리콘 밸리를 지배하는 세계관은 바로 부패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순수함을 제공하는 원천은 바로 캘리포니아의 지하창고 뿐이라는 인식이다. 기름 때로 얼룩진 트레이닝복 차림의 성인들이 그곳에서 신기술의 복음과 눈부신 진보를 위해 삶을 헌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념적인 차원에서, 오늘날 실리콘 밸리는 과거 극우가 점하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리콘 밸리가 티파티(tea party)가 지닌 기술지상주의적이고 세계주의적인 세계관을 구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삐 풀린 타락한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완벽하고도 이상적인 자본주의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심어주기를 원한다. 그들에 의하면, 오늘날 시민들은 기존의 산업계와 정부의 결탁으로 인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비싼 교통비, 천문학적인 주거비, 터무니없는 소유권 규제, 국가가 기업가를 구속하기 위해 입히는 꽉 조인 코르셋 등의 대가를 말이다. 사실 기업가야말로 유일하게 보호를 받는 계급임에도 그들 자신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향후 전투는
두 ‘하이테크 포퓰리즘’의 대립
결국 실리콘 밸리가 제안하는 정책이 담고 있는 세계관은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분야가 각종 규제에서 해방돼 인터넷의 질서파괴자들에게 넘겨지면, 즉시 가격은 내려가고, 기업가는 각종 굴레에서 벗어나며, 대중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복지국가가 개개인을 깊은 잠에 빠뜨리며 그들에게서 책임감을 앗아갔다”는 주장이 깔려있다.
사실 모바일앱에서 온라인 탄원서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이런 정책을 선전할 만한 혁신적 수단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당장 성공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결집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니까. 그러면 나머지는 기존의 전통적 로비스트들이 전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백만장자 벤처 투자자들이 쥐어준 넉넉한 후원금으로 말이다.
사실 실리콘 밸리가 정부당국의 건강상태에 대해 늘어놓는 한탄이 좌파 반체제 포퓰리즘 진영에게 (적어도 유럽에서는) 귀감이 됐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스페인의 포데모스에서 이탈리아의 오성운동(M5S)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 간 출현한 신생정당들은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처럼 소셜네트워크서비스망이나 신기술 등을 기반으로 지지자를 결집하는 홍보수단을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들이 실리콘 밸리의 우파들이 제안하는 개인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탈규제를 표방한 정책까지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런 정책들에 질색한다. 그러나 그들과 같은 수단을 활용하는 것까지 싫어하지는 않는 듯하다.
2015년 1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판 10면)에 실렸던 ‘정당의 시대는 끝났는가’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살펴보자. 기존의 정당들은 여전히 지난 약속과 과오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최근 스페인에서의 선거는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석이 돼버린 듯한, 더 많은 민영화와 유연한 시장을 외치는 신자유주의 노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 그들은 중상주의와 ‘노동 유연성’을 극대화하자는 실리콘 밸리의 구호에 맞설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들에게는 지지세력(적어도 남아 있다면)을 결집할 수단도 없다.
따라서 향후 전투는 두 하이테크 포퓰리즘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즉, 신생정당으로 대변되는 ‘좌파 하이테크 포퓰리즘’과 실리콘 밸리 기업가로 구현되는 ‘우파 하이테크 포퓰리즘’ 간의 대전이 될 것이다. 결과와 무관하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시민의 관심을 집중시킬 기술을 장악한 자가 결국 정책토론의 이슈도 주도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은, 그와 같은 중요한 기술을 우버나 페이스북에 독점시킬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인 것이다.
글·예브게니 모로조프 Evgeny Morozov
작가. 주요 저서로는 <디지털 신기루: 빅데이터 정책을 위해>(2015), <만사 해결을 원한다면 이곳을 클릭하라>(2014) 등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