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 불변의 약속
2016-03-31 올리비에 피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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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빨간 하늘>, 1933-오토 프뢰들리히 |
1931년, 22세의 나이로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 시몬 베유는 오트 루아르 지역의 광산촌 퓌-앙-블레에 여고교사로 부임한다. 그의 출신학교인 파리고등사범학교(ENS) 교장이었던 셀레스탱 부글레는 기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시몬 베유에게서 “무정부주의자와 성직자가 뒤섞인” 면모를 발견했고, 그의 비판정신과 전투적 태도는 그런 면모를 넘어선다고 평가했다. 그는 시몬 베유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가능한 한 더 멀리”(1) 나아가기를 원했다.
퓌에서 시몬 베유가 경험한 교사생활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투쟁하는 참여가 두드러지는 그의 철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된다. 시몬 베유는 1938년 조르주 베르나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어릴 때부터 경멸받는 사회 하층민들에게 마음이 갔다”고 털어놓고 있다.
시몬 베유는 앙리4세 고등학교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에밀 샤르티에로부터 “생각과 행동은 불가분의 것이며, 지식은 경험을 통해서만 진정한 것이 된다”고 배웠다. 알랭이라는 필명을 지닌 샤르티에는 철학자이자 휴머니스트이며, 열렬한 평화주의자였다. 시몬 베유는 그런 샤르티에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그 시기의 유럽은 파시즘이 부상하며 여기저기에서 군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1929년에는 대량실업 위기가 발발했다. 당시 프랑스 정계는 급진당(중도 좌파)이 우세했고 내각은 불안정했다.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1927년부터 시몬 베유는 한 평화주의노동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이듬해 그는 고등사범학교 재학생들이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군사교육에 항의하는 탄원서에 서명한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실직자들을 위해 기부해달라고 호소한다.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시몬 베유는 시민대학 정신을 실천해 철도노동자들에게 문학을 가르친다. “가르치는 사람이 그가 가르치는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도 있다”는 ‘상호교육’을 시도하기 위해, ‘부르주아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그가 쓴 논문 <르네 데카르트 론>에서도 이런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노동자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노동을 벗어나면 그들은 자신이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퓌에 도착한 후, 젊은 철학자 시몬 베유는 자신의 희망을 “정당활동이 아닌 조합활동”에서 찾으면서 오트 루아르와 루아르의 노동자 세계에 들어간다.(2) 시몬 베유는 전투적인 활동가들의 세계로 진출해, 노동총동맹(CGT) 산하 전국교원노조에 가입한다. 그리고 혁명적 성격의 노조활동을 추진하는 교원총연합(FUE)에도 가입한다. 그리고 생테티엔의 노동사무소에서 석탄광부들을 대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정치경제에 대해 강의한다. 그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 구분하는 노동의 수치스러운 분류 기준”을 없애기 위해 CGT가 1928년 생테티엔에 창설한 교양 및 직업교육 연구소와 노동대학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그는 또한 퓌의 실직자들 편에 선다. 그가 작성한 실직자위원회 발표문에는, “실직자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다른 이들을 떨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면, 그들도 납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역 언론은 그를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는 복음 전도사”나 “레위족의 빨갱이 성처녀”로 취급한다. 그는 경찰의 심문을 받으며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월급 대부분을 실직으로 고통받는 가정과 광부연대 기금을 위해 내놓았다.
1932년 여름, 독일에 체류하던 시몬 베유는 민중혁명이 아직 멀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정치게임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수동적 태도’를 보였다. 이 모습을 보던 시몬 베유는 “독일의 노동자들은 타협하지는 않겠지만 투쟁능력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프랑스공산당 창립자 중의 한 명으로, 1924년 트로츠키주의로 제명당한 보리스 수바린(1893~1984)과 의견교환이 활발하던 때, 시몬 베유는 소련을 여러 측면에서 “레닌이 건설했다고 믿었던 체제와 정확하게 정반대인 시스템”이라고 비난한다.
1934년 그는 “이론연구를 위한 것을 제외하고 모든 종류의 정치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다. 1936년 봄의 파업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사회적 갈등이 마키아벨리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명령을 내리는 자와 복종하는 자 사이의 갈등은 모든 정치집단에 내재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3) “구성원들 사이의 투쟁은 당연한 것으로, 달랠 수 없으며, 단지 강요에 의해 억눌릴 뿐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위대한 작품’이라 부르는 <자유와 사회적 억압의 이유에 대한 성찰>의 집필을 시작하면서, 진보라는 미덕과 기계가 가진 해방의 힘, 그리고 생산력에 부여된 ‘신화적 성격’을 고발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진 혁명의 힘이 ‘완전한 허구’라고 비판한다. 사회적 억압의 뿌리는, 노동자 착취에 근거한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산업’ 자체의 속성이다. 그것이 가진 억압적 성격은 특정 정치체제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런 특성이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해 부르주아지가 가지고 있는 힘은 우리 사회생활의 토대 그 자체에 존재하고 있고, 그 어떤 정치적 사법적 변화에 의해서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 힘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본질적으로, 근대 생산체제 그 자체다.” 따라서 억압을 없애려면 자본주의 시스템(그리고 착취)을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류를 죽어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로 실추시키는” 억압은 기술의 진보 자체에 의해 이루어지며, 진보가 초래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의 사회적 관계를 통해 억압이 일어나는 것이다. 해방은, “모든 사람들의 방법적 협업”에 근거하는 탈(脫)집중 사회에서, 그리고 “기계화”로 대변되는 “사회적 우상”으로부터 해방된 사회에서 생산도구를 다시 보유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더 이상 “노동자들 사이로 산책 나간 ‘자격증을 가진 교수’”로 머무르고 싶지 않았던 시몬 베유는 자신이 분석한 현실을 실제로 검증하고자 했다. 교육부에 1년 휴직을 신청하고, 완전히 노동계급과 운명을 함께하기 위해 공장에 들어간 것이다. 언젠가 그는 “짓밟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짓밟힌 사람들은 느낀다.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느껴보지 않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학생들에게 설명한 적도 있었다. 1934년 12월부터 1935년 8월까지 그는 알스톰 사에서 압착재단공으로 일했고, J.-J 카르노 & 포르주에서 인부로, 르노 사에서 프레이즈(금속절삭 공구) 직공으로 일했다. 그가 쓴 <노동일지>에는 그의 작업과 리듬, 그가 사용한 기계의 유형, 생산과정 등이 잘 표현돼 있다. 육체적 고통과 피로, 정신적 모욕, 그리고 노예와 같은 상태에 이르렀다는 감정 때문에 그는 혼란스러워한다. 이 시기의 체험에서 그는 “중요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모욕”이라는 교훈을 얻는다.
1935년 여름, 포르투갈로 휴가를 떠난 그는 어부의 아내들의 예배행렬을 보게 된다. “그곳에서 갑자기 기독교가 노예들을 위한 가장 뛰어난 종교라는 확신을 얻었다. 노예들은 기독교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고,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그리스도의 모습에 깊이 감명 받은 시몬 베유는 1938년 기독교에 귀의하지만 여전히 ‘교회 밖의 기독교도’로 남는다. 후에 이런 신비주의적 경향이 더 강조되면서 그가 보여준 정치적 급진성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외세에 복종한 프랑스 식민지의 원주민들 또한 ‘노예’였다. 시몬 베유는 신문에서 1930년 베트남 북동부 옌바이의 민족주의 봉기가 가혹하게 진압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인도차이나 문제와 알제리 상황에 대한 여러 기사들을 쓰고, 민족주의 지도자인 메살리 하지(4)를 만난다. 시몬 베유는 하지가 2년 형을 받은 후 그를 지지했으며,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국가 창설에 반대의견을 표한다. “50년 내에 근동과 세계 전체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국가가 탄생할 필요가 없다”(5)고 평가한 것이다.
1936년 7월, 스페인에서 파시스트와 공화당 사이에 내전이 발발한 후 시몬 베유는 홀로 바르셀로나로 간다. 평화주의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내정불간섭 정책을 지지했지만 “윤리적으로 참여해야 할 내적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아라곤으로 가 부에나벤투라 두루티가 창설한 무정부주의 민병대원들과 합류한다. 그러나, 1주일 후 심각한 화상을 입은 그는 전선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죽이는 것 말고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전쟁의 경험을 통해 그의 평화주의는 더 굳건해졌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야만에 대한 성찰>(1939년)을 집필하는 초석이 된다. 시몬 베유는 이런 평화주의 이상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와의 전쟁에도, 1939년 3월 나치 독일군대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입에도 반대했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이 ‘범죄와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인정한다. 그는 런던에서 레지스탕스에 합류하고 <뿌리 내리기>를 집필한다. 공공자산에 대한 사랑과 평등, 그리고 ‘노동의 영성’에 근거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갈 이 책은 1950년에 알베르 카뮈 덕택에 출간될 수 있었다.
점령독일군의 식량배급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인들과 함께 나누어 먹기를 그만둔 시몬 베유는 결핵에 걸린다. 그리고 1943년 8월 24일,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작품은 사후에야 출간되었다.
글·올리비에 피로네 Olivier Piron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기자
번역·김계영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2006), <르몽드 세계사3>(2013),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1)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시몬 베유의 인용문은 1998년부터 출간되고 있는 <시몬 베유 작품 전집>(갈리마르 출판사, 파리)과 플로랑스 드 뤼시가 펴낸 <시몬 베유 작품집>(갈리마르, 1999)에서 인용한 것이다. 전기 관련 인용문은 시몬 페트르망의 <시몬 베유의 생애>(파이야르, 파리, 1997년)에서 인용했다.
(2) 장 뒤프레, <시몬 베유가 우리에게로 올 때. 어느 노조원의 증언과 기타 미간행 텍스트>, Mille et une nuits, Paris, 2010(초판, Les Lettres nouvelles, Paris, 1964년 3-4월).
(3) “마키아벨리와 마키아벨리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3년 11월호 참조.
(4) 알랭 뤼시오, “메살리 하지, 기억 속에서 사라진 알제리민족주의의 아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2년 6월호 참조.
(5) Nouveaux Cahiers, 38호, 파리, 1939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