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다움’, ‘여성다움’은 존재하는가?
이정우교수의 철학 노트(2)
2016-03-31 이정우
공자가 35세 때 제나라의 경공(景公)을 찾아갔다. 당시 제나라는 춘추시대에 동방의 강자였고, 공자가 속했던 노나라는 제의 압박을 받는 처지였다. 이웃나라로서 서로 협력해야 했지만, 서로 적국이기도 했던 노와 제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공자가 경공을 찾아간 것은 상당히 예민한 상황이기도 했다. 경공은 공자를 만났을 때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러자 공자는 그 유명한 “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답을 내놓는다.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운 것”, 이것이 곧 정치라는 것이다. 공자가 제시한 이 ‘~다움’이라는 생각은 흔히 ‘정명론(正名論)’이라 불린다. 경공의 물음에 공자는 왜 하필이면 이름을 바로잡을 것을 권했을까?
세월호 사건을 생각해 보자. 만일 세월호의 선장이 ‘선장’이라는 ‘명(名)’을, 현대식으로 말해 개념을 알고 있었다면 그토록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겠는가? 물론 세월호의 선장은 ‘선장’이라는 말을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이 말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말을 아는 것과 개념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세월호의 선장은 ‘선장'이라는 말은 알고 있었지만, 그 개념을 알고 있지는 않았다. ‘선장'이라는 개념의 진정한 뜻=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면, 그는 선장답게 행동했을 것이다. ‘~답게’ 행동한다는 것은 이 때문에 한 사회에 있어 본질적이다. 선장이 선장답게 행동하고, 군인이 군인답게 행동하고, 선생이 선생답게 행동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역시 ‘~답게’ 행동할 때, 그 사회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다. 공자는 이런 맥락에서 정치란 결국 “君君臣臣父父子子”의 문제라고 답한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다움’이란 매우 중요한 가치다.
헬라스 사회에서의 ‘아레테’
인류사를 수놓은 다양한 문화들에서 이 ‘~다움’의 가치를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이를 철학적 수준으로 승화시켜 개념화한 대표적인 민족은 헬라스인들=그리스인들이다.
헬라스 철학의 출발점이 세계의 근원/원리, 즉 ‘아르케’를 찾는 것으로 시작됐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헬라스의 자연철학과 소피스트들 이래 아테네에서 전개된 철학은 그 출발점을 달리 한다. 자연철학이 자연=퓌지스에 대한 ‘경외감’에 출발해 그 근본 원리를 찾았다는 사실은 자주 언급되지만, 그에 반해 아테네 철학의 출발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다. 소크라테스의 아레테 개념이라든가,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등이 아테네 철학의 성과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무엇일까?
우리는 아테네 철학의 출발점을 ‘에르곤(ergon)’=활동으로 잡을 수 있다.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세계가 무엇으로 돼 있을까,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는 무엇일까와 같은 자연철학적 물음에서 출발하는 대신, 인간의 활동에서 사유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 점에서 같은 ‘그리스 철학’이라 해도 자연철학과 아테네의 철학은 그 성격이 현저하게 다르다(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양 흐름이 통합되지만). 똑같은 나무를 봐도,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나무가 어떤 질료로 돼 있을까 라든가, 나무가 어떤 식으로 양분을 섭취할까, 나무는 몇 년이나 살까 등의 물음이 아니라 사람이 나무를 탄다거나, 잘라서 집을 짓는다거나, 그 주위에 정원을 만든다거나 하는 ‘에르곤’=활동을 중심에 놓고서 사유했던 것이다.
아테네 철학의 다른 중요한 개념들은 바로 이 ‘에르곤’과 연계돼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특정한 활동을 영위하는 것은 항상 어떤 특정한 목적(Telos)을 위해서이다. 때문에 아테네의 철학은 그 전반에 있어 목적론(Teleology)을 기저로 한다. 자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설명은 훗날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이 목적론적 구도를 빼버리면 아테네의 철학은 생명을 잃어버린다. 인간의 활동과 목적은 깊이 결부돼 있다. 아울러, 특정한 목적을 향해서 가는 이런 인간적 활동은 인간 특유의 잠재성(Dynamis)을 전제로 한다. 이 잠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활동하는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 아예 충족돼버린다면(‘완성태’에 도달한다면) 활동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란 항상 무엇인가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 존재하는, 잠재성을 실현해 가는 과정에 있는 존재다.
그리스 문화에서의 ‘~다움’ 즉 ‘아레테’의 개념은 인간, 더 넓게는 모든 존재자들이 바로 이 ‘뒤나미스’를 얼마나 잘 실현하고 있는가와 관련된다. 이 개념은 흔히 ‘덕’으로 번역되지만, 이는 아레테 개념의 어떤 특정한 맥락에 초점을 맞춘 번역이다. ‘덕’(라틴어 ‘virtus’)은 인간의 경우에만 성립하는 아레테이며, 더구나 어떤 특정한 아레테들(선생의 아레테, 아버지의 아레테, 화가의 아레테)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됨 자체의 아레테, 즉 인간을 가장 고유한 의미에서의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인간-다움 자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원래의 아레테 개념은 인간-다움만이 아니라 특수한 ‘~다움’들을, 더 나아가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게서도 성립하는 ‘~다움’ ― ‘힘(Potentia/power)’ ― 을 뜻하는 개념이었다(서구어 문헌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the virtue of bamboo” 같은 표현들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때는 ‘효능’을 뜻한다).
어떤 존재자가 그것‘다움’을 최대한 추구할 때, 그 존재자는 자신의 이상적인 상태에 가까이 가게 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 등장하게 되며, 이 ‘이데아적인 것(The ideal)’은 바로 ‘이상적인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그리스 문화를 가리키는 개념으로써 ‘이상주의’를 드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적 이상주의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영감을 주는 문화로서 회자된다.
‘~답다’라는 이데올로기
그러나 ‘~다움’이라는 가치는 이런 맥락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띨 수도 있다. A라는 존재자가 a라는 ‘다움’을 내포한다는 생각을 ‘본질주의(Essentialism)’라 부른다. 즉, 만물에는 각각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각자의 본질을 가장 잘 발현하는 것이 그 존재자들의 존재의 의미, 나아가 존재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질은 ‘실존(Existence)’과 대대(待對)를 이루는 개념이다. 한 존재자의 실존이란 그것이 타자들과 맺는 관계들에 따라 성립하는 것이며, 본질이란 그러한 관계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동일성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타자들과 관계 맺으면서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을 겪지만, 그 가운데 어떤 동일성이 유지된다고 할 때 본질이 성립한다. 본질주의에는 실존과 본질 사이의 이런 차이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인류의 역사는 거대한 권력집중의 시대와 그 권력이 해체되면서 다원화되는 시대를 길항해 왔다. 서양의 경우를 중심으로 성립하는 개념이라 볼 수 있지만, ‘중세’라 불리는 시대의 특징은 상고시대의 거대 권력들이 해체되면서 도래했던 고대적 다원성을 재통합함으로써 새로운 거대권력들이 등장하는 시대다. 즉 ‘제국(Empire)’들이 도래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지중해세계의 로마 제국,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 동북아의 한 제국의 등장은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정치적 통합은 곧 사상에서의 통합과 맞물린다. 다원적 정치가 굵직한 제국들로 통합되는 과정은 곧 고대의 제자백가(지중해세계와 인도를 포함해서)가 굵직한 몇 개의 사상들로 통합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을 통해서 철학/사상들(‘~학’, ‘~가’, ‘~학’)은 종교(‘~교’)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런 종교들 중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일곱 가지가 있다. 그것은 지중해세계의 세 일신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인도의 두 종교(힌두교와 불교), 동북아의 두 종교(유교와 도교)다.
이렇게 성립한 중세적 형태의 종교적-형이상학적 사상들은 대체적으로 ‘위계=하이어라키’의 세계관을 지녔다. 물질로부터 신에게 이르는 거대한 ‘존재의 대연쇄’의 구도를 지녔던 지중해세계의 일신교들, ‘카스트 제도’에 의해 지탱됐던 인도의 힌두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를 중시했던 동북아의 유교적 체제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불교와 도교는 부드러운 형태의 위계를 내포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위계적 세계관을 떠받친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가 ‘~다움’의 이데올로기이다. 공자에게서 또 그리스 문화에서 큰 의미를 띠었던 ‘~다움’이라는 가치는 중세적 위계성의 울타리 안에 들어갔을 때 전혀 다른 얼굴을 보이게 된다. 존재론적 위계와 사회적 위계는 구분돼야 하지만, 때때로 양자는 유비적인 관계를 가지곤 했다. 사회적 위계를 사상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이론이 필요했고, 또 존재론적 이론은 알게 모르게 구체적인 사회적 지평에 구현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때 ‘~다움’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띠게 된다. 중세란 이렇게 거대한 종교적-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위계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정당화했던 시대이다.
‘실체’에서 ‘주체’로, 다시 주체‘들’로
이런 본질주의적 세계관은 근대에 들어와 흔들리기 시작한다. 예컨대 스피노자는 본질주의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본질주의에 스며들어 있는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정밀한 비판을 가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중세적 세계는 점차 와해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본질 개념과 짝을 이루어 온 실체 개념은 근대 철학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데카르트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서구 철학의 역사는 (데이비드 흄 등 몇 명의 경우를 예외로 하고) 여전히 실체 개념을 중시했다. 그리고 이들은 고중세의 실체 개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체 개념들을 제시했다. 계몽사상이 고중세 이래 내려온 이런 전통을 급진적으로 해체했지만, 그 후 나타난 표현주의와 낭만주의는 계몽사상의 이런 흐름을 이으면서도 고중세의 전통을 그것과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뚜렷이 나타난 하나의 흐름은 ‘주체’의 철학이다. 이는 실체를 “단지 실체로서만이 아니라 주체로서” 파악해야 한다고 본 헤겔 전후로 정점에 이른다. 이로써 고중세의 객체적인 실체, 본질은 근대의 주체라는 실체로서 대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서구의 경우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런 과정을 성리학으로부터 실학(고증학 등도 포함)으로 이행한 동북아세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사상가들은 이런 주체성의 철학을 두 가지의 중요한 방향으로 해체해 나갔다. 하나는 본질주의를 급진적으로 해체한 생성존재론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성의 철학을 해체해 나간 차이의 철학과 정치학이다.
생성의 존재론은 헤겔의 사유에 이미 함축돼 있었지만, 헤겔은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결국 생성을 동일성으로 수거하는 사유를 펼쳤다. 그러나 이후 인류가 겪은 다양한 경험들, 그리고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의 영향 등과 같은 배경에서 존재론은 점차 뚜렷한 형태의 생성존재론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런 흐름의 정점에서 생성존재론을 수준 높은 사유형태로 다듬어낸 인물들은 니체와 베르그송이다. ‘생성의 무죄’를 주장한 니체나 ‘지속’의 철학을 펼친 베르그송에 이르면, 이제 전통적인 본질주의는 적어도 그 고전적인 형태로서는 완전히 해체된다고 할 수 있다. 본질주의의 해체는 그것과 결부돼 있는 윤리와 정치도 해체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사상과 실천의 역사에서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생성존재론은 고중세적인 본질주의는 물론이고 근대적인 주체철학도 무너뜨렸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인 주체철학은 전통적 본질주의를 거부하고 주체의 철학을 전개했으나, 사실 근대적인 주체 자체가 하나의 실체, 본질, 동일성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상과 문화는 바로 이 근대적 주체가 해체된 공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움’의 문제에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조는 세계의 다원화를 배경으로 한 ‘차이의 철학’이다. 근대 사유에서의 ‘주체’는 인간 자체를 가리켰고, 보편적인 주체, 칸트 식으로 말해 ‘의식 일반’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서 이제 주체는 단일하고 추상적인 인간존재를 가리키기보다는 각종 형태의 주체‘들’을 가리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차이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론적 사유를 하는 한, 개개인의 주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일정한 동일성/정체성을 갖춘 집단적인 주체가 논의 대상이다. 이때 나타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차이의 철학들(서구적 주체와 비(非)서구적 주체들의 문제 등등) 중 하나가 곧 ‘남성과 여성’이라는 문제의 틀, 즉 남성 주체와 여성 주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주체가 단일하고 추상적인 ‘인간’이라는 주체였다면, 이제 논의의 초점은 남성 주체와 여성 주체의 관계로 옮겨간 것이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은 실재하는가?
그런데 묘하게도 이렇게 주체가 다원화되면서, ‘~다움’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근대의 사유는 추상적인 특징을 가진다. 근세에 성립한 물리학이 과학의 원형이 되면서, 이런 경향이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사유의 패러다임이 물리학에서 역사학(진화론 포함)으로 넘어가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주체가 다원화되고 보다 구체적인 맥락들에서 파악되기 시작하자, 고대로부터 내려온 ‘~다움’이라는 구도가 의미를 되찾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남성 주체와 여성 주체가 새롭게 개념화됐을 때 남자다움과 여자다움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차이의 철학’과 생성존재론은 맞부딪치게 된다. 차이의 철학에 따르면, 남성 주체와 여성 주체의 ‘~다움’, 흔히 말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존중돼야 한다. 여성 주체를 남성 주체로 환원해서는 안 되며(그 역도 마찬가지), 양자를 섞어 중성화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생성존재론에 따르면 남성성과 여성성 같은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구도는 결국 낡은 본질주의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이의 철학을 따라야 할까, 생성존재론을 따라야 할까?
생성존재론에 충실할 경우, 우리는 차이들을 차이생성의 결과라고 해야 한다. 세계에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본질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것, 오로지 생성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모든 x는 dx’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 어떤 존재자도 항상 x가 아니라 dx인 것이다. 여기에서의 ‘d’는 물론 ‘Differentiation(차이생성)’의 약자이다. A라는 건물은 사실은 dA이고, 철수는 사실은 d(철수)이며, 한국은 사실은 d(한국)이다.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차이생성을 겪는다. 모든 동일성들은 결국 그러한 차이생성의 결과, 즉 어떤 국면일 뿐이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남성다움, 여성다움이라는 것도 사실 이런 차이생성 위에서 잠정적으로 성립하는 동일성들이라고 봐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라고 하지만 남성도 변해 가는 것이고, 여성도 변해 가는 것이다. ‘여성’ 개념이라든가 ‘남성’ 개념은 이런 변화 위에서 일정하게 추상된 개념들인 것이다. ‘차이의 철학’은 생성존재론을 근거로 해서 성립된다고 해야 한다. 결국 남자다움, 여자다움은 실체적인 존재로서 고착화될 수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생성존재론을 취한다 해도, 동일성들이 그렇게 급격하게 변해 가는 것은 아니다. 산, 강, 빌딩 등이 쉽사리 변하는 것도 아니고, 생물학적인 ‘본성’들이 쉽게 변해 가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인 맥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강도를 만났을 때 여자 뒤에 숨는 남자는 사람들에게 “남자답지 못하다”고 손가락질 받을 것이고, 이유가 무엇이든 길가 돌멩이들을 발로 차면서 가는 여자를 아무도 “여자답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도 그렇게 간단히 무(無)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주의와 생성존재론을 화해시킬 수는 없을까? 본질과 실존을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 존재자의 실존이란 그것이 타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변해 가는 측면을 가리키며, 그 본질이란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는 그것의 동일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본질과 실존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경향(Tendency)’이라는 개념이 있다. 경향이란 어떤 본질을 함축하면서도 그것이 시간 속에서 바뀌어 간다는 것을 함께 표현하는 개념이다. A가 a라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조건 a는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a로 기운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움’이라는 개념을 이런 경향의 개념으로 새롭게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경향이라는 개념은 얼핏 전문용어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르크스, 베르그송, 브로델, 부르디외 등 많은 사상가들이 이 개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경향은 본질과 실존을 화해시킴으로써, 본질주의적인 고착과 생성존재론의 혼돈이라는 양극을 극복할 수 있는 개념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럴 경우 한 존재자는 어떤 점으로서 이해되기보다는 오히려 시간 속에서 이어져 가는 선으로서 이해돼야 할 것이다.
물론 경향 자체도 변해 갈 것이다. 경향은 애초에 시간을 배제하지 않는 개념이지만, 그 내부적으로도 시간을 내장하고 있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경향’ 개념을 바탕으로 우리는 생성존재론의 터 위에서 차이의 철학과 정치학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글·이정우
1959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시민들을 위한 철학,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소운서원을 열어 연구와 후학 양성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 내 대안공간인 파이데이아 홍릉을 창설해 대학의 시민교육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소운 이정우 저작집(전5권)>,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세계철학사 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