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까지 문 닫는 라트비아의 경제위기

소비에트연방 말기부터 시작된 침체에 주민들 체념
지역공동체 갈수록 붕괴…일자리 찾아 외국행 러시

2009-12-03     필립 레카체비치 | 지리학자·환경학자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후 라트비아는 신용대출로 소비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2009년 초. 경제위기는 이 조그만 발트해 연안국가로 하여금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리게 했다. 결과는 학교의 10%가 문을 닫아야 할 만큼 잔혹했다.


어떤 길을 선택해도 경치는 똑같다. 형형색색의 조그만 가건물을 끼고 있는 작업장 겸 정원들이 논밭과 황무지에 닿아 있다. 그 뒤로는 거대한 작업장, 굴뚝, 저장탱크와 용광로들이 사방으로 연결된 여러 선로의 철길과 얽혀 있는 희미한 산업화의 그림자들이 비친다.

멀리 거주지역이 보인다. 녹슬고 일부가 파손된 채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거대한 구조물들이 있다. 옛 소비에트연방 소속 국가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런 황폐화된 산업화의 풍경은 연방 시절 도시 생활 수준을 짐작게 한다. 마침내 주거용 건물들과 과거 사회주의자들의 대규모 퍼레이드를 연상시키는 넓은 도로와 교차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수도 리가에서 250km, 러시아 접경으로부터는 60km 떨어진 라트비아 동부 지방에 속한 조그만 도시인 레제크네에는 약 3만6천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여기서는 오늘날까지도 예전의 소비에트 스타일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결 모양의 양철 지붕에 하얀 벽돌로 지은 전형적인 소형 주택과 첫 번째 독립 시기인 1918~39년에 지어진 볼품없는 집들, 그리고 스탈린 시기의 견고한 집들이 뒤섞여 있다. 그 뒤로는 ‘쿠루츠코프카’라는, 소비에트연방 당시 도로의 처음부터 끝까지 늘어서 있던 판에 박은 모습의 4, 5층짜리 건물이 이어져 있다. 이제는 너무 낡아서 흔들거리는 건물을 임시방편으로 보수해놓은 듯하다. 그 다음으로는 최근 급하게 지은 밋밋한 상업시설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공공지출 축소로 주민 고통 가중

조그만 하천 하나가 도시와 그 주위 7개 구릉을 굽이돌고 있다. 하천에는 12세기 발트족에 맞서기 위해 리보니아족이 독일인 기술자에게 주문해 세운 요새의 잔해들이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젊은 교사인 잉가 발로디스가 우리의 질문에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답한 곳도 이 잔해 더미 아래였다. “경제위기라고요? 하지만 그 애기는 벌써 20년 전부터 있었는걸요. 1991년 연방이 몰락하고 나서 공장들과 기업들이 하나하나 문을 닫았지요. 이것도 부족했는지 1998년 다시 위기가 찾아왔고요.”

도시는 소비에트연방 말기부터 회복되지 못했다. 주력산업은 갑작스럽게 가동을 멈추었다. 레제크네 구역은 주민 1인당 연간 수입이 1220유로로 도시 전체의 6351유로보다 훨씬 낮은 편이며, 라트비아와 유럽연합(EU) 소속 도시 중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다. 이 수치로도 벌써 도시 지역과 도시 외 지역인 시골의 편차를 짐작할 수 있다. 소비에트로부터 독립한 이후 실업률은 언제나 평균치 이상이었다. 1997년과 98년의 아시아 위기 때는 러시아도 충격을 받았으며, 이 도시는 심각한 타격을 감수해야만 했다. 당시 주 교역 대상이 모스크바였기 때문이다.

도시 한 모퉁이에는 1991년 당시 100명 이상의 어린이를 수용해야 했던 탁아소가 앙상한 뼈대만 드러내고 있고, 또 다른 건물도 짓다가 중단한 잔해만 보인다. 이 건물은 대형 슈퍼마켓 용도로 지으려 했으나 두 소유주가 금전 문제로 서로 죽이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 지역 대표인 자니스 투틴은 “새로운 라트비아는 정책 실행과 관리에서 경험이 일천하다”며 “국가가 효율적인 관리 시스템을 정착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공공 예산과 개인의 이익 사이에서 혼돈에 빠질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럼에도 경제위기는 여러 가지를 변화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블라디스 돔브로브스키 총리는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한 7억1500만 유로의 한계 내에서 모든 공기업에서 고문단을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이 고문단은 주로 정치가들과 가족, 형제, 사촌, 처가댁 심지어는 운전사와 그 아들로 구성되어 여러 해 동안 수천 유로씩을 걷어가는 불법과 탈법의 온상이었다.

2008년 경제위기가 시작된 이래, 국제 언론과 금융 분석가들은 이 나라에 어떤 기회도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네덜란드 은행인 단스케은행은 2009년 5월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분석을 내놓았다. 2008년 9월 이미 스웨덴은행도 “라트비아에서 이미 게임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다.(1)

하지만 레제크네에서는 아직 아무런 재앙의 증거도 눈에 띄지 않는다. 가게와 식당, 술집도 그대로 문을 열고 있다. 그럼에도 몇 개월 전부터 상인들은 이익을 생각하기보다는 생존하는 데 만족했다. 중요한 것은 내일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어떻게든 버텨나가는 것이다. 때론 노동자들에게 큰 희생이 전가되기도 한다. 이곳 슈퍼마켓 ‘메고’는 직원들에게 봉급을 50~75% 삭감한 재계약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소비에트 시대부터 살아남아온 유니버설 슈퍼는 문을 닫았다.

4륜차 과소비와 약품 사재기

교통은 예전보다는 한산해졌다. 번쩍거리는 4륜구동차가 맹렬한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2000년대 초부터, 특히 2004년 라트비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후 4륜구동차는 이 나라를 쓸고 간 광란의 소비의 상징이다. 수도 리가에 있는 한 대형 병원의 외과의사 제논 나르버츠는 “이 나라의 도로 사정 탓에 누구라도 5만 유로짜리 4륜구동차를 사려 한다”고 불만을 늘어놓는다. 더 이상 할부대금을 지불할 수 없어지면 은행은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압류한다.


약국에서 일하는 베르지나는 의약품이 부족한 실태를 말한다. “실업자도 점점 더 많아지고 게다가 직장을 다시 구할 것이라는 희망도 없기에 외국으로 떠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약을 삽니다. 몇 개월 동안 아프면 곤란하니까요. 제 월급도 1년6개월 전 그대로입니다. 다행히 월급이 아직 깎이지는 않아서 그런대로 견딜 만합니다. 하지만 직장을 잃고, 의약품과 의료비용을 더 이상 감당치 못할까 걱정입니다.”

정부 부처에서 퍼뜨리는 섬뜩한 소식도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보건부 장관인 바이바 로젠탈은 “라트비아의 병원들은 조만간 재정이 바닥날 것이기에, 그 가운데 최소 30%가 문을 닫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지역의 몇몇 병원은 벌써 폐업했으며, 심지어 시골을 왕진하던 레제크네 의사들의 모습도 더는 보기 힘들다.

경제위기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주민들은 통제와 통계, 세금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보망을 가동해왔다. 여기서는 ‘어떻게든 되는 대로 하는’ 방식이 최선이다. 여기에서 불리는 명칭대로라면 ‘호별 방문 판매’가 빠르게 퍼지고 있다. 과일, 채소, 유제품뿐만 아니라 기초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거리의 슈퍼마켓보다 싼 가격으로 시골에서 올라온다. 이 지역 대표 투틴의 말에 따르면, 교외의 조그만 구역에서는 이제 위기를 의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생활조건은 예전에도 최악이었지만 지금도 여전합니다. 별 차이가 없어요. 사람들은 그럭저럭 적응할 뿐이라고 합니다.”

대화 도중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수치심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의식적으로 최소화하려 한다. 담담한 낙관론 속에서 라트비아가 인위적인 쇠약증에 걸렸다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방법도 역시 인위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 해도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타격을 받았다. 본인 자신은 아니더라도 친구, 이웃, 먼 친척들 중 누군가는 직장을 잃었다. “저는 슬픔을 느낍니다. 내 아이들의 미래가 암울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 봉급은 줄어들었고, 남편은 2008년 말부터 직장을 잃었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자동차 부품 공장을 세웠던 스웨덴의 볼보자동차에서 일했었지요. 그때는 그의 월급이 290유로였는데 지금 실업 수당은 100유로입니다. 게다가 몇 주 내로 수당은 43유로로 낮아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희망이 사라졌다고 믿기는 싫어요.” 이 지역에 사는 인타 림사네즈의 말이다.

그럭저럭 적응하다

쾌활하고 걸걸한 목소리를 가진 타니아도 마찬가지 말을 한다. 그녀는 유제품 회사에서 해고됐다. 31년간 회계 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그동안 1998년 러시아 위기 때와 이번까지 두 차례 해고되었다. 그녀는 다시 적은 월급을 받는 곳에서 일을 시작해야 한다. “직장에서 나더러 해고 리스트를 작성하라고 하더군요. 거부했죠. 현재 나는 되는 대로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다행히 저는 대출도 없고 돈을 쓸 일도 없기에 그럭저럭 버텨나갈 겁니다. 여기서 20km 떨어진 곳에 사시는 어머니가 닭 몇 마리와 우유를 주는 암소 한 마리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다지 걱정 안 해요. 세상은 완전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의기소침해서 말을 마친다.

대다수 은퇴자들은 친지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있다. IMF가 강제한 공적 지출의 감소로 가장 큰 부담을 받은 쪽은 교육 분야 종사자와 은퇴자들이다. 시내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공교육에 종사하다 은퇴한 올디스 비톨스는 TV를 통해 IMF가 또다시 은퇴 연금을 줄이라고 요구했다고 들었다.(2) 교육자 출신답게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분노는 확연했다. “은퇴자들은 화가 나 있습니다. 내가 받는 연금을 생각해보세요, 한 달에 115유로입니다. 그들은 은퇴자들이 매달 넷쨋주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아마도 우리를 굶겨서 일찍 죽기를 기대하나 봅니다.”

그래도 경제위기에 대한 분노가 가장 격렬하게 표출되는 곳은 지역 고용사무소다. 도심에 자리한 2층짜리 하얀 건물은 넘쳐나는 방문자를 감당할 수 없다. 여러 시간 줄을 서야 하며, 아예 포기하고 내일은 새벽부터 오겠다고 다짐하면서 돌아가는 사람도 많다. 벽에는 일자리가 많은 영국이나 아일랜드로 떠나도록 부추기는 쪽지 광고가 더덕더덕 붙어 있다. 일자리다운 일자리는 찾기도 힘들다. 고용사무소의 이나라 신다르조바 소장은 한숨을 쉰다. “1991년 이래로 올해가 가장 상황이 좋지 않는 것 같아요. 지금은 나오는 일자리가 손에 꼽을 정도예요. 그런데도 몰려드는 구직자가 이렇게 많네요. 우리 봉급도 대폭 깎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일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구직자들은 고용희망 등록 때 자신의 해직 증명을 위해 전 고용주의 추천 편지와 마지막 봉급의 액수를 적어 제출해야 한다. 이것만이 수당에 접근할 유일한 길이기에 서류를 얻는 것 자체가 전쟁을 방불케 한다. 실업수당의 액수나 받는 기간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수당 지급 기간은 9~12년 일한 사람은 4개월, 12~20년은 6개월, 20년 이상은 9개월이다.

교육비 삭감, 무늬만 학교 유지

또 다른 큰 문제는 교육 분야 예산이다. 이 지역의 33개의 초·중등학교 관리 책임자인 릴리자 주코브스카는 2008~2009년 할당된 예산을 세밀하게 책정해야 한다. 2008년 말부터 그녀는 3800명의 학생들을 위해 ‘학생이 있는 곳에 돈을’이라고 이름 붙인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이는 부패와 교육비의 전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이른바 ‘최적화’라는 단계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학교 폐쇄를 뜻한다. 이 지역의 1천 곳이 넘는 학교 가운데 100곳 이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가슴이 아프지요. 주민의 원성을 듣지요. 지방정부는 리가에 가서 교육부에 항의도 해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해당되는 마을은 이제 종말이 시작됐다고 보면 됩니다. 학교가 사라지면 이사를 가야 하고, 그렇게 되면 상점 같은 생활터전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먼 곳에 있는 학교에 갈 교통비조차 없는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에겐 교육의 기회조차 없어진 셈이죠.” 주코브스카의 지적이다.

예전에는 학교에 의사, 간호사, 조무사, 심리상담사를 둘 만큼 교육 예산이 충분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기억 속의 일이다. 정말 긴급한 예산만 유지되고 있다. 즉, 긴급하게 필요하지 않은 ‘유용한’ 분야는 희생시키는 것이다. 공공서비스 수준의 쇠퇴는 오랫동안 어린이들의 교육의 질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리가 칼리나는 예전 소비에트연방의 공동농장이던 리카바의 조그만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레제크네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곳으로, 주민 900명이 살고 있다. 그녀도 거기서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는데, 한 아이는 빌리아니라는 이웃 마을의 학교에 다니고 다른 아이는 레제크네에 있는 튼고등학교의 기숙학생이다. 빌리아니 학교는 재정이 없다. 2009년에는 교사 19명 중 6명만 남게 됐다. 그나마 정기적으로 등록한 학생 중 3분의 1만 받았다. “독립한 지 18년 만에 이런 위기는 처음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칼리나 부인은 하소연한다.

리카바의 학교에서는 교장 자리가 없어졌다. 관리는 이웃 지역인 가이갈라바에서 담당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모두 받아들였지만 교사의 절반은 학교를 떠나야 했다. 당연히 교실당 학생 수는 두 배가 되었다.

이곳 주민 중 절반은 러시아어가 모국어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라트비아어를 러시아권 학생들에게 외국어로 가르친다. 이것은 통합을 용이하게 하고 차이를 줄이려는 노력이었다. 그 나머지의 거의 모든 과목, 특히 문학과 문법 교육은 라트비아어로 이루어진다. 러시아권 아이들은 2개 언어 사용자가 되어간다.

가난과 알코올중독, 희망의 부재는 이곳 아이들이 직면해야 하는 문제다.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진학을 하거나 직업교육을 받으려고 해도 부모가 교육비나 교통비를 지원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16살이 되기 전에 학교를 떠난다. 경제위기가 이들을 서둘러 불안정한 상태로 내몬 것이다. 비록 학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가난 때문에 사춘기의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없게 되는 셈이다.

그래도 칼리나는 이웃들보다 상황이 나은 편이다. 760유로에 달하는 수입으로 두 딸의 교육비를 충당하고 조그만 승용차의 할부금과 오랫동안 꿈꿔온 프랑스 여행의 대출금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월급도 6월에는 30%, 7월부터는 절반이 삭감됐다. 그녀는 희생할 각오는 되어 있지만 두 딸의 교육에 관해서는 절대 아니다. 자동차를 팔고 시장이나 슈퍼마켓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탈 작정이다.

아들은 영국에서, 딸은 노르웨이에서


갑작스러운 빈곤화는 이 지역에서 낯설지 않은 또 하나의 현상을 부추긴다. 좀더 상황이 나은 지역으로 대량 이주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가정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리가나 스칸디나비아, 아일랜드,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외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릴리자의 아이들은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벌써 해외 이주가족이다. 아들은 영국에서, 딸은 노르웨이의 스키 타는 마을의 사회보장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가장의 부재도 가정의 구조를 약화시킨다. “학생들을 데리고 소풍을 갔습니다. 교회를 방문했을 때 사제가 미래에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애들에게 물었어요. 아이가 답했지요. 어머니가 아일랜드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하루빨리 자기들과 함께 살았으면 하는 것이라고.” 칼리나의 말이다.

칼리나의 두 딸도 프랑스와 영국으로 떠날 날만 꿈꾼다고 한다. 하지만 공부를 마치면 돌아오겠다고 다짐한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5만에서 20만 명까지 추정치가 오락가락한다. 전 인구의 5% 내지는 13%에 해당한다. 이는 라트비아에 문제가 된다. 인재의 손실이기 때문이다. “이 현상에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이 돈과 교육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가 그 혜택을 누리게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교육 분야의 노동조합 대표인 비자 디칼라의 말이다.

“라트비아의 자원봉사 노동자들이 1972년에서 84년까지 바이칼호와 아무르강을 연결하는 철도인 밤(BAM)을 건설하러 출발했을 때는 모두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들이 출발한 날은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확신이 있었지요. 오늘, 우리 동족이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아일랜드나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할 때, 우리는 그들을 경멸하며 조소합니다.” 이나라 신다르조바의 말이다.

글·필립 레카체비치 Philippe Rekachewicz, 이에바 루체부스카 Ieva Rucevska

번역·이진홍 memosia@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역·저서로 <진보와 그의 적들>(2003), <자살>(2004) 등이 있다. 



<각주>

(1) Danske Research, Flash Comments, Copenhaguen, 13 mai 2009, Economic Outlook, 스톡홀름, 2008년 9월.

(2) Eugene Eteris, ‘국제 지도자들이 라트비아에 대한 원조의 지연을 경고하다’(International lenders warn about delayed aid to Latvia), The Baltic Course, 리가, 2009년 7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