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어디로 가는가?
2016-05-02 조르주 디디-위베르망
봉기, 반란, 폭동: 분노의 불꽃은 축제와 폭력 그리고 환희와 보복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언제라도 옆길로 새거나 타락할 수 있는 예상 불가능한 사건을 야기한다. 폭발의 대상이 된 권력에 의해 억압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배출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폭동이 해방의 동의어는 아니다.
‘신성한 분노’, 다시 말해 정당한 분노가 있다. 그런데 분노의 정당성과 분노가 불러온 정당한 행위를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봉기와 그 안에 내포된 격정의 정당성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어떻게 분노의 규칙을 제정할 것인가? 분노가 정당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렇다면 봉기 권리는 무엇인가?
1795년 프랑스 파리 소재 자코 출판사에서 <주권민족의 권리를 위한 반란>이라는 5장 분량의 소책자가 출간됐다. 이 책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93)의 제35조, “정부가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때 국민과 각 집단에게 봉기란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가장 필수불가결한 의무다“를 첫머리에 내세웠다. 비슷한 시기인 1792~1793년 프랑스 혁명의 ‘분노한 이들’은 각종 글, 청원서, 팸플릿 등을 모아 <우리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1)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시간이 흘러 1907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에서 끝에서 두 번째로 발의한 엠마 골드만을 보자. 그는 총회에서 반항 권리를 주창하는 선언서 채택을 제안했다. 그가 동료 맥스 바긴스키와 작성한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는 개인과 민중의 반항 권리를 지지한다.”
“대회는 반항 행위가, 특히 정부와 금권정체의 대표를 상대로 일어날 경우, 심리적 관점에서 접근돼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반항 행위는 우리 사회의 부당함이 끔찍한 압박을 가한 개인의 심리에 남겨진 감정적 동요의 결과물이다.”
“고귀하고 예민하며 섬세한 정신을 가진 자만이 내외적 반항으로 표출되는 감정적 동요를 경험한다고 규정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반항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체제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결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이 행위는 그 원인이나 동기와 함께 그 자체로 칭찬받거나 단죄되는 대신 이해받아야 한다.”
“러시아에서처럼 혁명 시기에 반항은 심리적 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채 독재의 근간을 흔들고 소심한 이들의 열의를 북돋는 두 가지 목적으로 활용된다.” (…)
“대회는 이 결의안을 채택해 개별적 반항 행위에 대한 지지는 물론 집단 반란에 대한 연대를 확인한다.”(1)
표결에 부쳐진 이 선언문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그러나, 여기서 단번에 도입된 ‘심리적 관점’은 의아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감정적 동요를 경험하는 가장 예민하고 섬세한 정신’으로 내린 정치적 결정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런데 엠마 골드만이 언급한 분노는 이 ‘정신’의 주관적인, 집단적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반응이 분명하게 드러난, 역사정치적 현상(現狀)인 ‘참을 수 없는 체제’에서 기인한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정당한 분노, 즉 ‘정당한 정치적 분노’가 존재한다. 기원전 8세기경 서구세계에 등장한 첫 번째 정치군사 시평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노래하소서 여인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며 첫 문장부터 ‘분노’라는 단어를 언급했다는 점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차용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제목의 저서 <분노와 시간>에서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다름 아닌 서구 문명의 ‘정치-심리적’ 분석을 제안했다.(2) 호메로스에서 레닌에 이르기까지 사회를 동요시키고 자극하는 것은 바로 분노다. 다만 그 분노는 근간이 되는 ‘단순한 표출’을 넘어서 ‘계획’ 속에서만 구체화돼야 한다. 그러나 분노와 계획은 그저 보복과 원한만 낳는 것이 아닌가? 마치 모든 분노가 그 ‘정치적 구조’를 슬로터다이크가 말을 맺으면서 얼마간의 냉소를 담아 ‘분노의 세계은행’이라고 명명하던 것 안에서만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 ‘분노의 세계은행’은 ‘분노의 기업가’인 레닌과 마오쩌둥과 함께 그 자체로 혁명적인 계획을 의미하고 ‘소수주주들’은 은 해방이라는 욕망의 거대한 ‘통화기금’ 속으로 모두 잠식되는 존재다.
이렇게 매우 종합적인 설명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역사적 힘을 겨우 인정받은 분노란 그 즉시 거부당한다는 것, 그리고 이유는 분노가 치명적인 방식으로 분출되는 보복, 원한, 망상처럼 악한 의도나 운명으로 폄하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분노는 어디로 가는가? 철학적 전통은 분노가 어느 경우든 제대로 나아가기 힘들다고 답하는 듯하다. 그래서 필립 레노와 스테판 리알이 쓴 <정치철학사전>(3)에서 ‘반항’이나 ‘봉기’는 물론, ‘분노’라는 항목은 찾을 수 없다. 임마누엘 칸트에서부터 칼 마르크스 이후까지 혁명의 철학사는 있지만, 봉기와 이와 관련된 ‘심리적’ 분노는 뒤따르는 변화가 없는 일련의 시대착오적 동요로만 남아있는 것이다. 마치 분노 그 자체는 알랭 레가 의 미사적 관점에서 언급했듯, 혁명과 반항의 차이를 심화시켜 상반되는 개념으로 만들 것처럼 말이다.(4)
봉기라는 행동에서 분노의 역할을 살펴보는 일은 정치인류학으로 귀환된다. 갈등 관계나 권력의 문제라는 층위에서 그 계획을 가정해보기 전에 그 행동에 내재된 힘을 살펴보는 것이다. 정치적 분노의 현상학을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장 배쉴러,(5) 비토리오 마티외,(6), 다이엘 세파이(7)와 같은 사회학자, 1789년 ‘상 퀼로트(과격 공화파)’에 대해 저술한 하임 부어스틴(8)과 1848년 ‘시민전투병’에 대해 저술한 루이 힝커(9)와 같은 역사학자가 이미 시도했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을 하려면 사료편찬과 철학의 표준 구성에 대한 통섭적인 관점이 전제돼야 한다. 조르주 바타유가 모리스 메를로 폰티의 <인문주의와 공포>에 대해 쓴 평처럼 말이다. “헤겔이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지적했고, 메를로 폰티가 불안감으로 인해 풀어놓은 포괄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이는 어떤 의미에선 격동 그 자체로 들어서는, 인간의 상황에 대한 전적인 동의가 전제된 관점이다.”(10)
바타유는 이 논평을 통해 놀라운 헤겔 철학이 엿보게 해준 과잉의 움직임을 지적했다. 사고 자체가 일관성과 엄정함을 잃지 않고 분노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아나키스트적 관점이다. 에티엔 르수르드가 그레고리 막시모프의 정리를 바탕으로 수집해 <혁명의 일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미하일 바쿠닌의 글을 보면 사고라는 행위와 봉기라는 행위 간 인류학적 동등성과 같은 무엇을 구축해 마지않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11) 바쿠닌은 그래서 인간이라는 종의 공존하는 “두 가지 소중한 능력”은 “사고하는 능력과 반항하려는 욕구이자 능력”이라고 규정한다.
“자연이 모든 우리의 아이들에게 지운 노예의 사슬을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끊어야만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되고 자기계발과 내적 완성의 가능성을 획득한다. (…) 인간은 해방되고, 동물성에서 벗어나고 진정한 인간이 됐다. 인간은 불복종하고 기술을 사용하는 행위, 즉 반항과 사고를 통해 본질적인 인간으로서의 역사를 쓰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반항과 쾌락, 봉기와 축제는
이란성 쌍둥이?
바쿠닌은 결국 반항이란 ‘쾌락’의 부정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니 바쿠닌이 파리 시민의 응축된 분노로 촉발된 1848년 2월 혁명을 주로 더없이 흥겹고 자극적인 축제에나 사용하는 ‘도취’나 ‘열광’이라는 감정을 갖고 지켜봤다고 소회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파리에서 보낸 그 달은 (…) 영혼이 도취된 시간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도취됐다. 어떤 이들은 극한 공포심에, 다른 이들은 황홀한 광기와 비상식적인 희망에 말이다. 나는 새벽 4~5시에 일어나 다음날 새벽 2시에 잠들었다. 하루 종일 모든 집회, 모임, 클럽, 행렬, 산책, 시위 등에 참여했다. 간단히 말해 나는 모든 감각과 모든 숨구멍을 통해 혁명적 분위기가 주는 취기를 만끽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축제였다. 나는 모두를 보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모든 개인은 셀 수 없이 떠도는 하나의 군중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이들에게 말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물건과 사건, 예상치 못한 소식이 주의를 끌었기 때문이다. (…) 전 우주가 전복된 것처럼 보였다. 믿지 못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불가능이 가능이 되고, 가능한 것과 일상이 비상식적인 것이 됐다.”
쥘 발레스는 1871년 파리코뮌을, 하나 예를 들자면 정신없는 시장을 보는듯한 관점에서 기술했다. “‘아빠, 우리 지금 혁명 중인가요?'라고 와인판매상의 아이들이 물었다. 그 아이들은 무슨 축제라도 열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12)
민속학자들을 통해 알려진 (집단으로 통곡을 하는) 속죄의 축제, 장례 축제, 군사 축제, 야만적인 축제 등을 잊지 않았다면 이런 기술은 모든 봉기에서 분노 자체가 축제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전하려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브 마리 베르세는 1976년 <축제와 폭동>, 1980년 <폭동과 혁명> 등 연이어 출간한 저서를 통해 혁명 이전의 유럽에서 사회적 분노가 어떤 행태로 표출됐는지 충격적인 회화를 통해 보여준다.(13) 봉기의 축제적 이미지는 아마도 폭동을 주도한 이들이 그 순간이나 사후에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한 신화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축제 자체도 베르세가 “늘 현존하는 파괴적 잠재성”이라고 명명한 것을 충분히 드러내 보인다.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속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 행렬,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전함 포템킨> 속 바쿨린추크 해병의 장례식에서 보듯 역사 속 수많은 경우에 폭력의 경험은 축제, 또는 적어도 침묵의 시간에서 장례식이나 정의를 요구하는 장례 행렬로 이어지는 집단적 의식화를 야기한다.
그런데 축제에는 강한 힘이 내재돼 있다. 축제의 수호신이 디오니소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축제는 분노를 확장시키고, 나아가 희열로 승화시킨다. 축제는 두려움과 정신적 압박으로 인한 몸짓을 안무로 표출되는 힘으로 승화시킨다. 그러니 프리드리히 니체,(14) 플로렌스 크리스티안 랑,(15) 미하일 바흐친(16)이 그들의 명저를 통해 철학적 형성 과정을 밝힌 모든 가치가 전복되도록 기저에서 움직인 것도 축제다.
“시대에서 벗어난 시간”과도 같은 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분노가 기쁨과 희화화된 폭력으로 순화된다. 그렇지만 베르세는 “축제도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여기서 위험이란 가장 거칠고 인간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말한다. 의례적 술잔치나 무장 열병식, “흥겨운 청년 법정”, 광인의 축제, 샤리바리(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가 생겼을 때 소란과 조롱, 폭력 등으로 이것을 처벌하는 유럽의 오래된 민속 관행), “의식적 걸립(乞粒)”, 그 외 “당나귀 행렬” 등을 연구한 베르세는 축제가 권력의 표상과 권력 그 자체를 어떻게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지 설명한다.
카니발의 군중이 거창하게 판결을 내려 권력의 허수아비에게 사형을 선고하면 경찰의 업무 처리 절차와 사법적 절차의 세밀한 부분까지 흉내 내 의식이 진행된다. 이 과정은 물론 “웃기 위해서” 이루어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상상하거나 기대하기 어려운 무엇의 총 리허설이 될 수도 있다. 때가 되면 허수아비 대신에 이 허수아비가 상징하던 대상이 등장하는데, 그러니까 더 이상 단순한 권력의 상징물이 아니라 제후 권력의 주체로 대체되는데 뭔가 대단한 것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의식은 사건을 상징적으로 구현하지만 베르세가 “폭동으로 변모한 축제”라고 명명했던 것처럼 의식이 사건을 “실제로” 일어나게 만들기도 한다.
“축제가 열리던 중 어느 날 반란이 일어난다. 기쁨에 들떴던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소요가 성공하면 술이 있는 축제로 마무리되고 군중은 적을 몰아낸 뒤에 춤을 춘다. 축제에서 폭동으로 확실히 전이된다거나 전이가 가능하다기보다는 상호 교류한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모호한 담론은 전이의 의미를 설명하지 못하고 사건에 앞서 축제가 있었는지 혹은 폭동이 있었는지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통과 폭력에 가깝고, 넘쳐나는 관습이 구현되고, 축제 중에 사회정치적 긴장감이 개입되는 일을 모두 상황별로 나눠 상세한 목록으로 만들어서 개별적 상황이 우연의 조화인지 한 종류의 사건이 다른 범주의 사건에 미친 필연적인 결과인지 분류해 볼 가치가 있다. 이는 사실상 구축되고 의식화된 전통이 사건과 정치 시평과 어떤 관계인지 하는 질문이다.”
모든 이들이 받아들인 만큼 정부도 승인한 전통 축제만큼 욕망, 더 나아가 봉기를 위한 슬로건을 확산시키기 최적인 이벤트도 아마 없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이전 두 세기 동안에 축제는 집권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강화시키는 상반된 두 방향으로 모두 활용됐다. 예를 들어 보자. 괴기스러운 동물 형태로 묘사된 ‘정치 선전물’을 연구한 예술사가 아비 바르부르크는 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스위스 마을에서 열린 카니발에서 분위기가 무르익기 이전에 등장한 정치적인 암시나 도덕적 알레고리는 곧 전통 축제와의 단절을 의미했다”고 설명한다.
반면 베르세는 카니발의 속성이 폭동의 상징이 될 때 이루어지는 장르의 전환에 관심을 가졌다. 사순절의 두 번째 주간이었던 1630년 2월 27일, 디종의 포도재배업자가 일으킨 봉기에서 주동자는 시절에 맞게 마르디그라(Mardi Gras; 사순절 전날, 참회의 화요일)의 왕의 복장을 했다. 또 1707년 2월 26일 몽모리용에서 카니발이 끝날 무렵에 일어난 소요에서 선동자들은 머리쓰개와 페티코트를 입은 여성으로 분장하고 커다란 식칼을 들었다. 이 카니발에서 식칼은 물론 요리법을 상징하지만 사회적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무기로도 사용됐다.
이렇게 축제는 바르부르크가 ‘역동적 전환'이라고 부를만한 상호대칭적인 움직임을 통해 폭력으로 희생된 이의 장례에서 행동하는 폭력을 낳는다. 이 폭력은 모든 방향으로 작용하고 그 자체로는 어떠한 가치도 무가치도 아니다. 베르세는 <근대 유럽의 폭동과 혁명>이라는 책에서 모든 봉기가 방향을 바꿔 흘러갈 수 있는 종착역이 얼마나 복잡한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사례를 제공했다. 봉기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봉기는 갑자기 시작돼 우선 폭발적으로 확산된다. 이는 예상이 불가능한 엄청난 사건이다. 그 다음은? 자체적으로 흐지부지되거나 폭죽의 재처럼 홀로 사그라진다. 지나치게 즉흥적으로 권력에 대항해 일어난 경우에는 그 권력에 의해 제압되기도 한다. 대다수의 경우에 봉기는 다른 방향으로의 배출, 다시 말해 본래 분출 목적을 부인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고 억눌린 상태로 마무리된다. 폭동이 조직화되거나 위계질서를 갖추게 되면 흔히 폭동이 체제의 목적에 귀속되고 어떤 권력이 됐든 그 권력에 순응하게 됐다고 말한다. 아니면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애초와는 다른 목적을 향해 가게 된 것이다.
1903년부터 러시아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을 때 비아체슬라브 플레베 내무대신은 민중의 분노를 유대교 집단으로 향하게 해 “유대인의 피로 혁명을 잠재울 것”이라고 자신했다.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가 작성되고 극우파 민병대 블랙헌드레드의 지휘 하에 잔혹한 유태인 박해가 횡행하던 암울한 시기였다. 추후 독일 SS친위대가 그들의 행태를 (심지어 검은 바탕에 작은 해골이 있는 문장까지) 모방하게 된다. 베르세가 그 이전의 시기를 묘사하는 내용은 아마도 그런 냉소주의가 아니었다. 어쨌든 축제의 절대적인 힘과 폭동의 정당성의 뒤를 이어 베르세가 희생양 만들기 현상, “통합과 집단정체성이라는 감정의 강화”를 위한 “순수혈통유지용 외국인 혐오주의”라고 명명한 일이 발생했을 때 분노를 다른 방식으로 분출시키기 위해 동일한 방법이 사용됐다.
“순수주의를 추구하겠다는 결정에서 희생양과 공공의 죄인은 염세리(소금에 대한 세금징수원)나 고리대금업자나 비기독교인이 그랬던 것처럼 지목된 희생자로 보인다. 외국인과 유대인은 그런 비상식적 행동에 매우 적합한 목표물이었다. 외국인 혐오 현상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눈이 띄게 다르며, 쉽게 접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대부업자나 경쟁자에게 표출된다. 이 집단에게 책임을 돌릴 불행(전염병 발생, 선박 분실, 신성모독)이 시작되면 민중의 처벌이 행해진다. 마르세유 선박들이 나포됐다는 소식에 당시 그곳에 머물던 터키 대사가 살해됐다(1620년 3월 20일). 1706년 에든버러에서 영국 선원들도 비슷한 이유로 참수됐다. 런던에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가톨릭 교도와 공모했다는 편견 섞인 의심을 받아 주기적으로 박해를 받았다. 고대 로마 민족은 스페인 사람들이 자국 젊은이들을 납치해 군인으로 부린다고 비난하며 공격했다. 1506년 4월 19일 리스본에서 페스트가 발생하자 유태인 2천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의 분노에는 순응 또는 원한 말고 다른 운명이 없는 것일까? 배링톤 무어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과 같은 책은 봉기가 무분별하게 최악과 최상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17) 또한 1792~1795년 프랑스 서부 전반에서는, 자크 고드쇼의 표현을 빌자면 “반혁명적 반란”(18)이 일어났다. 1885~1914년 등장한 파시즘은 지브 스턴헬이 단호하게 명명한 “혁명적 우파”라는 관점에서 출발했다. 혁명적 우파는 (일부 극좌단체와 마찬가지로) 쿠데타(스턴헬이 조사한 프랑스 1899년 민족주의 소요의 경우)가 됐든,(19) 엔초 트라베르소가 열심히 분석한 ‘보수적 혁명’의 기반이자 추후 에른스트 윙거가 이름 붙인 ‘총결집’이 됐든 모든 민주적 체제에 대한 봉기를 촉구했다. 에밀리오 젠틸레의 최신작 <느닷없이, 파시즘>을 보면 로마 진군은 분명 파시스트 독재정권으로 순식간에 변절된 순수한 반정부 반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찌됐든 간에 ‘봉기’, ‘반란’, ‘폭동’이라는 단어는 해방되겠다는 욕망보다 정치판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해 (마치 마법의 암호 같은) 실마리를 주지 않는다는 점을 살펴봤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그러므로 겸손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분노는 어디로 가는가? 분노가 분출됐을 때 나오는 힘이 일방적으로 그 길로 이끌어 가는 게 아니다. 이는 변증법적 문제이거나 변증법적 해답을 요하는 문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42년 6월 28일자 <작업일지>에 “근대의 전쟁이 발발하는데 꼭 증오가 필요하지는 않다”(20)는 패러독스에 대한 사유를 담아 매우 단순하면서도 섬세하게 개괄적인 설명을 해줬다. 호전적 전체주의에서 과연 분노는 어디로 가는가? 브레히트는 “파시즘은 국민을 통제해 다른 국민까지 억압하게 만들 수 있는 정부체제”라고 답했다. 이게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글·조르주 디디-위베르망 Georges Didi-Huberman
철학자이자 미술사가. 최신작으로 <눈물 흘리는 민중과 무기를 든 민중. 역사의 눈 6> (에디시옹 드 미뉘, 파리, 2016)이 있다.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Claude Guillon, <우리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1792-1793, 분노한 이들의 글>, IMHO, Paris, 2009.
(2) Peter Sloterdijk, <분노와 시간. 정치심리적 고찰>, Maren Sell, Paris, 2007.
(3) Philippe Raynaud and Stéphane Rials (주관), <정치철학사전>, 프랑스대학출판부, Paris, 2012(초판: 1996).
(4) Alain Rey, <혁명: 단어의 역사>, Gallimard, Paris, 1989.
(5) Jean Baechler, <혁명적 현상>, 프랑스대학출판부, 970.
(6) Vittorio Mathieu, <혁명 정신의 현상학>, Calmann-Lévy, Paris, 1974.
(7) Daniel Cefaï, <우리는 왜 결집하는가? 집단행동의 이론>, La Découverte-MAUSS, Paris, 2007.
(8) Haim Burstin, <상 퀼로트의 탄생. 혁명기 파리를 바라보다>, Odile Jacob, Paris, 2005.
(9) Louis Hincker, <파리의 시민전투병, 1848-1851>, 프랑스북부대학출판부, Villeneuve-d’Ascq, 2008.
(10) Georges Bataille, ‘모리스 메를로 폰티의 <인문주의와 공포>에 대해’(1947), <근대사회>,n° 629, Paris, 2004년 11월-2005년 2월.
(11) Mikhaïl Bakounine, <혁명의 일반 이론 (1868-1872)>, Les Nuits rouges, Paris, 2008.
(12) Jules Vallès, <반란자 (자크 뱅트라, III), Gallimard, 1975(초판: 1886).
(13) Yves-Marie Bercé, <축제와 폭동. 16~18세기 민중의 사고방식>, Hachette Littérature, Paris, 1976.
(14) Friedrich Nietzsche, <비극의 탄생. 철학작품전집, I-1>, Gallimard, 1977(초판: 1872).
(15) Florens Christian Rang, <카니발의 역사적 심리>, Editions Ombres, Toulouse, 1990(초판: 1909).
(16) Mikhaïl Bakhtine,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민중 문화>, Gallimard, 1970.
(17) Barrington Moore Jr.,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La Découverte, 1983(초판: 1969).
(18) Jacques Godechot, <반혁명. 독트린과 행동, 1789-1804>, 프랑스대학출판부, 1961.
(19) Zeev Sternhell, <혁명적 우파, 1885-1914. 프랑스 파시즘의 기원>, Seuil, ‘역사세계’총서, Paris, 1978.
(20) Bertolt Brecht, <작업일지(1938-1955)>, L’Arche, Paris,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