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예술가들에게 현대성이란?

2016-05-02     에블린 피에예, 마리노엘 리오
 
1960~70년대 저항 정신과 미니스커트, 그리고 펑크 운동의 중심지인 런던은 전위예술의 정의를 바꿔 놓았다. 런던은 현대예술의 유행을 촉발했고, 그로 인해 엘리트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현대예술을 사회변혁의 동인으로 만들었다.
 
“예술은 성배 같아요.” 새드 콜스는 마치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기라도 하듯, 상기된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서는 어쩐지 로큰롤 느낌이 가미된 우아함, 그리고 예술가와 수집가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유의 세련된 편안함이 풍겼다. 2014년 일간 <가디언>은 새디 콜스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계 인사들”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현재 아트딜러로 활약 중인 그는 단아한 느낌의 갤러리 두 곳을 운영 중이다. 그 중 1997년 킹리 스트리트에 개관한 갤러리에서 취재진은 그를 만났다.
 
카나비 스트리트가 과거 팝 문화에 대한 향수를 깔고, ‘개성적인 독특한 상품’을 판매하면서 새로운 패션의 거리로 자리 잡기 전까지, 킹리 스트리트는 ‘신나는 런던(Swinging London; 1960년대 역동적인 런던-역주)’의 중심지로 널리 각광 받았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갤러리가 세워진 곳은 과거 나이트클럽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갤러리 내부는 온통 하얗고 드넓었다. 곳곳에 기둥이 서 있지만 내부는 시원하게 탁 트이고, 넓은 통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환한 빛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했다. 런던이 세계 제2위를 점하고 있는 현대미술 시장은 15년 간 매출액이 무려 약 10배 뛰었다. 그러나 우리가 에스프레소(차보다는 한결 국제적인)를 마시며 나눈 대화 속에, 돈은 소재로 끼어들지 않았다. 모호한 측면이 있었지만, 대화의 중심은 언제나 ‘정신적 가치’였다.
 
새디 콜스는 갤러리를 운영하기 전에, 스테인리스 조각품과 풍선 인형으로 유명한 예술가 제프 쿤스의 비지니스 매니저로 일했다. 이제 새디 콜스는 런던에서 운영 중인 갤러리 사업 외에, 도이치은행을 상대로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자문을 해주고 있다. 그에게 예술이란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갤러리는 장기적인 투자 대상이자, 예술가들과 ‘지속·충실·진실’을 바탕으로 관계를 맺는 수단이다. 
취재 당시 새디 콜스의 갤러리에는 루돌프 스팅겔(Rudolf Stingel, 1956~)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여우, 멧돼지, 곰, 때로는 눈밭에서 찍은 온갖 동물들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세상에나, 달력 사진 같군요.” 누군가가 감상평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달력 사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독일어로 말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귀화작가가 독일달력(독일에는 월별로 지역 동물 사진을 넣어 만든 달력이 유명하다-역주)의 이미지를 투사한 캔버스에 미세한 붓질로 완성한 작품이다. 붓질 자국은 눈으로 잘 볼 수 없었지만, 보도자료에 따르면 ‘천천히 이미지가 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감동과 평상심’을 오가며 완성되는 이미지는, 말하자면 ‘기억 그 자체에 대한 은유’라고도 볼 수 있다.
 
 ‘성배’. 모든 점에서 그 작품은 정말 성배였다. 먼저 스팅겔은 스타다. 그는 억만장자 프랑수아 피노가 소유한 베니스의 그라시 미술관, 런던의 가고시안 미술관 등 각종 유명 미술관을 누비며 전시회를 열었다. 현재 유수 미술품 가격 정보 사이트 ‘아트프라이스’에 의하면, 11번 째로 몸값이 높은 예술가인 스팅겔의 최근작은 무려 2백만 달러에 팔리는 영예를 누렸다. 덕분에, 스팅겔은 데미언 허스트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다. 그의 작품이 이렇게 상한가를 치는 이유는 되팔기 좋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 화랑주는 대개 작품 가격의 50%를 챙긴다. 물론 잘 팔리는 예술가의 작품이라면 책정되는 비율은 조금 다를 것이다.
 
자칭 ‘열린 공간’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미술품을 판매하고 있는 새디 콜스는 자신의 갤러리가 ‘초보 수집가를 위한 입문의 장’이 되고 있으며, 고객들이 작품을 수집하는 데 일관성을 선사하고 있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했다. 때로는 자신이 ‘주요’ 미술관으로 여기는 곳에 고객들이 작품을 기증하도록 설득하기도 한다고. 예술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상거래를 일종의 정신적인 일, 고결한 행위, 나아가 (정석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확실히 공익에는 도움이 되는) 어떤 도움의 손길로 미화하고 있는 셈이다.
투기 행위를 정신의 미화로 둔갑시키는 마법을 지켜보면서, 마냥 고개를 끄덕이거나 환한 미소를 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눈밭의 여우 사진이라니. 여하튼, 런던은 미술관 관람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런던시에는 미술관이 173개, 개인 화랑이 875개 있다). 프랑스에서 전체 인구의 35%에 불과한 미술관 관람객이 런던에서는 50%에 육박한다. 게다가 예술학교 학생 수도 런던이 가장 많다. 총 6개 동의 건물을 보유한 런던예술대는 명실상부한 유럽 예술교육의 산실로 자리 잡고 있다. 확실히 런던은 현대예술이 ‘대중화’된 도시인 듯하다. 그 이유와 비결은 무엇일까.
안드레아 슐리커는 세계적인 거물 화랑주 제이 조플링이 소유한 갤러리 중 한 곳(런던에 2곳, 홍콩에 1곳)인 화이트 큐브 버몬지 갤러리의 관장이다. 화이트 큐브 버몬지의 직원은 총 120명으로, 영국의 헤비급 갤러리로 활약하고 있다. 새디 콜스의 갤러리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사방이 온통 하얀 색이고 탁 트인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1) 역시 넓은 통유리창 덕분에 채광도 좋다. 게다가, 새디 콜스의 갤러리와는 달리 기둥이 없어서 실내가 한결 넓어 보였다. 실내 넓이는 5만5,440m2. 2011년 개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갤러리로 화제를 모은 곳이다. 슐리커는 자신이 마케팅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듯 최근 수십 년 간 미술계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30년 전만 해도 현대예술을 즐기는 사람은 극소수였어요. 그러나 지금은 많은 이들의 일상을 파고들고 있지요.” 덕분에 예술은 ‘사회 변화의 동인’으로 대접받고 있다.
 
근사하면서도 혼란스러운 ‘공존'의 풍경
 
화이트 큐브 버몬지 갤러리는 트레이시 에민, 사라 루카스, 데미안 허스트, 크리스 오필리, 안젤름 키퍼를 비롯한 많은 유명 예술가를 거느리고 있다. 슐리커 관장은 이 호화 갤러리가 “미술관과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즉 ‘떠오르는’ 신예작가에서, 흥행을 보증해주는 스타작가, 심지어 고전적인 전위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가에게 고른 전시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또한, 문화센터 역할까지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무료 음악회, 예술가 초청 이벤트, 60석 규모 강당에서 제공되는 컨퍼런스, 그리고 지역주민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등. 교육 프로그램의 기획 및 운영을 위해, 화이트 큐브 버몬지는 총 10명의 인력을 고용했다.
대중이 예술과 보다 친해지게 하려는 노력은, 단순히 대중에게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때로는 다양한 장르와 융합이 시도되기도 한다. 가령 음악팬들로부터 오랫동안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록밴드 소닉 유스의 기타리스트 더스턴 무어와 조형예술가 크리스찬 마클레이가 함께 연주를 하거나, ‘현대 클래식 음악’ 전문 실내악단 런던 신포니에타가 전시회에서 즉흥 연주를 선사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예술이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 슐리커 관장의 설명이다. 
 
슐리커 관장은 사회참여적 작품을 지원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며, 요셉 보이스의 ‘사회적 조각’이나 미국의 예술가 티에스터 게이츠를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그리고 화이트 큐브 버몬지의 소개 자료를 인용하면서, 게이츠를 치켜세웠다. “문화 공동체의 탄생에 기여한 인물로, 사회 참여에 불을 지피고, 정치의 변화, 공간의 변화를 자극했다”는 것. 게이츠는 예술 작업만큼이나 사회참여에도 열정적인 인물이다. 그는 고향인 시카고의 빈민가의 폐가를 도서관으로 개조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폐가에서 나온 재료를 이용해 만든 조각품을 판매해 얻은 수익으로 도서관 개조 작업을 진행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부동예술’이다. 슐리커 관장은 설명했다.
“때로는 ‘하얀 상자(화이트 큐브)’의 밖에서 이뤄지는 이러한 사회참여 작업, 티에스터 게이츠식의 빈부격차를 줄이려는 작업이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치유해준답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대부호 피노(프랑스의 대부호, 그라시 미술관의 소유주-역주)도 슐리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도 게이츠에게 그라시 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할 기회를 주었으니 말이다. 슐리커 관장은 핵심을 콕 집어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시도들은 모두 갤러리에 막대한 부가가치를 가져다주지요.”
 
의욕에 찬 사람이라면 버몬지에서 테이트 모던까지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테이트 모던은 영국의 작품은 물론, 전 세계 근·현대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영국의 국립미술관이다. 템즈강을 따라 펼쳐진 강안의 풍경은 경이롭기만 하다. 1980년대 초 마거릿 대처 정부의 도시 ‘재개발’ 사업에 의해 탄생한 도크랜즈는 19세기 세계 최고 무역항을 오늘날 런던 제3의 비즈니스 센터로 탈바꿈시켰다. 부둣가와 물류창고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높다란 마천루와 오피스, 호화로운 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높이 306m짜리 빌딩 ‘더 샤드(반짝반짝 빛나는 유리 조각을 의미하는 이름)’를 필두로 눈부시게 빛나는 미래지향적 건물들과,머리 위를 달리는 경전철 철도망 아래 고색창연한 잿빛 석조 가옥과 각양각색의 주점들이 올망졸망 펼쳐진 도시 풍경이 탄생한 것이다.
 
꽤 근사하면서도, 동시에 혼란스러운 풍경이다. 이런 맨해턴 드림이라니! 그것은 유크로니아(2)를 담은 일종의 SF물에 불과하다. 템즈강 양안의 주택 가격은 최근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잭 더 리퍼 투어’(3)를 선보이며 관광 산업의 활기를 되찾은 이스트엔드는 더 이상 빈민가로 통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현재 유기농 상점과 갤러리들이 성업 중이다. 젠트리피케이션(4)의 경계는 육안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쓰레기 수거가 제때 이뤄지지 않는 곳, 건물이 재개발되지 않은 곳, 대다수 주민이 이민자인 곳. 여기가 빈민가가 시작되는 경계선이다. 
2000년 테이트 모던 개관에 맞춰 건설된 인도교 밀레니엄브릿지는 세인트폴 성당과 런던시티를 이 아방가르드의 전초기지와 연결해주며 정책결정자들이 꿈꾸는 미래 런던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 템즈강에는 여전히 수상경비대가 순찰을 돌고, 근사한 모터보트들이 굉음을 울리며 항해하는 예스러운 풍경을 보여준다.
 
‘아고라’ 역할을 통해 
인기를 얻은 테이트 모던
 
낡은 전력발전소를 개조해 건립한 테이트 모던의 가장 큰 볼거리는 예전에 기계실이 있던 터바인홀이다. 이 전시실에서는 현재 한국기업 현대자동차의 후원을 받은 한 근사한 설치작품이 성황리에 전시되고 있었다. 2015년 10월부터 2016년 4월까지, 아브라함 크루즈비예가스는 이곳에서 런던 곳곳의 흙을 채운 삼각틀 모양의 목조 화분을 설치한 작품 ‘빈터’를 선보였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토양의 품질에 따라 어떤 화분에는 풀이나 꽃이 쑥쑥 자라날 것이고, 반면 싹을 틔우거나 꽃을 피우는 데 실패한 화분도 나올 것이다. 테이트 모던측은 이 전시회가 “도시와 자연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고, 기회·변화·희망에 대한 폭넓은 사유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누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인가. 다른 모든 공공미술관과 마찬가지로,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소장한 미술품은 무료로 볼 수 있다지만, 1년에 6차례 열리는 한시적 전시회는 모두 유료(20~32유로)인 것을! 
 
 ‘Witty, Sexy, Gimmicky: Pop 1957~67’. 전시회 제목 치곤 참으로 테이트 모던스럽다. ‘재치 있고, 섹시하고, 교묘하고, 그리고 팝!’하다니. 이런 것이 테이트 모던이라면, 2011년부터 테이트 모던 관장을 맡아온 크리스 더컨은 벨기에인이고, 에너지가 넘치고, 매력적이다. 세심하게 연출된 편안한 태도. 기존의 미술관 관장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현대적인 세련미. 더컨 관장은 각계각층의 명사를 비롯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마당발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를 알아본다. 덕분에 그는 각종 위원회나 재단(대표적으로, 테이트 아시아 퍼시픽 구매 위원회, 테이트 아메리카스 재단)을 설립하는 데 여러모로 큰 도움을 받고 있다. 
 
 테이트의 갤러리는 모두 4종이다. 먼저 주로 영국의 고전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테이트 브리튼이 있다. 그 다음 테이트 모던이 있고, 테이트 모던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런던 외 지역에 소재한 미술관도 두 곳 있다. 하나는 리버풀 부둣가, 또 하나는 콘월 주 세인트아이브스에 자리한다. 더컨 관장은 이 4개 미술관에 고용된 직원 수가 8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그 밖에도 테이트 갤러리에는 컨서베이터(Conservator; 소장품 수집 및 보존 담당자-역주) 25명과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는 교육팀 인력이 다수 고용돼 있다.
 
테이트 모던이 청년층을 비롯해, 대중에게 인기가 높은 것에 대해,(5) 더컨 관장은 “일종의 ‘아고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냉소주의는 최대한 배격하려고 노력한다. 테이트 모던은 인적 교류를 활성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술품 관람, 교육을 목적으로 오는 관람객 비율이 각각 12%에 불과한 반면, 교류를 목적으로 오는 관람객이 50%나 됩니다.” 그는 그 밖에 테이트 모던의 또 다른 성공비결에 대해 설명했다.
“마르셀 뒤샹 이후 조형미술을 위한 문화공간이 생겨났습니다. 관람객은 과거처럼 특정 분야를 따지지 않지요. 미술관도 다양한 장르를 포용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만큼 이제는 새로운 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무용과 연극의 추세도 비슷합니다. 가령 안무가 보리스 샤르마츠는 90명의 객원 무용수들과 함께 우리 미술관에서 작업을 했지요. 관람객은 덕분에 안무가들이 일하는 모습을 곁에서 자연스럽게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터바인홀이 일종의 댄스 파티장으로 변신한 셈이지요.”
 
그는 더욱이 새롭게 활기를 되찾은 미술관이 비인기 장르의 생존을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팝뮤직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팝뮤직에게 미술관은 새로운 역사를 불어넣어줄 수 있어요. 가령 디자인, 예술, 음악의 융합을 시도한 뉴욕 현대 미술관 모마(MoMa)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가 공연이나 연주회를 기획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령 1970년대에 결성돼 최근 다시금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며 인기몰이 중인 독일의 일렉트로닉뮤직 밴드 크라프트베르트가 대표적인 예다. 
경계의 해체는 그가 생각하는 큐레이터 업무와도 부합한다. 그는 큐레이터란 이른바 “두 가지 것을 조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테이트 모던은 정기적으로 작품을 개편한다. 이제는 시간 순서만이 아니라 주제별로, 상업적 인기를 누리는 현대 작가와 고전적인 전위 예술가를 서로 연관 짓는 식으로 전시회를 조직한다(초현실주의자들을 위한 ‘시와 몽상’전의 경우 요셉 보이스를 위한 전시실이 함께 마련됐다). 독단적으로 작품을 선별하는 것을 지양하고 싶다는 더컨 관장은 이른바 ‘수평 경영’에 의거한 이런 방식을 통해 학술적 지식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대중을 유혹하고, 대중에게 놀라움을 선사한다고 말했다.
 
미술관은 개인의 창의성 개발을 포함해 입문자들을 위한 예술교육센터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때로는 식재료를 이용한 옷 만들기, 케첩 싸움 같은 ‘어른과 어린이를 위한 살아 있는 예술’ 프로그램 등 개인의 창의성 개발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프랑스의 문화부에 해당하는 영국의 문화미디어체육부가 주문하는 대로 취약계층 및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민영 갤러리 화이트 큐브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마디로 두 경우 모두 오랫동안 대중의 입장에서는 너무 높게만 여겨지던 전위예술의 문턱을 낮추려는 시도로 읽히는 셈이다. 이 같은 시도들은 매우 훌륭하다. 예술작품에 대한 대중의 지식과 이해력을 높여주고, 위계질서에 얽매이지 않은 현대예술에 대해 대중이 친근함을 느끼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부인은 돈이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시도들은 ‘막대한 부가 가치’도 창출해준다. 이 점은 항상 재정 마련에 골머리를 앓는 미술관의 입장에서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정부 지원금만으로는 필요 예산의  30~40%밖에 충당할 수가 없다. 게다가 입장료 수입이나 기타 파생 사업(상점, 카페, 레스토랑)으로도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는 역부족이다. ‘테이트 모던에서 계속 무료관람이 가능하게 만들어주세요.’ 미술관은 후원금 모집에 매번 똑같은 구호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재정 모금 방식만큼은 매우 다양하다. 때로는 입장료에 일정액의 후원금을 포함시키기도 하고, 또 때로는 홀이나 물품 보관소에다 현금 모금함을 설치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회원에게 일정액을 부담시키거나(70파운드부터 시작), 스폰서 기업의 지원이나 메세나 후원 활동 등의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미술관은 이제 미술 시장에서 작품을 구매할 여력이 없다. 작품의 경매가가 나날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2015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간호사>와 마크 로스코의 작품 <넘버 10>은 각각 9,540만 달러와 8,190만 달러라는 놀라운 낙찰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미술관은 미술품 시세 폭등에 따른 높은 보험료로 인해 전시회를 여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6) 그런데도 이사회나 정책 책임자들은 유명 예술가를 동원할 때에나 단기간에 올릴 수 있는 그런 막대한 규모의 흥행 성적을 미술관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더컨 관장은 “부인, 부인은 돈이 너무 많습니다”라며 ‘올가’에게 읍소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올가란 더컨 관장이 런던에 넘쳐나는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부인들을 부르는 별칭이다. 물론 ‘우버들’, 다시 말해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은 모든 ‘벤처기업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기업의 후원을 받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이런 태도는 나름의 결실을 맺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한국의 예술가 백남준의 작품 9점을 구매하도록 재정을 지원하는 한편, 11년간 무려 5백만 파운드의 후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이런 거래는 다소 당혹스럽게 비친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도 아주 친절하게 예술후원의 순수함을 친히 밝혔다.
 “우리 현대자동차는 인간이 자동차와 정서적 유대감이 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과 훌륭한 예술의 관계 역시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7)
다시 말해, 현대는 이미지 제고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그래서  미술관이라는 ‘무형의 브랜드’로 이미지 개선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술가, 대중, 기업의 소통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는 얘기다.(8) 보다 조화롭고 신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나름의 윈윈(Win-Win)전략인 셈이다.
 
1990년대 초에 대거 등장한 (실로 엄청나게 부유한) 신흥 부유층은 모든 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선망의 대상이다. 그들은 대개 부동산이나 다이아몬드에 투자하지만, 부유층 내에서 더욱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미술품 수집가가 되거나 혹은 미술관의 대표, 또는 후원자로 변신을  꾀하기도 한다. 그러면 쉽게 미술관 이사회에 발을 들일 수 있다. 때로는 직접 미술관을 세우기도 한다. 베르나르 아르노는 파리에 루이뷔통재단 미술관을, 피노는 베니스에 그라시 미술관을 설립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올가’, 러시아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부인인 다리아 주코바는 모스크바에 현대미술창고센터를 설립했다.
 
그러나 그들의 호의는 순수하지만은 않다. 그들이 전문성과 자유 지성, 순수 학문의 산실인 미술관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예술가의 몸값을 높여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테이트 모던의 8개 구매위원회에는 전문가만이 아니라 후원자도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좀 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사실 비즈니스 문제라면 간단하다. 그러나 미술관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모두 같은 것만 한다, 
블록버스터가 된 미술관
 
 “스폰서 기업이나 후원자가 재정을 지원할 만한 예술가 풀은 매우 협소하다. 1999년 잭슨 폴락은 왕립미술원에 작품을 전시할 만한 역량이 되는 작가가 아니었다.” 테이트 모던 개관 당시 컬렉션 디렉터였던 제레미 르위슨의 말이다. 그는 2002년 테이트 모던을 떠나 프리랜서 미술 자문관이 됐다. 현재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운영하는 민간단체 왕립미술원에서 활동 중인 르위슨은 오늘날 미술계 전망에 대해 무조건 낙관하지는 않는다. 문화미디어체육부도 미술관의 사업가 정신을 높이 평가할 정도로, 모두 이구동성으로 장밋빛 전망을 내놓는 이때에 말이다. 르위슨은 “요즘은 모두 똑같은 것만 한다”고 말한다.    
                       
“이곳에서도, 지구 반대편에서도, 모두가 똑같은 이름만 내걸려고 해요. 미술관이 블록버스터로 전락하고 만 셈이죠.” 제프 쿤스, 아이웨이웨이, 빌 비올라. 오늘날 이른바 유명 인사가 된 예술가들이다. 반면 19~20세기에는 흥행을 보증하는 예술가로는 폴 세잔, 인상주의 화파,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에드바르트 뭉크,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앤디 워홀 등이 있었다. 더 현재와 가까운 예술가들로는 프랜시스 베이컨, 마크 로스코,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의 몸값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시장 아닌가. 명성을 얻으려면 일단 확실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넓은 인맥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아트딜러를 알고 있다면 금상첨화다. 아트딜러는 예술가가 미디어에서 주목을 받거나, 고가의 미술품 거래가 이뤄지는 국제 아트페어에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9) 르위슨 전 테이트 모던 컬렉션 디렉터에 의하면, 국제 아트페어에는 ‘아트페어를 위한 맞춤형 작품’이 구상된다고 한다. 아트페어가 열릴 때마다 같은 구매자들이 작품 기증자의 위상으로 전시회 기획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즉, 산업계와 미술계 간 유착이 심한 것이다. 가령 왕립미술원에서 성황리에 전시회를 마친 아이웨이웨이는 2016년 아르노 소유의 파리 봉마르셰 리브고슈 백화점에서 전시회를 가져야 했다. 또 런던의 공공갤러리 서페타인 갤러리는 호프만라로슈 제약회사의 상속자 마야 호프만이 운영하는 루마 재단에서 재정을 지원받는다. 
 
“냉소주의를 배격한다”는 더컨 관장은 “예술이 이제 경매장에서 거래되는 화폐가 되버렸다”고 씁쓸하게 현실을 인정했다. 대표적인 예가 소더비나 크리스티(1998년부터 피노의 소유)같은 경매사다. 주식시장만큼 변덕스럽게 요동치는 곳이 미술품 경매시장이다. “경매로 이득을 얻는 예술가는 3%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느 전시장에서나 마주치는 이 3% 예술가들은 도발적이고 경악스럽기까지 한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부르주아 순응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렇게 자기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준다”고 피노는 정색한 얼굴로 말한다.(10)
 
‘부르주아 순응주의’에 반기를 들기 위함일까. 테이트의 전시실을 비롯한 각종 현대미술 갤러리의 벽면에는 늘 인상적인 가치들을 제시하는 설명문이 반복적으로 내걸린다. 언제나 모든 작품은 “강한 전율을 선사하거나 순간으로 끝나거나 역동적”이기 마련이며, “감동의 물결이자 자석 같은 마력”을 선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말처럼 저항을 상징한다. 즉 모든 작품이 저마다 강렬한 영감의 원천이 돼주는 것이다. 
예전에 한 시인(말라르메를 의미-역자)이 말한 그 “부질없이 울리는 폐기된 골동품”들로 이뤄진 글로벌 예술을 위한 글로벌 규범. 뉴욕, 파리, 베를린 그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글로벌 규범은 늘 새로운 것, 감각적인 것, 재미있는 것만을 강박적으로 추구할 것을, 사유를 무시하고 ‘느낌’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미술관은 르위슨 전 디렉터가 말하듯이 교육이라는 과제와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결합시킨 ‘에듀테인먼트’를 추구하는 동시에 새로운 현대성을 찬양한다. 
 
그들이 찬양하는
 ‘새로운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그들이 칭송하는 새로운 현대성이란 실상 예술과 체제 저항을 한 데 결합시킨 작품을 통해 일종의 재미를, 만인이 평등하고 신속하게 무료로 예술을 즐길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을 선사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현상은 유력 미디어와 후원 기업, 대중이 하나의 취향으로 한 마음 한 뜻이 된 결과이기도 하다. 더컨은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맴도는 원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런 말을 덧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현 체제가 내적으로 폭발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정말 이런 (낙관적) 시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이미 우리 곁에서는 몇 가지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많은 수집가와 미술관이 현재 1950년대 전위예술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점이다. 카렐 아펠, 한스 하르퉁, 장 뒤뷔페가 다시 유행하고 있고, 그들의 몸값도 덩달아 오르고 있다. 달러로 무장한 ‘신흥 금수저’들은 점차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옛것의 가치를 되찾을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는 게 더컨의 견해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거품이 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잘 나가는 유럽 출신 예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자신의 작품 <추상화>(1986)가 최고 경매가 4,530만 달러의 기록을 경신하자, 2015년 3월 독일 월간 <디차이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시세는 너무나 충격적”이라고 털어놓았다.(11) 
 
오늘날 르위슨은 자신의 약력에 미술고문과 미술사가 외에, 런던극장 이사진이란 직함을 추가했다. 이 사실을 전하는 그의 태도는 조심스럽지만 열정적이었다. 2017년 더컨은 테이트 모던을 떠나 폭스뷔네(민중극장) 극장의 대표직을 맡을 예정이다. 폭스뷔네는 베를린에 있는 대형극장으로, 1992년부터 유명 연출가 프랑크 카스트로프가 대표직을 맡아왔다. 더컨은 자금모집 세계와 연극세계 중 무엇을 선택할지 단 일분도 갈등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서펜타인 세클러 갤러리에서 만난 한 젊은 프랑스 예술가도 갈등의 여지가 없었으리라.
런던에 오면 유럽의 특별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서펜타인 세클러 갤러리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그는, 도시 외곽에서 변변한 작업공간도 없이 네 명씩 우글거리며 사는 것에 지쳤다. 그리고 종일제로 일하고도 집세와 교통비를 간신히 낼 수 있는 비참한 현실에 질린 나머지, 결국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2016년 6월 테이트 모던은 현 미술관 규모의 60%를 증축한 10층짜리 피라미드 구조로 된 신관을 개관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이 미술관은 3천만 파운드의 재정 모집에 들어갔다. 한편 화이트 큐브는 글라인드본에 설치된 한시적 갤러리에서 ‘모두에게 환영받는 예술가들’ 중 한 명을 선택해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매년 이곳에서는 관람객이 멋진 파티드레스와 연미복을 입고 근사한 피크닉을 만끽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한 오페라 축제가 열린다. 1인당 입장료는 400파운드(약 500유로) 남짓. 이번에도 어쩌면 현대예술은 사회 변혁의 동인으로 간주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 참 대단한 ‘영감의 원천’이 아닌가.  
 
 
글·에블린 피에예, 마리노엘 리오 Evelyne Pieiller, Marie-Nol Rio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 작가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갤러리가 하얗고 넓게 트인 공간에 집착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브라이언 오도허티의 <화이트 큐브. 갤러리의 공간과 이데올로기>(Presses du Réel·파리·2008년)를 읽어볼 것.
(2) Uchronia;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
(3)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는 1888년 이스트엔드 매춘부 연쇄 살인범에게 붙은 별명으로, 현재까지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잭 더 리퍼의 범행 현장을 둘러보는 투어가 인기다.
(4) Gentrification; 빈민가의 고급주택화에 따라 빈민층거주민들이 배제되는 현상.(역자 주).
(5) 테이트 모던은 2014년 53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며,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관람객이 찾아오는 미술관에 등극했다.
(6) 영국에서는 국가가 ‘내셔널인뎀니티’를 통해 전시대여 보험료의 보증을 해주고 있다. 다른 나라의 사정은 이와 다르다.
(7) ‘테이트 모던과 11년 파트너십을 체결한 현대’, 아트 마케팅 컴퍼니, 2014년 1월 23일, www.artmarketingcompany.com
(8) ‘아트 인사이트 #13: 크리스 더컨’, http://brand.hyundai.com
(9) Anne Vigna,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한 브라질 미술시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5년 11월.
(10) Roland Moreno, <뒤죽박죽 환경의 승리>, l'Archipel, 몬트리올, 2011년.
(11) 아트넷뉴스, 2015년 12월 23일, http://news.artnet.com/
 
 
<박스기사> 
 
잠에서 깨어난 영국의 미술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파리는 ‘예술의 도시’ 자리를 뉴욕에게 넘겨주었다. 반면 프란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 루시안 프로이트, 프랑크 아우어바흐 등 일부 예술가를 제외하고, 작은 섬나라 안에 갇혀 있던 영국 미술계는 1980년대 획기적 전환점을 맞이한다. 테이트 리버풀(1988)과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1993)가 문을 연 것이 계기였다. 유명 화랑주이자 거물급 수집가, 앤서니 도페이는 어느 날 파격적인 광고문구로 파란을 일으킨다. “우리는 런던이 아닌 세계에 있음을 선언하는 바다.” 그는 전 세계 전위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회에 선보였다. 1981년 영국의 왕립미술원은 ‘미술의 새로운 정신’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에는 영국 역사상 최초로 게르하르트 리히터, 게오르그 바슐리츠 등 독일 예술가의 작품이 전시됐다. 
 
그러나 런던이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1960년대 생 예술가들의 공이 컸다. 대표적인 예가 데미안 허스트, 사라 루카스, 샘 테일러 우드, 개빈 터크, 트레이시 에민이었다. 처음부터 영국의 젊은 예술가(YBA) 군단은 보수당의 대부이자 광고업계의 거부인 찰스 사치와 마거릿 대처(1979년 선출 후 11년 집권기 동안) 총리가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었다. 그들은 YBA의 작품을 수집하고 예술 활동을 후원해주었다. 1985년 대부호 사치는 갤러리 하나를 인수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이 갤러리를 열심히 운영하고 있다. ‘철의 여인’이 내건 신자유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YBA는 대담한 경영자로 변신했다.
 
그들은 탁월한 홍보 감각을 발휘하며 부둣가나 폐공장에다 그들 최초의 전시회를 열었다(1988년, ‘프리즈’전). 1995~1996년 그들은 ‘브릴리언트’전을 계기로 미국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런던, 베를린, 뉴욕 등지에서도 사치, 경매사 크리스티, 그 밖에도 수많은 화상들의 후원을 받은 전시회 ‘센세이션’이 열렸다. 대담한 전술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스캔들, 그리고 미디어의 보도 세례와 만나 막대한 성공을 일구어냈다. 오늘날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작품을 대량 생산하는 데미안 허스트는 시장의 온갖 술수를 간파했다. 그는 2008년 갤러리를 통하지 않고(전례가 없는 사건), 자신의 신작 218점을 유럽의 소더비 경매를 통해 선보였다. “나는 예술 대 돈의 게임을 벌이고 있다. 예술가로서 나는 돈의 승리를 기원한다. 그러나 만일 돈이 승리한다면 예술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날 경매로 허스트가 벌어들인 돈은 자그마치 1,110만 파운드에 달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