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길 자초한 프랑스 대형서점 ‘프낙’

‘문화 다양성’ 명분 내세우며 유통 획일화 횡
돈벌이 상품만 가득… 직원들엔 가혹한 노동

2009-12-03     자크 드니|<르 디플로> 기자

문화상품 사업은 역설, 즉 대중에게 개별적인 차별을 조장해 소비를 이끌어낸다. 이것은 지난 1960년대 프낙의 경영진들이 두터워지는 중산층의 역설적 욕망에 호응하기 위해 개발한 아이디어다. 40년이 지난 지금, 유행을 선도하던 이 기업은 오락물을 판매하는 슈퍼마켓으로 변했다. 하지만 사주의 요구와 레저시장의 대혼란 사이에 낀 프낙 모델이 곤경에 처했다.


프랑스 유통업체 ‘피노 프렝탕 르두트’(PPR) 그룹은 지난 5월 7일 파리 ‘살 플레이엘’ 홀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2008년 실적배당 규모를 4억1800만 유로로 가결했다. 홀 밖에서는 대형 멀티미디어 서점인 프낙(FNAC) 직원 100여 명이 “피노, 이 비열한 사기꾼, 경제위기를 핑계 대지 마!”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PPR 그룹 소유주는 지난 2월 18일 3500만 유로 절감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3월 4일에는 파리 직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용 유지 계획’도 같이 발표했다.(1) 그러나 며칠 후 경영진은 음반 전문 매장인 ‘바스티유 프낙’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PPR 대변인 프랑수아 앙리 피노는 “2009년에도 우리는 고객 유치와 비용 절감, 순이익 창출의 세 가지 목표에 집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그룹이 더 강해져, 신뢰할 수 있는 균형 잡힌 배당금 정책으로 모든 주주를 안심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2)

유서 깊은 매장 폐쇄

비록 바스티유 매장이 가장 중요한 매장이 아닌 것은 맞지만, 이 매장을 폐쇄한 것은 프낙의 전 경영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공연 티켓과 문화상품 그리고 최첨단 기술장비를 판매하는 세계 유일의 대형 유통업체인 프낙은 지금 사회문제와 경제문제, 즉 망치와 모루 사이에 끼어 있다.

한편, 인터넷으로 이동하고 있는 젊은 소비자들은 더 이상 문화상품 판매에 대한 프낙의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온라인 할인점과 판매상들도 프낙의 가전제품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어쩌면 바스티유 매장의 파산은 당연한 귀결이다.

세계 전역에 300만 명 이상의 회원과 약 2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프낙은 모든 면에서 다국적기업이다.(3) 1954년 막스 테레와 앙드레 에셀은 파리 세바스토폴 대로변에 장만한 손바닥만 한 공간에 첫 번째 가게를 열고, 그곳에서 미래의 제국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프낙은 전후 ‘30년간(1945~74)의 영광’의 초반, 즉 경제호황기 초반에 프랑스 사회의 변화에 기반을 둔 시스템을 도입했다. 서비스 분야의 증대와 회사 간부급 고객의 출현 그리고 길어진 학업 기간 등에 따라 새로운 문화 패턴이 생겼기 때문이다. 프낙은 유통을 통해 품위 있는 레저의 대중화를 도모했다. 에셀은 퇴임 때 ‘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에서 자신을 “혁신적인 사장”이라 칭했다. 그는 “소비자들은 자신의 조직을 통해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며 소비자를 중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또 몇 쪽을 할애해 “엘리트 간부급의 구매력이 일반 샐러리맨보다 높은 편이다. 보통 많이 배운 사람들이 경제적 추론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4)며 새로운 엘리트 고객층, 즉 ‘이상적인 고객’에 대한 아첨성 발언도 빼놓지 않았다. 사실, 사회적인 지위로 선별된 간부급 소비자에게는 ‘문화의 중재자’인 판매 직원의 도움이 중요하다. 바로 이런 프낙의 감정이입 정책이 수세대를 거쳐 내려오며 기하급수적인 매출 성장의 자양분 노릇을 했다. 성인(聖人)의 전기를 흉내낸 에셀의 자화자찬식 전기를 읽다 보면, 문화상품 유통에 대한 거의 독점적 지위를 구축한 토대가 된 프낙의 신화에 위기의 씨앗이 싹트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유럽 유통업체협회 사장인 에두아르 르클레르가 식료품 전문 대형마트에 프낙과 똑같은 경제모델을 도입한 것과 관련해,(5) 에셀은 자서전에서 최고경영자(CEO)들을 위한 그 롤모델의 ‘대부’가 자신이라고 밝히며 여러 페이지에 걸쳐 직원들에게 겨울 스포츠 바캉스를 준 것에 공치사를 늘어놨고, 스스로를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섬유업계의 제왕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대부 마르셀 부삭과 비교했다!

파리고등연구원에서 사회학 논문 ‘서적 코너에서 수세대를 근무한 직원들을 통해 본 프낙의 역사’를 발표한 바 있는 사회학자 뱅상 샤보는 “프낙이 미국의 월마트처럼 대량 유통의 역할과 보편적 취향을 만들어냈다”고 봤다.(6)

그는 “그것이 문화에 대한 접근을 확장시킨 반면 매출의 70%가 기술제품을 기반으로 한 것이어서, 공급하는 제품의 품목을 축소시킨 측면도 있다. 그 나머지는 진열장, 즉 문화적 치장이다. 상품을 뺀 모든 공간이 이미지 유지를 위한 치장이다”라고 했다. 프낙은 1954년 이후, 자칭 문화의 선동자라는 ‘공인된 바 없는 인증’을 2008년까지 남용하더니, 이제는 ‘호기심의 선동자’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트로츠키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표방한 두 설립자의 초기 목표는 “소비자운동을 통해 정치운동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50년이 지난 지금, 문화활동은 수익 창출을 위한 문화로 변질돼버렸다.

프낙은 회원제다. 프낙은 회원들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것 이상으로 ‘문화’를 보급하고 있다. 프낙이 쓰는 슬로건은 비즈니스의 의미를 지녔다. 중요한 것은 문화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프낙은 회원들에게 배포하는 잡지 <콘택트>를 통해 전시 사진, 예술가들의 홍보 공연,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경연대회, 만화책 가격 홍보, ‘프낙닷컴’ 사이트를 통한 논픽션 문학에 대한 평론대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프낙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저서 <구별>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문화적인 선량한 의도’를 부각시켜 다른 부류와 구분짓고 싶어하는 중산층을 겨냥한 미끼를 지속적으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작가와 작곡가로 활동하는 다비드 카롤은 프낙의 이런 식의 투자는 항구적일 수 없다고 했다.(7) 그는 “프낙이 쓰는 혐오스러운 관행 중 하나가 음악 행사인 ‘뮤직 컴필레이션 축제’와 ‘파리 플라주 및 페스티벌 프낙 앵데탕당스’(Paris Plage et le Festival Fnac Indétendances)다. 프낙은 인디 레이블만 이 축제에 참가할 수 있고, 제작비도 자비 부담이라고 못박고 있다. 제작비를 프로듀서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프낙은 ‘봐라, 우리가 얼마나 인디 뮤지션들을 챙기는지!’라고 홍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런 식의 선동 때문에 페스티벌 입장 티켓값이 한없이 오르고 있다. 거의 30년째 인디뮤직 프로듀서로 활동 중인 장 로샤르는 “프낙 딱지가 붙은 예술가들이 벌이는 문화 선동은 거대한 연출이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음반을 저렴한 가격으로 팔기 위해 꾸미는 연출”이라며 분개했다.

가족기업서 다국적기업으로 변신

비록 1980년 프낙의 주식 선물시장 상장과 소유권 변경(8)이 기폭제가 되어 협동조합들이 점차 전문 문화상품 대형마트로 전환하는 추세였지만, 새로운 대주주 프랑수아 피노의 등장과 함께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PPR는 프랑스 보험회사 GMF가 1991년 베를린에서 무리한 해외 투자를 하다가 브랜드 구축에 실패한 전력이 있었지만, 나중에 베를린을 비롯한 해외에 매장을 확장하며(9) 가족기업에서 다국적기업으로 구조를 바꿨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비정규직 채용을 근대화란 이름으로 자행했다. 프낙이 가면을 벗고서 시장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프낙은 중앙 구매, 판매 가능성이 높은 상품만으로 매장 재정비, 재고상품의 최소화, 소형 브랜드 및 출판사에 대한 홀대 등 삭막한 정책을 추진했다. 프낙의 주력 모델인 상호부조론에 바탕을 둔 좌파경제 모델은 밀레니엄을 기점으로 퇴출되고, 자본 중심의 모델이 도입됐다.

사회학자 뱅상 샤보는 “PPR그룹이 프낙을 장악하며 추천 판매품목이 대폭 줄었다. PPR 인력자원부는 ‘판매직원은 전문가’라는 이전의 정책을 ‘판매직원도 100% 고객’이라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 말은 곧 중앙에서 전권을 쥐고 기업 간부들까지 관리하겠다는 의미다. 프낙의 창업공신 대부분은 경영대 출신들로 대체됐고, 이들이 대형마트의 식품유통 모델을 주로 도입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현상은 2003년 올리벤이 사장에 취임하며 확산됐다. 피에르 베레고부아 전 프랑스 총리의 자문위원과 스포츠 전문 방송 채널 ‘카날플뤼스’의 고문(퇴임 때 320만 유로의 낙하산식 보상금을 챙김)을 거쳐 PPR 사장이 된 올리벤은 점점 더 소형 음반업자들에 대한 약탈 마케팅 기법을 썼다. 한 음반 유통업자는 목소리를 높인다. “회사가 여전히 표면상 내세우는 선전은 문화 다양성 및 음반 자영업자들에 대한 지원이다. 하지만 음반 코너 책임자들이 우리를 돕겠다며 구체적으로 구사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지원이 아닌 지원 회피가 목적이다. 2005년 이들이 ‘핵심 제공품목 확장’을 목표로 추진한 ‘에코’ 프로젝트가 그런 이중성의 상징이다. 이들은 카탈로그에 실린 상품 일부를 골라 추천했다. 추천 상품들의 매출은 증가했지만, 나머지 상품들은 판매 부진으로 매장에서 철수될 운명에 처했다. 이 프로젝트는 중단됐지만, 타격이 컸다.” 그는 “프낙이 상품 반품권을 100% 쥐고, 이 권리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며, 자신의 실명 공개를 꺼렸다.

100명이 넘는 출판 자영업자들을 규합해 투쟁에 나선 잡지 <탕 데 스리즈>의 발행인이자 출판자영업자 협회 ‘로트르 리브르’의 회장인 프랑시스 콩브는 분노감을 표출한다. “프낙이 어려운 조건을 제시한다. 다짜고짜 40%의 할인을 요구한다. 계약엔 없지만 그것이 오래전의 나쁜 관행이다. 내가 15년 전 출판사를 시작했을 당시 이미 겪었던 일들이다.”

10년 전 출판사 ‘프레오 데 콜린’을 창업한 자크 르스캉프는 “프낙은 자신의 대차대조표에서 수익성이 좋지 않은 출판사를 철수시키려 한다. 판매에 치중한 수익 극대화 정책이다. 어렵다 싶은 도서는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운다”고 지적한다. 기자가 그에게 “대형 출판사에 비해 홀대 정책을 쓴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그는 “사실이 그렇다. 특히 지방이 심하다. 그래서 난 프낙과 거래를 줄였다”고 대답한다.

기술제품 쪽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물론 그 분야의 매출이 급락했다지만, 그래도 어쨌든 프낙의 전체 매출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뷰익GNX’ 시스템을 설치한 프낙은 (중국에서의 구매를 필두로) 원거리 구매를 할 때 다른 기업들과 함께 ‘GNX’의 역경매 시스템을 통한 공동 구매로 제품 가격을 최대한 낮추는 데 성공했지만, 반품을 할 수 없게 됐다.

끝없는 이미지 포장

그때부터 프낙은 누적되는 재고품을 가지고 더 이상 사치스러운 품질비교 테스트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프낙은 품질비교 테스트의 공정성을 내세워 이 테스트가 마치 품질인증서나 되는 것처럼 자랑해왔다. 시집 전문코너로 유명한 프낙 포럼(파리 제1구에 위치)의 노조위원장 에릭 마클로는 “이 모든 것이 프낙의 창업 가치 중 하나를 배신하는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15년째 최고의 재즈 코너가 있는 파리 몽파르나스 매장 책임자이자 프랑스 쉬드(SUD·연대단결민주)의 노조 직원 대표인 올리비에 가즈니에는 프낙이 “표면상 특정 판매품목을 차별하지 않고 문화적 다양성을 유지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척 봐도 금세 품목이 줄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파르나스 매장도 지속적인 품목 감소 추세로 1만5천 품목이 줄었다.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공간인 우리 매장은 홀로 자급자족하는 외진 골족 마을을 연상시킨다”고 항변했다.

마클로는 이런 속임수에 “출판 자영업자들이 농락당하고, 고객은 닭 취급 받는 칠면조 신세가 되어버렸다. 프낙이 칠면조들에게 컴퓨터 패키지를 보장 기간 연장을 빌미로 불필요한 보험상품과 함께 끼워팔고 있다. 특히 더는 존재하지 않는 애프터서비스 비용까지 지불하게 한다”며 분개했다. 프낙은 2년 전부터 ‘판매실적에 따라 개별적인 성과급을 지불하는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분명, 금융상품과 연계한 성과급제도는 월급쟁이들의 환상, 순탄한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젠 직원 간에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프낙의 명령에 따라 고리채로 보장연장보험과 회전대출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물론 직원들은 수익 증대가 목적인 액세서리와 가정용 소형 가전제품 판매에도 열성이다.(10) 이에 반해 코너 담당 직원들의 자율성은 줄었다. 23년째 프낙 테른(파리 8구)의 음반 코너 담당자로 일하는 크자비에 필뤼는 “내가 (본사에) 주문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내가 정리한다”고 털어놨다. 프랑스노동자동맹(FO) 산하 ‘위생안전노동여건위원회’ 위원인 이 직원은 자신이 마치 “단순 서랍 정리위원 같다”고 했다. 마클로는 “프낙이 직원들에게 멀티플레이어의 다양한 역할을 요구하며, 이들의 본질적 자격을 송두리째 박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 프낙이 직업 및 업무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는 것을 목표로 추진한 프로젝트 중 2004년과 2008년에 추진한 ‘직업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바스티유 매장 직원의 업종 변경 유도가 목적이었다.

프낙은 2009년 2월 발표한 사회복지 시행계획안에 오랜 기간 악화되어온 노동조건을 그대로 포함시켰다. 이에 파리 통합노조는 파리지방법원에 프낙을 제소했고, 프낙은 9월 이 계획안을 수정했다. 회사는 15년째 노조와 잦은 마찰을 빚고 있다. 노조는 회사가 “극단적으로 억압적인 내규를 정해 회사를 군대화하는 바람에 회사의 가치가 하락하고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다”고 규탄했다.(11) 프낙은 부서 폐지 비용을 매장에 전가하고, 컴퓨터 서비스를 아웃소싱하는 등 하도급에 여전히 의존하는 부패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12)

올리벤은 좌파적 정치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사장으로 임명되기 바로 직전인 2008년 “프낙의 찬란한 실적과 함께 회사의 환경 변화”를 구실로 행정부서 직원 300명을 해고했다. 그가 내세운 해고 이유는 음반매장의 판매 하락과 사진매장 철수 그리고 인터넷의 등장이었다. 프낙의 ‘산 증인’인 프랑스노동총동맹(CGT) 노조위원 크리스티앙 르카뉘는 “1982년 650명이던 파리 알 매장 직원이 현재 아르바이트 직원을 포함해 430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일의 양은 똑같다. 2009년 초반, 매출이 조금 감소했는데도 일은 줄지 않았다. 사람들이 경제위기의 영향을 체감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체감하는 것은 인력 부족”이라고 비꼬았다.

19년간 임금 동결

노조는 3년 만에 파리 매장에서 800명의 일자리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지방도 예외는 아니다. 니스에서는 2004~2007년 사이, 정규직 직원 27명이 인사이동에서 부서를 배정받지 못했다. 2008년 회사의 부당해고를 고발한 아쉐미 구에주달은 “프낙 직원들은 구조조정 실험의 대상이 됐다”고 했다. 우리와 인터뷰를 마친 이틀 후, 파리 중앙 FO 노조위원인 이 직원은 “지난 19년간 임금인상이 없었다”며, 프낙을 프뤼돔(프랑스 노동쟁의조정위원회)에 노조 차별로 제소했다. 노조 차별 사례는 또 있다. 파리 포럼데알 매장 개장 직후 입사해 30년째 근무 중인 CGT 노조위원 마클로의 월급도 세금을 제외하고 나면 1500유로에 불과하다.(13)

일각에서는 프낙의 현 위기를 회사의 주력 모델인 ‘상호부조론’의 쇠퇴 탓으로 보고 있다. 상호부조론의 쇠퇴 탓으로 파산한 상징적인 회사가 프랑스 가구유통회사 카미프다. 그러나 사회학자 뱅상 샤보는 다른 주장을 폈다. “프낙은 주력 상품을 첨단제품 위주로 조정했다. 이후 사진과 출판물조차 휴대전화 같은 디지털 제품으로 대체됐다.”

프낙은 1980년대 이후 할인 모델을 포기했다. 이로 인해 고객은 프낙에 와서 가격만 묻고, 콩포라마나 쉬르쿠프 할인매장으로 가서 물건을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PPR그룹 계열사 두 곳도 심각한 시련을 겪었다. 한 곳은 지속적으로 직원을 해고했고, 다른 한 곳은 아예 회사를 매각해버렸다. 또 고객은 인터넷으로 몰리고 있다. 파리 코메르스 거리에 있는 픽스마니아의 온라인이나 아마존 사이트는 상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시하고 있다. 샤보는 “이 두 사이트가 프낙의 가장 강력한 대중유통 경쟁자지만, 프낙닷컴도 그에 못지않은 경쟁력을 갖췄다”고 말했다.

한편 일부 실용주의자들은 몇 년 전부터 프낙이 새로운 사회복지 계획안을 내놓는 것은 회사 매각을 준비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수군대고 있다. 구에주달은 프낙의 부도덕성을 질타한다.(14) “프낙이 경제위기를 들먹이는 것은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프낙이 건재하다는 것은 회계 전문가가 경영진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확인됐다. 이를 근거로 사주 피노의 아들은 주주들을 안심시키고, 자신을 잘 따르는 주주들에게 심심치 않은 파이를 배분하고 싶어한다. 실망스러운 것은 대주주(아들)가 프낙을 윤리성과 도덕성을 홍보하는 광고판처럼 쓰고 있다는 데 있다. 이 광고 스크린 뒤에는 장사꾼들이 도사리고 있다.” 프랑수아 피노가 크리스티 경매장을 매입하고 작품들을 베니스에 전시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는 프낙의 후광을 이용해 품위 있는 예술 후원자 이미지를 각인시켜, 전통적으로 문화, 즉 영혼의 양식에 민감한 ‘품격 높은 부르주아 클럽’에 진입하고 싶어한다.

이데올로기로 수익 창출 노려

또한 이데올로기가 수익 창출에 도움이 된다고 인식하는 이 대주주는 프낙에 후광으로 작용하는 이데올로기의 치장도 치우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PPR 사이트에 접속하면 ‘프낙은 경쟁사와 다르다’고 믿기 마련이다. 이는 프낙이 문화적 다양성과 첨단기술의 발견이라는 즐거움에 기반을 두고 고유 브랜드를 고집하고 있는 탓이다. 실제로 홍보문구를 보면, 프낙의 특징은 도서·음반, DVD, 비디오게임, 기술제품 등 독보적인 구색을 갖추고 고객에게 상품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쓰여 있다. 동종업자들은 이에 분노한다. 툴루즈에서 음반가게를 운영하는 그레구아 라모는 “온갖 부류의 고객이 잡지 <텔레라마>(주로 우수 음반을 추천하는 잡지)를 읽고 프낙에서 음반을 구입하면서 자신들이 최상의 보보족(부르주아 보헤미안)이라 착각하지만, 금세 형편없는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꼬집었다.(15)

이에 대해 피노 가문은 PPR그룹이 최전방에서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고, 지구의 장래를 걱정해 환경 다큐멘터리 영화 <홈>을 제작하는 데 1천만 유로(총 1200만 유로)를 투입했다는 등 구체적인 사실을 거론하며 항변한다. 프낙 사이트를 보면 이 영화의 총판권을 프낙이 갖고 있다. 만약 프낙이 지구를 구하는 동시에 가능하면 DVD를 판매해 다소간의 수익을 챙길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이런 투자보다는 좀더 평범한 희생을 먼저 했어야 하지 않을까?

글·자크 드니 Jacques Denis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프랑세즈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프낙의 일자리 400개가 줄었다. 파리 바스티유 프낙에서만 200개, 지방 프낙 150개, 파리 근교 이브리 프낙 50개 등이다.

(2) 이런 광고는 PPR 주가에 극적인 영향을 미친다. 최악의 주식시장에서도 이 그룹의 주식은 7%가 상승했다. 2008년 11월 채 30유로에도 못 미치며 바닥권이던 주가가 2009년 9월 80유로를 웃돌고 있다.

(3) 2007년, 4년 연속 15%의 성장을 기록한 그룹은 46억 유로가 넘는 매출로 1억8600만 유로의 운영 수익을 올렸다. 2008년의 수익도 안정적이다.

(4) 앙드레 에셀 <난 세상을 바꾸고 싶다>, Stock, 파리, 1985, 325쪽과 301쪽.

(5) 위의 책, 399쪽.

(6)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1월호에 실린 세르주 알리미의 글 ‘세계 공습에 나선 월마트’ 참조.

(7) 샤를로트 뒤디냑과 프랑수와 모제의 저서 <포위당한 음악> <L’Echappée>, 몽트뢰이, 2008.

(8) 프낙의 소유권은 1977년 유통회사 쿠에서 1985년 보험회사 GMF로, 그리고 1993년 프랑스 수도 사업 전문회사(CGE)를 거쳐, 1994년 PPR그룹으로 넘어갔다.

(9) 프낙은 프랑스에 80개 매장을 비롯해 벨기에, 브라질,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스, 스위스 등 7개국에 진출해 있다.

(10) 프랑스소비자연맹(UFC)이 발간한 잡지 <문화를 최대한 활용하기> 참조, 파리, 2009년 6월.

(11) 예를 들어 2001년 이후 아르바이트 직원 수가 2배(2008년 30%에 육박)로 증가했다고 노조는 주장한다.

(12) 2000년대에 수많은 파업이 있었다. 그중 2002년 파업은 파리 점포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지위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13) 2009년 6월 10일과 8월 5일 발간된 잡지 <시네 엡도>에 실린 두 기사 참조.

(14) 2006년 10월 5일자 <르 누벨 옵세바퇴르> 참조.

(15) 샤를로트 뒤디냑과 프랑수와 모제의 저서 <포위당한 음악> <L’Echappée>, 몽트뢰이, 2008.

 


 

저가 판매 전략 위해 납품업자들 돈을 뜯다

출판업자들에게는 프낙의 거의 모든 것이 유료다. 고객이 직접 음반 수록곡을 들어볼 수 있도록 음반을 진열하는 것도, 복도에 크리스마스 카탈로그를 진열하는 것도 공짜가 아니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금기다. 출판업계가 불황인데, 서적 유통업계 1위인 프낙한테서 왕따를 당할 각오로 이 침묵의 금기를 깬단 말인가? 인터뷰에 어렵게 응한 출판업자 자크 르스캉프는 “프낙에 입점하는 것이 정말 비싸다! 프낙이 홍보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런 시스템은 문화산업에 찬물을 끼얹는 짓이다!”라고 성토했다. 프낙이 할인제도로 단골고객의 지갑을 지키고 싶어하는 것과 달리, ‘랑법’(자크 랑이 프랑스 문화부 장관 시절 특별법으로 제정한 도서정가제)을 지지하는 그는 “대형 서적 유통업체들이 가격을 파괴해 소형서점을 도산시킬 것이다. 프낙은 독립서점의 네트워크를 파괴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1978년 출판업자이자 작가인 제롬 랭동은 그의 저서 <프낙과 도서들>에서 “프낙이 독서층을 확장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난 프낙의 할인 시스템이 반대 결과를 빚고 있다고 본다. 이 시스템은 대중에게 제공되는 도서의 선택권을 제한해, 결국 도서의 판매가격 상승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가격이 자율화된 음반매장을 둘러보면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1980년 1만여 개에 달하던 음반매장은 2001년 1천 개로, 그리고 3년 후에는 600개로 줄었다.” 음반 자영업자의 시장 장악률은 1.4%가 고작이다. 독립음반 제작자 장 로샤르는 “프낙은 훌륭한 음반 상인들을 모두 스카우트해 주변을 정리했다. 프낙은 이들과 고락을 같이할 생각이 아니었다. 요즘 프낙은 이들을 다 해고해 남은 사람이 없다. 설령 최고의 음반 상인 중 몇 명이 아직 붙어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훌륭하면 훌륭한 만큼 프낙은 이들을 괴롭힌다!”고 했다.

오랜 기간 음반 분야에 종사한 다니엘 리차르는 프낙이 고객의 이익과 문화 다양성을 도모한다는 미명 아래 음반시장을 황폐화시켰다며 “정가제를 실시하지 않으면 음반 전문업자들은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프낙은 ‘녹색가격제’(할인제도)를 빌미로 우리에게 상품 할인판매를 지시했고, 그 결과 프낙이 음반시장을 독점해버렸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