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미국에서도 성적인 것은 정치적이다
2016-05-02 슬라보예 지젝
지금, 팔레스타인 소셜미디어에서는 논쟁이 한창이다. 서구에서는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논쟁의 중심에는 무하마드 아사프(1)와 타메르 나파르가 있다. 가자지구 출신의 팝가수 아사프는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아랍 전 지역 및 일부 유럽에서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다. 가자지구의 하마스도 그를 지지하며,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그를 ‘팔레스타인 문화대사’로 칭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관현악단의 팝 연주에 맞춰 감미로운 사랑 노래를 부르고, 애국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아사프. 그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지지한다는 점만 제외하고 정치적 분열을 뛰어넘는 화합적 인물이다. 2016년 3월, 한 인터뷰에서 아사프는 “전통을 지키자는 취지로 여동생이 대중 앞에서 노래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아사프의 이 발언에 대해, 팔레스타인 랩 가수이며 우디 알로니 감독의 영화 <정크션48>(2)의 공동작가이자 배우인 타메르 나파르는 다음과 같은 공개 항의의 글을 썼다.
만일 아사프가 아닌 다른 인기가수가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노래할 수 없고, 이런 전통을 나는 소중히 여기므로 내 여동생이 노래하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면, 나는 이의를 제기하며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언을 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자 출신의 우리의 영웅, 아사프라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고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
전통을 위해,
여동생이 노래를 못하게 한다?
무하마드 아사프를 지지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은 사상 처음으로 가자지구, 웨스트 뱅크, 디아스포라 지역, 난민촌, 그리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지 거리들에서 모두 하나가 되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아사프가 우리와 함께 그 거리에 나와 예멘, 가자, 모로코, 요르단, 알 리드(3)에서 온 소녀들, 즉 인기프로그램 <아랍아이돌>에 출연해 노래하고, 춤추고, 작곡하고, 공연하기를 꿈꾸는 소녀들에게 용기를 주기를 바란다.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식 분리장벽(Apartheid;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으로, 1994년 최초의 흑인정권이 탄생하며 철폐됨-편집자 주)과 성차별적인 분리장벽에 맞서 싸워야 한다. 나는 꿈꾼다.남녀가 손을 맞잡고 모든 분리장벽에 맞서 행진하는 것이다. 따로 떨어져 걸으면서 단결을 요구하는 것은 사리에 안 맞지 않은가! 전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은가? 나는 리드의 빈민촌에 사는 분노에 가득 찬 아이였다. 엄마가 내게 파이루즈(4)의 노래를 불러주면, 분노를 가라앉히곤 했다. 그런 것이야말로 소중히 간직할 만한 전통이다! 그러니 친애하는 아랍의 자매들이여, 소리 높여 노래하고, 경계를 허물어 우리의 분노를 가라앉혀 달라. 모든 이들이 자유롭지 않다면,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것과 같다!”
알로니 감독의 영화 <정크션48>은 1948년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정에서 태어난, 젊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 정부와 공동체 내 근본주의자들, 양쪽에서 압박받으며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 나파르는 노래를 통해 팔레스타인 가정에서 일어나는 소녀들의 ‘명예살인’ 전통을 비판한다. 이 때문에 일부 서구 좌파들(Western PV Leftists)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한다. 최근 미국을 방문한 나파르가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명예살인을 비판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몇몇 반(反)시온주의 학생들이 그를 맹비난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나파르가 그런 노래를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덧붙여 정말 명예살인이 존재한다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때 팔레스타인인들을 원시적 환경에 몰아넣고 현대화를 방해한 탓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나파르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급진파 교수님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영어로 내 이웃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내 이웃의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랍어로 노래한다.”
나파르의 주장은 이렇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서구 진보주의자들의 교만에 찬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미명 하에 명예살인을 옹호하거나 방관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 두 가지 관점, 즉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서구적 가치를 강요하는 것, 그리고 한 문화 속에 내재된 반(反)인권성에 눈을 감은 채 그 문화를 지켜야한다는 것은 모두 이데올로기의 혼돈에 속한다. ‘보편적 인권’에서의 ‘보편성’의 문제, 그리고 서양의 개인주의적 문화에서 비롯된 가치 및 규범을 우선시하는 문제에 대한 글들은 이미 수없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 추가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다문화주의, 반(反)식민주의를 내세워 생활방식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것도, 항상 옳지는 않다는 점이다.
화장실은 왜 남성용 아니면 여성용인가
아사프와 나파르 사이의 최근 논쟁은 성적 차이와 관련한 거대한 투쟁의 일부로, “성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1968년의 슬로건(5)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다. 수십 년 전,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제재도, 군사적 침공도 두렵지 않다. 오직 두려운 것은 서구의 풍기문란함이 침투하는 것이다.” 무슬림이 서구에서 가장 두려워한 것이 무엇인지, 호메이니의 말을 그 자체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경제적, 군사적 투쟁의 무자비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적은 서구의 경제적 신(新)식민주의나 군사적 침략이 아니다. 다름 아닌 ‘풍기문란한’ 문화인 것이다. 푸틴의 러시아도 같은 경우다. 러시아의 보수 애국주의자들은 러시아와 서구의 갈등을 문화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결국 성적 차이에 초점을 맞췄다. 푸틴은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6)에서 오스트리아의 남자 동성애자가 우승한 것에 대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저녁 만찬에서 말했다. “성경은 두 가지 성, 즉 남성과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이 두 가지 성이 결합하는 주요 목적은 아이를 낳는 데 있다.” 늘 그랬듯이, 과격한 애국주의자인 지리노프스키는 보다 노골적으로 말했다. “올해는 유럽의 종말이다. 우리는 끝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 유럽에는 더 이상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단지 ‘그것(it)’만 존재한다.” 드미트리 로고진 러시아 부총리는 “유럽 통합 지지자들에게 향후 유럽의 모습으로 턱수염 난 소녀를 보여준 셈이다”라고 트위터에 남겼다. 통합 유럽의 상징인 ‘이 수염난 여성(오랫동안 기이한 인물의 전형으로 등장해온)’의 이미지에는 묘한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러시아가 문화적 냉전을 재개할 것을 외치며 유로비전 콘테스트를 TV방송에 내보내지 않을 만도 하다. 러시아에서도 호메이니와 동일한 논리를 찾아볼 수 있다. 진정 두려움의 대상은 군사적, 경제적인 위협이 아니라 도덕적 타락, 성적 차이로 인한 위협인 것이다. 다수의 아프리카 및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동성애자 해방운동 또한 자본주의 세계화의 문화적 영향, 그리고 그에 따른 전통‧사회‧문화적 양식의 약화가 표출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동성애자에 반대하는 것을 마치 반(反)식민지주의 투쟁의 일환으로 여긴다. 예를 들어 보코하람(7)도 마찬가지 아닌가? 보코하람 대원들에게는 ‘여성해방’이야말로 자본주의 현대화가 몰고 온, 가장 파괴적인 문화충격일 것이다. 따라서 보코하람은 남녀 관계를 계급에 따라 규제함으로써, 자신들이 현대화의 파멸적인 영향에 맞서 싸운다고 인식한다. 여기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무슬림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착취와 지배 등 식민주의의 파괴적이며 치욕적인 측면들을 몸소 겪었다. 그런 무슬림들이 무슨 이유로 서구 유산 중 (적어도 우리에게는) 가장 핵심적인 평등주의와 개인의 자유(반어법을 포함)를 공격대상으로 삼았을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대상을 꽤 잘 골랐다는 점이다. 그들이 진보적인 서구세계를 감당할 수 없어하는 이유는 서구국가들의 착취와 폭력적인 군림 그 자체보다, 그렇게 잔인한 현실을 그 반대의 가치, 즉 자유, 평등, 민주주의로 위장하는 것 때문이다.
보코하람은 규범적인 성적 차이의 논리를 극단적으로 끌고 갔을 뿐이다. 성적 차이의 개념은 남녀에게 각각의 구체적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상징적인 규범을 부여한다. 이는 화장실의 분리라는 영역까지 확장된다. 역설적인 점은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분리된 화장실이 오늘날 특히 미국에서 커다란 법적, 이데올로기적 논쟁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2016년 3월 29일 화요일,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와 애플 CEO 팀 쿡을 필두로 대부분 실리콘 밸리를 기반으로 하는 80명의 기업 임원들은 트랜스젠더들이 반대성별의 공공 시설물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법을 비난하며 팻 맥크로리 노스캐롤리나 주지사에게 보내는 서한에 서명했다.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토록 차별적인 법안을 제정하기로 한 당신의 결정에 매우 실망하는 바입니다. 우리 비즈니스 공동체는 이 법이 기업의 임직원 및 비즈니스에 해가 된다는 점을 각 분야의 의원들과 계속 논의해왔습니다.” 해당 법은 개인의 성 정체성이 아닌 생물학적 성에 따라 화장실, 샤워실 등의 공공시설들을 사용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트랜스젠더는 자신이 선호하는 성별의 시설을 이용하려면, 출생증명서 상의 성별을 법적으로 변경해야 한다.
거대 자본이 어느 쪽 편을 들지는 자명하다. 팀 쿡은 노예와 같은 노동조건 속에서 애플제품을 조립하는 수십만 명의 중국 폭스콘 노동자 문제는 접어놓고서, 비(非)특권계층과 연대한다는 것을 과시하며 성 차별 폐지를 요구했다. 늘 그러하듯, 대기업들은 ‘정치적으로 옳은’ 이론과 보란 듯이 결탁한다.
‘범세계적 무소속’
엘리트들의 강한 소속감
그렇다면 ‘트랜스젠더리즘(Transgenderism)'은 무엇인가? 이는 부여받은 성(性)과 성 정체성 또는 성적 외양(남성 또는 여성으로 보이는 외모) 간에 불일치를 경험하는 이들과 관련된 용어다. 이진법에 의한 성 정체성이 부여받은 성과 반대인 ‘트랜스섹슈얼’, 또는 젠더퀴어 같은 이들이다. 젠더퀴어의 경우, 비(非)이진법적이며 포괄적이다. 즉 두 가지 성이 공존하는 바이젠더, 모든 성적 외양을 아우르는 팬젠더, 또는 정체성이 유동적인 젠더플루이드, 무성의 존재에 가까운 에이젠더 등이다. 다음 사례 중 하나 이상이 일치한다면, 젠더퀴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1)성적 정체성이 겹치거나 성 정체성 간에 경계가 모호한 경우, 2)두 가지 이상의 성을 갖고 있는 경우(바이젠더, 트라이젠더, 또는 팬젠더), 3)성이 없는 경우(에이젠더, 논젠더르드, 젠더리스, 젠더프리, 뉴트로이스, 또는 제 3의 성 등)이다.
사회관계에 대한 관점으로서 트랜스젠더리즘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소위 포스트젠더리즘이라고 불리는 사회‧정치‧문화적 운동이다.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발전된 생명공학기술과 보조생식기술을 적용함으로써 인간 종(種) 내에서 젠더를 자발적으로 없앨 것을 주장한다. 포스트젠더리즘을 옹호하는 이들은 성 역할, 사회 계층, 그리고 성적‧신체적 격차 및 차이가 대체로 개인과 사회에 해롭다고 주장한다. 최신 보조생식기술이 지닌 근본적인 잠재력을 생각할 때, 포스트젠더리즘을 주장하는 이들은 향후 생식 목적의 섹스는 쓸모없어지거나, 모든 포스트젠더들은 자신들이 원하면 임신과 출산, 양육이 모두 가능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또 그런 사회에서는 성별구분이 필요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트랜스젠더리즘이 특정 ‘소속’을 거부하고 정체성의 ‘유동화(流動化)’를 반기는 추세와 맥락이 같다는 점이다. 최근 프레데리크 로르동은 반(反)애국주의적 좌파들을 맹비난했다. 비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얼마나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지는 인정하지 않고, ‘소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한다. 이는 배부른 자들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로르동은 자신들이 어디와도 무관한 보편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소속과, “권리 없는 불법체류자들과 함께 시민권을 얻기 위해, 소속을 위해 투쟁하는 무국적의 현실, 완전한 무소속 상태의 끔찍한 현실”을 대비시켰다. 그는 “권력의 중심에 선 채 국가의 영향력을 부인하면서도, 변방에서는 뻔뻔하게도 국가의 영향력을 누리는 것은 완전히 위선이다. 그 누구도 국가에 소속되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 국가에 소속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하버마스와 울리히 벡의 ‘영혼 없는 보편주의’를 겨냥한 말이다.
오늘날 유럽에서 재정 몰수에 반대해 주권을 부르짖는 대중의 애국주의적 주장을 볼 때, “민족국가와 집단 해방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일이 시급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로르동의 주장은 상당 부분 일리가 있다. 자신의 뿌리에 집착하는 현지인들을 조롱하는 ‘범세계적(Cosmopolitan)' 엘리트들이 실상 ‘뿌리 없는’ 그들만의 엘리트 그룹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범세계적 무소속’의 뿌리가 얼마나 깊으며, 강한 소속의 징표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세계를 누비는 ‘유목민 엘리트’들과, 안전한 곳에 속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난민들을 한 부류로 취급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는 마치, 다이어트 중인 부유층 여성과 기아 상태의 난민 여성을 한 범주 안에 넣는 것과 같다.
게다가 여기에는 고전적인 역설이 존재한다. 소외되고 변방으로 밀려날수록, 자기 민족의 정체성과 자신만의 생활양식을 주장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치적으로 옳은’ 구도가 형성된다. 서구세계와 동떨어진 사람들은 본질주의자에다 인종차별적 동일화주의자라는 말을 듣지 않고도, 자신들만의 민족 정체성을 실컷 주장할 수 있다. 반면, 악명 높은 백인 이성애자에 가까울수록 이러한 주장을 하기는 어려워진다.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주장한다는 것이, 아시아인들과 이탈리아인들,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들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려울 것이다.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모델로서의) 백인남성이라는 특정 정체성의 주장을 금지시키는 것은, 금지 그 자체로 부당한 것임에도 이들에게 중심적 위치를 부여한다. 백인남성들이 자신들의 특정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다른 이들의 탄압행위에 대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보편·중립적 위치를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공정성은 그 반대로도 작용한다. 즉, 가난한 유럽 국가들은 부유한 서유럽국가들에게 다문화를 포용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신들은 애국심을 가져도 괜찮은 것이다.
동물과의 결혼을
금지시키는 것은 정당할까
이와 유사한 갈등은 트랜스젠더리즘에서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모든 금지규정에 저항하며 관습을 거스르는 듯한 트랜스젠더들이 이와 동시에 극도로 민감하게 행동하고, 강요된 선택 때문에 억압받는다고 느낀다(“왜 나의 성별을 결정해야 하는가?”).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범주를 뛰어넘어 정말 그들이 자신에게 붙는 ‘트랜스-’라는 접두사를 당당하게 내세운다면, 왜 그들만의 공간을 그리도 간절히 요구하는 것일까? 그들은 남성용, 또는 여성용 화장실 입구에서 “나는 트랜스젠더다. 남자이면서 여자다. 여자 차림의 남자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한, 어떤 화장실이든 사용할 수 있어!” 라고 당당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정상적인’ 이성애자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지 않은가? 때로는 규정된 성 정체성의 틀 안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지 않은가? 남성(또는 여성)은 어떤 특정한 정체성이 아니라 어떤 정체성을 회피하는 특정방식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요구들이 등장할 수 있다.
왜 여러 사람들 간의 결혼은 안 되는가? 무엇으로 결혼은 남녀 간에만 가능하다는 제약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동물과의 결혼은 왜 안 되는가? 동물 감정의 정교함이 검증된 세상에, 동물과의 결혼을 금지하거나 제한한다면 이는 종(種)차별주의(8)가 아닌가?
이러한 교착상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쓰레기통에서 찾아보자. 오늘날 공용 쓰레기통은 점점 분화되고 있다. 그리고 재활용품을 분리수거하는 통들이 있다. 재활용품의 종류는 종이, 금속, 플라스틱 등으로 다양한데, 여기서 갈등이 생긴다. 만약 가느다란 플라스틱 끈이 달린 종이봉투나 공책을 버려야 한다면, 이는 플라스틱과 종이 중 어디에 속할까? 분리수거통에는 분류체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종이: 책, 신문 등. 단, 하드커버 책이나 비닐 표지 책 등은 제외.’ 이 경우, 재활용품을 제대로 분리수거하려면 족히 30분은 걸릴 것이다. 따라서 보다 쉬운 처리를 위해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일반 쓰레기통’을 보조로 둔다. 즉 종이나 플라스틱 등을 제외한, ‘일반 쓰레기’라는 것이 존재하듯 말이다. 이런 분류체계를 화장실에도 적용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 어떤 분류도 모든 종류의 정체성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즉 남성용과 여성용에 ‘일반 성별’을 추가하면 안 될까?
철저하게 분류하려는 시도가 이렇게 실패하는 이유는, 분류가 불가능한 정체성들이 실제로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다. 성적 차이를 실재적이고, (모든 분류를 거부하는) ‘불가능한’ 것, 동시에 불가피한 것으로 고집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젠더 포지션(남성, 여성, 게이, 레즈비언, 바이젠더, 트랜스젠더 등)이 존재하지만 그 다양성은 길항관계를 맴돌며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게이는 남성적, 레즈비언은 여성적, 트랜스섹슈얼은 한 성에서 또 다른 성으로 이동하며, 크로스드레싱은 두 성을 결합하고, 바이젠더는 두 성 사이를 떠돈다. 어디에든 ‘남성 또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이 깔려있다. 즉, 오늘날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길항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한편에서는 사회분열에 대응하기 위한 기본방침으로서 성적 차이라는 고정된 형태를 강요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완전한 성전환의 ‘유동화’가 일어나고, 성적 차이가 다양한 형태로 분산되고 있다.
지구 한편에서는 낙태와 동성결혼이 도덕적 진보로 지지받지만, 다른 곳에서는 동성애 혐오, 낙태 금지운동이 확산 중이다. 이 길항관계를 다룸에 있어 범할 수 있는 중대한 실수가 있다. 그것은 양 극단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두 극단이 공유하는 것, 즉 성을 명확하고 안정적으로 계층에 따라 구분하거나, 무성(無性)화된 세상에서 성별 간에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 둘 중 택일함으로써 성적 차이로 인한 무리한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평화로운 세상의 청사진 속에서 사회적 길항관계, 즉 계급투쟁이 사라진 사회의 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글·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슬로베니아 류블랴냐에서 1949년 출생. 정신분석학과 영화에 열정을 가진 상당히 이색적인 철학자인 지젝은 전(全)세계의 비판적 젊은이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 최근 저서로는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플라마리옹, 2012년), <폭력>(오 디아블로 보베르, 2012년), <라캉과 침묵의 파트너들>(누, 2012년), <우리의 구원자들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자>(스렉코 호르바트Srecko Horvat와 공저, 포스트, 2013년)등이 있다.
번역·오정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Muhammad Assaf; <아랍 아이돌(Arab Idol)> 시즌2 우승자. 우승 후 스타덤에 올랐다.
(2) <Junction 48>; 2015년 개봉된 이스라엘 영화. 우디 알로니 감독, 마이클 모쉬노브, 타릭 코프티, 마이사 압드 엘하디 등 출연.
(3) al-Lyd;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인구가 함께 거주하는 이스라엘의 도시. 이스라엘에서는 로드(Lod)라고 불린다.
(4) Nouhad Haddad Fairuz; 1934년 레바논 출생. 아랍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가수.
(5) “Sexual is political”; 1968년 페미니스트 운동 당시 유행했던 슬로건
(6) Eurovision Song Contest; 유럽방송연맹(European Broadcasting Union) 회원국 시청자 앞에서 노래, 춤 등 기량을 뽐내고 순위를 가리는 유럽 최대의 음악 경연대회.
(7) Boko Haram; 2001년 결성된 나이지리아의 이슬람 무장단체. 보코는 하우사어로 서양식 비(非)이슬람 교육, 하람은 아랍어로 죄, 금기라는 뜻으로, 합치면 ‘서양교육 금지’라는 뜻이 된다. 서양교육 중에서도 주로 여성의 교육을 금지한다.
(8) Speciesism; 동물 학대를 조장하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믿음. 생명윤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 1946~)는 인간의 행복만을 중요하게 취급하는 인간중심주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이며, 이는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