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 도로 위를 가른 새로운 철의 장막

2016-05-02     장아르노 데랑, 시몽 리코
2015년, 1백만 명의 난민들과 이주민들이 발칸의 도로를 통과했다. 유럽연합(EU)이 이들의 출발을 저지하기 위해 터키와 협상하는 동안, 수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이나 빈곤을 피하는 수단이던 국경의 인도적 구원 통로는 계속 폐쇄되고, 끊어지고 있다.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 근처 작은 마을 이도메니의 상황이다. 작은시골 도로가 끝나는 지점,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벌판에 그리스의 마지막 수용소가 설치돼 있다. 수용소는 밭들과 조그만 화물터미널 간에 간신히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서 마케도니아로 들어가는 입구를 표시해주는 철조망까지의 거리는 철로를 따라 수백 미터에 불과하다. 경찰들은 난민들이 50명씩 지나가도록 허용한다. 마케도니아의 제브젤리야(Gevgelija) 수용소로 이어지는 문은 반쯤 열려 있다. ‘발칸의 도로’가 점점 폐쇄되자 마케도니아는 난민들의 접근조건을 강화했다. 2015년 11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인, 이라크인, 시리아인들만 난민들로 받아들여졌다. 그 외 다른 국가 난민들은 ‘경제적 목적의 이주민들’로 간주됐다. 하지만 그 후 1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인들도 난민 자격이 박탈됐다. 3월 초부터는 시리아인들도 시리아 북서부도시 알레프 출신만이 국경을 통과할 수 있게 됐다. 다마스 출신은 통과할 수 없다.
이도메니 수용소의 수용능력은 1,500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난민들은 수천 명에 달한다. 따라서 작은 텐트 속에 몸을 구겨넣고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3월 8일 자정 슬로베니아가 자국의 국경선을 폐쇄한다고 통보했을 때, 많은 질문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어떻게 이동을 계속할 것인가?”, “현재 통로가 완전히 막혀 있는데 국외 탈출 안내인들의 네트워크에 의존해야 하나?”하는 등의 질문들이다. 그러나 아무도 터키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마케도니아로 가는 테살로니키의 고속도로 상의 에브조니에서 펼쳐지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도메니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국경초소 전의 마지막 휴게소는 2015년 11월부터 다시 국외 탈출 안내인들의 소굴이 됐다. “나는 아테네에서 왔습니다. 베오그라드까지 가는데 안내인에게 700유로를 지불했습니다.” 30대 알제리인 브라힘이 말한다. 매일 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고속도로 양쪽에서 잠을 잔다. 그 중 가장 부유한 이들은 모텔에서 자고, 나머지 사람들은 버려진 건물에서 잔다. 모든 사람들이 전화를 통해 인터넷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 통신소통은 국외 탈출 안내인들과 접촉하고, 경로를 연구하고, 가족들과 소통하는데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이곳에는 남자들만, 아니 거의 남자들만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그레브나 이란에서 온다. 이들이 난민으로 수용될 가능성은 없다. 밤마다 이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간의 국경선을 둘러싼 가시철조망을 돌파하려고 시도한다. 모로코 남부 출신인 라르비는 이미 여러 차례 시도한 바 있다.
“방책에는 뚫린 구멍들이 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근처에 마케도니아 군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잡아 구타하고 그리스로 돌려보낸다.”
마케도니아 중부 중심도시인 벨레스. 철로 방향으로 불쑥 튀어나온 집에는 렌체 즈드라브킨 여사가 살고 있다. 50대 주부인 렌체는 2011년 철로를 따라 걷는 이민자들을 보았다. 당시에는 기차탑승이 그들에게 금지돼 있었다. 버려진 산업도시인 벨레스는 남쪽의 그리스와 북쪽의 세르비아 국경 한 가운데에 있다. 렌체는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돕기 위해 최초로 결집한 마케도니아인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이민자들에게 물과 비스킷, 옷을 주었다. 그들에게 그늘에서 한 시간쯤 쉬고 손발을 씻으라고 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떨었으며, 경찰의 눈을 피해 내 집에 숨었다. 그럼에도, 금방 내 주소가 소셜 네트워크에 돌아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들을 돕는 것을 보고 미쳤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웃들도 먹을 것과 덮을 것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2015년 봄에는 매일 수십 명의 사람들이 벨레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렌체는 제브젤리야 수용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이들을 계속 도왔다. 그는 발칸 도로들이 폐쇄된 후, 떠도는 난민들의 행렬을 다시 보게 됐다. 렌체의 집 2층 창문에서는 철로를 따라 전진하는 그림자들이 보인다.
“이민자들의 합법적인 이동을 당국이 금지하면, 그들은 몸을 숨기며 목적지로 가야 한다. 유럽이 인도주의적 해결책을 줄 것을, 그들이 당당하게 여행할 수 있게 해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래 이동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인들 거주지역인 카다라크 주변부를 소개한다. 코소보와 분리되는 산기슭에 위치한 바크신체와 로자네 마을은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위치한 타바노브체 국경초소, 철로, 고속도로에 인접해 있다. 오래 전부터 마케도니아 경찰은 이 촌락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다. 수많은 불법거래의 중심지이자, 강력한 알바니아 게릴라들의 거주지였기 때문이다. 로자네는 오래 전부터 차후 이동을 준비하는 곳이 됐다. 이주자들은 공사 중인 건물이나 그 지역의 ‘정글’격인 국경 가까운 덤불숲에서 잠을 자며, 세르비아로 몰래 넘어가기 위해 밤을 기다리곤 했다. 인도주의적 통로가 만들어지면서 몇 달 동안 이주자들의 물결은 계곡 쪽으로 몰렸다. 그러나 이 인도주의적 통로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경제적 목적의 이주자들’과 ‘불법 이주자들’은 곧바로 산악도로를 다시 탔다. “유럽연합이 강제하는 제약조건들이 증가함에 따라 폭력이 증가했다”고 세르비아의 ‘국경없는 의사회(MSF)’ 대변인 프란시스카 밥티스타 다 실바 여사가 한탄한다. 2015년 5월 ‘알리 바바’라 불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이끄는 납치 조직망이 와해되면서 수십 명의 난민들이 풀려났다. 그 후 ‘비즈니스’가 다시 시작됐다.
세르비아의 남부 도시 프레세보는 코소보와 마케도니아 사이의, 불모의 계곡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도시에는 대부분 알바니아인들이 산다. 이곳 거주민 5만여 명에게 이주민 행렬은 경제적 밸브가 되고 있다. 경찰은 난민들의 신분을 기록하고, 폐업한 담배 공장에서 그들의 지문을 채취하고 있다. 이 도시의 기업들은 폐업 상태다. 난민 위기가 대량의 신규유입자금을 끌고 들어왔다. 크로아티아행 버스 운송, 식품, 휴대폰 등 ‘난민 경제’가 난민들이 가장 많이 몰려온 6~11월에 호황을 누렸다. 난민등록센터 맞은 편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슈켈젠 씨는 2015년 매상고가 3배 올랐다고 한다. 역 근처는 당시 지붕 없는 수용소였다. 신분이 확인되고, 크로아티아로 가기 위해 필수적인 세르비아 당국의 72시간 통행허가증을 기다리며, 수천 명의 난민들이 길 위에서 잠을 잤다. 난민등록센터의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 도착하는 난민의 수가 줄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국경 도시 디미트로브그라드에서는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까. 상당수의 난민들은 세르비아에 도착함으로써 최초로 승리감과 자유를 만끽한다. 매일 100~300명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디미트로브그라드에 도착한다. 이들은 터키에서부터 몸을 숨기면서 매일 밤 걸어서 불가리아를 통과했다. 이 여정에 소요되는 시간은 2주일. 그것도 운이 대단히 좋고 아주 건강한 사람들 기준이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비슷비슷하다. 난민들의 돈과 휴대폰을 강탈하는 불가리아 경찰과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15세 자베드는 힘이 빠져, 경찰이 통행증을 발급하는 안내센터 근처에서 비틀거리며 걷는다. 두 개의 대형 텐트가 추위를 막아준다. 그러나 결코 자리가 충분치는 않다. 스위스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수프와 덮을 것을 나눠준다.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프가니스탄인뿐이다. 우리는 산 속에서 걷는 데 익숙해져 있다. 시리아인들은 우리를 뒤쫓아 올 수 없다”라고 자베드의 친구가 말한다. 불가리아를 통과하는 아프가니스탄인들도 난민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축에 든다. 이들도 국외 탈출 안내인들에게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유럽 국가들이 난민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음에 따라 이들의 여행은 불확실해졌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작은 국경도시인 시드. 2015년 9월 중순에서 10월 말까지 20만 명 이상의 난민들이, 다뉴브 강의 구불구불한 물길위에 솟아오른 언덕에 위치한 베르카소보-밥스카 초소를 이용해 세르비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건너왔다. 이 기간 동안 거의 1천 명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자원봉사자들이 이 국경으로 차례로 건너와 난민들에게 먹을 것도 주고 격려도 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우리의 대통령, 우리의 정부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체코 사람들이 국경 폐쇄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무정부주의 투사들과 더불어 베르카소보에서 임시거주하고 있는 50대의 기독교 복음주의자인 파벨이 설명했다. 그 후 이웃 도시인 시드의 역에서부터 통행로가 만들어졌다. 시드에서는 세르비아 경찰과 크로아티아 경찰이 함께 슬라본스키 브로드의 크로아티아 난민 안내센터를 향해 탑승하도록 난민들을 감시했다. “‘제발’을 아랍어로 뭐라고 하지? 너는 크로아티아 말을 아니?”라고 한 시리아 가족에게 방향을 지시해주려는 세르비아 공무원이 자신의 동료에게 묻는다. 난민들의 쇄도로 인해 어제의 적들은 ‘실용적’ 관계로 복원되고 있는 셈이다.
세르비아와 헝가리 국경도시 수보티차를 소개한다. 1945년부터 1989년까지 헝가리로 가는 세르비아의 마지막 도시 수보티차는 유럽을 둘로 나누는 철의 장막에 인접해 있었다. 2011년 이 도시는 발칸 도로들과 연결되는 중요한 매듭이 됐다. 이주민들은 버려진 벽돌공장 주변에 다시 모였다. 국외 탈출 안내인 조직망이 헝가리까지의 이송을 보장해주었다. 2014년과 2015년 사이의 겨울, 10만 명 이상의 코소보 주민들이 급하게 탈출할 때 이 조직망을 이용했다. 9월 14일 헝가리가 국경을 완전히 봉쇄해 버린 후 누구도 수보티차를 통해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난민들’과 ‘경제적 목적의 이주민들’의 구분이 시작되자, 망명 후보자들은 숲속 정글로 들어가게 된다. 모로코 출신의 하킴(Hakim T.)은 국경 통과료를 지불하기 위해 1,200유로의 송금 이체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자동차에서 내려야만 한다. 안내원이 가시철조망 안의 통로로 안내하면, 저쪽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폭력, 강탈, 감옥행 등의 위험이 존재함에도, 합법적인 통로가 폐쇄되자 불법 탈출이 재개됐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 도시 스베타 루시야를 소개한다. 크로아티아의 이스트라 주(州) 경계에 위치한 조그만 국경 초소에서 기념할만한 배구 대회가 개최됐다. 2015년 12월 19일 슬로베니아 국경선을 따라 만들어지는 가시철조망 벽 건설에 반대하기 위해 두 국가의 시민들이 철조망 양쪽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 방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투사들과 스포츠맨들 뿐만은 아니었다. 사냥꾼 협회는 그 방책이 사냥감을 쫒는데 장해물이 된다고 비난했다. 유고슬라비아의 국가 분열도, 2004년 슬로베니아의 유럽연합 가입도 이런 식의 철의 장막 설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국경에 위치한 슬로베니아의 조그만 국경도시 셴틸의 경우, 바로 여기에서 1991년 6월 최초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터졌다. 슬로베니아 국방부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부터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 통제권을 빼앗았을 때였다. 셴틸-스필펠트 초소는 두 나라 사이의 가장 중요한 연결 통로이자, 발칸으로 가는 루트의 빗장이다. 2015년 가을 내내, 이 초소는 자동차 통행을 금지했다. 여기서 매일 수천 명의 난민들이 유럽 북쪽으로 갈 수 있기를 기다렸다. 2월 19일 오스트리아는 쿼터를 도입해 1일 80명의 피난처 신청인들에게만, 또 마지막 목적지가 제 3국이라는 것이 증명 가능한 3,200명의 난민들에게만 오스트리아 영토에 진입할 권리를 주었다. 같은 날 비엔나는, 통과 난민들에 대한 단일등록절차를 만들기 위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의 경찰청장들을 소집했다. 며칠 후 오스트리아는 정부 수반들의 지역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초대에서 제외된 그리스는 이 정상회담에 대해 ‘일방적이고 비우호적인’ 주도 행위라고 비난했다. 유럽연합이 진정성 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스트리아와 협력 국가들인 ‘비셰그라드 그룹(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가 외교·안보·경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헝가리 비셰그라드에서 만나 결성한 협력체)’이 솅겐 조약을 무시하고 발칸도로의 폐쇄를 결정했다.(1)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의 국경을 이루는 오흐리드 호숫가에서는 터키에서 오는 난민 물결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그리스에 갇힌 수만 명의 난민들은 새로운 루트를 찾고 있다. 두 가지 루트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를 통한 루트, 또 하나는 알바니아를 통한 루트다. 난민들은 알바니아로부터 몬테니그로로 갈 수 있고, 그 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 이어서 크로아티아 혹은 곧바로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가기 위한 시도가 가능하다.
몇 달 전부터 알바니아 당국은 난민들의 도착을 예상하고 있다. 알바니아 당국은 3월부터 국가의 경계선에, 그리스 국경에, 알바니아 쪽의 포그라데츠 지역과 마케도니아 쪽의 스트루가 지역 간 국경을 이루는 카파산 초소에 특별 기동대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 산악에 있는 모든 통로를 통제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알바니아가 머지않아 막다른 통로가 될 것이다.  

그리스-마케도니아 국경 근처 작은 마을 이도메니의 상황이다. 작은시골 도로가 끝나는 지점,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벌판에 그리스의 마지막 수용소가 설치돼 있다. 수용소는 밭들과 조그만 화물터미널 간에 간신히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서 마케도니아로 들어가는 입구를 표시해주는 철조망까지의 거리는 철로를 따라 수백 미터에 불과하다. 경찰들은 난민들이 50명씩 지나가도록 허용한다. 마케도니아의 제브젤리야(Gevgelija) 수용소로 이어지는 문은 반쯤 열려 있다. ‘발칸의 도로’가 점점 폐쇄되자 마케도니아는 난민들의 접근조건을 강화했다. 2015년 11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인, 이라크인, 시리아인들만 난민들로 받아들여졌다. 그 외 다른 국가 난민들은 ‘경제적 목적의 이주민들’로 간주됐다. 하지만 그 후 1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인들도 난민 자격이 박탈됐다. 3월 초부터는 시리아인들도 시리아 북서부도시 알레프 출신만이 국경을 통과할 수 있게 됐다. 다마스 출신은 통과할 수 없다.
이도메니 수용소의 수용능력은 1,500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난민들은 수천 명에 달한다. 따라서 작은 텐트 속에 몸을 구겨넣고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3월 8일 자정 슬로베니아가 자국의 국경선을 폐쇄한다고 통보했을 때, 많은 질문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어떻게 이동을 계속할 것인가?”, “현재 통로가 완전히 막혀 있는데 국외 탈출 안내인들의 네트워크에 의존해야 하나?”하는 등의 질문들이다. 그러나 아무도 터키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마케도니아로 가는 테살로니키의 고속도로 상의 에브조니에서 펼쳐지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도메니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국경초소 전의 마지막 휴게소는 2015년 11월부터 다시 국외 탈출 안내인들의 소굴이 됐다. “나는 아테네에서 왔습니다. 베오그라드까지 가는데 안내인에게 700유로를 지불했습니다.” 30대 알제리인 브라힘이 말한다. 매일 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고속도로 양쪽에서 잠을 잔다. 그 중 가장 부유한 이들은 모텔에서 자고, 나머지 사람들은 버려진 건물에서 잔다. 모든 사람들이 전화를 통해 인터넷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 통신소통은 국외 탈출 안내인들과 접촉하고, 경로를 연구하고, 가족들과 소통하는데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이곳에는 남자들만, 아니 거의 남자들만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그레브나 이란에서 온다. 이들이 난민으로 수용될 가능성은 없다. 밤마다 이들은 작은 무리를 지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간의 국경선을 둘러싼 가시철조망을 돌파하려고 시도한다. 모로코 남부 출신인 라르비는 이미 여러 차례 시도한 바 있다.
“방책에는 뚫린 구멍들이 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근처에 마케도니아 군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잡아 구타하고 그리스로 돌려보낸다.”
마케도니아 중부 중심도시인 벨레스. 철로 방향으로 불쑥 튀어나온 집에는 렌체 즈드라브킨 여사가 살고 있다. 50대 주부인 렌체는 2011년 철로를 따라 걷는 이민자들을 보았다. 당시에는 기차탑승이 그들에게 금지돼 있었다. 버려진 산업도시인 벨레스는 남쪽의 그리스와 북쪽의 세르비아 국경 한 가운데에 있다. 렌체는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돕기 위해 최초로 결집한 마케도니아인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이민자들에게 물과 비스킷, 옷을 주었다. 그들에게 그늘에서 한 시간쯤 쉬고 손발을 씻으라고 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떨었으며, 경찰의 눈을 피해 내 집에 숨었다. 그럼에도, 금방 내 주소가 소셜 네트워크에 돌아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들을 돕는 것을 보고 미쳤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웃들도 먹을 것과 덮을 것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2015년 봄에는 매일 수십 명의 사람들이 벨레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렌체는 제브젤리야 수용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이들을 계속 도왔다. 그는 발칸 도로들이 폐쇄된 후, 떠도는 난민들의 행렬을 다시 보게 됐다. 렌체의 집 2층 창문에서는 철로를 따라 전진하는 그림자들이 보인다.
“이민자들의 합법적인 이동을 당국이 금지하면, 그들은 몸을 숨기며 목적지로 가야 한다. 유럽이 인도주의적 해결책을 줄 것을, 그들이 당당하게 여행할 수 있게 해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래 이동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인들 거주지역인 카다라크 주변부를 소개한다. 코소보와 분리되는 산기슭에 위치한 바크신체와 로자네 마을은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위치한 타바노브체 국경초소, 철로, 고속도로에 인접해 있다. 오래 전부터 마케도니아 경찰은 이 촌락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다. 수많은 불법거래의 중심지이자, 강력한 알바니아 게릴라들의 거주지였기 때문이다. 로자네는 오래 전부터 차후 이동을 준비하는 곳이 됐다. 이주자들은 공사 중인 건물이나 그 지역의 ‘정글’격인 국경 가까운 덤불숲에서 잠을 자며, 세르비아로 몰래 넘어가기 위해 밤을 기다리곤 했다. 인도주의적 통로가 만들어지면서 몇 달 동안 이주자들의 물결은 계곡 쪽으로 몰렸다. 그러나 이 인도주의적 통로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경제적 목적의 이주자들’과 ‘불법 이주자들’은 곧바로 산악도로를 다시 탔다. “유럽연합이 강제하는 제약조건들이 증가함에 따라 폭력이 증가했다”고 세르비아의 ‘국경없는 의사회(MSF)’ 대변인 프란시스카 밥티스타 다 실바 여사가 한탄한다. 2015년 5월 ‘알리 바바’라 불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이끄는 납치 조직망이 와해되면서 수십 명의 난민들이 풀려났다. 그 후 ‘비즈니스’가 다시 시작됐다.
세르비아의 남부 도시 프레세보는 코소보와 마케도니아 사이의, 불모의 계곡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도시에는 대부분 알바니아인들이 산다. 이곳 거주민 5만여 명에게 이주민 행렬은 경제적 밸브가 되고 있다. 경찰은 난민들의 신분을 기록하고, 폐업한 담배 공장에서 그들의 지문을 채취하고 있다. 이 도시의 기업들은 폐업 상태다. 난민 위기가 대량의 신규유입자금을 끌고 들어왔다. 크로아티아행 버스 운송, 식품, 휴대폰 등 ‘난민 경제’가 난민들이 가장 많이 몰려온 6~11월에 호황을 누렸다. 난민등록센터 맞은 편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슈켈젠 씨는 2015년 매상고가 3배 올랐다고 한다. 역 근처는 당시 지붕 없는 수용소였다. 신분이 확인되고, 크로아티아로 가기 위해 필수적인 세르비아 당국의 72시간 통행허가증을 기다리며, 수천 명의 난민들이 길 위에서 잠을 잤다. 난민등록센터의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 도착하는 난민의 수가 줄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국경 도시 디미트로브그라드에서는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까. 상당수의 난민들은 세르비아에 도착함으로써 최초로 승리감과 자유를 만끽한다. 매일 100~300명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디미트로브그라드에 도착한다. 이들은 터키에서부터 몸을 숨기면서 매일 밤 걸어서 불가리아를 통과했다. 이 여정에 소요되는 시간은 2주일. 그것도 운이 대단히 좋고 아주 건강한 사람들 기준이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비슷비슷하다. 난민들의 돈과 휴대폰을 강탈하는 불가리아 경찰과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15세 자베드는 힘이 빠져, 경찰이 통행증을 발급하는 안내센터 근처에서 비틀거리며 걷는다. 두 개의 대형 텐트가 추위를 막아준다. 그러나 결코 자리가 충분치는 않다. 스위스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수프와 덮을 것을 나눠준다.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프가니스탄인뿐이다. 우리는 산 속에서 걷는 데 익숙해져 있다. 시리아인들은 우리를 뒤쫓아 올 수 없다”라고 자베드의 친구가 말한다. 불가리아를 통과하는 아프가니스탄인들도 난민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축에 든다. 이들도 국외 탈출 안내인들에게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유럽 국가들이 난민들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음에 따라 이들의 여행은 불확실해졌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작은 국경도시인 시드. 2015년 9월 중순에서 10월 말까지 20만 명 이상의 난민들이, 다뉴브 강의 구불구불한 물길위에 솟아오른 언덕에 위치한 베르카소보-밥스카 초소를 이용해 세르비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건너왔다. 이 기간 동안 거의 1천 명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자원봉사자들이 이 국경으로 차례로 건너와 난민들에게 먹을 것도 주고 격려도 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우리의 대통령, 우리의 정부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체코 사람들이 국경 폐쇄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무정부주의 투사들과 더불어 베르카소보에서 임시거주하고 있는 50대의 기독교 복음주의자인 파벨이 설명했다. 그 후 이웃 도시인 시드의 역에서부터 통행로가 만들어졌다. 시드에서는 세르비아 경찰과 크로아티아 경찰이 함께 슬라본스키 브로드의 크로아티아 난민 안내센터를 향해 탑승하도록 난민들을 감시했다. “‘제발’을 아랍어로 뭐라고 하지? 너는 크로아티아 말을 아니?”라고 한 시리아 가족에게 방향을 지시해주려는 세르비아 공무원이 자신의 동료에게 묻는다. 난민들의 쇄도로 인해 어제의 적들은 ‘실용적’ 관계로 복원되고 있는 셈이다.
세르비아와 헝가리 국경도시 수보티차를 소개한다. 1945년부터 1989년까지 헝가리로 가는 세르비아의 마지막 도시 수보티차는 유럽을 둘로 나누는 철의 장막에 인접해 있었다. 2011년 이 도시는 발칸 도로들과 연결되는 중요한 매듭이 됐다. 이주민들은 버려진 벽돌공장 주변에 다시 모였다. 국외 탈출 안내인 조직망이 헝가리까지의 이송을 보장해주었다. 2014년과 2015년 사이의 겨울, 10만 명 이상의 코소보 주민들이 급하게 탈출할 때 이 조직망을 이용했다. 9월 14일 헝가리가 국경을 완전히 봉쇄해 버린 후 누구도 수보티차를 통해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난민들’과 ‘경제적 목적의 이주민들’의 구분이 시작되자, 망명 후보자들은 숲속 정글로 들어가게 된다. 모로코 출신의 하킴(Hakim T.)은 국경 통과료를 지불하기 위해 1,200유로의 송금 이체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자동차에서 내려야만 한다. 안내원이 가시철조망 안의 통로로 안내하면, 저쪽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폭력, 강탈, 감옥행 등의 위험이 존재함에도, 합법적인 통로가 폐쇄되자 불법 탈출이 재개됐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 도시 스베타 루시야를 소개한다. 크로아티아의 이스트라 주(州) 경계에 위치한 조그만 국경 초소에서 기념할만한 배구 대회가 개최됐다. 2015년 12월 19일 슬로베니아 국경선을 따라 만들어지는 가시철조망 벽 건설에 반대하기 위해 두 국가의 시민들이 철조망 양쪽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 방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투사들과 스포츠맨들 뿐만은 아니었다. 사냥꾼 협회는 그 방책이 사냥감을 쫒는데 장해물이 된다고 비난했다. 유고슬라비아의 국가 분열도, 2004년 슬로베니아의 유럽연합 가입도 이런 식의 철의 장막 설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국경에 위치한 슬로베니아의 조그만 국경도시 셴틸의 경우, 바로 여기에서 1991년 6월 최초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터졌다. 슬로베니아 국방부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부터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 통제권을 빼앗았을 때였다. 셴틸-스필펠트 초소는 두 나라 사이의 가장 중요한 연결 통로이자, 발칸으로 가는 루트의 빗장이다. 2015년 가을 내내, 이 초소는 자동차 통행을 금지했다. 여기서 매일 수천 명의 난민들이 유럽 북쪽으로 갈 수 있기를 기다렸다. 2월 19일 오스트리아는 쿼터를 도입해 1일 80명의 피난처 신청인들에게만, 또 마지막 목적지가 제 3국이라는 것이 증명 가능한 3,200명의 난민들에게만 오스트리아 영토에 진입할 권리를 주었다. 같은 날 비엔나는, 통과 난민들에 대한 단일등록절차를 만들기 위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의 경찰청장들을 소집했다. 며칠 후 오스트리아는 정부 수반들의 지역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초대에서 제외된 그리스는 이 정상회담에 대해 ‘일방적이고 비우호적인’ 주도 행위라고 비난했다. 유럽연합이 진정성 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스트리아와 협력 국가들인 ‘비셰그라드 그룹(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가 외교·안보·경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헝가리 비셰그라드에서 만나 결성한 협력체)’이 솅겐 조약을 무시하고 발칸도로의 폐쇄를 결정했다.(1)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의 국경을 이루는 오흐리드 호숫가에서는 터키에서 오는 난민 물결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그리스에 갇힌 수만 명의 난민들은 새로운 루트를 찾고 있다. 두 가지 루트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를 통한 루트, 또 하나는 알바니아를 통한 루트다. 난민들은 알바니아로부터 몬테니그로로 갈 수 있고, 그 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 이어서 크로아티아 혹은 곧바로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가기 위한 시도가 가능하다.
몇 달 전부터 알바니아 당국은 난민들의 도착을 예상하고 있다. 알바니아 당국은 3월부터 국가의 경계선에, 그리스 국경에, 알바니아 쪽의 포그라데츠 지역과 마케도니아 쪽의 스트루가 지역 간 국경을 이루는 카파산 초소에 특별 기동대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 산악에 있는 모든 통로를 통제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알바니아가 머지않아 막다른 통로가 될 것이다.  


글·장아르노 데랑Jean-Arnault Dérens & 시몽 리코Simon Rico
<발칸 통신> 사이트의 기자, 편집자.

글·고광식
파리8대학 언어학박사. 주요 역서로 <르몽드 세계사3> 등이 있다. 
(1) 브누아 브레빌(Benoît Bréville), “솅겐 조약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6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