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도니아의 끝없는 정치위기

2016-05-02     장-아르노 데랑, 로랑 제슬랭
4월 12일 이후 매일 밤, 마케도니아 시민들은 거리로 나선다. 광범위한 불법도청 가담자 50여 명에게 내려진 사면조치에 반대하기 위함이다. 명백한 위기상황임에도 정부는 6월 5일 총선을 예정대로 진행하려 하고, 야당은 불참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유럽 중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마케도니아를 지배하는 자가 발칸반도를 지배한다.” 어느 겨울밤, 옛 오스만 제국령 구시장의 한적한 카페에서 바라본 수도, 스코페는 위태로운 심연에 빠진 국가의 잠든 도시처럼 보였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특사를 지낸 아르심 제콜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커피잔을 휘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발칸루트는 마케도니아를 두고 오랫동안 영토싸움을 해온 세르비아와 그리스 모두에게 중요하다. 알바니아와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민족의 문화적 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가 이미 잊혀진 이 유럽 변두리 지역을 만성적인 저개발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우리 마케도니아는 여전히 발칸반도의 관제탑 역할을 한다. 온갖 정보와 불법거래망이 교차하는 이 지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측 가능하다.”
마케도니아에는 발칸반도 최대의 미국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국가 규모에 비해 필요이상으로 이상하리만치 큰 건물이다. 제콜리는  “미군이 1999년 전쟁 이후 코소보에 세운 본드스틸 캠프 역시 오랫동안 모두의 관심거리였지만, 발칸반도 내 진정한 미국의 의사결정기관은 스코페에 있다”고 말했다. 
마케도니아의 거리를 걷다보면, ‘인적이 없는 땅’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공식적으로 약 2백만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조사에서 언급된 수치는 조금 다르며, 2011년 인구조사 결과는 나오지도 않은 상태다.(1) 고립된 산간지역에는 숲의 개발을 막으려는 노인들만 몇 명 살고 있고, 스코페 같은 대도시도 대졸 청년들을 겨우 붙들고 있는 실정이다. 2010년 세계은행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고 1991년에 마케도니아가 독립한 이후 약 44만7천 명이 마케도니아를 떠났으며, 매년 2만 명이 자국을 떠나는 것으로 집계된다.(2) 공식 실업률은 30%를 웃돈다. 평균임금은 350유로 이하, 산업은 침체상태다. 대부분의 이들에게 유일한 해결책은 이 나라를 떠나는 것뿐이다. 최근 몇 년간 증가한 산업은 명백한 빈곤화 지표인 스포츠베팅샵이 유일하다.
2006년,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의 역사라 할 수 있는 마케도니아국내혁명기구-민족통합민주운동(VMRO-DPMNE)이 재집권할 당시, 니콜라 그루에브스키 새 총리는 극단적인 자유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국세조세경쟁과 소셜덤핑을 이용해 해외투자를 유치하려 했다. 스코페 교외에 ‘마케도니아-중국 경제수역’이 설정됐지만 텅 빈 황무지가 됐으며, 당시 추진한 민영화 사업은 마케도니아 산업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았다. 2015년, 해외 이주자가 마케도니아로 송금한 금액은 해외직접투자액에 버금가는 규모인 2억5,210만 달러였다. 오늘날 비공식적 경제부문은 GDP의 35%에 달하며, 자국민의 20%가량이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정부는 만성적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으며, 국가채무는 끝도 없이 증가하고 있다. 
‘2014년 스코페 프로젝트’는 수도 중심부를 고대 마케도니아 인물 조각상들이 늘어선 갤러리로 만들어 놓았다.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해 비잔틴 제국의 왕과 수도사들의 조각상이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맞선 첫 전투의 영웅 조각상들과 나란히 서있다. 심지어 현대 팝가수의 조각상도 있다. 이 지나친 역사 왜곡은 마케도니아 정부가 재설정한 전략적 우선과제의 흔적이며, 그루에브스키 총리의 변질된 민족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경제정책 실패에 이어 EU가입 계획도 틀어졌다. 2005년에 EU 가입후보국 지위를 획득한 이후로 조금의 진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진행이 중단된 공식적인 이유는 ‘마케도니아’라는 명칭이 고대 그리스의 독점적 유산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간의 ‘국명 분쟁’ 때문이다.(3) 미국 출신의 매튜 니메츠 UN특사의 중재 아래 협상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가 지지부진한 진행을 정당화할 좋은 구실을 제공했고, EU가입에 대한 마케도니아 국민의 열망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몇 년 전부터 그루에브스키 총리는 주요 파트너였던 EU와 거리를 두었다. 대신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며,(4) 일명 ‘비셰그라드 그룹’으로 불리는 극보수주의 국가들과도 친분을 쌓았다.(5) 
이런 처참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는 오랫동안 ‘유럽의 성공사례’로 통했다. 프랑수아 레오타르 UN특사의 중재 아래 2001년 마케도니아 정부군과 알바니아계 무장세력(UÇK-M) 간에 발발한 전쟁이 종결된 것이다. 당시 체결된 오흐리드 평화협정은 마케도니아 국민의 1/4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소수민족의 권리 확대를 약속했지만 이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물론, 반군 출신의 알바니아계 민주통합동맹(BDI)이 여전히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지만, 이 자리배치는 그저 형식일 뿐이다. VMRO-DPMNE와 알바니아계 정당 간의 동맹은 사실상 계획적 방침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논공행상과 자리를 나눠먹는 것에 불과하다. 모든 마케도니아 장·차관들이 각각 알바니아계 대역을 두고 있다. 공직자마다 다른 집단 출신의 심복을 둔 것이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공무원 수가 증가하는 나라임에도 공공서비스는 개선되지 않는다. 공직이란 그저 정당들이 빛을 진 사람에게 자리를 나눠주기 위한 어장에 불과한 것이다. 민족별 쿼터제는 변질됐고, 공직자들 수는 수천 명에 달한다. 이들은 특정 직무도 없으면서 소수민족(대다수가 알바니아계이며, 이밖에도 집시, 세르비아인, 터키인이 있다)을 대표하는 정당에 가입함으로써 약소하나마 직위와 보수를 받게 된다.(6)  이러한 민족분열 논리를 밑거름 삼아 성행한 후견주의는 민족분열 논리를 악화시켰다. 
EU는 이러한 ‘다민족국가’라는 허울을 만족스럽게 여겼었다. 오래 전부터 ‘알바니아 문제’를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여겼는데 덕분에 지역안정이 보장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콜리 전 OSCE특사는 “오흐리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부터 이미 과일 속에 벌레가 있었다”며, “유럽은 군벌이 평화를 책임질 거라고 믿었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었다. 같은 실수가 마케도니아뿐 아니라 유럽 남동부 전역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VMRO-DPMNE에게 바란 것은 단지 2008년 코소보 독립 선언을 인정하라는 것이었을 뿐, 그리 손해를 볼 일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정치·사회적으로 실망한 알바니아계 집단의 민심을 달래고 또 다른 내전을 막고자 했다면, 코소보 독립 인정이라는 상징적 만족감을 안겨주고 재정수입의 마피아적 재분배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타협안은 집권세력을 만족시킬 수는 있겠으나 정당들이 사회에 떠넘긴 짐을 더욱 무겁게 짓누르는 대안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 그루에브스키 총리는 권력을 지나치게 남용하기 시작했다. 민간 방송채널 ‘A1’과 같은 야당의 주요매체를 건드린 것이다. 결국 A1은 2011년에 폐지됐으며, 소유주인 벨리야 람코브스키는 ‘탈세’로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7) 정부 내부적으로는 편협한 통제시스템을 이용해 공무원들의 충성을 요구했을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공무원은 “VMRO-DPMNE에 가입해야 인사이동이나 승진이 가능하다. 또한, 도처에 첩자와 밀고자가 있으므로 자리를 보전하려면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계도 마찬가지로 정부 압력에 남몰래 불판을 터뜨린다. 모든 마케도니아 기업이 부적절한 세무조사를 피하려면 VMRO-DPMNE 간부를 고용해야 한다고 ‘권고’받았다. 2015년 2월, 제1야당인 마케도니아사회민주연합(SDSM)의 조란 자에브 대표가 광범위한 전화도청 시스템을 규탄하고 나섰다. 야당, 기자, 경찰, 외교관, 재판관은 물론 정부 인력까지 포함한 2만 여명의 시민을 겨냥한 전화도청 시스템은 그루에브스키 총리가 직접 도입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루에브스키 총리의 사촌인 사쇼 미잘코브 비밀정보국장은 자리에서 물러나 헝가리로 망명을 갔다. 이후 마케도니아는 끝없는 정치위기로 빠져들었고 거리 곳곳에서는 시위가 벌어졌다. 2015년 봄, 정부청사 앞에 수천 명이 진을 치고 총리와 행정부의 사퇴를 요구했다. 진을 친 지 몇 달 후인 7월 15일, 마침내 4개의 주요 정당들 간에 선거인명부 공개 및 총선 실시에 대한 협정서가 체결됐다. 원래대로라면 다음해 6월 5일에 시행돼야 하지만, 선거인명부 검토가 충분치 않았다는 이유로 야당은 총선을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014년 가을, 마케도니아 학생층이 대학 개혁 프로젝트에 대한 강력한 반대시위를 시작했다. 오랜 경제침체와 실질적인 정치토론의 부재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마케도니아 사회가 정부에게 그 책임을 묻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2015년 5월 9~10일, 경찰 특별전담반이 알바니아계 용병과 전과자 수십 명이 숨어든 마케도니아 북부 도시 쿠마노보를 급습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비밀정보부가 계획한 이 ‘반테러’ 작전은 전화도청에 쏠린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경찰 9명과 ‘테러리스트’ 용의자 1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민족집단들 간에 새로운 폭력이 발생할 우려를 낳았다. 쿠마노보 모스크의 무슬림 단체 일원인 아브디 아브디유는 “정부가 이 사건을 이용해서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계 간에 증오를 조장하고 일자리와 부패척결을 요구하는 성난 민심을 처리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이런 악질적 장난에 말려들지 않았다. 발칸 지역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오히려 모든 공동체들이 거리로 나와 단결된 입장을 표명했다”고 설명했다. 
2015년 한 해 동안 백만 명 이상의 난민이 EU국가를 향해 마케도니아를 가로지르는 ‘발칸루트’를 거쳐 갔다.(8) 그동안 마케도니아에서는 종교와 민족의 장벽을 넘어선 놀라운 연대운동이 시작됐다. 식품·의류 수거센터가 생겼으며, 여러 종교와 민족으로 구성된 봉사팀이 몇 달 전부터 타바노브체와 게브구엘리야 대합소에서 교대로 근무하고 있다. 1년 전부터 북부지역에서 원조 관련 업무를 통괄해온 알렉산드라 다비도브스카는 “마케도니아인인지 알바니아계인지 따질 겨를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빈곤상태를 봐왔다. 도움의 손길이라면 누구든 환영이다”라며, “시민들이 발 벗고 나선 이유가 처음에는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였다면, 이제는 함께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암담한 경제 전환기만을 수년간 경험한 마케도니아 청년들의 미래에는 빈곤에 머무는 것과 해외로 떠나는 것, 이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그러나 이 청년들이 바로 마케도니아 사회를 결집시키는 기반이 된다. 이제 이러한 움직임이 충분히 지속돼, 지난 두 세기 동안 마케도니아를 지배했던 구체제를 뒤엎을 새로운 정치세력이 출현하는 일만 남았다. 유럽의 신성불가침한 만트라, ‘안정성’의 문제를 건드리게 될지라도 말이다.   


글·장-아르노 데랑 Jean-Arnault Dérens
&로랑 제슬랭 Laurent Geslin
<Le Courrier des Balkans>의 기자

글·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Recensement hautement périlleux dans les Balkans’(발칸반도의 매우 험난한 인구조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3년 8월호
(2)‘Emigration: la catastrophe démographique qui menace la Macédoine’(이민, 마케도니아를 위협하는 인구학적 위기), <Le Courrier des Balkans>, 2015년 10월 26일
(3)니콜라 오트망 Nicolas Autheman, ‘Nous sommes les descendants d’Alexandre le Grand’(우리는 알렉산더대왕의 후예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0년 5월호
(4)‘Les Balkans, nouvelle ligne de front entre la Russie et l’Occident’(서구와 러시아의 새로운 전쟁터 ‘발칸’), ‘La Macédoine au cœur des manœuvres’(작전 중심에 놓인 마케도니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5년 7월호 
(5)‘비셰그라드 그룹’은 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등 중유럽 4개국의 비공식적 동맹을 뜻한다. 비셰그라드 그룹은 1990년대 초에 초국가적 협력을 도모하고 EU가입을 촉진한다는 목적 하에 만들어졌다. 
(6)‘Minorités en Macédoine: pour avoir un emploi public, il faut la carte du parti’(마케도니아에서 소수민족이 공직을 얻으려면 정당에 가입해야만 한다), <Le Courrier des Balkans>, 2011년 10월 21일
(7)‘Fermeture de la chaéne de télévision A1 et de trois quotidiens, un été dévastateur pour les médias’(방송채널 A1 폐지 및 일간지 3곳 폐간, 언론에게 치명적이었던 그해 여름), <국경 없는 기자회>, 파리, 2011년 8월 17일
(8)‘Réfugiés, l’Europe tire le rideau’(유럽, 난민 문제를 은폐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5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