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의 폭력에 맞선 ‘테러조직’ 헤즈볼라

2016-05-02     마리 코스트
러시아 폭격기와 이란의 지략과 레바논 시아파 무장군의 지원 덕분에, 시리아군은 2월말 휴전 이전의 영토를 수복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지원하는 최전선에 있는 헤즈볼라는 그 정당성이 강화됐다. 아랍국가연맹에게 ‘테러집단’으로 지목됐음에도, 헤즈볼라는 북부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시리아 국경에 접한 레바논 베이루트 남부의 다히예 마을과 동부 베카 평원을 지나는 도로에 널린 시리아군의 시신들은 이제 이곳 풍경의 일부가 됐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이 개입한 시리아 내전에 참전하면서 막대한 공물을 바친 셈이다. 레바논 수도 남부 루와이스의 작은 상점에서 일하는 파라 C.(1)는 2014년 다마스쿠스 인근 구타에서 살해된 약혼자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검은 히잡을 쓴 파라가 입을 열었다.
“그는 15일 동안 시리아로 싸우러 간다고 나갔어요. 돌아와서 일주일을 쉬었다가 다시 떠났어요. 폭연과 폭발 때문에 눈과 귀에 문제가 자주 일어났어요. 늘 피비린내가 난다고 했지요. 참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그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해봤어요.”
전쟁에서 사망한 전투원의 부인은 헤즈볼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파라는 약혼자 신분이기 때문에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는 여전히 헤즈볼라를 지지한다. “죽은 전투원들은 많아요. 제 주위에서 7명이 죽었지요. 그래도 우리의 성지를 지켜야 해요.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극단적 수니파인 탁피리스트(2)가 레바논 시아파를 공격할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전소된 자동차, 산산조각난 유리창, 연기 가득한 도로 한가운데에서 누워 있는 시체···. 2015년 11월 12일 다히예 부르즈 엘바라즈네에서 발생한 자살테러 두 건은 1990년대 레바논 내전이 종결된 이후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렇지만 이번 테러는 주민들에게 레바논에서 헤즈볼라의 지지 기반을 IS조직이 우선적으로 공격한다는 점을 재확인시켜줬다. 2013년부터 베이루트나 베카에서 시아파 이슬람 정당인 헤즈볼라가 통제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십여 차례 넘게 발생했다. 이중에는 알카에다 하부조직이 자행했다고 주장하는 건도 있다. 헤즈볼라가 공식적으로 인근의 시리아군을 군사 지원하기 시작한 2013년 4월부터 보복성 공격이 늘었다.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군을 공격하는 무장 수니파 반군을 빗대어 “시리아 주위에는 그들이 미국, 이스라엘, 탁피리스트 집단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줄 진정한 친구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이란과 함께 펼치는 대(對) 이스라엘 ‘저항’의 한 축으로 여기는 시리아 정권을 지지할 것임을 재천명했다. 며칠 뒤 헤즈볼라는 레바논과 국경을 접한 시리아 서부 지역이자 반군이 점령한 쿠세이르에서 일어난 전투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시리아 정부군이 대패하고 있던 참에 헤즈볼라가 개입하자 전세가 크게 역전됐다. 헤즈볼라의 지원 덕분에 쿠세이르 지역은 한 달이 채 못 돼 수복됐다. 도망치고, 갈증을 호소하고, 먹을 게 없어 생감자를 먹는 반군 전투원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는 반군의 첫 패배가 얼마나 혹독한지 보여준다. 
‘아랍 세계와 무슬림 연구소’에서 헤즈볼라에 대해 연구하는 키아라 칼라브레세는 “반(反)아사드 시위 초반에는 헤즈볼라 당원들은 이 시위가 자신들과 직접 관련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2012년 알레포에서 발생한 레바논 시아파 순교자 납치 사건, 헤르볼라에 대한 시리아 야당의원들의 적대적인 선언, 디히예 테러 등은 헤즈볼라 내부의 강력한 합의를 끌어냈다. 그는 다마스쿠스 남부에 있는 알리의 딸이자 무함마드의 손녀의 묘를 모신 시아파 성지인 사이다 제이납 회교 사원 테러를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
“헤즈볼라는 우선 일부 반군조직이 위협하거나 파괴한 시아파 성지를 보호할 필요성을 내세워 시리아 내전에 개입했어요. 헤즈볼라의 시리아 내전 개입은 그렇게 다에시 같은 반군조직에 맞서 진정한 이슬람을 지키기 위한 성스러운 임무가 됐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규모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헤즈볼라 당원 중에서 불만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2013년 당시 시리아에 아들을 보낸 전투원 출신의 알리 M.은 헤즈볼라의 시리아 내전 개입에 대해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은 늘 지지해 왔다. 하지만 시리아 내전이 그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 2014년 IS조직이 이라크 모술을 정복하고 칼리프 국가를 선언하자 이런 소소한 불평은 자취를 감췄다. 헤즈볼라는 시리아 정부가 정권을 계속 잡고 있도록 도와야 자신의 조직도 유지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2013년부터 시리아전에 참전한 아흐마드 B.는 접경지대 진지전에 신물이 나 전투를 그만두길 원했다. 그렇지만 IS조직의 폭력성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IS조직이 레바논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시리아에서 테러리즘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란과 러시아를 적극 지지한다면서 (그의 생각으로는) 이들이 터키, 걸프만 연안 국가, 미국, 이스라엘이 사주하는 ‘테러’와 투쟁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평했다. “헤즈볼라는 IS조직과 이스라엘 간 관계를 밝혀냈고 이는 2015년 1월 골란고원에 대한 공습으로 명백해졌다.(3) IS조직과 투쟁하는 이들을 공격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공공의 적으로 부상했다”고 칼라브레세는 나름대로 분석했다.
시아파 공동체는 전반적으로 헤즈볼라의 시리아 내전 개입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헤즈볼라에 비판적이라고 알려진 로크만 슬림이 설립한 하이야 비나 단체가 2015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78.7%의 시아파가 여기에 찬성한다고 한다. 이번 전쟁으로 인한 ‘순교자’가 1,500명에 이른다는 점도 헤즈볼라에 가입하려는 사람들의 물결을 막지는 못했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는 청년들이 줄을 이었다. 레바논 남부에서 일하는 문화부 관계자는 지지리도 가난한 헤즈볼라의 지지 기반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재하기 때문에 그 대의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히예 초입의 케니세 마르 미카엘 구역의 후세인 M.은 “헤즈볼라가 이념전도 펼치고 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아이들이 헤즈볼라 스카우트 캠프에 참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이 16살이 되면 전쟁의 맛을 알게 만든다”고 우려를 표했다. 헤즈볼라 가입은 당장 먹고살 수단을 마련했다는 의미도 된다. “헤즈볼라는 무력전을 펴지만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들도 고용한다. 기자나 엔니지어처럼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며 “아이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나중에 고용한다”고 시리아에서 친구 두 명을 잃은 그는 설명했다.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헤즈볼라가 당원에게 지급하는 월급과 지원금을 감축했지만 최소급여가 410유로에, 지하경제가 국민생산의 30%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이곳은 여전히 매력적인 일자리이다. 
헤즈볼라는 2006년 여름 ‘33일 전쟁’을 겪은 이래로 시아파 교도만이 아니라 의지가 있는 모든 이들을 모집해 이스라엘과 연합국에게 저항하는 정책을 통해 정당성을 쌓아왔다. IS조직이 등장하자 헤즈볼라는 이 정책을 강화해 없어서는 안 될 조직으로 자리매김했다. 헤즈볼라는 지하디스트에게 맞서서 레바논 국경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수호자로 나섰다. 2014년 10월 알카에다 연계단체인 알노스라 전선이 바알베크 남부 브리탈에 있는 외진 군초소 중 한 곳을 공격했을 때 비로소 국경의 어떤 구역은 군이 아니라 헤즈볼라가 통제한다는 점이 드러났다. 군이 관리하는 마지막 검문소를 지나 나비 스밧 근처에는 저 먼 진지에 가기 위해 안티레바논 산맥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리는 시아파 전투원들뿐이다. 2013년 6월 아흐마드 알아시르 살라피스트 셰이크가 사이다에서 레바논군에게 공세를 펴면서 헤즈볼라와 군 간 공조를 이미 비난했었다.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장갑차 수대와 전송장비가 고장 났을 때 헤즈볼라가 투입됐다. “명사수들이 우리를 보호했다”고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레바논 특수대 소속 군인인 이마드 K.가 전했다. 한 퇴역 장교도 “어쩌겠냐. 군에는 사람도 장비도 부족하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헤즈볼라의 정치종교적 계획에 동조하는지와 관계없이 시아파가 아닌 레바논 국민 중 일부도 헤즈볼라만이 IS조직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2월 19일 사우디아라비아가 발표한 레바논군 지원프로그램 중단과 30억 달러(27억 유로)에 해당하는 물자 회수 결정은 의미심장하다. 바로 그날 베이루트에서 20km 떨어진 사디야트에서는 헤즈볼라와 연계한 ‘저항여단’인 사라야 알무카와마와 수니파군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수니파 소대는 남쪽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차단했다. 나스랄라가 베이루트와 남부 지지 기반을 연결하기 위해 이 길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항상 역설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명백히 헤즈볼라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고 슬림은 설명했다. 그는 이런 마찰이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알아사드가 명백하게 러시아와 이란의 군사 개입 덕분에 시리아에서 주도권을 되찾은 상황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헤즈볼라의 레바논 지배’를 비난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 중 하나는 레바논이 1월초 이란의 중동 정책을 규탄하고 헤즈볼라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한 아랍국가연맹의 결의안 투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레바논 사업가들을 추방하고 국민들에게 레바논 방문을 금지한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걸프만 연안 5개국은 지난 3월 2일 이 결의안을 채택해, 레바논 정부에 참여해 레바논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시아파 정파인 헤즈볼라에게 압박을 가하려고 했다. 레바논은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정파 간 갈등으로 인해 2014년 5월부터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다. 헤즈볼라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시리아 내전은 레바논에서 헤즈볼라의 입지를 강화시킨 동시에 종파 간 긴장관계도 악화시켰다. 대다수가 시리아 야당에 동조하는 수니파 집단은 자신의 입장을 과격하게 표현하고 나섰다. 강력한 수니파 리더십이 부재하고 일부 정치인의 수니파 과격화 현상을 수단화하는 작태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슬림은 “이런 상황의 시리아에서 헤즈볼라의 위상은 민감한 문제일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며 “상당수가 헤즈볼라에게 적대적인 시리아 난민 150만 명이 레바논에 있는 상황에서 이런 관계 경색은 더욱 위험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지난 12월 미국 의회는 헤즈볼라를 테러‘범죄’조직으로 지정하고 제재조치를 취했다. 이번 결정으로 레바논 은행은 헤즈볼라와 관련이 있는 고객을 거부해야 한다. 슬림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요인이 하나 더 있다며 “이런 압력을 통해 장기적으로 헤즈볼라의 세력이 약해질지는 미지수지만 당장 더욱 날선 증오심이 표출되기에는 충분하다”고 우려했다.  


글·마리 코스트 Marie Kostrz
레바논, 시리아 담당 특파원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인터뷰이들 중 일부는 가명으로 처리했다.
(2) Takfirist; 탁피리즘을 신봉하며 자신의 의견과 신앙을 공유하지 않은 모든 수니파나 시아파 이슬람 신도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수니파.
(3) 2008년 테러로 사망한 헤즈볼라 지도자 중 한 명인 이마드 무흐니에의 아들이 이 공습으로 사망했다.



박스기사

대(對) 이스라엘 항쟁의 명분으로


헤즈볼라(아랍어로 ‘신의 당’이라는 뜻)는 이스라엘군이 1982년 남부 레바논을 침공한 이후에 시아파 공동체 내에서 탄생했다. 1985년에서야 공개 헌장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단체로 자리 잡았다. 헤즈볼라는 이 헌장을 통해 이스라엘 및 미국과 투쟁을 벌이며 ‘저항’의 최전선에 있고자 했다. 정당이자 레바논 내전에 개입한 무장단체인 헤즈볼라는 1979년 왕정을 무너뜨린 이란 이슬람혁명의 정신적인 지도자 호메이니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란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 헤즈볼라의 영적 지도자인 모하마드 후세인 파드랄라는 모두 시아파 고위성직자를 교육하는 이라크 나자프에서 공부했다. 
헤즈볼라는 연대네트워크(학교, 단체, 병원)를 조성해 그때까지 레바논에서 소외됐던 시아파 공동체의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이란에서 자금은 물론 군사적 보호와 물자를 지원받는다. 무장정파로서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점령군과 투쟁하며 시리아 정부와 가까워졌다. 1989년 레바논 내전의 종지부를 찍은 타이프 협정으로 헤즈볼라 내부에 ‘레바논화’ 절차가 시작됐다. 헤즈볼라는 이슬람 국가 건설을 포기하고 1992년 새로운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의 지휘 아래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했다. 다른 민병대들은 무기를 내려놓기로 했지만 헤즈볼라는 군사 조직을 그대로 유지했다.
2005년 2월 14일 베이루트에서 라피크 하리리 레바논 총리가 암살된 사건의 배후로 시리아와 헤즈볼라가 의심을 받게 되면서 헤즈볼라의 세력이 약화됐고 레바논 사회의 종파 간 갈등은 심화됐다. 그렇지만 헤즈볼라는 시아파와 일부 기독교 세력의 지원을 받아 3월 8일 베이루트 거리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모아 아직 건재함을 입증하는데 성공했다. 3월 14일 시리아에 적대적인 수니파, 드루즈파, 기독교 정당도 대규모 집회를 열어 1976년부터 레바논에 주둔해 온 시리아군의 철수를 약속받았다. 양측 간 중재안이 마련돼 헤즈볼라의 당원 두 명이 처음으로 대연립정부에 참가하게 됐다. 이듬해부터 이스라엘의 공세가 재개되면서 헤즈볼라의 정당성은 강화됐다. 적군에게 강력한 반격을 하면서 헤즈볼라는 자신의 독자적인 행동과 무력 사용을 정당화하고 있다.  


글·마리 코스트Marie Kostrz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