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이후 차기 UN 사무총장의 역할

2016-05-30     샤시 타루르

UN헌장 기초자들은 사무총장에 두 가지 역할을 부여했다. 사무총장은 ‘기구의 수석행정직원(Chief administrative officer of the Organization)’인 동시에, 총회 및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에서 위임한 불특정(주로 정치적인) 책무를 독립적으로 수행한다. 각 사무총장은 자신이 ‘행정관’에 가까운지, ‘총장’에 가까운지 보여줘야 한다.
사무총장의 역할은 역설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사무총장은 정부, 특히 안보리 상임이사 5개국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특정 국가에 편파적 입장을 취해선 안 된다. 총장 임명 전에는 관료 또는 외교관으로서 신임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임명 후에는 과거를 잊고 세계의 대변인, 심지어 “속세의 교황”이 돼야 한다. 사무총장은 회원국들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지원해야 하며 그 결정을 실행해야 한다. 또 한편 회원국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어떤 조치를 취할지 제안을 할 권한이 있다. 또한 복잡한 조직을 관리하고 UN 기구들의 수장 역할을 한다. 그러나 회원국들이 부여한 예산 및 규제적 제약 내에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사무총장이 아젠다를 결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결정권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젠다에 대한 집행권은 없다. 비전을 제시할 뿐이며, 그 이행은 회원국의 몫이다. 즉 세계를 움직일 수 있지만 이끌 수는 없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하마슐드 전 사무총장은 “공복으로서 공정하다는 것은 정치적 동정(童貞)이 아니라 정치적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무총장은 UN헌장과 국제법을 충실히 따르는 한, 공정하게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UN 사무총장 선거과정에서, 현재 진행 중인 미국 대선운동과도 같은 요란함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되다 보니 밀실선거로 보일 정도다. 유권자도 제한돼 있다. 안보리의 15개 이사국이 한 명의 사무총장 후보를 결정해 총회에 제출하기 때문에 총회의 193개 회원국 중 대다수가 배제되는 셈이다. 실제로 총회는 항상 안보리 결정의 거수기 역할만 했을 뿐이다. 따라서 사무총장이 되려면 안보리의 마음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현재 안보리에는 상임이사 5개국(미국, 중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UN 내부에서는 “Perm Five” 또는 P-5로 축약)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사무총장직의 지역순환에 대한 암묵적 관례는 어느 정도 공식화됐다. 1971년 이후 유럽,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초임 후 다른 아프리카 출신자로 대체됨), 아시아 출신이 차례로 선출됐다. 따라서 이번에는 유럽 출신이 유력하다. 유럽 중에서도 아직까지 사무총장을 배출한 적이 없는 동유럽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

문제는 동유럽 출신이되, 러시아나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후보를 선정해야 한다는 것이다(다른 상임이사국이 유럽 출신을 반대할 가능성은 낮음). 모든 동유럽 후보에 대해 거부권이 행사된다면, ‘서유럽 및 기타’ 그룹(1) 중 오세아니아 출신(뉴질랜드 전 총리이자 현 UN사무차장인 헬렌 클라크 등)이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특히 UN에도 여성 사무총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대됨에 따라, 여성 후보가 선출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만일 올해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또는 아시아 출신의, 특히 남성 후보가 선출된다면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사무총장 선출 과정이 전 세계 대중에게 공개될 수 있을까? 필자는 2006년 사무총장 선거의 후보가 되면서(7명의 후보 중 반기문 현 사무총장과 근소한 차이로 2위를 차지함), 전례 없이 많은 공개 활동에 참여했다. 지역 그룹과의 회의, 아프리카통일기구(OAU) 연례총회 연설, 선거분석 홈페이지, 여론조사 및 논설 등이 그 예다. 심지어 BBC 주최 토론회에도 참여했다(당시 반기문 현 사무총장이 불참한 것을 보면, 공개유세의 영향이 미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한국은 반기문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15개 안보리 이사국 모두를 방문했다. 그리고 좋은 조건의 양자 간 협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다른 후보들은 그렇게 할 시간도, 자원도 없었다. 한국은 안보리 이사국 중 개발도상국에 양자 간 개발원조를 약속하는 등 유일하게 1년에 걸쳐 예산을 아끼지 않고 모든 이사국에 조직적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결국 한국 후보가 승리했다. 이는 상임이사국 중 반대하는 국가만 없다면 안보리 대상의 선거운동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결국 사무총장 선거에서의 당선 여부는 후보의 비전이나 자격, 언어능력, 행정능력 또는 개인의 카리스마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사무총장은 정치적 직책이므로, 선출 또한 주로 상임이사 5개국의 정치적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상임이사국이라고 해도 안보리 과반수의 찬성표를 받지 못하는 후보를 선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각 안보리 회원국이 복수의 후보에게 투표할 수 있으므로, 상임이사 5개국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안보리 과반수의 표를 얻지 못하는 경우는 생각하기 어렵다. 
지난 수년 간 사무총장 후보 중 “거부할 이유가 가장 적은” 인물이 선출되는 사례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당선된 사무총장 중에는 배에서 떨어져도 파도조차 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평가된 인물이 많았다. 상임이사국은 총장보다는 행정관에 가까운 인물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무총장에 대한 소셜 미디어, 위성 TV방송 또는 보다 집중적인 언론 보도가 이뤄진다고 해서 이런 근본적 현실이 바뀔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물론 사무총장 후보들이 전 세계적으로 공개유세에 나서는 것은(최근 총회 행사는 온라인으로 공개됨)  과거와는 다른 신선한 모습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도 미국 및 러시아가 수용할 수 있고 나머지 상임이사국이 지지하는 동유럽 후보가 선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후보는 처음부터 치명적인(단, 불치병은 아닌) 핸디캡을 안고 시작하는 셈이다. 오는 7월경 선거의 윤곽이 드러날 예정이며, 그 결과는 9~10월경 발표될 것이다.
일단 사무총장이 선출된 후, 어떤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 최근에는 상임이사 5개국이 맡은 업무에만 충실한, 조용한 행정가를 원한다는 인식이 확대됐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 이러한 인식을 깨고 자신의 역할을 확대한 사무총장이 있다.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은 냉전 종결과 함께 직책의 ‘영향력(Bully pulpit)’을 전임자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과감하게 개입의 도덕성과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 할 의무를 의제로 삼았다. 또한 회원국들에게 국가의 주권과 국민을 보호할 책임 간 모순을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1998년 2월 사담 후세인이 UN의 핵사찰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이 처음으로 이라크 폭격을 언급했을 때,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은 상임이사국 대다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그다드로 날아갔다. 그리고 위기를 봉합하는데 성공했다. 일시적 성공에 그치긴 했지만, 상임이사국의 의지에 반(反)한 행동을 통해 사무총장직의 더 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무총장이 불편한 질문을 던질 수는 있으나 적절한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1999년 UN 개입에 관한 코피 아난의 역사적인 총회 연설 후, 수많은 싱크탱크의 보고서 및 칼럼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억압받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개입은 단 한 건도 실현되지 않았다. UN을 국제법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사무총장의 성명은 교황의 산아 제한 비난보다도 회원국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 
사무총장은 회원국이 특정 문제에 행동을 취하지 않아 이를 비난하고 싶어도, 그 회원국의 지지가 없다면 다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양한 문제에 대해 각국 정부의 협력을 이끌어내야 하는 상황에서 특정 문제에 대한 갈등으로 차질을 빚을 수 없는 것이다. 아난 전 사무총장은 이에 대해 가나의 옛 속담을 인용했다. “손가락을 상대의 입에 넣은 채로 그의 머리를 때리지 마라.” 
오늘날 단 하나의 슈퍼파워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사무총장은 자신의 청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UN의 생존에 필수적인 관계를 잘 관리해야 한다. 미국의 일부 세력은 UN이 미국에 유용함을 입증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데, 냉전 시대라면 불가능했을 요구다. 이로 인해 사무총장은 미국의 관심사와 회원국 전체의 의견 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사무총장이 미국의 이익으로부터 가장 독립적일 때 미국에 가장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회원국들이 예산을 세부적으로 통제함에 따라, 사무총장의 권한이 약화됐다. 아난 및 그 전임자인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는 대대적인 행정개혁을 시도했으나, 회원국들이 관할하던 부문의 절차 및 규제적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역대 어떤 사무총장도 회원국 정부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누리지는 못했다. UN은 대사관 또는 정보기관을 운영하지 못하며, 이를 시도할 경우 회원국의 반대에 직면할 것이다. 따라서 사무총장의 영향력은 제한된 범위를 넘지 못하며, 회원국 간 물리적(또는 재무적) 경계를 넘나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UN은 무대인 동시에 배우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UN은 회원국들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서로의 차이점과 합의점을 읊는 무대인 동시에, 무대에서 결정된 정책을 수행하는 배우(특히 사무총장, 직원, 기구 및 운영조직)다. 
차기 사무총장은 막대한 외교적 힘을 확보하고 미디어 노출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UN헌장에서 보장하는 것보다 정치적 권한은 축소될 것이다. 차기 여성 사무총장은(모든 징후로 볼 때 ‘여성’총장의 가능성이 높음) 직원 및 예산 관리능력이 뛰어나고 공공외교(및 막후교섭)에 능해야 한다. 또한 비정부기구, 비즈니스 그룹, 언론 등 광범위한 외부 조직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차기 사무총장은 또한 남반구의 갈등으로 얼룩진 빈국에 그들의 이해관계를 최우선시하고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동시에 북반구의 강력한 부국과도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안보리, 특히 상임이사국의 권한과 특권을 인지하면서 총회의 우선과제 및 열정에도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회원국에 정치적으로 가능한 제안을 하고 회원국이 부여한 권한 내에서 임무를 이행해야 한다. 
현재 UN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그 동안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성공을 통해 투자할 가치가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사무총장은 무엇보다 이상적 목적에 대한 비전을 갖고 직책의 잠재력과 한계를 숙지해야 한다. 즉, 사무총장으로서 성공하려면 UN이 나아가야 할 비전을 구상하고 제시하는 동시에 현재의 조직을 관리하고 보호해야 한다. 미래의 UN은 이제까지의 업적에 기반을 두되, 환경 변화에 맞춰 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1945년에 구축된 강력한 기반을 기초로 지난 70년간의 혁신과 성과를 반영하고 외부 세계의 문제를 다루며 발견한 과제를 고려하도록 UN의 혁신을 이루어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이제까지 능력을 입증한 부문에 더욱 집중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할 경우 우선 UN에서 전 세계적 대응책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UN은 평화협정을 감독하고 평화유지활동을 수행하는데 있어 현재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같은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또한 특정 지역에서 정치적 해결책을 개발하고 평화유지 방법을 구축하는 동안 행정·관리를 맡을 주체가 필요할 경우, 국가적 이해관계를 초월해 모두의 이름으로 행동할 수 있는 UN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UN은 평화유지군을 제외하고는 군사적 개입을 이끌지 않을 것이다. 단, 지금과 같이 UN의결기구에서 그러한 개입의 법적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UN은 또한 국제 평화 및 안보에 대한 중대 위협에 맞서고, 평화를 구축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군사적 힘은 국가건설에서 한계가 있다. 탈레랑(2)이 말했듯, 총과 검으로는 많은 일을 할 수는 있어도, 그 위에 앉을 수는 없다. 
국제사회의 갈라진 틈을 UN만큼 효율적, 객관적으로 메울 수 있는 조직은 없을 것이다. 그 틈을 메우지 못했다면, 환경파괴, 전 세계적 전염병 발발, 인권 침해, 테러공격 등 21세기의 많은 문제들이 더욱 확산됐을 것이다. UN은 부국과 강대국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과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장이며 앞으로도 같은 역할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국가들이 크기와 빈부에 관계없이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차이점을 해소하고, 인류애를 통해 공동의 목적을 찾을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해야 한다.
UN이라는 집의 설계에 대해서는 이만 줄이겠다. 옛 속담과 같이, 집이란 단순한 건물 그 이상이다. 21세기 UN이 그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려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욱 중요한 뭔가가 필요하다. 새로운 UN은 창립 정신에 비할 수 있는 21세기의 정신이 필요하다. 새로운 UN은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모두를 안전하게 보호할 지붕이 돼야 한다. 
미래의 UN은 인류의 최대 문제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UN헌장의 주체인 ‘우리, 인류(We, The peoples)’를 위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미래의 UN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 즉 전 인류의 희망으로 UN이 창설됐다는 것을, 그리고 그 희망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새로운 사무총장이 이러한 UN이 되도록 이끌어가야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샤시 타루르 Shashi Tharoor
인도의 외교관,  저술가. 1956년 런던 출생. 미국 터프츠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 이후 UN 난민 고등판무관실을 비롯해, UN의 중요 직책을 거쳤다. 2002년부터 UN 통신 및 공공정보국 사무차장으로 일했고, 2006년에는 UN 사무총장 후보로 인도 정부의 공식 추천을 받아 한국의 반기문과 겨룬 바 있다. 2007년 UN을 떠났으나 인도 정부의 국제관계 자문을 하면서 저명한 국내외 신문과 저널에 기고하고 있다.


번역·권혜숙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서유럽과 기타그룹(Western Europe and Others Group, WEOG)은 UN에서 자주 사용되는 5개 지역 그룹 중 하나로, ‘기타’지역에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터키, 미국 등이 있다. 
(2)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프랑스의 정치가, 외교관,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 보통 ‘탈레랑(Talleyrand)’으로 불린다. 나폴레옹을 정계에 등장시켰고, 외무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영국 주재 대사가 돼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란드로부터 벨기에의 독립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