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국민의 희망은 시뮬라크르적 환상?

2016-05-30     셰르뱅 아마디, 필립 데스캉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페르시아어판 편집인, 기자
 
5월에 개회한 이란의 새 의회 내 강경보수파의 의석수가 예전 같지 않다. ‘다원주의’라고는 하지만, 이번 선거로 사회 변화의 폭이 크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을 지지하는 온건파와 개혁파는 변화와 개방에 대한 희망을 품고, 이슬람 종교로 맺어진 유대보다는 국가적, 민족적 요인으로 단결된 정권을 변화시키려 한다.
 
 
“승리도 굴복도 아니다!” 2016년 2월 10일, 테헤란은 흰색 터번을 중심으로 격앙된 분위기에 휩싸였다.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테헤란의 아자니 대로에서 열린 이슬람 혁명 기념 연례축제 행렬에 참가했다. 이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거리’ 위에서 외치는 구호는, 혁명 기념 행렬보다는 수호성인축제에 가까웠으며 현 정권에 충실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핵 합의(1)를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보여준 셈이었다. 외교적 성공을 거두고, 2월 26일과 4월 29일, 2차에 걸쳐 진행되는 선거를 앞둔 ‘온건파’의 수장 로하니 대통령이 국민들과 함께한 이번 행보는 아주 시기적절했다.  
  
공식 언론의 집계에 따르면, ‘수백만’ 이란인들이 자유 광장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수백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십만 명은 확실히 모였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1989년 유고)와 그 뒤를 이은 알리 하메네이, 두 최고 지도자의 초상화를 앞세운 전통적인 인물 숭배, 그리고 이스라엘과 미국에 적대적인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오만한 서구’에 맞서 동네자치위원회들이 퍼레이드를 지휘했던 20년 전, 혹은 불과 10년 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많은 이들이 가족과 함께 거리에 나왔다. 젊은이들은 삼색 모자를 쓰거나, 축구장에서처럼 볼에 이란 국기를 그렸으며 예외적으로 플래카드와 확성기를 통해, 엄숙한 이슬람 연설을 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이란의 위대함을 칭송했다. 국제사회로의 ‘복귀’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의 축’으로 불리던 이란이 서구 강대국들과 협상을 벌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란의 동맹국인 레바논, 이라크, 시리아나 예멘이 이란과 관련된 지역 분쟁에서 우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돈 내고 드세요. 공짜인 줄 아시는 건 아니겠죠?”
 
40대 여성이 노점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한다. 익힌 무는 맛있었다. 축제 분위기는 계속됐다. 코미디언들의 무대 옆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건물 등반 시범을 앞두고 더 많은 인파가 모여든 사이로 카니발 분장을 한 큰 얼굴이 가로질러 갔다. 민속무용 공연 후에는 혁명수비대의 ‘쇼’가 이어졌다. 지난 1월 12일 걸프만에서 미(美)해병들을 체포하는 장면이었다. 마임과 애국적인 노래들이 이어졌다. 더 나아가니 증권거래소와 민영화본부의 전시장도 있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계속 울려댔다. 드문드문 보이는 외국인들에게는 환영인사와 함께, “같이 사진 찍자”는 요청이 밀려들었다. 멀리 차도를 향하는 미사일이 보였다. 바로 앞에는 젊은 동성애자 3명이 거리낌 없이 행렬 가운데로 향하고 있었다.(2)  치안유지군은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광장 입구에는 (민간) 로켓과 (군사용) 드론이 놓여 있었다. 서양식 옷차림의 30대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와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는, 단결된 모습을 외부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로 상황을 요약해준다. 
 
“선택은, 최악과 차악 중에 고르는 것 뿐“
“이슬람혁명 기념 거리 행렬에 참여하는 사람은 1백만 명이지만,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은 5천만 명이나 됩니다!”
 
나심과 사지다 L. 부부(3)는 혁명 기념 축제를 혐오한다. 세속 좌파 옹호자인 이 부부는 1979년 팔레비 왕조 타도에 적극 참여했었다. 1983~1990년에는 이란 이슬람공화국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나심 L.은 포도주 두 잔을 마시며(금주법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포도주를 빚는다), 선거를 앞둔 좌파 운동가들의 딜레마를 고백한다. “저는 지속가능한 발전과 사회 정의를 결합한, 일종의 에코 사회주의를 지지해요. 하지만 현재는 우리 진보주의자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최고지도자의 권한을 축소하려 하는, 덜 보수적인 후보들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 최선입니다.”
 
“일부 개혁파 후보들이 더 자유로운 방안들을 내놓고 있고, 후보들의 공약 간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잠시 숨을 고르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지고, 노조 및 단체들을 재조직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현 정권이 중요한 대중적 기반을 잃은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녹색운동’(4)도 정권의 탄압으로, 그리고 중산층의 지지밖에 없었기 때문에 급속히 세력을 잃는 것을 보았습니다. 젊은 세대는 새로운 개혁을 이룰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2009년 이후,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점을 개혁파가 이해한 듯합니다.”
 
사지다 L. 부인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2013년 선출된 로하니 대통령의 ‘포괄적’ 접근방식에 희망을 품고 있다.
 
“비싼 암치료제가 필요한 친구가 있습니다. 만약 이 친구가 완쾌된다면,  수입을 쉽게 만들고 건강보험 혜택을 늘린 로하니 대통령 덕분입니다. 우리는  교수들의 항의 시위 이후 그들의 상황이 나아진 것을 보았습니다.”
 
비판적 견해를 표명하면 당국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는 나라에서, 진보주의 운동가들은 사람들이 거의 다루지 않는 이란의 여러 측면을 조명한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변화를 흉내내는 것들(시뮬라크르)을 찾는 데 있어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비공식 만남을 포함해 투표 전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상당수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선택이 있다면, 최악과 차악 중에 고르는 것뿐이다.”
 
푸야 T.는 생애 처음으로 (나쁜 후보들에게 투표하는 아들과 함께) 투표소에 갈 생각이다. 하지만 차마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지는 못할 것 같다.
“강경보수파, 온건파, 개혁파, 말만 다르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80년대에 권력을 잡고 이미 나쁜 짓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정권의 탄압을 겪은 좌파들은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1988년 교도소 대학살을 잊지 못한다.(5) 현재 이란의 최고지도자는 당시 대통령이었다. 2009년 대선 때 개혁파 후보였던 미르 호세인 무사비는 1988년 당시 총리였고, 알리 하셰미 라프산자니는 당시 군 최고사령관이었다. 라프산자니는 대통령직(1987~1997)에 오르면서부터 자유기업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 ‘이슬람의 세계 혁명’ 이데올로기가 고갈되면서, 엘리트들 간에는 허가받은 대다수 출간물이 잘 보여주듯, 신자유주의가 퍼져나갔다. 82세의 고령과 엄청난 재산, 아들을 감옥으로 보낸 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라프산자니는 여전히 이란 정치계의 중심인물이다. 지금은 ‘온건파’로 분류되는 라프산자니는 로하니 대통령과 연정을 맺어 모하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1997~2005 재임) 측근인 개혁파의 지지를 얻었다. 
 
불평등 심화, 돈으로 안 되는 것은 없다
1970년대에 출생한, ‘불타버린 세대’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푸야 T.는 애정과 비웃음이 뒤섞인 시선으로 이란과 테헤란의 모순을 관찰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도시 모형을 본따 만든 테헤란은 1천3백만여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다. 그러나 이곳은 항상 혼잡한 수백만 킬로미터의 고속도로로 인해 흉물단지가 돼버렸다. 극심한 환경오염이 아름다운 산들의 풍경을 덮어버린 것이다. 푸야 T.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예금으로 수익을 올리는 중앙은행의 재원으로 건설된 고층건물들을 조사 중이다. 금융공공기관의 방만한 운영 결과,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국내 은행 부문은 비대해졌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은 급등했고(2015년 15% 내외), 끝내 부동산 거품이 터져버렸다. 지하경제가 번성하고, 재산세나 금융소득세 탈세로 인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아파트 가격이 그 실례다. 도시 북부에서는 제곱미터 당 약 7천 유로에 달하는 아파트가, 사막이 가까운 남부의 경우에는 수백 유로에 불과하다. 
 
대학입학도, 군 복무 면제도 돈만 있으면 다 가능하다. 4,500유로면 입학시험에서 떨어져도, 입학가능자격을 얻어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18개월의 군복무를 면제받으려면 대학입학자격 취득자는 3,500유로, 의사는 8,500유로만 내면 된다.(6) 또한 대부가 편리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한때 금지되었던 고리대금업이 2000년대에 들어서는 ‘할인 수익’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됐다.(7) 
 
정치적으로 전투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단체(협회)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타미 전 대통령 재임 시기에 수많은 비정부기구(NGO)가 출현했다.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제6대 대통령의 재임 기간(2005~2013)이 가장 힘든 시기였던 NGO는 오늘날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자드 G.라는 이름의 여성은 극빈층이 거주하는 남부 지역에 세워진 한 센터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곳은 바느질, 예산이나 가계 관리운영을 배울 수 있는 공제(共濟) 센터다. 한 상담그룹이 거리낌 없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들은 심리학자의 인도 하에 부부 문제, 직장 문제, 가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어떠한 종교적 지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이란인들은 이슬람 제도 기준에 따라 살지만, 이슬람교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다. 가까운 사람들 간에는 신뢰가 다시금 자리 잡았다. 집단 개념의 후퇴가 자아로의 회귀를 불러왔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연대가 회복된 것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가 있다. 테헤란 변두리지역에 위치한 또 다른 단체는 이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아프가니스탄 출신 가정들의 조기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많은 단체들이 마약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제공한다. 우리가 방문한 단체에서는 마약을 끊을 수 있도록, 20여 가구를 감독하는 의료서비스팀과 긴밀히 연결 중이다. 마약중독자와 결혼한 적이 있는, 단체 책임자 파리드 D.는 말했다.
 
“전 지금 제가 아주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의미를 되찾은 거죠. 지난 10년간 마약중독자수가 2배나 늘었습니다. 사회 모든 계층이 이 문제에 노출돼 있어요. 하지만 시골 출신들과 문화적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심각하게 노출돼 있죠. 교육시스템은 어떠한 예방책도 제시하지 않아요.”
 
여기서도 사람들은 종교를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약중독문제에 대처하는 것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지 종교적 의무 때문이 아닙니다.”
테헤란대학교 인류학자, 나세르 파쿠히는 마약중독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란의 대대적인 마약 중독 현상은 소련연방 시절 알콜 중독에 비견할 만합니다. 흥분제든 진정제든 약물은 걱정에서 벗어나게 하고, 결국 자기 상황을 받아들이게 만들죠.”
 
매년 약 3천만 명이 마약이나 항정신성 약물로 사망한다.(8) UN경제사회이사회의 이란 대표에 의하면, 이란에서 압류되는 아편은 전 세계 압류량의 74%에 달하며 헤로인과 모르핀은 25%라고 한다.(9) 양귀비 주요 생산국인 아프가니스탄 인근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접경지역은 양귀비 수입과 운송에 큰 역할을 한다. 게다가, 이란은 메타암페타민의 화학구조를 변형시킨 ‘크리스탈’ 등의 화학마약 제조국으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란 정부에게 있어 마약거래단속은 가혹한 탄압을 정당화하는 구실이다. 2015년 사형이 집행된 죄수 977명의 대부분이 마약사범이다. 이는 1989년 이래 최고치에 해당하는 수치였고,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수천 명의 수감자 중 일부는 체포 당시 미성년자였다.(10)   
 
은퇴한 전직 배관기술자, 시리우스 F.는 테헤란 남부지역에서 주민자치회를 이끌고 있다. 그는 사회적 타락 현상과 그 결과를 관찰하고 있다.
 
“노동자였던 이곳 주민들은 먼저 산업부문에서 대량 해고당했습니다. 그 다음, 부동산 거품이 빠지면서 건설부문에서 해고됐지요. 여기에 대학을 갓 졸업한 ‘고학력 실업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피자 배달을 하거나, 기약 없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기다립니다. 특히 공원에서의 마약판매 등 암거래, 지하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석유 근로자, 교사, 간호사들의 시위, 임금인상 요구 운동이 등장한 것을 유일한 긍정적인 신호로 본다. 그러나 여전히 ‘최악과 차악’ 중에 선택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시위 투쟁가들의 의견 합치는 어렵다.
 
서민층으로, 1970년대 유명했던 노조운동가의 미망인이면서 오랫동안 테헤란의 중요 부문 책임자로 일해 온 조레 V. 여사는 다른 각도로 말하며, 한발 물러나는 태도를 보였다.
 
“30년 전, 저는 가족 중에 글을 알았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제 아이들이나 조카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합니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출산율은 1/3로 감소했어요. 모든 사람에게 여행이 가능해졌고요. 우리는 소비자의 자유선택에 우선권이 주어진 것, 시민의식과 평등한 시각의 부재를 비판할 수 있어요.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은 개선됐고, 사람들에게는 의사표현의 자유가 조금씩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전 진보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이슬람혁명의 성과에 대한 논쟁이 거세다. 혁명 이후 보건, 교육이나 주택 부문에서 얻은 사회적 성과가 잃은 것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간 많은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지다 L.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호메이니가 경멸의 대상일지라도, 그는 역사 속에서 평가될 것입니다.”
 
특히 미국과 사담 후세인에게 대항한 점에서 호메이니는 재평가될 것이라는 얘기다.(11)
 
테헤란 북부 상류층 동네를 보자. 자녀를 외국으로 유학 보내거나 미국에서 장기간 체류하는 상류층의 파티에서 이란의 전통음식들이 보드카나 위스키와 함께 나온다. 파티에 참석한 기업 총수들은 경제개방을 열렬히 기다려왔다. 그들은 로하니 대통령의 ‘통찰력’, ‘최고지도자가 이끄는 국가기구와 능숙하게 조율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친(親)서방적인 태도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쟁구도가 문제시되자마자 확신에 차 들먹이는 국가 주권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래도 투표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선거유세 기간은 아주 짧다. 자그로스 산악 지대에서 선거 유세 진행 속도는 투르 드 프랑스(매년 7월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세계 최고 권위의 프랑스 일주 사이클 대회-역주)의 속도와 비슷하다. 이란 헌법수호위원회는 투표 8일전 의원 선거 후보 리스트를 확정한다. 입후보자 1만2천 명 중 절반이 제외된다. 출마를 사퇴하는 입후보자들도 있어서 결국 5천 명의 후보만 남는다. 의석은 290석에 불과하다. 자신을 알리는 시간은 단 1주일. 주민이 몇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에도 선거 유세단을 태운 승합차들이 줄을 잇는다. 선거 포스터로 뒤덮인 차량이 행렬 맨 앞에 서고 이어 다른 차에 탄 후보가 구경 나온 주민들과 악수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차량들이 경음기를 울려대며 그 뒤를 따른다. 기둥이란 기둥에는 모두 선거 벽보가 나붙고, 구멍가게나 노점은 선거유세장이 된다. 사람들은 여기서 차를 마시며 시사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2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그때는 도로도, 전기도 없었다. 고도 2,300m에 위치한 촌락에 가스가 들어온 건 불과 4년 전. 겨울에는 기온이 영하 15도 밑으로 내려가곤 한다. 급작스러운 현대화 물결과 함께, 여전히 유목민 생활을 하는 로르스족 거주 지역에 커다란 변화가 밀려왔다. 천막을 치고 생활하던 고산 방목지에 시멘트 건물이 들어섰다. 이란은 그간 도시화된 국가로 변모했다. 도시 거주 인구는 이란 혁명 이후 거의 3배 가까이 늘었다. 
 
이란 정권은 상황에 적응하며, 금지보다는 포화 상태를 노린다. 미디어 분야를 보면, 이란 국내 채널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송출되는 수많은 채널이 생겨났다.(12) 권력 측근 인사들이 통제하는 이 채널들은 시청자의 이목을 끌며 기분전환을 해주는 오락 프로그램을 주로 방영한다. 정치 분야에 있어서는 제대로 조직구조를 갖춘 정당이 없다. 따라서 TV방송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오락프로그램의 홍수 속에 빠져있다.
 
30개 의석에 1,200명의 후보가 난립하는 테헤란을 보자. 학교나 예배당에 설치되는 투표소에서 유권자는 투표용지에 30개의 이름과 번호를 정확하게 기입해야 한다. 기표소가 없는 상황에서, 1천여 명의 후보명이 알파벳순으로 적힌 공식 후보명단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온건파와 개혁파는 각각 수단껏 후보 명단을 퍼뜨린다. 그리고 투표 전날, 많은 사람들이 거리 곳곳에 급하게 붙여놓은 선거 포스터를 살피며 메모한다. 용의주도한 사람들은 작은 박스를 가져오며 어떤 이들은 전화로, 혹은 이웃에게 자문을 구한다. 우리가 방문했던 단체 대다수가 30명의 의원을 배출한 개혁파, 모하메드 레자 아레프가 이끄는 ‘희망의 명단’(개혁·온건파 연대-역주)에 투표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인터넷 접속 제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명의 이란인들이 이용하는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가 대도시 테헤란 시민들을 한 데 모았다. 인스타그램이나 텔레그램에서 2월 26일 가장 많이 공유된 사진은 붕대를 감은, 잉크 묻은 손가락이다.
 
“그래도 나는 투표한다. 지난번처럼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4월 29일 치러질 2차 투표로 의회 구성원이 확정될 것이다. 몇몇 온건파 후보들은 이미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아야톨라 모하메드 야즈디 국가지도자운영회의 의장 등 초강경파 인사들은 여럿 떨어졌다. 의회와 동시에 8년 임기의 국가지도자운영회의가 구성되면 중차대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76세의 고령으로 건강이 악화된 최고지도자가 사임 또는 해임되거나 유고시, 새로운 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이라고 해서 어느 진영도 승리를 자신할 수는 없다. 개혁파와 온건파가 같이 나섰지만, 개혁파 대부분은 1차 투표에서 떨어졌다. 이란 정부는 선거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유도했다고 자부할지도 모른다(박스기사 참조). 
 
도시 사람들은 변화를 선택했지만, 빈곤에 시달리는 지방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지금은 온건파로 나선 많은 후보들이, 예전에는 오랜 기간 보수파로 여겨졌었다. 게다가 국가 제도가 외교, 정치, 경제 분야와 관련해 향후 선택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도록 이슬람 율법학자들에게 충분한 권한을 부여했다.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극빈층에 보조금 지급, 무주택자를 위한 ‘백만 채’ 주택 건설 공약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란 혁명수비대가 통제하는 기관을 비롯한 재단의 이익을 위해 주요 공공부문 일부를 민영화했다. 
 
핵 합의가 이란인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시기가 늦어지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둬 공고해진 ‘온건파’의 입장이 단시간에 약화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란이 동결재산 일부를 회수하기 시작했고 석유 수출을 늘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럽 기업들(에어버스, 푸조, 르노, 지멘스 등)과 체결한 프로젝트들이 서방 은행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다시 제동이 걸리고 있다. 서방 은행들은 ‘정의’를 외치는 미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1980년대부터 미국이 홀로 취한 보복조치에는 이번 경제제재 해제가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는 여전히 대이란 보복 조치를 지지 중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은 미국이 핵합의에서 ‘자국의 역할을 완수’할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러나 교역을 장려하기 위한 국제운송 관련 규약 ‘명시’(13)를 약속하던 토마스 섀넌 미 국무부 차관은, “이란이 미국 금융체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황급히 덧붙여야 했다. 
 
외교 뒷거래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미국의 보잉사를 포함, 서방 기업 관계자들은 줄을 이어 이란을 방문하고 있다. 경제 개방으로 경제 봉쇄 상황에서 건설된 생산시설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데, 이 생산시설 덕분에 이란은 석유의존도를 낮출 수 있었다(예산 재원의 약 25%). 페르시아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이스파한 체헬 소툰(40개의 기둥) 궁전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거울들은 “겉모습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사회적 미사여구와 이슬람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숨김의 미학으로 세계에, 고통스러운 현대화에 발맞추어 나가고 있다.  
 
 
 
글·셰르뱅 아마디 Shervin Ahmad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페르시아어판 편집인
 
글·필립 데스캉 Philippe Descamp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조승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이란에서 가능성을 열어주는 협정 Un accord qui ouvre le champ des possibles en Iran’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5년 5월호
(2) 법에 의거해 성정체성 변경은 가능하나, 동성연애는 사형감이다. 동성끼리 포옹만 해도 채찍 형을 받을 수 있다. 반대파 제거 사유로 많이 쓰인다. 
(3) 취재원의 발언 자유를 위해, 기사에 나온 모든 이름은 가명 처리했다.
(4) 2009년에 있었던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선출을 반대하는 반정부 운동  
(5)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파트와는 주로 인민 무자헤딘을 겨냥했다. 인민 무자헤딘의 책임자들은 이라크에서 넘어왔다. 그러나 수많은 세속주의 좌파 투쟁가들도 죽음을 맞았다. Cf. George Robertson, ‘The Massacre of Political Prisoners in Iran, 1988’, Abdorrahman Boroumand Foundation, 런던, 2011.
(6) 지하경제의 비중을 보면 월평균 임금 측정은 어렵지만, 약 300유로 정도다.  
(7) Ramine Motamed-Nejad, ‘화폐와 불평등주의. 이란 화폐 시위의 발생 기원(1979~2013)’, <Revue de la régulation> n° 18, Paris, 2015 가을.
(8) ‘마약에 관한 세계 보고서 Rapport mondial sur les drogues’, 국제연합(UN) 마약범죄사무소 (UNODC), 비엔나, 2014.
(9) UN 경제사회이사회, Geneva-New York, 2015.4.8. 
(10) ‘세계 사형제도 La peine de mort dans le monde’, 2015년 보고서, Amnesty International.
(11) 1980년 9월, 이라크 대통령은 이슬람 혁명으로 힘이 약해졌다고 생각한 이란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8년간의 전쟁으로 1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12) ‘이란 정부, 미디어 통제권 상실. le pouvoir iranien perd la main sur les médias’,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1년 7월호
(13) AFP, 2016.4.5.
 
화해의 길로 나아가는가?
 
2월 26일, 4월 29일, 양일간에 열리는 선거의 향방을 가리는 열쇠 중 하나는 기권표다. 이란 정부는 변화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유권자들을 선동해 2009년 ‘녹색운동’의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1차 투표의 공식 투표율이 62%에 이르지만, 그래도 2012년 투표율에 비하면 조금 낮은 편이다. “내기가 받아들여졌다”고 알리 아하니 프랑스 주재 이란대사는 말한다. “이란은 이 지역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신뢰할만한 국가로 비쳐집니다. 이란 국민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높은 투표참여율로 우리 제도시스템이 견고하다는 점을 입증하며 정치적 성숙함을 보여주었습니다.”유권자들 중에 모하마드 하타미 같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인사도 보인다는 점에서 이란 정부는 자축할 만하다. 인터넷을 통해 온건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개혁성향의 하타미 전임 대통령(1997~2005)은 선거과정에 참여하면서, 현 정치체재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수많은 제한조치의 철폐를 요구했다. 이란 사법당국이 하타미에 대한 언론 보도를 금지했으나, 그는 선거 이후 야즈드를 방문한 로하니 대통령으로부터 의외의 찬사를 받았다. 
 
미르 호세인 무사비, 메흐디 카루비의 참여는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2009년 대선 후보였던 이들은 마흐마디네자드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대선 결과에 이의 제기 후, 혹독한 탄압을 받아온 무사비와 카루비는 추방자의 모습이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선거 전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국민들에게 이란 정치체제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투표에 꼭 참가하라. 그래야 우리나라와 국민들의 안전과 권위가 강화될 것”이라고 대국민 연설을 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소속으로 뽑힌 많은 당선자들에 의해 강화된 개혁-온건 연대가 지속적인 화해무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하니는 그 한계를 긋는다. “로하니 대통령이 개방정책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목표 실현을 위해 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자유재량을 누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의회 내 다른 세력들과 공조해야 합니다. 정부가 정책을 어려움 없이 이끌어나가기 위해서지요. 그는 또한 우리 사회의 종교적, 문화적 또는 사회적 가치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모하마드 알리 자파리 혁명수비대 장군은 핵 합의 이후 ‘새로운 서구의 물결’과 ‘의도치 않게 반혁명의 길을 따르는’ 이들을 비난하며 국가 내부의 화합과 화해의 시대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로하니 대통령은 ‘온건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급진 사상’을 비판하면서 간접적으로 이에 답변했다. “우리는 자급자족을 위한 방안을 강구하면서 세계와 소통해야 합니다.”(1)
 
무사비와 카루비는 가택연금 상태이나 공식적으로 부과된 처벌은 없다. 개혁-온건파의 득세에 힘을 얻은 카루비는 1차투표와 2차투표 사이에 로하니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2) 2009년 대선 때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재판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카루비는 로하니 대통령이 그의 명예 회복을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 같은 시도는 초강경파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킬 것이다.   
 

 

(1) AFP, 2016.4.7
(2) Reuters, 2016.4.10.
입헌 석학제(Constitutional mollarchy) 
 
1980년 12월 3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 의해 채택되고, 1989년 7월 28일 개정된 이란 헌법은 이중 합법성에 기반을 둔 정권을 창출한다. 이중 합법성의 하나는 Velayat-e-faqih (이슬람법 해석의 수장인 지도자의 감독 체제), 다른 하나는 ‘국민의 소리’다. 행정기구(대통령)와 입법기구(의회)는 보통선거로 선출된다. 그러나 핵심 직위를 이슬람 율법학자에게만 배정함으로써, 이들이 다양한 통제 메커니즘을 통해 공적인 생활의 방향을 이끌어나가도록 한다. 성직자 6인, 율법학자 6인으로 구성된 헌법수호위원회는 이렇게 이슬람법이 헌법이나 이슬람 신자들에게 맞는지 검증하고 주요 선거의 입후보자들을 걸러낸다. 
 
그 중심에 있는 이란 혁명의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는 1989년 국가지도자운영회의(Assembly of Experts)에 의해 선출됐다. 종교적 권위의 상징이자 진정한 국가수반인 하메네이는 이슬람법에 가장 박식한 학자들 가운데 뽑힌 것이다. 최고지도자의 특권은 일반적인 대통령제나 입헌군주제 국가보다 훨씬 크다. 모든 권력을 감독하고 국민투표를 소집할 수 있으며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불평등한 이두 정치 체제 내에서 국제 협정이나 조약은 공화국 대통령(2013년 6월에 선출된 하산 로하니)이 조인하지만, 대통령의 역할은 오히려 총리의 역할과 비슷하다. 이란 의회(Majlis)는 법안 발의권을 가지고 있고, 장관들의 임명을 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해임할 수도 있다. 헌법상 소수종교에는 의석 5석이 배정된다(조로아스터교, 유대교, 아르메니아 정교, 아시리아 정교, 칼데아 기독교).  
 
자료 출처: 이란 이슬람 공화국 헌법, Alhoda, Teheran,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