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2016-05-30     장뤽 라신 | 파리 인도남아시아연구소 명예소장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누가 상상했을까? 숙적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정상들이 한 달에 2회나 독대할 것을, 그리고 파키스탄이 오랜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거리를 둘 것을 말이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중국, 인도, 아라비아 해로 둘러싸인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여러 변화 가운데 가장 괄목할 만한 사례다.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이지만, 2015년 파키스탄은 역내 역학관계에 참여했다. 중국과 파키스탄 연안지대를 잇는 경제회랑 계획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강화됐다. 아프가니스탄 및 인도와의 관계는, 새로운 지도자들의 등장에 따라 널뛰기를 했다. 새로운 지도자들이라 함은, 2014년 5월 취임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같은 해 9월 취임한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그리고 4개월 후 사우디아라비아 왕위에 오른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을 말한다.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낙담했다. 한편 힌두교 국가주의자가 인도 총리로 취임함에 따라 양국 관계는 긴장됐다. 하지만, 1월 2일 인도 군사기지에 테러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대화에 유리한 분위기가 지속됐다. 오랜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는 새로운 사우디 행정부가 펼치는 역내활동으로 복잡해졌다. 따라서 현재는 파키스탄을 이끄는 이두정치 세력이 신중하게 수를 써야 하는 시점이다. 이두정치 세력이란, 1990년 초선 당선된 이후 2013년 3선 재임에 성공한(1) 나와즈 샤리프 총리, 그리고 군 수장으로서 파키스탄의 역내외교와 전략정책에 비토권을 지닌 라헬 샤리프 참모총장을 말한다(두 사람의 성이 같은 ‘샤리프’인 것은 우연이다).
내부적 갈등은 두 사람의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난 2014년 12월 파키스탄 탈레반(TTP)이 페슈와르 육군부속고등학교에 침입해 청소년 132명을 포함, 총 141명을 집단학살했다. 이후 탈레반 세력과의 투쟁은 1차 과제가 됐다. 이는 여전히 승리한 싸움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적 차원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에서
 
2015년 4월, 파키스탄은 예멘 침공을 위한 사우디의 병력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는 파키스탄의 경제나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종교학교) 그리고 아마도 핵무장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던 사우디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는 결과를 낳았다. 이란이 군사핵프로그램에 가담했다고 비난받던 당시, 파키스탄은 사실상 사우디를 노하우와 군수품을 제공받을 유일한 공급원으로 간주했다. 게다가 파키스탄인 수백만 명이 사우디아라비아와 페르시아 만에서 일하고 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샤리프 총리 자신이 사우디 왕가에 많은 빚을 지고 있기도 하다. 군사정부를 이끈 페르베즈 무샤라프 전 대통령(1999~2008)이 감옥에서 샤리프 총리를 빼내자, 사우디 왕가가 그를 2000~2007년 망명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총리가 국회의 부정적 여론을 방패로 삼기는 했지만, 군과 정부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야말로 병력지원 거부에 동기를 부여한 셈이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파키스탄군 재단들은 군전역자들 가운데서 용병을 모집했다. 그리고 수니파 왕가가 대다수 시아파의 저항을 압제로 다스리는 바레인에 구조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나 예멘에서 세력확대 중인 후티족 반군에 대항해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과 그 동맹세력이 벌이는 대규모 군사작전에 참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후티족의 자이드파(2)내 시아파는 이란의 시아파와 구별되며, 이 자이드파 무슬림들은 예멘의 혼란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사우디는 이 움직임의 이면에 이란이 있다고 비난한다. 이러한 움직임이 한편으로는 사우디와 수니파 아랍토후국들 사이에, 다른 한편으로는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에게 보호받는 대상들과 시아파 이란 사이에 또 다른 대립을 만들어낸다고 말이다. 
사우디에 ‘초청된’ 두 샤리프, 즉 파키스탄 총리와 참모총장은 “사우디 왕국의 영토적 통합을 유지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2016년 1월 7일 사우디 국방부 장관 무하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제2왕세자가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방문했을 때도 반복됐다.(3)
그러나 이들은 자국군이 이미 파키스탄 탈레반 세력과의 싸움에 전 병력을 쏟아 부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게다가 이미 시아파 소수민족이 수니파 무장단체 라쉬카르-에-장비의 공격을 받은 상황에서 내부 갈등을 격화시킬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또한 파키스탄은 2010년에 시작돼 여전히 미완 상태인 이란-파키스탄 간 가스관 건설사업 재개를 비롯해, 이란 핵문제에 관해 미국과 이란이 체결한 조약으로 생겨날 가능성들도 놓칠 생각이 없다. 중국의 재정 원조를 받는 파키스탄 과다르 항의 대항마인 이란의 차바하르 항을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재정지원을 담당하는 인도가 개발하려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차바하르 항은 내륙국인 아프가니스탄이 파키스탄의 해상 독점권을 타파하고, 인도가 이란을 거쳐 가스자원이 풍부한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에 접근하게 해줄 것이다.
2015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가 34개 시아파 국가로 구성된 ‘대 테러리즘 군사동맹’의 창설을 발표했을 때, 그리고 논의된 바도 없이 자국이 자동으로 동맹에 편성돼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파키스탄의 당혹감은 한층 커졌다. 지난 1월 초, 사우디 반체제인사인 시아파 종교지도자 니므르 알 니므르의 처형으로 촉발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의 위기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2016년 1월 7일, 이슬라마바드를 방문한 사우디 외무부장관 아델 알 주베르는 파키스탄의 지원을 공식적으로 약속받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파키스탄 정부는 대화를 권장하며, ‘무슬림들을 분열시킬 만한’(4)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자국 국회에 분명히 하고 있다. IS의 위협이 아프가니스탄, 심지어는 파키스탄까지 확장된 상황에서, 자국이나 이웃 국가에서 이미 마주해야 하는 문제들에 지역적 혼란이 더해지길 원치 않는 것이다. 나와즈 샤리프 총리와 라헬 샤리프 참모총장은 1월 18일과 19일에 리야드를, 이후 테헤란을 방문해 사우디와 이란 간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별 소득은 얻지 못했다.
 
전략 패러다임 속의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2014년 9월,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파키스탄의 술수와 자국 내 미국 전략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임기를 마쳤다. 이제 나토군 병력은 대부분 철수했는데, 2015년 1월 이후로는 미국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십만여 명의 병사, 교육관, 특수부대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에 카르자이 대통령의 뒤를 이은 가니 대통령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파키스탄이라는 패를 쓰기로 결심했다. 지난 몇 달간 대(對) 파키스탄 탈레반 작전을 공조하기 위한 민간 및 군고위인사급 방문이 늘어났다. 이제 이 파키스탄 탈레반 세력들은 아프가니스탄 내 은신처들을 갖추고 있다. 고의는 아닌 듯하지만, 이 은신처들은 2001년 이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세력들에게 제공된 파키스탄 내 은신처와 꼭 닮은 꼴이다. 그 대가로 가니 대통령은 파키스탄 탈레반 세력들이 대화에 나서도록 파키스탄 정부가 촉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화해 행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거센 비난의 대상이 됐다. 특히 2015년 5월, 파키스탄 정보부(ISI) 측에 정보 일부를 위임하는 형식으로 ISI와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국(NDS) 간의 협력계획이 발표됐을 때 비난의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계획은 무산됐고, 이에 반대했던 아프가니스탄 안보국장은 몇 달 후 사퇴를 종용받았다. 한편 NDS는 2013년 초에 발생한, 탈레반의 전설적인 에미르(이슬람통치자)이자 물라(영적지도자)인 무하메드 오마르의 사망소식을 폭로했다. 이 소식은 탈레반 2인자이자 오마르의 후계자인 물라 아크타르 만수르를 약화시켰다. 만수르는 파키스탄 당국과 미국, 중국 참관인들의 비호 아래, 2014년 7월 탈레반 밀사들과 아프가니스탄 대표자들 간의 첫 번째 공식회담을 허용했던 인물이다. 이 소식이 알려진 이후, 탈레반 세력 내부의 위기는 심화됐고 대화절차는 중단됐다. 
그러나 2011년에 시작된 대규모 지역 연례 포럼인 ‘하트 오브 아시아-이스탄불 프로세스’(5) 국제회의가 2015년 12월 중순 이슬라마바드에서 개최됐다. 이는 아프간과 파키스탄 간의 갈등을 줄이는 데 일조했다. 양국 간의 갈등은 2015년 9월 탈레반이 아프간의 쿤두즈 시를 일시 점거했을 때, 파키스탄 당국이 탈레반 세력과 일부 연관돼 있다고 아프간 국방장관이 비난하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6)
2014년 가을 이후 라헬 샤리프 참모총장은 12월 27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다섯 번째로 방문했다. 이는 아프간과의 대화를 다시금 국가의제로 되돌리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2016년 1월 12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미국, 중국 대표자들은 이슬라마바드에 다시금 모여 아프가니스탄과 아프간 탈레반 세력 간의 접촉 재개 과정을 결정하려 했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은 협상과 사전조건의 원칙을 거부하는 분파들이 공격받길 바라지만, 그에 대해 파키스탄 정부는 주저하는 상황이다. 4개국의 대표자들은 1월 18일 카불에 다시 모였고, 또 다른 회담들이 곧 이어질 예정이다. 그렇지만 소득은 전혀 없다. 향후 협상의 기본원칙들은 물라 만수르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의해 결정됐다. 탈레반 세력 간의 불협화음이 IS에 찬동하는 결과로 이어지진 않더라도, 모든 잠정적 진전을 실패로 돌아가게끔 할 수 있다. 
파키스탄 정부에게 아프간 문제는 인도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는 사안이다. 파키스탄의 전략 패러다임은 숙적인 인도와 존재감이 큰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끼어버리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7) 한편 가니 대통령이 파키스탄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인도로서는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 신임 아프간 대통령이 7개월 후에야 인도를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아프간-파키스탄 관계의 널뛰기 현상은 인도에 행동의 여지를 남겼다. 차바하르 항의 활성화, 오래 기다려왔던 (탈레반 세력과 최전선에서 맞붙게 된 아프간 국군의 약점인) 전투용 헬리콥터의 아프간 공급 결정, 그리고 2012년 12월 모디 인도 총리의 아프간 국회 신본부 낙성식 방문은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한편 파키스탄의 경우, ‘통제선(LOC, Line of Control)’(8)으로 분단된 카슈미르의 상황은 힌두민족주의 성향의 인도국민당(BJP) 출신 모디 총리 취임 이후 더욱 긴장됐다. 
하지만 186명의 사망자와 3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나온 2008년 뭄바이 테러사건 이후,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던 양국 간 대화가 재개되기 시작한다. 작년 12월 6일 방콕의 소박한 회담 자리에서는 양국 안보보좌관들이 테러리즘, 카슈미르 등 포괄적 토론을 재개했다. 이러한 정체 상황의 타개는 지금껏 테러 문제만을 선결과제로 삼아왔던 인도, 그리고 이제 군 부대를 승선시킨 파키스탄(파키스탄의 새로운 안보보좌관인 나세르 칸 잔주아 장군은 파키스탄 군 수장의 최측근이다), 두 나라가 모두 변화한 것에 힘입은 결과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협약 당사국총회(COP21) 참석 차, 외관상으로는 우연히 이루어진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와 모디 인도 총리의 만남, 그리고 12월 25일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이루어진 인도 총리의 ‘즉흥적인’ 파키스탄 총리 관저 방문은 긍정적인 신호였다. 만모한 싱 전 인도 총리는 10년이라는 재임기간(2004~2014) 동안 이웃국가를 방문할 필요성에 대해, 주변을 설득하는 법을 모르는 인물이었다. 
한편 우려했던 대로, 2016년 1월 2일 파키스탄에서 가까운 파탄코트의 인도 공군기지에서 발생한 테러는 이렇게 시작된 대화에 제동을 걸었다.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인도 조사관들이 제공한 정보를 이용해 테러집단들을 무력화하겠다는 의지를 인도 정부에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실제로, 인도 측의 혐의를 받은 무장단체 자이쉬 에 무함마드의 조직원들이 체포됐다. 하지만 이처럼 단순한 선의의 제스처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1월 중순으로 예정됐던 양국 외무부장관 간 회담이 연기됐다. 하지만 대화를 재개한다는 원칙만큼은 고수하고 있다. 모든 고위급 회담의 가능성을 수포로 되돌리겠다는 파탄코트 테러사건의 목적을 좌절시키고자, 인도 정부는 이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 놀라운 절제력을 드러내보였다. 
 
중국과 연결성의 논리
 
1970년대 이후로 서로 ‘형제의 나라’로 여겨온 중국 인민공화국과 파키스탄 이슬람공화국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인도에 맞서 평형추 역할을 하는 만큼, 이 관계의 일차적 논리는 무엇보다도 전략상 논리였다. 파키스탄 핵개발에 대한 중국의 원조, 그리고 양국이 공동 개발한 (중국에서는 FC-1 샤오룽이라 이름붙인) JF-17 선더 경전투기를 비롯해 방위산업 분야의 협력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의 추진력 아래, 중국의 지정학적 영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정학적‧경제학적 영역과 불가분의 관계로 보인다. 인도와 중국 간에는 언제나 영유권 분쟁이 존재했다. 또한 인도는 4만 명의 산악 전담부대를 신설하고 역내 인프라를 개선함으로써 세력을 강화 중이다. 그럼에도 양국 간의 대화는 계속된다. 양국 지도자들은 서로 상대국을 방문하며, 중국-인도 간 교역규모(2014년 650억 달러)는 중국-파키스탄 간 교역규모의 7배에 달한다.
‘신 실크로드’ 프로젝트 차원에서 2015년 4월 이슬라마바드를 방문한 시진핑 주석은 무샤라프 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추진된 프로젝트인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CPEC)’의 실행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이는 신장 자치구(중국 서부)에서 파키스탄 과다르 항을 연결하는 다양한 도로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다. 자금조달 예상 규모는 460억 달러에 육박하며, 여기에는 여러 건의 산업 및 에너지 프로젝트도 포함된다. 파키스탄 경제에 있어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Manna)’인 셈이다. 그러나 건설현장 및 중국 노동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급선무다. 또한 중국은 이 경제회랑이 지나가게 될 파키스탄 북부 길기트발티스탄 지역의 지위 정상화가 굉장히 유용하리라고 암시한다. 그렇지만 인도는 히말라야 산악지대에 위치한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게다가 경제회랑 연결도로가 지나가는 아프가니스탄의 광물자원에도 관심이 많다.
이러한 중국-파키스탄 연결성의 논리가 다른 인접국들에게도 확대돼야 할까? 현재로서 파키스탄은 인도에 ‘최혜국’ 지위를 부여하길 한사코 거부해왔다. 2010년에 조인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통상운송조약에 따르면, 아프간 화물차량은 인도를 거쳐 갈 권리가 있지만 반품 운송, 특히 인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의 모든 상업적 운송이 불가능하다.(9) 재계 출신의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인도-파키스탄 관계 정상화에 호의적이며 상공회의소 역시 그러한 태도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이 ‘우선은 카슈미르부터’로 요약되는 전략적 접근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민간 권력은 전진하든 한발 후퇴하든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2016년에 재개될 -혹은 그렇지 않을- 대화의 쟁점이다.
파키스탄의 많은 이들은 이 정책이 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이는 테러리즘을 부추겼음은 물론이거니와, 나라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의 지리적 위치는 주요한 장점이다. 한편으로는 아시아 신흥강국들과 근동, 중앙아시아 사이에 위치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페르시아 만 바로 앞, 히말라야 산맥과 인도양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일례로, 지나 연구소 싱크탱크 회장이자 전 주미 파키스탄 대사 셰리 레만은 “비즈니스, 통상, 경제적 통합이야말로 미래 그 자체이며 관행의 변화를 촉발시켜야만 한다”고 단언한다.(10) 
약간 주저하긴 했지만 군대가 투입됐으며 2014년부터 대폭 강화된 대 테러 및 파키스탄 탈레반 소탕작전은 분명 불가피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정책 변경이 아니라 국가 기조의 변화다. 즉 파키스탄을 남아시아 무슬림들을 위해 건립된 ‘이념적 국가’로 만들었던, 학교와 병영에서 교육되는 공식 교리인 ‘파키스탄 이념’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선출된 권력이 이러한 일에 직면해야 하며, 이는 군 세력 역시 현 상황을 검토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파키스탄군은 인도와의 대화 재개 국면에 들어갔다고, 혹은 적어도 ―늘 불안정한 결과를 속단하는 일 없이― 이를 방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들 말한다. 그럼에도 군 세력은 파키스탄이라는 나라 자체의 본질에 관해, 그 공식적 이념에 관해, 이슬람(어떤 종류의 이슬람인가?)과 정부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에 관해 고찰하길 삼가고 있다. 정치인들 역시 이에 관한 논의의 장을 여는 일을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다.  
 
 
 
글·장뤽 라신 Jean-Luc Racine
EHESS-CNRS 인도남아시아연구소(CEIAS)의 명예소장, 아시아센터의 수석연구원, <전쟁을 무릅쓴 카슈미르>(Cachemire, au péril de la guerre, Autrement, 2002)와 <인도와 아시아>(L’Inde et l’Asie, Editions du CNRS, 2009)의 저자.
 
번역·박나리 
연세대 불문학과 및 국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나와즈 샤리프는 1990년 11월~1993년 7월, 이후 1997년 2월부터 1999년 10월 12일 페르베즈 무샤라프 전 대통령의 쿠데타 이전까지 총리직을 맡았다.  
(2) 자이드파는 예멘과 이란 북서부의 타바리스탄, 카스피 해 남부에서 9세기부터 발달한 시아파의 소수 종파 중 하나다. 주요 거점지는 여전히 예멘이다. 
(3) ‘Pakistan will stand by Saudi Arabia if territorial integrity threatened: PM Nawaz’, The Express Tribune, Karachi, 2016년 1월 10일.
(4) ‘Grave dangers face Muslim world in light of Saudi-Iran standoff: Sartaj’, Dawn, Islamabad, 2016년 1월 5일; ‘A delicate balance’, Dawn, 2016년 1월 6일.
(5) ‘하트 오브 아시아’ 회의의 참가국은 아프가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아랍에미리트(UAE), 인도,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파키스탄, 러시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터키 등이며 본 회의의 의제는 독일, 호주, 캐나다, 이집트, 스페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노르웨이, 폴란드, 영국, 스웨덴, UN, EU, NATO 등의 지지를 받고 있다.
(6) ‘MoD blames ISI for Kunduz assault’, Tolo News, Kaboul, 2015년 10월 1일.
(7) ‘인도-아프간이라는 쌍의 고난(Les tribulation du couple indo-afgha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4년 3월 기사 참조.
(8) 1947년 카슈미르를 통치하던 힌두계 군주에 의해 결정된 카슈미르의 인도 합병 이후, 두 나라는 수차례 대치해왔다. 1949년 이후 카슈미르는 한쪽으로는 (파키스탄 특별령의 두 지역인) 아자드카슈미르와 길기트발티스탄, 다른 한쪽으로는 (인도령인) 잠무카슈미르와 그 외 지역으로 분리돼 있다.
(9) 2014년 두 나라 간의 공식적 교역규모는 26억 달러에 달했다. 두 나라 사이에 놓인 국가들(아랍에미리트공화국, 싱가포르)과의 교역규모까지 고려하면, 실제 가능성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이 수치는 아마도 배로 늘어날 것이다. 
(10) Sherry Rehman, ‘The audacity of hope: Beyond photo-op, Modi and Sharif must move quickly and come up with a peace plan’, The Times of India, Bombay, 2014년 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