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을 거부한 영화감독 라울 루이즈
2016-05-30 기 스카르페타
프랑스 필름보관소는 4~5월 칠레 출신 영화감독 라울 루이즈 회고전을 처음으로 개최한다. 루이즈 감독의 미발표 영화를 포함해 60여 편의 영화가 소개될 예정이고, 그중 상당수 작품들은 회고전을 위해 특별히 복원된 것들이다. 라울 루이즈 감독의 많은 영화들은 영화산업과 영화시장이 강요하는 규범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라울 루이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최근 반세기 동안 가장 독창적인 영화인 중 한명? 어쩌면 가장 많은 영화(40년 간 120편)를 제작한 감독? 오직 자신만의, 극단적 바로크 양식의 영화언어를 만들어낸 인물? 상상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탁월한 크리에이터? 루이스 부뉴엘 감독 이후 이야기 전개에서 절대적 자유를 표현한 감독?
어떤 수식어가 붙건 간에 루이즈가 보여준 질적‧양적 풍요로움은 놀랍다. 지나칠 정도로 많다 싶은 루이즈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되찾은 시간>이나 <리스본의 미스터리> 같은 대작영화나 저예산으로 촬영한 실험영화 또는 언더영화, 그리고 그 중간에 속하는 모든 영화들에 다양하게 걸쳐 있다. 사실 루이즈 감독은 사람들이 그에게 제안하는 그 어떤 계획도 함부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 영화들 속에 늘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나 창작의 자유를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늘 20여 개의 시나리오가 들어 있었고, 10개의 프로젝트를 동시 진행했으며 그중 몇 가지만 실현됐을 뿐이다. 사실 그는 영화를 촬영할 때만 행복했다. 그래서인지 일단 촬영이 끝난 영화들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이 미완성으로 끝나거나 분실되기도 했다. 그는 평생 ‘늘’ 영화를 만들기 위해 행동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생은 어떠했는가? 그는 1941년 칠레에서 태어났다. 아르헨티나에서 다큐 영화 공부를 시작했지만 사람들이 그에게 주입시키려했던 규범에 반기를 들고 곧 다큐에서 멀어졌다. TV 프로그램 편집과 멕시코방송 연속극 작가로 활동하면서 극히 적은 예산으로 첫 영화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루이즈는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칠레를 통치하던 시기(1970-1973)에 사회당(당시 사회당내에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모든 좌파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는 모택동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의 영화 관련 그룹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열광적으로 문화예술 활동을 펼쳤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루이즈는 유럽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곧 파리에 자리를 잡았고 점차 영화를 찍을 수 있게 해 줄 사람들과의 모임을 발견해 나간다. 피에르 클로소프스키의 영향을 받은 놀라운 두 영화 <유예된 사명>과 <도둑맞은 그림에 관한 가설>이 평단과 영화애호가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때부터 2011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삶은 모든 공통의 기준을 벗어나 자신만의 작품과 만나게 된다.
루이즈 감독은 마지막까지 진정한 좌파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투적이고 행동적인 영화의 원칙이나 계율, 즉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모든 것을 희생하지는 않았다. 그가 프랑스에 자리 잡고 얼마 되지 않아 <추방된 자들의 대화> 같은 영화를 제작했을 때 그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던 칠레 사람들은 그 상황을 다루는 루이즈의 아이러니나 무례함을 몹시 비난했다. 그들은 그런 상황이 근엄함이나 ‘파토스’가 느껴지게 감동적으로 다뤄져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1) 루이즈는 1970년대 국립시청각연구소의 주문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는 일부터 1980년대 자크 랑 장관이 창설한 그르노블문화센터, 르아브르 문화센터 같은 기관들과의 협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혼 없이 텔레비전의 주문을 수용하거나, 더 고전적인 시스템 내에 통합되는 과정을 통해 루이즈는 파울로 브랑코 같은 제작자를 알게 됐다. 그 덕택에 많은 재정적‧기술적 수단을 확보해 더 유능한 배우들과 작업할 수 있게 됐으며, 여러 영화축제에 작품을 출품해 더 많이 상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도 루이즈는 자유롭게 도발하고 규범의 절대 권력에 반기 들기를 멈추지 않으며 자신의 예술을 구현해 나갔다. 할리우드 시스템이나 블록버스터 시스템, 그리고 그보다 덜 상투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른바 프랑스 식 ‘작가주의 영화’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 횡포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반기를 들었다.(2)
루이즈는 많은 경우에 이미 만들어진 장르들을 차용했다. 환상 영화(<항해사의 세 왕관>, <해적들의 도시>, <세 번의 삶과 한 번의 죽음>), 뱀파이어 영화(<누신젠 하우스>), 추리영화(<범죄의 계보>), 전기 영화(<클림트>), 기념비적 문학작품(<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되찾은 시간>) 또는 연재소설의 규칙을 따르는 대중소설을 각색한 영화(<리스본의 미스터리>) 등 많은 장르를 차용한 것은, 매번 그 장르의 코드를 넘어서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그 코드 안에 배제된 것을 집어넣기 위해, 그리고 그것들을 절정으로 밀고나가 그 안에 발생론적인 변화를 도입하기 위해서였다. <범죄의 계보>는 미궁에 빠진 문제를 풀기위한 것이지만 관객의 관심을 완전히 다른 문제(감정선이나 무의식적인 도취, 불확실성의 확산)로 옮겨놓는다. <클림트>는 화가 클림트의 생애에서 중요장면들을 재구성하는 동시에, 연대기적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며 빈사상태에 놓인 환자의 망상을 통해 미화된 인물의 단말마의 고통을 전달한다. <리스본의 미스터리>는 자연주의 영화나 환상 영화와는 정반대로, 시간과 공간이 평행하는 다른 세계,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요소들이 충돌하고 중간 중간 비밀들이 삽입되며 한 이야기 속으로 다른 이야기가 개입하는 순전히 루이즈적인 픽션의 세계 안에 연재소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요소들(뜻밖의 반전, 우연의 일치)을 끌어들인다. 이것들은 증식되고 혼란을 일으키며 균형을 잃을 때까지 끝없이 고조시켜 나간다.
어떻게 보면 루이즈에게는 모든 일이 도전과 같다. <클림트>에서는 단면적이고 정적이며, 도상적이고 경직된 특성을 갖는 클림트의 화풍을, 그와 대립되는 피사계심도와 운동-이미지의 세계에 옮겨놓는 데 성공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되찾은 시간>에서 도전은, 사람들이 프루스트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각적으로 옮겨놓는 일, 다시 말해 길고 구불구불한 문장, 사건과 팽창으로 가득 찬 프루스트의 문장을 영화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었다. 경이로울 정도로 불안정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이동촬영과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한 그의 영화는 결과적으로 문학작품의 영화화를 넘어서서 ‘프루스트의 테마에 대한 변주’이자 프루스트적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 움직이는 영상을 스크린 위에 영사하는 장치, 또는 그것을 사용하여 영사하는 장소)를 만들어냈다. “나는 프루스트를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 프루스트를 채택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바로크 영화예술의 정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바로크 예술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비범한 형식적 창의성(치밀하게 계산된 촬영 앵글의 기상천외함, 다양한 중심, 이미지에 담겨 있는 시각적 역설을 강조하는 피사계 심도의 집중적 사용, 카메라 이동의 대담성)이다. 하지만 루이즈에게 있어 발명은 형식뿐 아니라 이야기 구성 그 자체에도 관여한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너무나도 알려지지 않은 <꿈속의 사랑싸움>(루이즈의 모든 영화중에서 단연코 가장 ‘루이즈적인’ 영화이며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감탄스러운 작품 중 하나)은, 이질적인 주제와 모티브들의 정확한 조합을 통해 내러티브의 시퀀스들이 만들어지며 이것들이 서로 충돌하고 중첩되면서 수많은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그 속에서 당황한 관객들은 현기증을 느낀다. 그리고 제약 없는 상상력의 미궁 속에 자신을 내맡기며 엄격한 ‘시스템’을 훌쩍 넘어서게 된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루이즈는 이전의 작품들을 참조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이룩했다. 부뉴엘, 오손 웰스(그 배경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을 느끼게 한다)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의 회화적 엄숙함은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작품들에서 길어왔다고 할 것이다. 그의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이나 <지식의 환상>(3)같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에서처럼, 미궁과도 같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그 이전에 일어난 사건들의 반복이나 투영에 불과한 이야기들도 있다.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의 소설에서처럼 시간성이 함부로 침입하고 충돌하기도 하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에서처럼 일상이 마술적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또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에서처럼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삽입되며 대중적인 이야기 코드들과 게임을 벌이기도 한다.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소설에서처럼 점점 이상야릇함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테라 노스트라>에서처럼 환생이나 유령이 등장하면서 이질적인 시간들이 얽히고 설키기도 한다. 즉, 루이즈의 영화들은 다른 영화들과 경쟁할 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위대한 남미작가들의 작품과 경쟁하는 것이기도 하다.
루이즈는 기꺼이 다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가 어렸을 때 산티아고에서, 주로 미국의 B급 영화들을 24시간 연속상영하는 극장에서 오후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다. 서부영화를 보다말고 잠이 들었는데 깨 보면, 다음 영화, 예를 들면 해적 영화가 시작돼 있다. 그런데 영화는 달랐지만 등장하는 배우는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마치 변신과 같은 이상한 느낌, 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융합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어쩌면 이 일화에서 우리는 루이즈 영화의 원초적 장면, 혹은 루이즈 신화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에서는, 정말 잡다한 시간과 공간이 증식되고 교차하며 상호 침투한다(<눈먼 올빼미>, <꿈속의 사랑싸움> 등). 또한 순환적 모델과 시간의 흐름이 겹쳐지고, 미래가 과거에 의해서 결정될 수도 있다(<범죄의 계보>, <마주 보이는 밤>). 또한 가장 염려스러운 기묘한 요소들이 가장 헝클어지고 가장 우스꽝스러운 기상천외함과 어우러지기도 한다. 단 하나의 삶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살기도 하고, 한 사람이 여러 삶을 살기도 한다(<항해사의 세 왕관>, <세 번의 삶과 한 번의 죽음>). 어떤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일들은 그와 평행한 다른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다른 이야기의 메아리가 될 수도 있다. 각각의 비밀은 또 다른 비밀을 덮는 가면일 뿐이고, 각각의 수수께끼는 또 다른 수수께끼를 은폐할 뿐이다(<리스본의 미스터리>). 그 어느 것도 안정적이지 않고,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현재와 과거, 꿈과 현실 간의 경계는 계속 허물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루이즈와 브뉘엘을 비교하곤 한다. 그들 사이에는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다. 꿈에의 호소, 둘로 나뉘는 서사, 끊임없는 색다름의 추구, 유머와 기묘함의 결합, 합리적 개연성의 즐거운 포기 같은 것들이 그렇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부뉴엘에게 상상력의 자유는 시나리오에만 있을 뿐 그것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는 촬영 자체는 철저히 사전에 계획해둔 대로 진행된다. 그런데 부뉴엘과는 정반대로 루이즈에게는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즉흥성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촬영은 영화가 만들어져감에 따라, 그리고 루이즈의 상상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해져서 어떤 때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유사하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루이즈는 촬영 플로어 가까이에 소파를 가져다 두고 촬영을 중단하고 낮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측근들에 따르면 그런 일이 아주 드문 것도 아니어서, 낮잠에서 깨어나면 그가 조금 전 꾼 꿈을 기록해두었다가 배우들에게 역할을 나누어 주고 애매모호한 텍스트를 재빨리 익히게 한 다음 그 페이스를 잃지 않고 “자기가 꾼 꿈을 영화로 촬영”했다고 한다. 평생에 걸쳐 루이즈의 영화 20여 편에 출연했던 배우 멜빌 푸포는, 루이즈가 촬영하는 시퀀스에 쓰려고 미리 준비했던 오브제(공, 단도 등)를 품에 안고 잠들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그 오브제가 자신의 꿈에 등장할 것이고,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오늘날 관계자 입장에서 루이즈의 영화를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결국 그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이다.(4) 어떤 사람들은 열정적이면서도 느슨한 촬영의 성격을 언급한다. 그런 촬영 분위기에서 배우들은, 루이즈가 그의 독특한 상상력 속에 배우들을 통합시키는 순간조차 각자 최대의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물론, 루이즈가 직접 준비한 풍요로운 식사(루이즈는 그 부분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에 밤늦도록 노랫소리가 흐르는, 전설적인 ‘촬영 뒷풀이’는 말할 필요도 없다.
또 어떤 일화들이 있을까? <세 번의 삶과 한 번의 죽음>의 주연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는 자신이 등장하는 시퀀스의 촬영이 끝난 후에도 며칠씩이나 ‘관객’으로서 촬영장을 지켜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그는 루이즈의 영화 제작 방식에 매혹돼 있었다. 페오도로 아킨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에서 루이즈 감독이 촬영하기 몹시 힘든 장면을 찍고 나서 오후 4시쯤 그날 촬영을 끝내겠다고 했다. 그러자, 기술팀 인원들이 그에게 와서 촬영을 더 하자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들이 조금 전에 경험했던 마술과도 같은 순간을 더 느끼길 원했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그 어떤 촬영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말한 것, 그들은 앞으로도 결코 그것을 볼 수 없으리라.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결국 현대 영화 개관에서 라울 루이즈야말로 지독히도 시대의 흐름을 역행한 크리에이터라 할 수 있다.
글·기 스카르페타 Guy Scarpetta
작가, <마술사 라울 루이즈>(브누아 피터 공저), Les Impressions Nouvelles, 브뤼셀, 2015년)
번역·김계영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2006), <르몽드 세계사3>(2013),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1) 대부분의 칠레 망명자들은 나중에 이 영화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수정했다. 모범적이거나 이상화된 시각보다 웃음이나 아이러니를 통해서 더 많은 진실이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2) 이와 같은 규범의 억압에 대해서는 제라르 모르디야의 뛰어난 기사, “주제! 주제! 주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6년 1월호 참조.
(3) 미셸 푸코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 대해 사용한 표현.
(4) 안 알바로, 페오도르 아킨, 아리엘 동발, 존 말코비치, 자크 피에이예, 멜빌 푸포, 에디트 스콥, 크리스티앙 바딤, 엘자 질버스타인이 <마술사 라울 루이즈>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