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 파리의 우울과 신성한 매춘
'멜랑콜리'로 점철된 인생-자살 시도와 방황
'악의 꽃', 저주의 씨앗이 잉태된 탓
조은섭 <문학평론가>
'파리와 교감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파리의 뒷골목, 작은 광장들, 고궁들, 공원들, 빛바랜 허름한 카펫들이 깔린 카페들을 찾아다니며 파리에 몸을 맡겨 보는 것이다. 파리가 분출하는 질퍽한 삶의 애환을 통해 파리와 친숙해 지는 방법이다. 또 다른 하나는 파리에서 가장 높은 몽마르트 언덕에 올라가 파리를 한눈에 내려다보면 된다. 파리전체를 품을 수 있어 좋다.
헌데 파리와 가장 잘 매치되는 작가와 작품은? 숱한 작가와 작품들이 뒤엉킨다.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어깨에 들추어 메고 장발장이 지나던 음습하고 퀴퀴한 파리의 하수구, 마리우스와 꼬제트가 서로 첫눈에 반해 사랑을 키워가던 룩셈부르크 공원을 꼽을 수 있다. 또, 종지기 꼽추와 가련한 집시의 사랑과 연민, 가톨릭의 횡포, 자유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변주되는 노트르담, 즉「레미제라블」과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de Paris)」의 작가 빅토르 위고, 그리고 라틴구역에 사는 가난한 법대생 라스티냑, 뒤틀린 부성애의 화신 고리오 영감과 두 딸 아나스타지와 델핀이 펼치는 왜곡된 신분상승야망을 질척하게 묘사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들 수도 있다. 그리고, 서정적인 시 <미라보 다리>로 세상의 많은 연인들의 가슴을 후빈 아폴리네르, 「목로주점」으로 파리의 빈민가를 집중 조명한 에밀 졸라, 「파리의 우울」을 노래한 보들레르, 자유계약결혼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세기의 동성애로 구설수에 오른 랭보와 베를렌 등을 우선 빼놓을 수 없다.
이 숱한 예술가들 중에서도 파리와 가장 긴밀한 교감을 나눈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 보들레르다. 그는 파리중심가 생-제르맹과 생-미셸대로 근처 오트푀이유거리에서 예순 두 살의 늙은 전직사제신부 프랑수아 보들레르의 외아들로 태어나서, 파리 16구에 위치한 닥터 듀발이 운영하던 정신요양소에서 생을 마감한 순도 100%의 파리지앵의 전형이다. 그의 시신 또한 < 파리 몽빠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치됐다. 많은 비평가들이 보들레르에게 <저주받은 시인>이란 접두사를 붙이는데, 그의 저주는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꼭「악의 꽃」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여섯 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늘그막에 둔 아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아버지가 사망하고 일 년 반 만에 서른아홉 살 난 젊은 오픽대령과 재혼한 어머니, 그리고 사사건 그의 삶에 끼어들며 간섭하던 의붓아버지와의 갈등, 저주의 씨앗이 배양되기 딱 좋은 환경적 요인들이 생성됐기 때문이다. 훗날 그가 학창시절은 친구와 선생님들과의 잦은 드잡이와 언쟁의 나날이었으며, 1839년 생-루이 고등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혀 퇴학당할 때까지 '멜랑콜리'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한 것도 환경적 요인이 기우가 아님을 확인 시켜준다.
고등학교에서 내쫓긴 보들레르는 개인교습을 통해 무사히 대학입시에 합격, 법대에 진학한다. 그러나 몸 안에 흐르는 시인의 피를 잠재울 순 없었다.
그는 2년도 채 안 돼 학교를 포기한다. 법보다는 시가, 시보다는 젊은 혈기를 자극하고 방기를 부추기는 관능적인 파리에 몸을 맡기는 게 좋았다. 네르발, 발자크 등 문인들과 어울려 해시시를 피우거나 하룻밤을 같이 지셀 수 있는 여성들과 여흥을 즐겼다. 부모가 보내주는 생활비는 호사스런 향락의 늪에 빠진 보들레르에겐 푼돈에 불과했고, 생활고에 항상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가족들이 회의를 소집했다. 보들레르가 방탕한 파리생활을 청산할 수 있도록 그를 한동안 멀리 여행 보내자는데 합의한다. 결국 그는 거의 반강제로 파리와 격리된다.
보들레르는 1841년 6월 인도양에 있는 모리셔스와 레위니옹 섬으로 보내져 9개월 가까이 그곳에 머물어야 했다. 그는 파리에 대한 향수병으로 몸살을 앓는다. 이때 만난 여인이 바로 유명 사진작가 나다르의 전 애인이자, 잠시 연극배우로 활약했던 잔 듀발이다. 그녀는 보들레르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몸을 한껏 이용해 세상물정에 어둔 시인을 농락하고 등골을 휘게 한 동시에 그에게 시상을 제공한 인물이다. 검은 머리카락에 늘씬한 목, 어둡고 삶에 찌든 듯한 큰 눈, 두툼한 입술과 툭 불거진 관능적인 입, 전통적인 미인상과는 거리가 먼 타입인데다 음흉하고, 거짓말쟁이였다.
눈먼 돈이 생긴 시인은 파리에 뿌리며 향락을 샀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호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벨라스케즈나 코레즈등의 대가의 그림들도 구입한다.
그의 생부가 남긴 막대한 유산이 채 2년도 안 돼 반 토막이 나버린다. 어머니는 아들의 방탕생활에 기겁한다. 또 다시 1844년 법적인 조치가 취해진다. 남은 재산을 법적으로 묶어 놓고, 그 이자로 매달 200프랑만 아들이 수령할 수 있게 했다. 2년 만에 천당에서 다시 지옥으로 떨어진 그는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는다. 아니 시인의 길을 걷기 전 채무자들을 피해 파리전역을 떠돌아다닌다. 또한 닥치는 대로 원고청탁에 목매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돈이 된다 싶은 주로 미술비평에 전념하며 생활비를 충당한다. 그 결과 연이어 낸 첫 작품「1845년 살롱」과 「1846년 살롱」도 미술비평서적이었다. 시인이 아닌 비평가로 먼저 등단한 셈이다. 하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오히려 빈털터리에다 빚 때문에 싸구려 거처를 찾아 파리 구석구석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극도로 공황상태에 빠진 시인이 자살을 기도한 시기도 이때다. 공식 확인된 보들레르의 파리 거처만 해도, 테오필 고티에가 파리에 거주하던 에드거 앨런 포, 네르발, 메리메, 발자크, 보들레르, 뮈세 등 쟁쟁한 문인들을 규합해 해시시클럽의 아지트로 삼았던 생-루이 섬에 있는 <로정 호텔>을 비롯해서 사십 군데가 넘는다고 하니 당시 그의 고충이 어땠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빚더미에 깔려 허덕이다 생을 마감한 시인과 파리사이에 얽힌 애증의 관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유산을 탕진하던 시기가 꼭 부정적인 면만 띠는 것은 아니다. 파리를 그 어떤 작가보다 속속들이 잘 파악하는 계기가 된 셈이고, 나름대로 시도 썼기 때문이다. 1857년 발표되는「악의 꽃」에 실린 <알바트로스(L'Albatros) >, <지옥의 돈 주앙(Dom Juan aux enfers)>, 특히 추함과 미, 에로스와 타타노스를 교묘히 조합, 에로티즘과 죽음의 세계를 시니컬하게 그린 <시체(Une charogne)>등이 그 당시에 쓴 것들이다.
댄디족 보들레르에게는 늙은 전직사제신부의 아들로 태어난 사실자체가 우울일 수도 있다. 그리고 1857년에 「악의 꽃」이 발표되고, 공중도덕과 미풍양속을 해친 혐의로 법원에 기소되어 초판 100여 편중 6편의 시-보석/ 망각의 강 / 너무 쾌활한 여인에게 / 레스보스 / 저주받은 여인들 / 흡혈귀의 변신-가 삭제판결을 받자 내재된 그의 지독한 우울증이 폭발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르피가로>는 "추함에 천박함이 아우러진 책이며.......마음과 정신이 나간 모든 사람에게 문을 개방한 병원"이라고 혹평하며 시인을 아예 죽창으로 내리찍었다.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전체가 그를 공공의 적, 저주받은 시인으로 몰아세웠다. 칼날 같은 감수성에다 명석한 두뇌를 지녔지만 심약한 보들레르는 "시에 새로운 전율"을 부여했다고 극찬한 위고를 비롯해 플로베르, 생트뵈브 등의 격려편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숙명과도 같은 파리의 우울을 곱씹어야 했다. 소화불량, 다리와 가슴통증을 달래기 위해 이듬해부터는 에테르, 아편 그리고 해시시와 친숙해진다.
이때 나온 책이 글쓰기의 고통과 해시시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인위적인 천국」이다. 이어 1861년 <우울과 이상> <악의 꽃> <반항> <포도주> <죽음>등 5장으로 되어 있던 「악의 꽃」초판에서 징계를 받은 6편의 시를 삭제한 채 재판을 찍어낸다. 신작시 <파리의 풍경>편 등을 추가해 127편 6장으로 늘린 것이다. 그 배열순서도 <우울과 이상> <파리의 풍경> <포도주> <악의 꽃> <반항> <죽음>으로 바뀌었다. 중요한 것은 초판에서 보이던 희망의 색태조차 그 빛을 잃고 저주와 절망의 가락으로 전체적인 톤을 바꿔놨다는 사실이다.
대체적으로 「악의 꽃」에서 드러나는 보들레르의 시적 자아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다. 파리에 대한 애증을 담은 <파리의 풍경>편에 실린 시들도 그렇다. 대부분의 시에서 이곳이 파리 어디다, 라고 정확하게 장소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시 <백조>에서 단지 루브르박물관과 카루셀 개선문을 거론할 뿐이다. 하지만 신과 사탄, 자연과 초자연, 해학과 아이러니, 삶과 죽음, 미와 추함의 대조된 보들레르가 실제로 겪은 우울한 파리의 풍경이 송두리째 그곳에서 묻어나고 있음을 독자들을 금세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베르나르 델바유가 <보들레르, 파리에 대한 열정>이란 글에서 밝힌 것처럼 보들레르는 파리를 속속히 소유한 극소수의 작가였다. 그가 1860년 출판업자 풀레-말라시(Poulet-Malassis)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파리에 대한 그의 애착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어느 파리산책자에 대한 철학적 몽상과 아름다운 판화들에 대한 열줄, 스무 줄, 혹은 서른 줄의 몽상들을 집필할 기회인 것 같습니다." 텍스트를 동반한 파리풍경을 담은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편지였다. 안타깝게도 서로 이견이 있어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물론 사후에 출간된「파리의 우울」에 대다수 시들이 소개되었지만 파리풍광을 담은 멋진 보들레르의 파리가이드북이 사산된 것은 후세대에겐 엄청난 손실이자 통한의 아쉬움이다. 조석으로 변화무쌍한 파리의 기후, 산책로, 공원, 비좁은 뒷골목, 진흙탕길 등 파리곳곳을 죄 꿰고 있었다.「악의 꽃」재판 '에필로그'에 실을 요량으로 <몽마르트 위에서 본 파리에 바치는 오드>란 미완성 시에는 파리에 대한 그의 애정과 증오 그리고 한탄이 고스란히 배어난다.
난 널 사랑 한다
오, 내 사랑하는 이여
오, 내 매혹적인 여인이여
………………
멜랑콜리 한 변두리거리들
한숨과 음모로 가득한 네 공원들
네 사원에서 음악처럼 토해내는 기도소리들
어린애처럼 구는 너의 절망소리들
늙고 미친 여자처럼 구는 너의 유희들
너의 의기소침들…
요컨대 시성(詩聖) 보들레르가 1866년 "프랑스는 진짜 시에 대해 끔찍해 한다,"라고 소리치며 자신의 우울을 표출한 것만큼이나, 그의 눈에 비친 파리의 모습은 우울하고 가련하다.
필자가「파리의 우울」을 읽다 불현듯 시인 보들레르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단어로 '영혼의 신성한 매춘'을 꼽은 것도 그래서다. 부모, 형제자매, 조국도 부정하는 이방인이 되길 원한 그, 해시시, 포도주, 섹스를 탐닉하며 인위적인 천국을 꿈꾸던 그, 돈, 명예, 권력, 여자 등, 극히 인간적인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그의 삶이 신성한 매춘과 잘 변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의 꽃」서문에서 시인이란 어느 경우에라도 "노래하고, 축복하고 그리고 희생하고, 스스로를 받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명시한 것처럼, 그는 자신을 '영혼의 신성한 매춘'에 받쳤다.「악의 꽃」과「파리의 우울」을 유고집으로 남긴 채, 사십 육세의 짧은 파리지앵의 다면적이고 난해한 삶을 신성과 매춘이 혼재하는 '파리의 우울' 속에 묻은 것이다.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은 시인 사망 뒤(1821-1867), 2년이 지난 1869년에 출간된 유고집이다.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은 1946년 9월 재심을 거쳐, 1949년 5월 23일에야 비로소 명예회복을 하고 판금에서 해제됨.
"나는 부모도 형제자매도 없다(......) 나는 조국이 어느 위도 상에 있는지 모른다.(......)" -<파리의 우울>에 실린 시<이방인(L'Etranger)>중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듀발(Duval)은 그가 사랑했던 혼혈연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아이를 사산한 것으로 미뤄 오픽과의 관계가 보들레르의 생부사망 직후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뒤발은 실제 젊은 기둥서방을 보들레르 몰래 두었음.
훗날 모두 가짜로 판명됨.
당시만 해도 파리 곳곳에 밭과 농장, 그리고 비포장도로가 수두룩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