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광기’를 증오하면서도 닮아가다
인문학100년사 1930~1940년 (4)
2016-05-30 성지훈 I 인문학자·본지 편집위원
[시대적 배경] 1929년 10월 24일, 이른바 ‘검은 목요일’에 월가의 주가 폭락으로 미국 경제가 무너졌다. 세계 경제는 마비됐고, 거리는 실업자들로 넘쳐났다. 미 정부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개입 정책에 나섰고, 독일과 이탈리아도 실업난 해소를 위해 국책 대형공사에 착수했다. 1922년 이탈리아는 파시즘의 길로 들어섰다. 독일도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비판적 지식인들과 공산주의자, 유대인 탄압에 나섰고, 스페인도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전체주의 체제로 돌아섰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혁명의 영웅으로, 소련의 공업화와 농업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끈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의 지도자들이 레닌 사후 스탈린과 권력 투쟁을 하다가 숙청당했다(1937~1938). 반면, 프랑스에서는 1차 대전 이후 국내외적으로 움튼 파시즘에 대항하고자, 좌파전체의 연합체인 인민전선(1935~1938)이 성립됐다. 그러나 인민전선의 내부 분열로 인해 독일의 침략을 막지 못했다. 이 실패의 쓰라린 경험은 2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발전, 계승됐다.
사회심리학의 기반을 다지다
1930년대는 독일 나치즘과 일본 전체주의가 인종주의적 편견과 증오심을 내세우면서 지구촌적 비극을 촉발한 시기였다. 그러나 ‘세계의 구원자’를 자처하고 나선 미국에서는 인종주의가 학문과 법체계 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미국 학계의 주도적 지위에 오른 사회심리학자들은 인종 유형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33년 프린스턴대학의 다니엘 캐츠(1903~1998)와 K.W.브랠리는 백인, 흑인, 독일인과 일본인 학생들의 특성을 분석했다.(1) 미국거주 백인과 독일인, 일본인들은 부지런하고 똑똑한 반면에 흑인들은 미신을 신봉하고 게으르다는 식이다. 이들의 인종 특성정의는 당시 미국인들에게 대체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졌지만, 미국이 세계를 재패한 1950년대에 들어서자, 인종 유형별 특성적 표현이 조금씩 바뀌었다. 미 백인들은 물질적인 안락을 추구하며 삶을 영위하는 유물론자들로 인식되는 반면, 전쟁 중 미국의 적이었던 독일인과 일본인들은 근면하고 똑똑한 이미지를 다소 상실했으며, 흑인들은 미신의 미몽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독일인과 일본인들은 전쟁 이전의 이미지를 회복했다. 그리고 흑인들은 재능이 풍부한 뮤지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됐다. 인종적 고정관념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상황 등에 따라 변화한다. 사회심리학의 기원은 19세기 말로 봐야한다. 이 시기 가브리엘 타르드(1843~1904)는 저서 <모방의 법칙>(문예출판사, 2012)에서 개인들이 사회적 메커니즘에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를 탐구했다. 또한 귀스타브 르 봉(1841~1931)은 <군중심리학>에서 개인이 어떻게 군중화 되는지를 다뤘다. 최초의 사회심리 실험은 1897년 노르만 트리플렛(1861~1934)이 시도한 사이클 경기의 경쟁효과에 관한 연구다.
그러나 과학적인 사회심리학의 본격적 연구는 1930년대에 들어서야 이뤄졌다. 사회심리학이 학문으로서의 실험적 방법론과 이론적 장을 정립한 것은 이 시기다. 초기 사회심리학의 많은 연구자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즘의 등장을 피해 도망친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심리학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히틀러가 꼽힌다. 망명 연구학자들은 히틀러의 ‘광기’를 증오한 반면, 그의 여론조작, 프로파간다 그리고 조직 장악력 등의 주제에 관해서는 관심을 가졌다. 한편, 미국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문화 사회로 전환되면서, 인종주의의 문제가 점차 두드러졌다.
1924년, 미국의 실험적 사회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플로이드 올포트(1890~1979)는 사회심리를 행동과학 분야로서 탐구한 <사회심리학>을 출간했다. 사회심리학의 주요 테마 중 하나인 ‘태도’, 즉 각 개인이 특정 대상이나 견해, 사람에 대해 보이는 반응을 지칭하는 이 태도는 그의 동생인 고든 W. 올포트(1897~1967)가 중요시했던 연구 분야다. 고든 올포트는 종교나 직업, 타인에 대한 태도가 단순한 지적 견해를 넘어,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는 정서를 내포한 것이라고 봤다. 이러한 개념은 2차 대전 이후 고정관념과 인종주의에 관한 연구에서 다시금 차용됐다. 한편 터키 출신의 미국 사회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1906~1988)는 개인의 판단이 집단의 규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를 유명한 실험으로 증명했다. 실험 결과, 애매한 상황에 처한 개인은 홀로 판단을 내릴 때보다 집단의 규범에 더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쿠르트 레빈(1890~1947)과 그의 동료 로널드 리피트, 로버트 화이트는 어느 집단의 성과에서 리더십의 스타일(전제적, 민주적, 혹은 방임주의적)이 지닌 효과에 관심을 보였다.
실험실에 들어간 심리학
또한 사회심리학이 오늘날처럼 가설과 연역의 과정을 매우 중시하는 실험 및 연구의 학문이 된 것도 1930년대에 들어서였다. 이로부터 10년 간 사회적 행동의 초창기 척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1928년 루이스 리언 서스톤(1887~1955)은 태도측정방식을 확립했다. 여기서 ‘태도’란, 종교에서부터 인종적 선입관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에 관한 각 개인의 의견이나 믿음을 뜻한다. 이러한 방식은 외부 관찰자를 필요로 했다. 1932년, 렌시스 리커트(1903~1981)는 더 이상 관찰자가 필요 없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했다. 이는 특정사항에 관해 상대방의 공감정도를 묻되, 점수로 변환 가능하도록 하고 이를 합산해 총점을 매기는 방식이다.
또 다른 분야에서 야코브 레비 모레노(1874~1974)는 계량사회학(Sociometry), 즉 한 집단 내 여러 구성원 간의 친밀도 관계를 측정하는 학문을 창설했다. 그는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해당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느끼는 호감(혹은 반감)을 관찰했다. 이러한 계량사회학적 테스트는 한 집단 내에서 인기 있는 리더, 영향력 있는 리더, 소외된 인물, 배척당하는 인물 등을 분간할 수 있게 했다. 실험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여론조사나 자연환경 상의 관찰조사가 인기를 잃게 됐다. 그리고 학파간의 알력과 대립이 일어났다. 여론조사 지지자들은 “실험주의자들이 연구하는 상황이 인공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지적했다. 반면, 실험주의자들은 “여론조사 지지자들의 자료 수집에서 정확성이 결여됐다”고 비난했다.
망명하는 유대인 지식인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장악하자, 대학가에서 대규모의 유대인 숙청 작업이 실시됐다. 유대인들은 협박과 가혹행위, 해임을 당했다. 1933년 5월 베를린에서 나치당은 ‘유대인’ 프로이트의 저서들을 불태웠다. 1938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에서도 지식인들의 대대적인 망명이 시작됐다. 망명에는 거의 모든 지적 분야가 포함됐다. 물리학자(알버트 아인슈타인, 에르빈 슈뢰딩거, 막스 보른, 볼프강 파울리 등), 수학자(존 본 뉴먼, 쿠르트 괴델 등), 작가(토마스 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베르톨트 브레히트, 슈테판 츠바이크 등), 예술가(파울 클레, 아놀드 쇤베르그 등) 등 모두가 미국으로 향했다.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등도 마찬가지였다. 지식인들의 망명이 이어지자, 빈과 베를린은 ‘지적’ 수도로서의 지위를 졸지에 잃었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이 새로운 지식인들을 영입한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이러한 망명의 물결은 이념의 단순한 지역적 이동으로만 요약될 수 없었으며, 이념의 흐름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특정 이념의 변화와 재탄생, 그리고 때로는 완전한 쇠퇴로 이어졌던 것이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엇갈린 운명
형태심리학(게슈탈트 심리학)의 창설자 3인인 쿠르트 코프카(1886~1941), 막스 베르트하이머(1880~1943), 볼프강 쾰러(1887~1967)는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흩어졌고 대학가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미국의 심리학계에서는 행동주의심리학이 대세였는데, 이 행동주의 심리학의 접근은 독일 심리학의 포괄적이며 유심론적인 관점과 완전히 정반대였다. 형태심리학은 지각(Perception) 연구에 한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 심리학계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 교수출신의 카를 뷜러(1879~1963)와 샤를로테 뷜러의 운명 또한 비극적이었다. 아동심리학의 선구자인 뷜러 부부는 독일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지만 망명 때문에 학계의 경력이 산산조각 났던 것이다. 몇몇 소수의 심리학자만이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미국 사회심리학의 주류 인사가 된 쿠르트 레빈 이 그 예이다. 레빈은 독일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였으며, 나치를 피해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로 왔다. 후에 그의 연구는 집단 역학, 동기 그리고 리더십 분야에 심오한 영향을 끼친다. 레빈은 조직과 지역사회에서 발생하는 실무적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에 집중했다. 이 점에서, 레빈은 조직 심리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기록된다.
한편 정신분석학자들의 운명은 정반대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딸 안나가 영국으로 망명했을 때, 몇 년 전에 도착한 앨프리드 존스와 멜라니 클라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프로이트 부녀는 ‘정신분석학의 시조’라는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브루노 베텔하임(1903~1990), 에릭 에릭슨(1902~1994), 에리히 프롬(1900~1980), 카렌 호나이(1885~1952), 빌헬름 라이히(1897~1957), 헬렌 도이치(1884~1982) 역시 각자 나름대로 미국 정신분석학에 족적을 남겼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연구자와 이념의 수용 여부는 학계에 좌우됐다. 독일에서는 사회학 교수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던 만큼, 사회학 분야의 위상이 크게 흔들렸다. 1933년 독일에 있었던 55명의 사회학 교수 중 1938년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16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러한 망명자 중 일부 소수만이 영미권의 학계에 적응할 수 있었다. 바로 폴 라자스펠드(1901~1976)가 그 경우였다. 아프리카 남서부, 나미비아 중앙에 있는 도시인 마리엔탈의 실업자에 관한 연구는 미국에서 그의 이름을 드높였고, 경험주의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학계의 문을 열어줬다.
마르쿠제, 미국 비판적 사고의 대표자
반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적, 이론적, 비판적 방향은 영미권의 이념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이끄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상대적으로 폐쇄적으로 남아 있었다. 이 학파의 지도자들은 종전 이후 독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 학파의 일원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의 운명은 조금 놀라웠다. 그는 미국에서 전후 비판적 이념의 대표자가 됐다. 그의 저작이 학계보다는 지식인과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급진적 독자층에서 더 많은 반향을 얻었던 것이 사실이다.
경제학자 가운데서도 유사한 분열을 찾아볼 수 있었다. 루드비히 폰 미제스나 오스카어 모르겐슈테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처럼 신고전주의 운동에 들어갔던 오스트리아 학파 일원들은 영미권 학계에 쉽게 통합될 수 있었다. 반면 경제를 역사적, 사회적, 비판적 접근법으로 해석했던 칼 폴라니나 폴 배런 같은 경제사가들은 미국 대학가에서 상당히 부차적인 지위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철학 분야에서도 망명은 굉장히 차별화된 결과를 만들어냈다. 유대인이 대부분이었던 빈 학파는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미국에서 루돌프 카르나프(1891~1970)는 분석철학의 중심인물이 됐다. 한편 학파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카를 포퍼는 영국에 정착하는 편을 택했고, 그곳에서 이들의 이념은 큰 반향을 얻었다. 반면 에른스트 카시러와 레오 스트라우스, 마르틴 부버의 저작은 망명국에서 미약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심지어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던 한나 아렌트의 저작 역시 미국의 지식인계에서는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케인스, 경제학 사상에 혁명을 일으키다
“지금 내가 저술하고 있는 경제학 이론은 지금껏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경제적 문제에 적용해왔던 고찰 방식에 혁명을 일으키리라 확신한다.”
이런 엄청난 포부를 드러낸 걸 볼 때,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는 자신의 재능을 확신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1935년 친구 조지 버나드 쇼에게 보낸 서신에서 쓴, “경제학 사상에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다음 해인 1936년에 출간될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라는 대작을 집필 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반세기 동안, 소위 ‘케인스주의’라 하는 사상이 모든 서구권의 경제를 지배했다. 이 저작의 탄생배경과 영향력을 이해하려면, 193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의 주가 대폭락은 연쇄반응을 촉발했다. 미국 대공황의 충격파는 1930년대 초 유럽 대륙에까지 닿았다. 판로를 찾을 수 없었던 나머지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수백만 명의 실업자들이 거리로 나앉았다.
어떤 방도를 취할 것인가? 이미 몇 년 전부터 독일 정부(1932년)와 미국 정부(1933년)는 실업자들을 거두고 경제활동을 부흥시키기 위한 대규모 건설 정책에 뛰어들었다. 케인스는 (비록 이 정책의 주도자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개입 정책에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이 정책을 대규모 피라미드의 건설 작업에 견줬다. 이러한 건설이 실상 쓸모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자리만 창출한다면 상관없었다. 그리고 자유방임주의 학설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케인스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일반이론>을 구상했고 집필했던 것이다. 현재의 문제, 즉 대규모 실업 사태에 해답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이 저서는 전통적 경제학파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다. 케인스는 영국 경제학 이념을 대표하는 인물들인 아서 C. 피구(1877~1959)와 앨프리드 마셜(1842~1924)을 전통적인 학파로 꼽았다. 자유시장을 지지하는 이 두 인물은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 장 바티스트 세이라는 경제학 사상의 주요 시조들을 계승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케인스는 시장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시장과 관련된 주요 가설 중 하나, 즉 장 바티스트 세이가 제시한 ‘공급의 법칙’에는 반대했다. 이 법칙은 “공급은 제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고 단언했다. 공급되는 모든 제품은 그 판로를 찾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예컨대 목수가 새로운 가구 제작에 착수할 경우, 그는 사람을 고용해 임금을 줘야 하고 이 임금은 새로운 제품 구매를 위한 가용 소득의 원천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케인스가 보기에 이처럼 공급과 수요 간의 자발적인 일치는 가설적 관계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분배된 모든 소득이 자동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는 모든 소득을 소비하기보다는 그중 일부를 저축할 수 있다. 기업 역시 자본을 자동적으로 모두 재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주식 투자를 하거나 비축하는 편을 선호할 수 있다. 케인스에 의하면, ‘실효 수요’, ‘소비 성향’, ‘투자 장려’ 등의 여러 요인 간의 괴리가 공급과 수요 간의 전반적인 불균형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그 무엇도 경제라는 기관이 전속력으로 돌아가게끔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업가들은 더 팔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생산을 제한하고 고용을 중단하며, 실업자들은 소득이 없기 때문에 더는 구매할 수 없다. ‘불완전고용의 균형’, 즉 생산-소비 사이클을 재활성시키는 일을 그 무엇도 돕지 않는다면 영구적 실업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시장의 자율적 규칙이 완전고용을 보장하기에 충분치 못하므로, 경제성장을 인위적으로 촉진시켜야 한다. 소비를 장려하고, 투자를 활성화하기, 다시 말해 수요를 진작시키는 것이다. 케인스는 단순한 초기 부양책만으로도, 자신이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라고 명명한 연동효과를 통해 사이클을 재개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승수효과는 케인스가 케임브리지 동료인 리처드 칸에게서 차용한 개념이다. 정부는 사이클을 재개하기 위해 개입할 가능성, 더 나아가 그럴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다양한 방식이 될 수 있다. 대규모 건설 사업이나 공공조달, 가계소득 분배, 기업의 투자를 장려해 고용을 창출하기 위한 저금리 정책, 비생산적인 연금 비율을 제한하기 위한 상속 과세 등이 그것이다. <일반이론>은 특히 경제 활성화에서 통화량이 주요 역할을 한다고 봤다. 왜냐하면 케인스는 통화가 ‘중립적’ 수단이 아니라 지불과 유통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출 등을 통해 통화량을 늘리는 것은 기업가들에게 새로운 활동을 창출할 자본력을 제공한다. 반면 현금을 보유하는 행위는 경제활동에 제동을 건다. 케인스는 매우 직설적이었는데, 비생산적인 저축에 적대적이었던 만큼 ‘금리생활자들의 안락사’라는 도발적인 표현을 제시하기도 했다.
<일반이론>은 저자의 의도처럼 이후 몇 년간의 경제학 사상에 혁명을 일으켰다. 국가경제를 ‘전반적인 순환도’처럼 소개함으로써 현대 거시경제학의 기반 즉 전후의 국가회계 원칙을 내놓았고, 결국 정부의 경제정책에 토대를 제공했다. 케인스주의는 2차 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경제정책 대부분에 영감을 줬다. 이는 케인스주의의 한계가 나타날 때까지 이어졌다. 케인스주의의 한계란, 경제부양책이 국가의 만성 적자를 야기하며 통화 공급이 인플레이션의 급증을 촉발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경제의 개방, 재정의 세계화는 각국의 경제부양책을 아무런 효과가 없게끔 만들었다.
이것이 케인스주의의 종말을 뜻하는 것일까? 신케인스학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케인스의 사상은 몇몇 경제정책의 처방만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케인스는 무엇보다도 이론가였다. 그의 주요 공적은 성장을 보장하는 데 시장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데 있다. 정부에게 조정자의 역할을 부여했지만, 그러한 대응에 관해서는 수많은 방법을 고려했다. 그는 추상적이고 자동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시장의 이미지를 거부했으며, 주체들의 경제적 행동에 사회적, 심리적 요인을 고려함으로써, 경제현상을 살아 있는 체계로서 다뤘다. 이를 통해 케인스는 경제를 하나의 인문학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문화주의, 문화가 인성을 만들어내다
프란츠 보아스(1858~1942)는 20세기 초 미국의 인류학계를 지배했던 인물이다. 보아스를 통해 인류학은 ‘문화적’이 됐다. 그의 목표는 각 사회 고유의 핵심을 이루는 관습과 신앙, 생활방식의 일체로서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1898년부터 1936년까지 컬럼비아대와 뉴욕대에서 거의 40년간 교편을 잡은 보아스는 이곳에서 여러 세대의 인류학자를 양성해냈다. 1920년대 이후 그의 제자 일부가 모여서 ‘문화주의’라는 사조를 형성했다. 이러한 사조를 형성하는 데는 루스 베네딕트와 마거릿 미드라는 두 여성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베네딕트(1887~1948)는 한때 댄서이자 시인(앤 싱글턴이라는 필명으로)으로 활동했으며, 뉴욕의 뉴스쿨 오브 소셜리서치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1923년에 보아스의 조교가 된 그녀는 현장연구를 통해 애리조나의 여러 인디언 부족, 특히 남서부의 피마 인디언과 푸에블로 인디언을 연구하게 됐다. 베네딕트는 이 두 부족이 보이는 행동방식 간의 차이에 충격을 받았는데, 푸에블로인들이 사교적이고 평화주의적인 반면 피마인들은 다혈질에 공격적이고 격렬한 성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니체의 구분 개념을 차용해 이 두 심리적 유형을 각기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로 정의했다. 아폴로 유형은 더 차분하고 안정적이며 순응적이다. 피마 인디언이나 콰키우틀족이 속하는 디오니소스 유형은 다혈질에 격렬하며 폭력적이다. 베네딕트는 이 인성의 차이가 서로 다른 두 ‘문화’의 표현이라고 확신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문화의 패턴>이라는 책을 출간해 자신의 이론을 발표했다. 각 문화는 몇몇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나타나는 독특한 모형인 ‘패턴’에 따라 구성되며, 이 문화적 모형은 그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인성을 만든다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1946)이라는 저서에서 일본인의 인성에 자신의 분석을 적용했다. 이후 콜럼비아 대학에서 베네딕트는 보아스의 또 다른 제자인 마거릿 미드(1901~1978)를 만나는데, 미드는 문화주의의 중심적 인물이자 미국 인류학의 ‘대모’가 된 인물이다.
미드는 24세에 오세아니아의 사모아 섬 주민들을 연구하러 떠났다. 미드가 이 여행 경험을 기반으로 출간한 첫 저서 <사모아의 청소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미드는 미국 청소년들의 혼란이 가득한 청소년 시기와는 달리, 사모아 소녀들의 청소년기가 내적 충돌이나 위기가 없는 평온한 시기라고 묘사했다. 이후 태평양 제도의 발리(1933년에 두 번째 남편인 그레고리 베이트슨을 만난 곳)를 여행하며 미드는 교육에 따른 인성 유형의 연구를 시도했다. 뉴기니의 여러 사회를 비교하며 아라페시 부족의 차분하고 평온한 인성, 문두구머 부족의 난폭하고 호전적인 인성을 대비시켰다. 한편 챔블리 부족에서는 남성이 부드럽고 감정적이며, 능동적인 여자 가장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후 그녀는 산업화 국가의 국가별 성격 및 사회적 변화의 비교연구에 점점 더 관심을 가졌다. 1949년에는 <남성과 여성: 사회에서 남녀의 역할>이라는 책을 출간해 미국과 태평양 부족사회에서의 남녀 지위를 각각 비교했다. 전문용어 없이 생기발랄한 문체로 쓰인 그녀의 책들은 상당한 대중적 성공을 일궜다. 그녀는 자신의 책들에서 미국사회와는 모든 면에서 대치되는 평화롭고 관용적인 오세아니아 부족사회를 그려냈다.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사회인 것 같지만 말이다.
문화가 인성을 만들어낸다면, 이제는 이 인성 ‘만들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성과 문화’ 학파의 또 다른 거장인 에이브러햄 카디너(1891~1981)와 랄프 린턴(1893~1953)이 마주한 문제였다. 뉴욕 출신의 정신분석학자 카디너는 20년대 초에 빈에서 체류하며 프로이트를 만났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정신분석학과 인류학의 만남을 모색하는 연구 세미나를 열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보아스에 이어 인류학부 책임자를 맡은 린턴, 베네딕트도 이 세미나에 참석했다. 카디너와 린턴은 함께 ‘기본적 인성’이라는 개념을 구상했다.
학부생들의 교과서용으로 집필된 <인간의 연구>(1936년)에서 린턴은 ‘문화적 전승’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며, “문화는 사회적 유산”이라고 적었다. 하나의 문화 내에는 개인이 사회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의하는 역할들의 레퍼토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역할들의 통합은 여러 사회화 단계를 거쳐 시행된다. 맨 처음에는 카디너와 린턴이 ‘기본적 인성’이라 부른 것이 자리하는데, 이는 한 사회 내 모든 구성원에게 고유한 성격적 특징 일체를 말한다. 이러한 기본적 인성은 개인의 사회화를 보장하는 가족과 학교, 종교 등의 ‘초기 교육’을 통해 전승된다. 이후 이 기본적 인성을 기반으로 각 개인의 성격이 형성되는 것이다.
문화주의 학파의 저서들은 대중에 널리 보급됐다. 특히 베네딕트와 미드의 책이 많이 읽혔다. 50년대 및 60년대의 분위기는 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데에 호의적이었다. 이들의 사상에 담긴 생각들은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운동, 관습의 자유화 등 여러 사회적 운동들과 방향을 함께했다. 평생 친구로 남은 두 여성 인류학자 역시 이러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동물행동학의 탄생, 동물에서 인간으로
1973년, 카를 폰 프리슈(1886~1982)와 콘라트 로렌츠(1903~1989), 니콜라스 틴베르겐(1907~1988)은 동물행동에 관한 연구로 노벨의학상과 생리학상을 받았다. 세 사람 모두 새로운 학문인 동물행동학의 시조로 여겨지며, 이 동물행동학의 초창기 연구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카를 폰 프리슈는 꿀벌의 춤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1919년에 프리슈는 꿀벌이 벌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춤을 추듯 동그랗게 도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대담한 가설을 세웠다. 이 춤에는 무언가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메시지가 담긴 것이 아닐까? 1925년 이후 뮌헨에서 자신이 이끄는 연구소에서 몇 년간의 수많은 실험을 통해 프리슈는 이 가설을 입증하기에 이르렀다. 꿀벌은 자신이 꽃가루를 찾아낸 장소를 춤을 통해 벌집의 다른 구성원에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야 과학계는 꿀벌의 춤이 특정 장소를 (춤의 회전축이 태양을 향해 이루는 각도에 따라) 지시하는 메시지라는 이 놀라운 발견을 받아들이게 됐다.
콘라트 로렌츠와 본능 이론
노벨상의 두 번째 수상자인 콘라트 로렌츠는 셋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대중에게는 ‘재투성이 거위의 남자’로 알려져 있다. 거위에 관한 이 유명한 관찰연구는 1930년대에 시작됐다. 그 당시 그는 ‘각인’이라는 현상을 발견했다. 거위에게 각인은 갓 태어난 새끼가 발달의 가장 초기 단계에 동족 혹은 어미를 향한 선호를 결정짓는 것을 말한다. 로렌츠는 새끼 새의 어미를 모형새나 또 다른 동물(고양이나 암탉), 혹은 심지어 인간으로 교체하면, 이제 갓 부화된 새끼들은 이러한 교체된 대상을 자신의 어미로 여긴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새끼들은 마치 어미에게 하듯이 교체된 대상에 계속 달라붙고 어디든 따라다녔다. 따라서 새끼 새에게는 부모의 이미지에 대한 선천적인 지식이 없는 셈이며, 민감한 시기에 이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후 몇 년간 로렌츠는 특히 본능에 관해 연구했다. 대부분 동물종의 경우, 해당 종 특유의 변하지 않으며 정형화된 행동이 일부 존재한다. 공격 자세, 구애 행동, 식별하는 소리, 몸단장 등의 이런 행동들은 본능에 해당된다.
티티새가 지렁이를 찾아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바닥을 쪼아대는 행동이나, 거미가 거미줄을 짜고 새가 둥지를 짓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본능은 촉매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발현되는 내적 프로그램에 해당된다.
로렌츠와 절친한 네덜란드 출신 동물학자 니콜라스 틴베르겐은 큰가시고기의 촉매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이 물고기의 경우 수컷의 배가 붉은 색이다. 봄이 돼 수컷들이 서로 다툴 때, 붉은 배 혹은 붉은 얼룩을 지닌 다른 모든 대상의 존재는 큰가시고기의 공격을 촉발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로렌츠와 틴베르겐은 본능이 학습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던 행동주의자들과 반대 입장을 보였다. 이 두 동물학자는 본능을 학습이 아니라 발육에 따라 변화하는 내적 프로그램으로 여겼다.
로렌츠와 틴베르겐이 새와 물고기, 즉 본능적 행동 계열이 훨씬 더 발달한 생물을 주로 연구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반면 학습을 연구했던 행동주의자들은 포유류(쥐, 개, 원숭이 등)를 주된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동물과 인간의 공격성
2차 대전 후, 니콜라스 틴베르겐은 영국으로 이주해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 됐다. 그는 1951년에 <본능의 연구>라는 책을 출간했다. 1973년 그는 프리슈, 로렌츠와 함께 노벨상 공동수상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집안에서 두 번째로 노벨상을 받은 인물이 됐다. 그의 형인 얀 틴베르겐이 4년 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로렌츠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빈 대학과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연구와 수업을 계속했다. 1961년에는 스위스에 정착해 생리학 및 행동학 연구기관인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소장이 됐다.
바로 이 시기, 그는 동물행동학의 원칙을 인간의 행동에 적용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 1963년에 출간한 유명한 저서 <공격성에 관해>에서 로렌츠는 공격성이 모든 동물종의 생존에 (영토를 지키거나 차지하는 데, 다른 구혼자들을 물리치는 데) 불가피한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성을 다스리기 위한 조절과 억압의 메커니즘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종 수컷 간의 수많은 싸움은 종종 상호간의 위협과 협박으로만 한정되는 관례적인 싸움으로 그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서는 특정 상황에서 이 억제 장치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전쟁, 즉 폭력의 한계가 사라지는 경우인 셈이다.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책을 통해 로렌츠는 동물행동학을 인간 행동 연구에 사상 최초로 적용했다. 이러한 행적을 따라 ‘인간행동학’이 발전하기에 이른다. 로렌츠의 제자인 이레네우스 아이블-아이베스펠트는 인간과 동물의 (기쁨, 복종, 지배, 유혹 등의) 자세 및 몸짓을 연구했고, 데즈먼드 모리스는 인간과 동물의 성적 행동을 비교했다. 1970년대부터 비언어 의사소통 및 어머니와 영유아 간의 상호작용 연구가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글·성지훈
파리8대학에서 유럽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불편한 관계에 관심이 많다. 앞으로 본지에 '인문학 100년사'를 연재하면서 오랫만에 오래된 책들을 다시 꺼내 새롭게 공부할 즐거움에 들떠있다.
(1) http://academic.research.microsoft.com/Publication/37028674/racial-prejudice-and-racial-stereotyp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