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소년 대통령의 언어정치
진실 혹은 거짓, 제왕적 언어의 분열증
대통령의 언어엔 도덕적 권위도 진정성도 없어
악성코드에 감염된 지배집단은 ‘유사 가족화’
“어떻게 한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저런 거짓말을 사석도 아니고. 입만 열면 거짓말이란 게 틀린 말은 아닌 듯. 참으로 대한민국 걱정되는구만.”
한 달 전쯤이었을까. 그 대통령의 ‘권총 협박’ 발언에 대한 한 누리꾼의, 그나마 얌전한 반응이다. 그 ‘권총 협박’ 발언이라는 것은, 신문 보도에 따르면 “괴한이 권총을 들고 집에까지 와 협박을 했고 경호원들이 붙잡았으나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경찰에 신고도 않고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헝가리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에서 그 대통령이 했다는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헝가리 대통령에게 한 말이 아니라 내국 인사에게 한 말이란다. 이 발언을 둘러싸고 정치권에서 진실 공방이 있었다.
그러나 그 발언이나 공방마저도 금세 잊혀졌다. 그도 그럴 만한 게 그 발언에 대해 사람들은 어이없어하거나 진정성 없게 받아들였기 때문일 터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헤게모니로 통치해야 할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발언이 권위와 진정성 모두를 잃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지나 않은지 우려스럽다. 이런 마당에 얼마 전에는 또 그 입으로 법질서를 지키고 지도자급의 비리를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으니 인터넷 댓글들이 맑을 리 없다. 마침내 그는 2007년에 이어 2009년에도 한 여성주의 커뮤니티가 여성 비하 발언 대상으로 선정한 ‘꼬매고 싶은 입’ 1위를 차지했다.
11월 27일에 있었던 ‘대통령과의 대화’ 방송은 정점에 달했다. 세종시 이야기를 꺼내면서 대통령이 되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셈으로 고백했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고백은 진정한 반성이 되거나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기는커녕 더 큰 불신을 초래했을 성싶다. 그렇게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자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그 버릇을 고쳤을까. 아니다. 후회를 한다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명했다. 그는 난데없이 노무현 정부 때의 ‘신국가방재시스템 구축방안’이라는 문건을 들이밀며 왜 87조원짜리 사업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으면서 20조원을 들이는 4대강 사업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느냐고 항변했다. ‘신국가방재시스템 구축사업’과 ‘4대강 사업’은 엄연히 다름에도 똑같은 것인 양 왜곡 비교하며 국민을 조롱한 것이다. 그날 대통령은 아동 성폭력 대책과 관련해 “초범으로 반성하는 게 아니라 재범을 하게 되니까 아동 성범죄자는 평생 격리시켜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는 아마도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본 모양이다.
대통령은 ‘늑대소년’이 되었다. 여기서 늑대소년임을 까발리는 게 중요하지 않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으므로.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되 거짓이고, 진실이되 진실이 아니다. 나는 1년 전 어느 계간지에 한 나라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언어세계를 분석해 기고한 적이 있다.(1) 그 글에서 나는 그의 거짓말은 결국 그의 언어정치의 한 방법임을 짚어보았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기호는 기표(記表·예컨대 ‘나무’라는 말)와 기의(記意·예컨대 실제의 나무)의 자의적인 결합체이다. 이 이론에 빗대어 나는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언어세계는 한편으로는 기표(예컨대 대운하 사업을 포기하겠다는 말)와 기의(그러나 4대강 사업은 사실상 대운하 사업을 의미)로 분열되는 ‘거짓된 진실’, 즉 ‘분열증적 병폐’를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의 언어 능력 이론에 빗대어 ‘정신·두뇌=삽질기계=삽질언어’로 충만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언어세계는 ‘가장 냉혹하고 가장 이성적인’ ‘정치·경제학적 정신질환의 언표 행위’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아전인수와 왜곡 능력 탁월
“본디 기표와 기의는 불일치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해 언중세계와 의미세계의 다양성을 보장해주지만, 이것이 정치·경제학적 질환으로 변질돼 (대통령) 자신의 정신·두뇌 내부 세계에서는 기표(가령 ‘전 국민을 위한’)와 기의(가령 ‘1%를 위한’)의 불일치(전 국민을 위한다면서도 1%를 위한) 놀이에 깔깔거리면서도 동시에 그 바깥 세계를 향해서는 무모하게 기표와 기의를 일치시키려는 표정관리의 덫에 걸리며 종종 정신질환적 언표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언어세계가 삽질언어로 단순화된 정신-두뇌의 일괴암적 구조 같아 보이지만 어쨌거나 그것마저도 사실은 상황과 연관된, 상황을 아전인수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언어 능력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대통령의 언어정치는 그 자신만이 발화하는 개인적 언어세계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그는 ‘한마디’를 통해 모든 것이 알아서 작동되도록 하는 제왕적 언어기계의 조종자이다. 오늘 새로운 문제가 되고 있는 ‘빵꾸똥꾸’ 징계 사건은 그 단적인 사례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 대통령은 12월 21일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 자리에서 “방송이 우리 사회의 윤리와 도덕을 선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주길 바란다”며 ‘막말 방송’을 없앨 것을 지시했다. 그 대답은 즉각 나타났다. 방통위가 22일 문화방송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유행어인 ‘빵꾸똥꾸’에 대해 권고 조치를 내린 것이다. ‘빵꾸똥꾸’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오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뭐가 구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방통위 위원장을 낙하산 인사하고, 방송을 장악하고, 미디어법을 계산하는 이유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입은 하나가 아니다. 권력이 행사되는 국가 장치(검찰·언론·정당·교육 등) 곳곳에 편재한다. 그렇다고 그 권력이 권위 있고 정당한 권력이냐, 그렇지도 않다. 국민에게 빵꾸똥꾸 소리나 듣는, 허접스럽고 야비한 막가파 권력이다.
메타개그 부르는 언어기계들
권력이 행사되는 국가 장치의 모든 곳을 장악하려는 기도는 오늘의 지배전략 때문만은 아닐 터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첫째는 막장 드라마식 복수의 정치극이요, 둘째는 심판받기를 두려워하는 자의 권력 재창출극이 아니겠는가. 그 대통령이나 그 국가 장치 곳곳의 언어에는 소통과 공감은 온데간데없고 불통과 복수극과 명령어가 난무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입이나 눈짓을 통해 굳이 암시하지 않더라도 국가 장치의 각 부품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돌아가는 집단적 언어기계의 활극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언어기계는 전쟁 중이되 어느 정치인의 표현대로 저강도 전쟁이며,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에 빨려들어 가도록 하는 ‘착한 주체’로 탄생하는 게 아니라 냉소와 비웃음으로 메타개그를 날리도록 하는 ‘나쁜 주체’들을 양산하는 저주받은 언어를 낳는다. 가령 자신이 그리는 신문 만평에 교묘하게 그를 욕한 만화가나 그 만화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그 대통령이 스스로를 제왕적 위치로 만들기 때문에 권력 체제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도 국가 장치를 장악한 그 집단(여당·장관·검찰·언론인 따위)은 ‘가족 유사성’으로 편재한다. 가족 유사성이라 함은 체격, 얼굴, 생김, 눈의 색깔, 걸음걸이 등이 동일한 방식으로 겹치고 교차한다. 그래서 그런 건가. 어떤 누리꾼은 그 집단을 특정 동물 종족으로 비유하곤 한다. 그 종족에 누가 될까봐 차마 여기에 옮기지는 못하겠다.
가족 유사성의 대표적인 것이 그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던 학자가 국무총리로 들어앉으면서부터 그의 입이 된 사례다. 무엇보다도 입-언어가 닮아간다. 그 집단에서 가족 유사성은 무엇보다도 특정한 언어들을 특정한 성향 속에서 사용하도록 하는 기질의 체계인 아비튀스(2)를 생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끼리 입-언어가 닮아가면서 아비튀스 공간에 복속된 소비만 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을 능동적으로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 유사성이다. 가령, 그 국무총리가 세종시 문제로 충청도를 방문했을 때 지역 주민들이 “에쿠스(원안)를 왜 쏘나타(수정안)로 만들려는 거냐”고 항의하자 그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에쿠스를 쏘나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쏘나타를 에쿠스로 만들겠다는 것임을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단순히 그가 꼭두각시이기를 넘어서서 그렇게 말하도록 한 것은 아비튀스 공간을 고향의 논리로 배치하며 능동적으로 생산하는 기지를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비튀스 공간에서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이미 결정되므로 소통은 없다. 아비튀스 내에 동원된 주민이 따로 있고 그 바깥에 저항하는 주민이 따로 있으며, 그 경계를 공권력으로 배치하면서 소통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지 않았는가.
피아를 구별짓는 정치적 언어
현실세계에는 무수히 많은 기호들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있으며, 언어란 그 실타래의 극히 미약한 한 부분을 통사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 통사적 구조가 진실게임을 말해준다. 그 대통령이 후보 시절 BBK 사건에 연루됐을 때 대변인이 “주어가 없다”며 문장성분상 주체의 부재를 주장해 희화화한 것은 진실게임의 본질 중 하나가 통사적 구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통령이 세간에 진정성을 상실한 것은 아마 이 무렵부터였고, 그것은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는 불변의 법칙처럼 행사되고 있다. 날마다 새롭게, 그러나 동일하게 사고는 자꾸자꾸 터진다. 불법과 탈법으로 버무려졌다고 비판되는 4대강 사업 예산 통과를 위해 그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새해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해 준예산이 집행되면 국정이 중단되고 국가가 위기에 처하며 공무원 임금 지급이 연기될 거라고 위협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 씨알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통치자와 국민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 대통령이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토로했을까. 심하게는, 법과 질서를 운운하면서 법을 고무줄놀이로 악용하는가 하면 법 위에 군림하고 심지어는 헌법을 존립 근거로 하면서도 헌법마저 유린하는 그 가족 유사성의 파렴치어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천리(天理)를 거역하는 그의 몰염치어들은 국민을 국민으로 존엄해주는 언어가 아니라 현존 권력의 힘을 빙자한 정치적 악성 코드라 할 만하다. 뭐, 모든 국민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국민에게 다 그런 것은 아닐 터다. 그를 수호천사로 여기는 사람도 많을 테니 말이다. 적어도 30%대의 지지자들이 산채의 파수꾼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언어와 정치는 피아의 구별짓기 게임이자 피의 존재성마저 박탈하는 전쟁무기임이 드러난다.
19세기 후반 쿠바의 혁명가이자 시인인 호세 마르티는 쿠바에서 국민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다. 그는 이런 시를 썼다.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권리가 없다.” 아직도 냉동고에 얼려 있는 용산의 비극이 떠오른다. 마르티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이 땅 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내 행운을 나누고 싶습니다. 산속의 냇물이 바다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군요.” 더 많은 국민이 반대하고 있는 4대강 삽질사업의 재앙이 떠오른다.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이 쫓겨나고 죽어가고 있다. 장기 집권의 독재자라고 비난받아왔지만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티를 가장 존경한다. 내가 알기로는, 카스트로는 지적이고 도덕적이며 윤리와 문화를 중시하는 지도자이다. 그는 적어도 정직하며 거짓말로 국민을 농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쿠바가 1990년대 사상 최대의 위기인 ‘특별한 시기’를 견뎌낸 바탕 중 하나일 터다. 대통령은 삶과 언어를 정직하게 열어놓아야 한다. ‘경제 살리기’라는 탐욕의 마법적 코드는 한국 사회를 야만의 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글•고길섶
문화이론 계간지 <문화과학>의 편집위원이고, 전북 부안에 살며 지역문화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소수문화들의 정치학>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 <스물한 통의 역사 진정서> 등이 있다.
<각주>
(1) ‘어느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언어세계’, <실천문학>, 93호(2009년 봄).
(2)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대표적 문화이론 개념. 계급과는 다른 개념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이 공유하고 내재화한 행위·규칙·취향 등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