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국들 EU 가입, 안 풀리는 고차방정식

[Dossier] 허약체질 EU 진단

2010-01-06     장아르노 데랑

2003년 6월 19~21일 테살로니카에서 개최된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신조어가 탄생했다. ‘서구 발칸’. 이 용어는 ‘6-1+1’이라는 난해한 산술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풀어서 설명하면,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했던 6개 국가들에서 2004년 EU에 가입한 슬로베니아를 뺀 다음, 거기에 알바니아를 더한 것이다. ‘서구 발칸’ 국가들은 2007년 1월 1일 일찌감치 EU에 가입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같은 국가들과는 구별된다.

지역 평화를 깨는 지역이기주의와 국수주의 급부상
EU 회원국들, 정치적 손익계산으로 의견일치 어려워


현재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알바니아는 EU 가입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코소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다. 그러나 EU 회원국 중 5개 국가들(스페인·슬로바키아·루마니아·그리스·키프로스)이 아직 코소보를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새 천년에 감돌았던 낙관주의
테살로니카 정상회의에서 결정된 규칙은 다음과 같다. EU 가입 후보국들은 EU ‘가입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요 개혁들을 단행해야 한다. 행정 개혁, 법치국가 확립, 부패 척결과 조직범죄 근절, 민주주의와 인권 존중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경제 자유화와 경쟁에 대한 완전한 개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거기에 덧붙여, 각 후보국의 상황이 사안별로 평가된다. 유럽위원회는 후보국의 진전 상황을 평가할 권한이 있다. 2004년 10개국(1)이 대거 EU에 가입한 이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최근 EU에 가입했다.

새 천년이 시작되던 당시만 해도 발칸반도에는 일종의 낙관주의가 감돌고 있었다. 전쟁이 완전히 종식된 것처럼 보였다. 2000년 1월 크로아티아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고, 같은 해 10월 세르비아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을 몰아냈다. 물론 몇몇 문제가 남아 있었다. 코소보는 1999년 6월부터 유엔의 보호 아래 있었고, 보스니아는 국가로서 기능하기조차 힘든 상황에서 개혁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했다.

어쨌든 발칸반도는 민주화와 재건의 길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몇몇 유럽 지도자들은 심지어 ‘발칸반도의 비발칸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 국가들에 EU 가입은 ‘자연스러운’ 절차로 보였다. EU는 이 지역에서 점증하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책임을 수행했다. 가령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주둔하고 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평화유지군(SFOR)은 2004년 12월 유럽연합부대(EUFOR)에 임무를 이양했다. 한편 양자·다자 간 원조가 줄을 잇는 가운데, 유럽재건청(EAR)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코소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EU의 활동은 코소보 전쟁 종전 몇 주 후, 1999년 6월 30일 발효된 ‘남동유럽 안정화 협약’(2)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이러한 개입과 발칸 국가들이 서명한 ‘안정화 및 협력 프로세스’는 EU 가입을 향한 첫 단계로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 프로세스는 벽에 부딪혔다. 오랫동안 모범국가로서 EU 조기 가입이 기대되던 크로아티아로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크로아티아는 2004년부터 EU 가입 정식 후보국이었다. 2005년 10월 가입협상이 시작되었지만 2008년 12월 17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슬로베니아가 거부권을 행사하며 크로아티아와 EU의 실무협상을 방해한 것이다. 두 국가가 독립권을 쟁취한 1991년 이후부터 계속되던 피란만 영해 분쟁이 원인이었다.(3) 슬로베니아는 아드리아해 깊숙이,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의 영해 사이에 고립된 37km의 좁은 군도를 가지고 있다.
 


오랜 앙숙, 다시 영해 분쟁 
슬로베니아가 원하는 대로 내륙 국경을 조금만 이동시킬 경우 ‘유엔 해양법 협약’이 규정하는 각도 계산법에 의해 슬로베니아의 영토가 곧바로 국제 수역에 연결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4) 이 문제와 관련해 1996년 합의가 이루어지고 2001년 슬로베니아 의회의 비준을 받았지만, 그 후 크로아티아가 합의를 파기하면서 이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돼왔다. 이 분쟁은 두 국가에 국가 정체성과 자존심이 걸린 문제로서 국내 정치에서도 중요한 사안이 되고 있다.

슬로베니아의 거부권 행사 이후, 유럽위원회는 2009년 1월 전 핀란드 대통령이자 2008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르티 아티사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재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선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6일 EU는 이 분쟁은 ‘양자 간 합의’에 의해 해결될 문제라고 선언하고는, 크로아티아와의 EU 가입 협상 일정을 무기한 연기해버렸다.

결국 그해 9월 11일 류블랴나(슬로베니아의 수도)에서 열린 크로아티아 총리 야드란카 코소르와 슬로베니아 총리 보루트 파호르의 회담으로 분쟁 해결의 열쇠가 넘어갔다. EU는 10월 2일 크로아티아와 EU 가입협상을 재개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 협상의 향방은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양국 간 협상 결과에 의존하고 있다.
마케도니아 역시 2005년 12월부터 공식적인 EU 가입 후보국이지만 구체적인 협상 일정은 잡혀 있지 않다. EU는 협상을 개시할 준비가 돼 있지만 그리스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 이미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NATO 가입에 반대한 바 있다. 이런 반대에도 마케도니아는 2009년 4월 NATO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라는 말의 기원이 헬레니즘의 독보적인 유산이라는 이유를 들어 마케도니아 공화국이라는 국명의 사용에도 반대하고 있다.(5) 마케도니아는 그리스를 상대로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소송을 제기했다. 회원국인 그리스와 비회원국인 마케도니아의 분쟁 해결을 위한 어려운 협상이 EU가 아닌, 미국인 폴 니미츠가 위원장으로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의 손으로 넘어간 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EU 가입 차단 정책의 정치적 결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보 사나데르 크로아티아 총리는 2009년 7월 1일, 크로아티아와 유럽에 ‘충격’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남기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2003년 총리직에 오른 노련한 정치가 사나데르는 1990년 이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민족주의 보수 정당 크로아티아민주연합(HDZ)을 근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크로아티아 사회의 실질적인 현대화를 이룩하긴 했지만 당내 권력 구축에는 실패했다. 그 후 야드란카 코소르가 뒤를 이어 총리직과 당수직을 겸임하게 되었지만 블라디미르 세크스와 안드리야 헤브랑이 이끄는 당내 강경파가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21세기에 부활한 기원전 갈등  
2010년에 있을 크로아티아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한 헤브랑은 옛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6)에 기소된 크로아티아 전범들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을 뿐 아니라 세르비아와의 화해에도 반대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EU 가입에도 회의적이다. 크로아티아 전문가들은 사나데르가 총리직을 사임한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한다. 사나데르는 우선 당내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고, EU 가입 협상 실패의 책임을 EU 쪽으로 돌리려고 했던 것이다.(7) 그 후 코소르가 류블랴나까지 가서 이끌어낸 협상 결과는 미약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슬로베니아는 언제라도 크로아티아의 EU 가입 시도에 거부권을 행사할 준비가 돼 있다.

NATO와 EU 가입에 실패한 마케도니아에서는 위험한 민족주의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 니콜라 그루에프스키가 당수로 있는 마케도니아의 혁명조직 ‘마케도니아 국가통일민주당’(VMRO-DPMNE)은 그리스에 맞대응을 하고 나섰다. 마케도니아는 2007년 스코페 공항의 이름을 ‘알렉산드로스 공항’으로 바꾸었고, 수도 스코페에서 그리스 국경까지 연결된 새로운 고속도로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고속도로’(마케도니아 황제였던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8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 연합군들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역자)라는 이름을 붙였다.(8)

마케도니아의 모든 도시에 이 두 영웅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대대적으로 세워졌다. 이러한 ‘고대 영웅에 대한 집착’(9)은 그리스의 태도에 상처받은 마케도니아인의 반그리스 정서와 관련이 있다. 대다수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리스 정부가 자신들의 국가 명칭과 모국어, 국민의 정체성을 문제 삼음으로써 국가적·지역적·개인적 정체성을 침해당했다고 느끼고 있다.

그루에프스키는 이러한 여론에 편승해 ‘알렉산드로스’ 바람을 일으키며 권력 유지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약 50만 명)에게는 이러한 시도가 먹혀들지 않는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1992년 독립한 마케도니아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2001년에는 내전의 위험으로까지 치달았다.(10) ‘오흐리드 평화조약’에 의해 마케도니아의 지방분권화가 시작되었지만, 알바니아계 주민의 요구 사항이 모두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알바니아계 소수민족은 마케도니아가 공식 EU 가입 후보국이 된 이후부터 마케도니아 정부의 정책이 EU의 기준에 부합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정부를 지지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그 후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진전도 이루지 못한 채,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확실치도 않은 위대한 과거 선조들에 열광하면서 자족하는 이 고립된 소국(마케도니아-역자)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코소보의 독립을 지켜보면서 알바니아계 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주의적 유혹을 느끼기 시작했다.(11)
 
EU 대신  나선 국제사법재판소
발칸 지역을 다시금 불안에 빠뜨리는 이러한 두 분쟁에 직면하자, 이론상으로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해야 할 EU는 개입 중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EU 내부의 국가 간 합의 도출 방식으로는 그리스의 민족주의를 약화시킬 방법이 없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은, EU가 중재자로서 무능하다는 방증이다.

크로아티아의 EU 가입 협상이 연기되면서 국내 여론조사에서 EU 가입에 회의적이라고 응답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졌다. 반면 세르비아·몬테네그로·알바니아의 국민들은 EU 가입에 적극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의적 여론이 한풀 꺾이고 나면 공공연하게 EU에 적대감을 보이는 민족주의 경향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2008년 5월 치러진 세르비아 총선 결과는 놀라웠다. 보리스 타디치 대통령이 이끄는 ‘친서방 정당연합’이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민족주의 성향의 세르비아 급진당(SRS)이 그 뒤를 이으며 제1야당의 자리에 올랐다. 코소보 독립 몇 달 후 치러진 이 총선에서 급진당의 부상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총선 결과는 세르비아 국민 다수가 EU 가입에 찬성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EU 가입 정책은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옛 유고 전범재판에 대한 협력 문제를 제외한다면 세르비아의 EU 가입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2000년 10월 ‘민주주의 혁명’ 이후 세르비아는 국내에 거주 중이던 대부분의 전범 혐의자들을 체포했다. 그중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은 2008년 7월 21일 베오그라드에서 체포된 전 세르비아 독재자 라도반 카라지치였다. 그러나 이들 중 고란 하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는 지금도 계속 도피 중이다.
 
EU의 유일한 전략은 시간 끌기
만약 이 두 전범이 체포된다면 세르비아의 EU 가입 후보국 인정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2월 17일 독립을 선언한 코소보를 세르비아 국경 안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유럽위원회는 ‘중립’을 고수하고 있다. 유럽위원회는 신생국가의 인정은 자신의 권한이 아니며 EU 회원국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라고 못박았다. 그러나 EU 회원국들은 이 문제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EU는 크로아티아의 EU 가입 후보국 인정이 지연됨에 따라 시간을 벌고 있는 셈이다. 유럽의 외교관들은 간접적 표현을 통해 피란만 영토분쟁에 대한 슬로베니아의 ‘완고한 태도’에 만족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역설적으로, 슬로베니아가 EU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1995년 종전 이후 답보 상태에 빠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문제에서도 이런 시간 끌기 정책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12)는 2009년 7월 초,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는 듯 2010년 1월 1일부터 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케도니아 국민의 비자를 면제해주겠다고 발표했다. 이 국가들의 국민이 EU 지역(Schengen)을 무비자로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크로아티아 국민은 이미 이런 권리를 누리고 있던 터다. 발칸 지역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기다려오던 비자 면제를 시행해 EU 가입 연기에 따른 불만을 잠재우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알바니아, 코소보는 이번 조처에서 제외됐다. 이 세 국가는 이민정책과 국경 통제에 관한 로드맵이 정하는 엄격한 기준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 기준들에는 생체 정보가 담긴 전자여권 발부, 재입국 심사, 제3국 불법 이민자 수용소 건설 등이 포함돼 있다. 무엇보다 이 국가들이 불법 이민 수출국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코소보의 경우 인구의 60%가 25살 미만이며, 경제활동 가능 인구에서 실업자가 차지하는 비율도 60%에 육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 젊은이에게는 ‘서유럽행’만이 유일한 희망이 되고 있다. 알바니아도 사정은 다르지 않으며, 오래전부터 정치적 위기를 겪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데이턴 평화협약에 의해 구성된 비현실적 정치체제로 인해 점점 더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13)
 
비자 면제도 형평성 논란
이 지역에서는 EU의 이번 결정이 ‘차별적’이라며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에 제외된 국가들은 인구 대다수가 이슬람이라는 공통점을 가졌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정말로 그런 기준이 적용되었다고 생각하긴 어렵지만 이 지역 언론들은 선동적 뉘앙스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세르비아인에게는 유럽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면서 스레브레니차 학살사건(1995년 유엔이 지정한 안전지대였던 이 지역에 세르비아계 군인이 진입해 이슬람교도 주민 수천 명을 무차별로 학살한 사건-역자)의 피해자들은 제외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옳은가?”(14)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2008년 2월의 코소보 독립이 자신들의 주권 회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과 EU로 향하는 문이 쉽게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때까지 우방으로 여겨졌던 프랑스와 영국 등 ‘서방국가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이어졌다.

한편 2008년 12월 활동을 개시한 EU 코소보 민간임무단(EULEX)은 ‘중립적’ 자세를 고수하면서 코소보의 치안·사법·세관 등과 같은 주요 행정체계 구축을 위한 ‘기술적’ 지원을 해주고 있다. 이 활동은 유엔의 중재로 세르비아와 합의한 ‘6개 실행계획’을 전제로 진행되었으며, 조직범죄 소탕활동도 세르비아와의 협력 속에 진행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임무단은 점점 급진화돼가던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분노와 좌절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지난해 8월 25일에는 급진 민족주의 단체 ‘자결’(Vetevendosje)이 민간임무단의 차량을 파괴하는 일이 발생했다.
 
설상가상 경제위기
현재로선 국제사회, 특히 지금은 유럽의 감독 아래 있는 두 국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코소보의 EU 가입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새로운 분쟁들에 대해 여론을 환기할 능력도 없고 코소보에 대한 일관적 정책을 추진할 능력도 없는 EU는 새 천년 초반 ‘행복하던 시절’에 자신만만하게 내세웠던 자신의 역할을 사실상 포기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제위기까지 찾아왔다.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른 발칸 지역 국가들은 앞다퉈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를 요청하고 있다. 보스니아는 120억 유로를, 세르비아는 310억 유로를 꾸기로 했다. 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도 구제금융을 요청할 예정이다. 그러나 IMF는 EU와 다른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EU는 ‘좋은 거버넌스’와 부패 척결을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반면, IMF는 공공지출 삭감을 요구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공무원 월급 삭감(최대 40%까지!)에 이어 인원 감축을 단행할 예정이다. 박봉에 시달리는 경찰과 의사들은 다시금 뇌물에 손을 벌리게 될 것이다. 뇌물 수수는 그동안 감소 추세에 있었다.

그동안 미약하게나마 진행되던 ‘사회 안정화’의 노력이 경제위기 때문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노동 수입만으로 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었다. 맞벌이 부부들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불가능한 꿈이 돼버렸다. 가계 수입 감소에 이어 통화가치 절하로 대출이자가 뛰었기 때문이다. 이미 1990년대 초반(전쟁, 국제사회의 제재, 초인플레이션)에 사회적 추락을 경험했다가 새롭게 신분 상승을 시도하고 있던 중산층은 다시금 같은 경험을 반복할까 두려워하고 있다. EU의 기준에 맞춰 민주주의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EU 가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바로 이 중산층이다.

전략도 계획도 없고, 내부 문제로 혼란에 빠져 있으며, 주요 사안에 대해 입장이 분분하기만 한 EU는 새롭게 대두되는 위기 앞에 속수무책이다. 사람들은 EU가 1991년 발발한 유고 사태를 사전에 방지하지 못한 것은 EU의 정치적 통합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증거라고 지적해왔다. 제도적 위기와 경제위기로 인해 EU는 주어진 책임을 수행하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다. 발칸 지역에서 일관성 있는 정책을 추진해나갈 역량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축소된 유럽헌법 채택이 급진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글•장아르노 데랑 Jean-Arnault Derens
최근 로랑 제스랭·마리리즈 오르티즈와 함께 <발칸의 터키 시장>(파리·2009)을 출간했다.

번역•조은섭


<각주>
(1) 에스토니아, 헝가리, 레토니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체코, 키프로스, 몰타.
(2) 이 협약은 2008년 초 목적과 방법 면에서 내용이 많이 완화된 ‘지역협력회의’로 대체되었다.
(3) ‘피란만 분쟁: 슬로베니아의 크로아티아 EU 가입 저지’, <르 쿠리에 데 발캉> 참조.
(4) Joseph Krulic, ‘피란만의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국경선 확정 문제’, <Balkanologie>, Paris, 2002 참조.
(5) Nikos Kalampalikis, <그리스인들과 알렉산드로스 신화>, L’Harmattan, Paris, 2007.
(6) 재판 전에 죽은 얀코 보베트코를 포함해 미르코 노라치, 안테 고토비나, 라힘 아데미 등 총 10명의 전범이 기소되거나 처벌되었다.
(7) Davor Butkovic, ‘이보 사나데르 사임 이후의 크로아티아: HDZ를 장악한 강경파들’, <르 쿠리에 데 발캉> 2009년 7월 2일자 참조.
(8) ‘발칸반도의 새 불씨, 알바니아의 민족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판), 2009년 6월호 참조.
(9) Risto Karajkov, ‘마케도니아인 우리는 누구인가?’, <르 쿠리에 데 발캉>, 2009년 2월 16일자 참조.
(10) ‘마케도니아 위기의 근본 문제들, 새로운 분열로 치닫는 발칸반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1년 10월호 참조.
(11) ‘발칸반도 국경선, 판도라의 상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월호 참조.
(12) 유럽이사회는 각 EU 회원국의 정상들과 외무부 장관, EU 위원들, 유럽위원회 위원장으로 구성된다.
(13)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압박하는 데이턴 협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9월호 참조.
(14) Gerald Knaus & Alex Stiglmayer, ‘솅겐 사증 면제: 수혜자와 소외자’, <르 쿠리에 데 발캉>, 2009년 7월 18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