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어떻게 EU에 신자유주의를 불어넣었나

2016-07-01     베르나르 카상 | 파리8대학 명예교수

EU와 영국은 6월 23일 영국 국민투표에서 결정된 탈퇴를 준비하기 위한 제도적 조정책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브렉시트’ 관련 국민투표의 결과로 인해 유럽의 지도자들은 특히 영국의 압력 아래 ‘대규모 시장’에 한정됐던 공동계획을 완전히 재고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정치적 논의들이 아예 숫자 싸움으로 변하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럽연합(EU) 내 영국의 잔류여부에 관한 6월 23일 국민투표는 ‘EU 탈퇴파’의 승리로 나타나면서, 이 문장을 한 번 더 입증했다. 잔류파와 탈퇴파는 각기 모든 분야의 전문가와 로비스트, 기관을 동원해 영국의 ‘브렉시트’가 지닌 경제적·재정적 장단점에 관한 수많은 상반된 연구전망을 쏟아냈다. 반면, 영국이 EU의 공동체적 관습 및 정책에 영향을 미친 방식에 관해서는 정보가 그다지, 아니 거의 제공되지 않았다. 이러한 영향력의 덕을 입은 EU와 대다수 유럽 국가들은 이런 사실을 널리 알리지 않으려 한다. 특히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프랑스의 경우에는, 자국이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공개하길 원하지 않는다.
 다수의 국외 작전지역에 군사 개입을 감행한 (프랑스를 제외한) EU 회원국들은, 자국의 국제전략적 야망을 유럽과 나토의 차원으로 한정했다.(1) 이들은 EU 차원의 제약과 특혜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국이 EU, 더 나아가 유로존에 속해 있음을 알리며, ‘유럽’과의 관계를 ‘상대’ 혹은 대립이라는 단어로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회원국들의 강제조약에 굴복하고 유로존에서 제명될 위협에 처한 그리스의 경우, “예외 없는 규칙은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2차 대전 종전 이래로 영국 행정부들은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해왔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미국 해리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재임했던 딘 애치슨은 1962년 12월 5일 자 연설에서 이러한 태도를 비난했다. “영국은 제국의 지위를 잃었고 아직도 제 역할을 찾지 못했다. 자치적 열강의 역할을 하려는 시도, 즉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에 기반을 둔 역할, 어떠한 구조와 통일성과 권력도 없는 영국연방(The Commonwealth)의 선두적인 역할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것이다.” 최근에도 이 표현은 ‘브렉시트’ 관련 논란에서 꾸준히 반복되고 있다.
당시 이 발언은 영국 기득권층 사이에서 물의를 빚었는데, 역시 역사적이었던 15여 년 전의 두 연설에서 윈스턴 처칠이 썼던 표현을 조롱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1946년 3월 5일의 취리히 연설로, 처칠은 유럽합중국의 창설을 권장하며 영국은 이를 우호적으로 지지하되 외부에서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는 유럽과 뜻을 같이 하지만 유럽과 하나는 아니다.” 두 번째는 1948년의 연설로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영국을 중심으로 서로 교차되는 ‘세 가지 원(Three Majestic Circles)’의 이론을 발전시켜갔다. 먼저 미국과 ‘백색’ 자치령(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들이 하나의 원을, 다음으로는 유럽이 또 하나의 원을, 마지막으로 영국연방(2)이 마지막 원을 구성한다. 영국이 이 세 개 원 중 유럽에 가장 가깝다 하더라도, 그 중 하나에만 속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 큰 시장, 오로지 그것뿐”
 
영국과 EU 간 관계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최근 미디어에서 흔히 거론되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Semi-detached’다. 영국 외곽 지역에서 두 가구가 한 건물을 나눠 사용하는 주택 형태를 의미하는 단어다. 물론 EU는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영국을 포함한 28개 조각으로 이루어진 건물 하나, 또 하나는 영국이라는 단 하나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건물 하나를 합한 두 개의 건물이지만 말이다. 영국은 상황에 따라 이 두 건물을 자유로이 옮겨 다니는 셈이다. 2016년 2월 18일과 19일의 유럽이사회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얻어낸 양보안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3)
한편 영국이 미국과 ‘특별한 관계’라는 주장은 좀 더 복잡한 사안인 것으로 드러났다. 오랫동안 계속된 이런 환상은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 국가안보국(NSA)이 설계한 국제적 차원의 감시망을 폭로하며 현실화됐다. 세계 각국의 정보부에서 전혀 몰랐던 사항이 대대적으로 공개됐던 것이다. 미국뿐이 아니라 호주와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의 감청기관들은 미국을 위해 전 지구의 모든 메시지를 수집해오고 있었다. 사실상 미국의 전술가들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자국의 하청업자들만 완벽히 신뢰했던 셈이다.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를 가리키는 이 ‘다섯 개의 눈(Five Eyes)’은 2차 대전 이후 1946년 조인된 UKUSA 안보협정(UK-USA Security Agreement)을 비롯해 여러 비밀조약을 통해 공식화됐다. 그에 따라 이러한 ‘앵글로스피어(Anglosphere)’가 EU의 바깥에서 힘의 한 축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영국은 이 축을 출발점으로 삼아 국제무대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균열이 존재하며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이를 뛰어넘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2016년 4월 22일, 런던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은 영국의 EU 잔류는 미국의 국익에 관계된 사안이기도 하다고 단호하게 강조했다. 비록 ‘앵글로스피어’가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에서 여전히 감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강력한 울림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지정학적 사안에 지나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각국 정부의 우선사항이 될 수는 없다. 일단 캐나다는 미국과의 관계를 관리해야 하며 호주와 뉴질랜드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자국의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립지향적인 영향력들은 언어적 연관성을 유일한 유대감으로 삼아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입증한다. 그러나 이 공동체의 분열을 유감스러워하는 열렬한 ‘앵글로스피어’ 애호가들은 자신들이 이미 대승을 거뒀다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이미 대대적인 확장세에 있는 유럽연합이 제2의 ‘앵글로스피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순전히 언어학적으로 보자면 유럽연합은 점점 더 영어권이 돼가고 있다.(4) 대다수의 과학기술, 기업경영, 고등교육, 통신, 상업 분야 등에서 영어는 EU의 자국어들을 대체하고 있다.
예컨대 유럽연합의 공식기관 중 유럽집행위원회는 규정상 각종 조약뿐 아니라 ‘공동체 기득사항(유럽연합의 설립 이래 법규 제정 및 가입국간의 합의에 기초해 축적하고 배양한 실행과 관행은 법적 구속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두 공동체의 기득권으로서 공동체의 여러 기관과 각 가입국의 행동을 지배하고 규율하도록 돼 있음-역주)’을 수호하는 기관이지만, 각 회원국의 자국어(현재는 24개)에 유럽연합의 공식 언어 및 업무언어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1958년 언어관련 규정을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이는 유럽대외관계청(EEAS)이나 유럽이사회 당국도 마찬가지다.(5) 프랑스 국적의 EU집행위원 피에르 모스코비치가 프랑수아 올랑드 행정부의 미셸 사팽 재정부장관에게 공식서신을 영어로 작성해 보냈던 것은, ‘자발적인 노예화’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집행위원회의 이러한 경향에는 명백한 경제적 파급효과가 존재하며,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라는 원칙을 무시한 채 영어권 국가 기업들에게 혜택을 주는 셈이다. 이들은 집행위원회의 입찰서에 회답을 작성할 때 상당 수준의, 혹은 막대한 수준의 번역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6)
영국이 만족해할 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비단 언어적 관행에서만 EU가 영국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부의 철학과 정책도 영국적이며 이는 태생부터 그러했다. EU 체제의 꼭대기에 경쟁 및 자유무역이라는 자유주의적 교리를 자리하게 한 것은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출범시킨 1957년의 로마 조약이었다. 차후의 조약들, 특히 단일유럽의정서(1986) 등은 이를 더더욱 공고히 했을 뿐이었다. 처칠의 견해에 따라 로마 조약에 조인하지 않았던 영국 정부는, 이후 자국의 가능성을 점쳐본 뒤 과거의 실수를 되잡으려 했다. 영국의 EEC 가입은 드골 장군의 반대로 두 차례 실패한 이후 1973년에야 성사됐다. EEC 가입의 대가 및 이득을 실질적으로 따져서 공동체에 가입한 영국의 행보는 유럽 대륙의 사회민주주의 및 기독교민주주의 지도자들이 지향했던 유럽 통합 절대주의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총리를 지냈던 마거릿 대처는 영국이 추구했던 목표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했다. “더욱 큰 시장, 오로지 그것뿐.” 이는 영국에 어떤 행정부가 들어서든 늘 일관되게 추구했던 정치적 노선이었다. 필요한 경우 단독으로라도, 특히 사회 문제의 경우 EU 법규에 예외 조항을 강요함으로써 시장의 활력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기, 모든 형태의 정치통합 혹은 화폐통합을 방해하기, EU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이러한 전략의 성공사례 중 하나는 2004년 및 2007년 EU 회원국이 중앙유럽 및 동유럽 국가로까지 확장됐던 것으로, 그로 인해 독일과 영국이 함께 이득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파견근로자(어느 EU 회원국 기업이 자사 직원을 다른 회원국으로 2년 이내로 파견하는 경우를 의미-역주)’를 이용한 EU 내 소셜덤핑 가능성을 상당 수준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았다.(7) 이처럼 상당히 대단한 술수였지만, 영국의 외교단은 그 결과를 아주 작은 목소리로만 주장할 뿐이며 이는 늘 더 많은 파트너를 끌어들이기 위함이다.
영국은 의외의 파트너를 찾아냈는데, 유럽집행위원회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물론 스스로를 유럽합중국 정부 정도로 여기는 EU 행정부는 대부분의 역대 영국 행정부가 권장해왔던 ‘여러 국가로 이루어진 유럽(Europe of the States)’에 완전히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렇지만 영국 정부에 대해선 자유주의적 기조를 끝없이 생산해내는 귀중한 우방이라고 인식한다. 영국과 EU 간의 이러한 공모는 영국인들이 EU 내부에서 자국 이익에 매우 전략적인 요직에 앉아 있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그 중 한 명은 유럽의회 역내시장위원회(IMCO)의 위원회장직을 십 년도 더 전부터 맡고 있다. 게다가, EU 집행위원장 장 클로드 융커가 런던 시티(영국 금융가)의 영향력 있는 컨설턴트이자 은행계 로비단체의 대변인으로 알려진 조너선 힐을 금융서비스 담당 집행위원으로 임명한 것은 더욱 의미심장한 결정이었다. 이해충돌의 상황에 놓인 위원이 조너선 힐뿐이 아니긴 하지만, 가장 상징적인 결정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는 룩스리크스(룩셈부르크 정부가 조세피난처 역할을 하며 340여 개 다국적 기업의 탈세를 도운 것으로 밝혀진 대대적인 스캔들-역주)가 보여줬듯 융커가 룩셈부르크의 전 총리였을 당시, 애플이나 아마존 등 여러 다국적기업의 세무적 편의를 봐줬던 것과 같은 이유다.(8)
50년 전의 딘 애치슨이 보기에, 영국은 자신의 역할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그가 오늘날 의견을 내놓는다면 ‘유럽 건설의 밀항자’(9)라는 역할을 생각해냈을지도 모른다. 조촐한 승리를 거둔 뒤 그 업적의 칭송을 다른 이들에게 돌리는 밀항자. 그리고 그러한 일에 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진정한 과두정치인인 피터 서덜랜드(세계무역기구‧WTO의 전 사무총장)(10)보다 더 적합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으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정적인 ‘브렉시트’와 관련해 가장 통탄할 모순 중 하나는 영국이 EU를 자국처럼 자유무역주의 집단으로 만드는 데 크나큰 성공을 거뒀다는 데 있다.”(11)   
 
 
글·베르나르 카상 Bernard Cassen 
파리8대학 유럽학연구소 명예교수.
비영리단체 ‘투쟁의 기억(Mémoire des luttes)’의 사무총장.
 
번역·박나리 
연세대 불문학과 및 국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저서로 <세금혁명> 등이 있다.
 
 
(1) 유럽연합 회원국 중 4개 중립국(아일랜드,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만이 나토에 가입하지 않았다. 
(2) ‘국민투표 앞둔 캐머런 영국 총리의 “유럽회의주의”(“Brexit”, David Cameron pris à son propre pièg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2월호 참조.
(3) ‘데이비드 캐머런이 “또 다른 유럽”의 길을 열었더라면?(Et si David Cameron avait ouvert la voie à une “Autre Europe” ?)’, 투쟁의 기억(Mémoire des luttes), 2016년 3월 1일, www.medelu.org
(4) Benoît Duteurtre, ‘유럽의 언어(La langue de l’Europ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6월호 참조.
(5) ‘프랑코포니의 야망을 위해(Pour une ambition francophone)’, 정보 보고서 n° 1723, Pouria Amirshahi 발표, 외무 위원회, 국회, Paris, 2014년 1월호 참조.
(6) Dominique Hoppe, ‘단일언어주의의 대가(Le coût du monolinguism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5월호 참조.
(7) Gilles Balbastre, ‘파견 근로자, 구속된 근로자(Travail détaché, travailleurs enchaîné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4월호 참조.
(8) Eva Joly, Guillemette Faure, <양떼 속의 늑대(Le Loup dans la bergerie)>, Les Arènes, Paris, 2016. 참조.
(9) 자신이 기여하지 않은 집단적 행위의 혜택을 보는 이를 가리키는 사회과학 상의 용어로, 미국 경제학자 맨커 올슨(Mancur Olson)의 <집단적 행위의 논리(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 1965)>에서 처음으로 이론화됐다.
(10)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전 회원, 전 유럽연합 집행위원,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전 사무총장, 골드만삭스 사 및 BP사 전 회장 등을 역임했다.
(11) Peter Sutherland, ‘A year of magical thinking for the Brexiteers’, Financial Times, 2016년 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