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담만으론 유럽을 통합할 수 없다

[Dossier] 허약체질 EU 진단

2010-01-06     프레데리코 산토핀토|브뤼셀 평화안보 정보연구팀 연?

2009년 11월 23일, 헤르만 판롬파위 벨기에 총리와 영국 출신의 캐서린 애슈턴 유럽연합(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유럽이사회 상임의장과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에 각각 선출됐다. 비판론이 없지 않지만, 이것은 EU 회원국이 공동 외교정책을 도모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어렵게 비준된 리스본 협약은 부족한 부분에 대해선 차후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할 것이다.  

8년 만에 탄생한 리스본협약, 일관성·실행력 취약
이사회-위원회 이원구조, 정책보단 정치에 휘둘려


2009년 12월 1일 발효된 리스본 협약이 탄생하기까지 지난 8년간 이를 둘러싼 수많은 협상과 협약, 정부 간 회담, 국민투표, 타협, 유럽 정상회담이 있었다. 이 ‘전투의 길’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외교정책이라는 상징적 분야에서 유럽연합(EU)의 대외활동에 일관성을 부여해줄 체제 개혁은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일처럼 느껴진다. 협약의 표현들은 애매모호하고, 비준 이후에 진행될 협상의 난항을 예고하고 있다. 
  
중요 개혁 가운데는 유럽이사회 상임의장직(임기 2년 6개월, 1회 연임 가능)과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직 신설이 들어 있다. 2009년 11월 23일 헤르만 판롬파위 벨기에 총리가 이사회 상임의장으로, 영국 출신 캐서린 애슈턴이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로 선출됐다. 또한 대외관계청(SEAE)이 신설돼, 위원회 부의장직을 겸임하는 고위대표가 관리하게 됐다. 이 새로운 구성은 기존 시스템(예를 들어 6개월 임기의 의장 순환제는 그대로 유지된다)을 보완하는 것이지만 전체적 조정에 관한 더 자세한 사항은 들어 있지 않다.(1)
 
마법의 주문과 난해한 조합

EU 대외활동의 일관성 부족은 오래전부터 EU 체제에 잠재해온 역설의 산물이다. EU 회원국은 한편으로는 그들이 단결하지 않으면 점차 세계에서 소외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 외교정책이 부상하면 자신들의 주도권을 잃을 것을 우려한다. 간단히 말해서 주권을 나눠갖기는 싫고, 그러면서 더 강한 유럽을 원하는 것이다. 이 모순된 요구사항 사이에서 그들은 주저하고, 언젠가는 마법의 주문이 자신들의 갈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지극히 복잡한 절차들과 제도를 조금씩 만들어왔다. 리스본 협약이 과거와 같은 암초에 부딪히기 전에 이 난해한 조합을 재검토해야 한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상황은 명백해진다. EU의 권한은 경제력(석탄·철강 공동시장)에 근거를 두고 있고, 이를 발판으로 EU는 국제 무대에 점차적으로 등장했다. 무역에 관한 권한 외에- 예를 들어 EU는 세계무역기구(WTO)에서 27개 회원국의 이름으로 협상을 벌인다- EU는 강력한 공동개발 협력정책(전체 예산의 5% 이상, 5개년 개발로 70억 유로 이상)(2)을 수립했다. EU의 변별력과 정체성이 드러나는 분야 중 하나로 간주되는 이 정책은 EU 위원회와 EU 의회라는 양대 초국가적 체제에 의해 관리된다. 1993년 유럽의 무능함을 드러낸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화염 속에서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통해 유럽공동외교안보정책(PESC)이 창설됐고, 1999년에는 유럽안보방위정책(PESD)이 추가로 창설됐다. PESC와 PESD 창설은 EU가 경제적 차원을 넘어 냉전 이후의 도전에 대처하려는 의지를 반영하며, 또한 EU의 권한 확대를 통제하려는 회원국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사실 PESC·PESD는 만장일치제로, 외교정책 분야의 결정권을 가지는 각료 이사회에 유리하도록 위원회와 의회, 사법재판소를 배제하고 있다. 1999년에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직(초대 대표는 하비에르 솔라나)도 이런 맥락에서 신설된 것이다. 그러나 일종의 ‘슈퍼 대사’라고 할 수 있는 고위대표는 정책결정자는 아니다. 개발협력과 무역 부분은 여전히 위원회의 특권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개발과 무역 두 분야는 병행해 진행된다.

2000년대 초 국제 정세가 변화하면서 EU의 이런 구조는 살아남기 힘들게 됐다. ‘새로운 위협’(테러리즘, 국가 부도, 범죄의 세계화, 통제 불가능한 이민)의 부상은 사실상 개발협력의 성격을 변질시켰다.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은 군사력의 한계를 드러냈고, (전쟁 밖의) 지원이 모든 외교정책의 중요 요소로 확인됐다. EU의 대외활동 기구(한편으로는 개발협력, 다른 한편으로는 PESC·PESD)가 여러 부서로 나누어져 있는데다, 개발협력은 EU의 결정 절차를 따르고, PESC·PESD는 정부 간 결정 절차에 따라 서로 다르게 기능하는 만큼 EU의 기능은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각 체제들의 내부 구조 역시 복잡하다. 예를 들어 위원회가 해외에서 활동할 때는 4명의 상임위원(3)이 관리하는 6개 부서가 제각각 일을 벌인다. 여기에 위원장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사회의 경우,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가 이사회를 대표할 뿐 아니라, 6개월 임기의 순번제 의장도 그 대표가 된다. 이사회의 이런 구조는 일관성 결여와 불연속성의 근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리스본 협약은 이런 복잡한 맥락에서 시행된다. 새로운 체제에서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미묘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고위대표가 갖는 예전 권한과 위원회 부의장의 권한이 통합된다. 따라서 고위대표는 한쪽 발은 이사회에, 또 다른 발은 위원회에 담게 되고, 머리 하나에 모자를 두 개 쓴 셈이 된다. 길고도 험난한 협상의 결과로 탄생한 이 해결책에서 유럽연합 대외활동의 일관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머리는 하나 모자는 둘
정확하게 말하면, 리스본 협약에 따른 새로운 직제 배치는 이사회와 위원회로 양분된 조직 구조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예를 들어 고위대표가 협력 분야에 개입하려면, EU를 세계에서 가장 통합된 지역기구로 만드는 초국가적 절차에 근거해 위원회의 고유한 권한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반면 외교 군사 분야에서 활동하려면 리스본 협약 이전 상태로 되돌아와야 한다. 즉 회원국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것이지 결정권자로 활동하는 게 아닌 것이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직제 배치는 문제의 근원은 해결하지 않은 채 두 영역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셈이 됐다.

리스본 협약에 따른 체제 구조는 수수께끼와 애매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어, EU 내부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0년 7월 EU 의장국이 되는 벨기에는 벌써 고위대표가 외무 각료회의를 주재하는 것이 원칙이기는 하지만, 계속 시행될 순번제 의장이 PESC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포했다. 그 이듬해 1월 의장국이 되는 스페인 또한 같은 의견이다. 이렇게 될 경우, 리스본 협약 이전에 각료회의의 대외활동은 3명이 수행했는데, 리스본 협약 이후에는 4명이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2010년 2월에 위원회 개혁이 시행되는데, 5개 부서(4)에 3명의 상임위원을 남겨두고, 여기에 고위대표 겸 위원회 부의장, 그리고 새로 대외관계청이 추가된다. 대외관계청은 이사회와 위원회에 분산된 수많은 부서를 통합하게 되는데, 아직까지 위원회와 이사회 사이에서 명확한 위치가 정해지지 않았다. 또한 유럽의회가 위원회에 대한 활동 통제권을 갖고 있지만 PESC 활동에 대한 통제권은  없어, 앞으로 어떻게 양쪽을 연결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러시아에 대한 비조직적 대응
게다가 리스본 협약은 (장관급인) 고위대표와 위원회 부의장의 서열을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았다. 위원회 위원이 자신의 사임을 요구할 수 있는 의장에게 보고해야 한다면, 이사회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애슈턴 외교 고위대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또한 EU 회원국에 관한 브뤼셀 집행부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는가? 유럽 국경을 넘어서면 위원회는 대표가 두 명인 하나의 기구가 되는 셈이다. 대외활동에서 체제적 이원성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이원성이 위원회 내부에까지 전파될 위험이 있다. 

비준 이후 새 협상에서는 이런 문제들과 또 다른 문제들이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의 생존 가능성은 지도부에 임명된 인사들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판롬파위와 애슈턴이 각각 상임의장과 외교 고위대표로 임명되자, 벌써부터 그들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선택은 유럽 국가들이 공동의 외교정책을 유지하려는 의지로 해석된다. 비록 리스본 협약이 EU의 복합성도, 그 행정적 과중함도 해결하지 못한다 해도, 일각에서는 공동 외교정책이 없는 것이 조직의 개혁을 가로막지 않을까 우려한다. 하지만 조직 개혁보다는 정치적 차원이 우선 고려돼야 한다. EU 회원국은 현재 국제 문제를 다루면서 너무 자주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보인다. 이 이해관계는 객관적 상황을 반영할 뿐 아니라, 전체 외교정책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각 회원국의 자국 중심적인) 선택의 결과다.

가장 명백한 예는 에너지 문제다. 어떤 체제 개혁도 유럽인이나 공동 정책을 통일시킬 수 없을 것이다. 공동 정책 없이, 어떻게 EU가 러시아에 공동 대응할 수 있는가?(5) 더 구체적으로,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이 미국의 셰브론과 컨소시엄으로 그루지야를 횡단하는 BTP(바쿠~트빌리시~세이한) 송유관을 건설하고, 독일이 발트해 해저에 유럽의 절반을 우회해 모스크바로 직접 연결되는 가스 공급관을 건설하는 마당에, 런던과 베를린이 러시아-그루지야 분쟁에 대해 서로 다른 정책을 편다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럽의 공동 이해관계가 과연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이다.(6)

여러 대학 등에서 이뤄지는 EU 관련 강의에서는 대개 EU 결성 과정을 ‘은밀한 혁명’으로 소개한다. 특히 통합 절차의 한계와 결점을 설명하는 데 ‘점진주의’ 이론이 사용된다. 어쨌든 현재 이 논리는, 시행할 정책의 내용 자체에 대한 통찰은 미룬 채, 더 벅차고 혼란스러운 체제 타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것 같다.

글•프레데리코 산토핀토 Federico Santopinots
브뤼셀 평화안보 정보연구팀(GRIP) 연구원으로, 유럽 문제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각주>
(1)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진이 접촉했을 때 EU 위원회는 새로운 직제 개편으로 당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앞으로의 기능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뿐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편집부). 
(2) PESC 예산은 연간 약 2억5천만 유로(2007~2013년 총 17억4천만 유로)다.
(3) 대외관계(캐서린 애슈턴), 개발과 인도주의 지원(카렐 드 구치), EU 확장(올리 렌), 무역, 유럽 근접 정책, 유럽 에이드(EuropeAid) 협력(베니타 페레로 발트너).
(4) 무역사무국, 개발사무국, EU 위원회 인도주의 지원국, 개발 지원을 관리하는 유럽 에이드, 확장사무국(유럽 근접 정책도 이 사무국 소관이 된다), 5개가 해당된다.  
(5) 마티아 레몽, ‘유럽 에너지, 경쟁과 종속’,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2월호 참조.
(6) 미셸 푸셰, ‘EU, 어떤 국경과 어떤 계획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5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