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 급진적 자유주의로 선회한 페루
2016-07-01 아만다 샤파로
페루 대선에서 엘리트 관료 출신의 경제전문가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77)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녀 대통령을 꿈꿨던 게이코 후지모리(41)의 대권 도전을 또다시 좌절시켰다. 6월에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쿠친스키는 51.12%의 득표율로 승리했으나, 게이코 후지모리 후보와의 표차가 4만1천표(0.24%)에 불과해 후지모리의 정치적 협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쿠친스키가 소속된 ‘변화를 위한 페루인당(PKK)’의 의석수가 전체 130석 중 18석에 불과해, 후지모리가 대표로 있는 73석의 ‘민중권력당(FP)’의 지원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중도우파인 두 정당이 정치·경제적 성향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경기활성화 등 주요 정책을 두고 협력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급진적 자유주의 성향의 우파인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가 반동적 성향의 우파인 게이코 후지모리(1)를 상대로 힘겹게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쿠친스키나 후지모리 모두 친기업적인 자유주의적 우파로, 페루는 남미 우파정치 세력의 본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선거기간 중 페루 언론들은 좌파 정권에 이은 우파의 정권 재탈환 여부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질 법 했지만, 대선 캠페인과 관련된 각종 부정행위와 비리 의혹들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좌파지지자들의 상당수가 부동층으로 돌아섰고, 심지어 우파 지지로 선회했다. 투표를 불과 한 달 남겨두고, 페루 최고의 선거기구인 선거관리위원회(JNE)는 선거기간 내내 지지율 2위를 달린 경제학자 훌리오 구스만과 백만장자 세사르 아쿠냐의 선거 출마 자격을 박탈시켰다. 훌리오 구스만은 정당 등록 법규 위반 혐의를, 세사르 아쿠냐는 재해를 당한 상인들 중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인도적 지원을 가장한 금품을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러한 선관위의 갑작스런 결정은 선거 구도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전 국민의 분노와 혼란을 초래해, 수백만 명의 유권자들을 부동층으로 만든 것이다. 5명의 선관위원들은 새로 도입된 선거법을 엄격하게 적용한 결과라고 밝혔다. 선거운동이 이미 시작한 후인 2016년 1월 발효된 이 법은 20솔(약 5유로) 이상의 가치를 지닌 금품이나 선물의 제공을 금지한다. 게이코 후지모리의 반대파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그렇다면 유사한 혐의로 기소된 다른 후보들, 예를 들어 게이코 후지모리에 대해서는 왜 이 법을 그처럼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는 건가요?”
지난 2월 14일, 게이코 후지모리는 한 문화행사에 방문해 참가자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게이코 후지모리는 결선투표에서 쿠친스키에게 분패했다. 투표의 적법성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미주기구(OAS)의 루이스 알마그로 사무총장은 2016년 4월 1일 트위터를 통해 ‘절반만 민주적인(Semi-democratic)’ 선거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2001년 이후 네 번째 민주 대통령이 탄생한다며 자축하고 있던 페루의 입장에서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오히려 이번 대선 캠페인은 각종 부정부패와 무능력한 기관들의 행태로 인해 페루 민주주의의 결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이는 남미에서 이미 가장 취약한 국가 시스템에 속해 있는 페루 국민들의 신뢰감을 더 떨어뜨리는 일이다.(2)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2014년에는 지방의원 선거와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 백여 명의 후보들이 마약밀매에 연루돼 있다는 의혹이 일었고, 이들 중 10여 명은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 몇 달간 페루 대부분의 미디어 공간은 대선 후보 자리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후보들의 공약, 프로필, 특히 후보들 간에 별반 차이가 없는 이데올로기는 뒷전이었다. 후지모리, 쿠친스키, 전 대통령인 알란 가르시아와 알레한드로 톨레도는 사실상 거의 같은 경제공약을 내걸었다.
유일하게 차별화된 계획을 제안한 후보는 바로 35세의 젊은 국회의원인 프랑스계 페루인 베로니카 멘도자(Verónika Mendoza)였다. 좌익연합인 광역전선(Frente Amplio)의 수장인 그녀는 투표를 불과 몇 주 앞두고 놀라운 상승세를 보였다. 그리고 가스사업 계약의 재협상을 이끌어내는 등, 이제껏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좌파의 주제들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그럼에도 대세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로니카 멘도자는 17.8%의 지지율과 국회 의석 21석을 바탕으로 대선 1차 투표에서 3위를 기록하며 국회의 주요 야당으로 떠올랐다. 경제적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페루의 현 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한 이변이라 할 수 있다. 역사학자 안토니오 자파타는 페루를 ‘우파 국가’로 분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3) 페루 현대사에서 좌파가 권력을 잡았던 시기는 농업 개혁과 전략적 분야들의 국영화를 주도했던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1968-1975)의 집권기가 유일하다.
공약의 거품화가 좌파 실패의 원인
유독 페루에서 좌파가 힘을 쓰지 못한 이유로는 크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적이고 레닌주의적인 담론들이 힘겨운 쇄신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를 지나고서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정치학자 스테파니 루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장좌파세력인 ‘빛나는 길’이 표방한 마오쩌둥주의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한 것도 좌파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4) 반면 후지모리즘은 기존 정치인들과 노조를 탄압하면서 좌파의 당파적인 구조와 지역사회와의 뿌리 깊은 유착관계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군인 출신의 오얀타 우말라가 진보주의적인 계획을 내세워 2011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좌파의 귀환은 드디어 현실화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말라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자신이 내걸었던 공약들을 뒤로하고 전임자였던 우파 대통령들의 전철을 밟는 길을 택했다. 대통령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현재 그의 성적표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지지율은 20%에 불과하고 국회 의석도 과반수를 차지하는데 실패했다. 그가 이끄는 집권 여당인 페루국민당은 거의 해체되다시피 한 상태로, 이번 대선에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우말라 대통령이 집권한 5년 동안 페루는 무려 7번이나 정부가 교체됐다. 현지 주민들과 광산업체들 간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회적‧환경적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우말라 대통령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5)
원칙적으로는 대선 당시 그가 내세운 ‘금보다 물이 우선’이라는 슬로건이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 라이트모티프(주도동기)가 돼야 했지만, 우말라 대통령은 모든 대규모 광산, 특히 페루 북부 콩가의 남미 최대 규모의 금광산 개발 프로젝트와 아레키파 지역 티아 마리아의 구리개발 프로젝트를 강행했다. 이에 반대하는 시위들을 무력 진압하고 주동자들을 처벌하는 과정은 기존에 우말라 대통령을 지지하던 사람들까지도 완전히 등을 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재임기간 중에 발생한 시위로 총 66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6)
몇몇 분석가들이 교육 부문의 진보(장학금, 대학 개혁), 사회복지 프로그램(고령연금, 건강보험혜택 확대), 빈곤율 감소(2011년 27.8%, 2015년 21.8%)에 있어서 우말라 대통령의 업적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경제적 건전성 측면에서 최근 몇 년 동안 페루의 상황은 한층 더 악화된 상태다.(7) 경제 분석가 산티아고 페드라글리오는 “아무리 좋게 평가해봤자 중간 정도다”라고 말한다. 또한 범죄, (8) 마약 밀매,(9) ‘빛나는 길’의 재출현 문제들과 관련해 페루 국민들의 불만은 나날이 높아져가고 있다.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쿠친스키는 독재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신을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2011년 대선에서는 민간 투자자들에 반대하는 우말라를 견제하기 위해 게이코 후지모리와 연합한 적이 있다. 쿠친스키의 부모는 본래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페루로 다시 이민을 온 경우이다. 쿠친스키는 톨레도 대통령 집권 당시 경제부 장관을 역임했고 월스트리트에서도 은행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지만, 그가 내세운 민간 투자 촉진, 감세, 행정 규제 완화 등을 골자로 하는 경제계획은 후지모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페루는 10년 넘게 평균 6%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해오다가 최근에는 그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수출의 60%가 원자재일 정도로 원자재 의존도가 높다. 2015년에 페루는 세계 2위의 은 생산국, 세계 3위의 아연, 구리 생산국, 세계 6위의 금 생산국이었다. 게다가 가스와 석유 개발도 현재 진행 중이다. 반면, 산업화가 거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근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쿠친스키는 수력발전소, 공항 건설, 광산 개발과 같은 모든 종류의 초대형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입장이라, 현지 주민들과의 갈등 심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쿠친스키는 기득권층과 기업가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2015년 고위간부연례회의(CADE)에서 그는 84%의 지지율로 다른 후보들을 큰 차이로 따돌리고 1위에 올랐다. 게이코 후지모리는 2위였다. 그러나 쿠친스키에 대한 페루 국민들의 우려는 만만찮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2006년 그가 안데스 지역 주민들에 대해 내뱉은 “뇌에 산소가 부족하다”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용서하지 못한다.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그는 현재 국회 의석 130석 중에 73석을 확보하고 있는 후지모리 세력들과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페루의 정치적‧경제적 전망은 적어도 향후 몇 년 동안에는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단지 독재자 대통령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글·아만다 샤파로 Amanda Chaparro
기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게이코 후지모리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아버지의 곁에서 어머니를 대신해 영부인 역할을 수행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인권유린, 국고유용, 부정선거 등의 혐의로 2007년 징역 2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2) <Latinobarómetro>에 의하면, 페루 국민들은 온두라스 국민들과 멕시코 국민들과 함께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다.
(3) Cf. Antonio Zapata, Pensando a la derecha, Planeta, 2016
(4)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하면, 20년 동안 페루 정부와 ‘빛나는 길’ 게릴라 간의 유혈충돌로 인한 사망자는 7만 명에 달한다.
(www.cverdad.org.pe/ifinal/conclusiones.php)
(5) 프랑스의 인권보호기구에 해당하는 Defensoría del Pueblo의 최근 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211건의 갈등이 진행 중이며 이 수치는 5년 전부터 변하지 않았다(www.defensoria.gob.pe/informes-publicaciones.php).
(6) <Defensoría del Pueblo> 사이트에 공개된 연간 보고서: www.defensoria.gob.pe/informes-publicaciones.php
(7) 국립통계정보청(INEI), www.inei.gob.pe
(8) INEI에 의하면, 도심 지역에 거주하는 15세 이상 페루 국민의 30.8%가 2015년에 발생한 범죄의 피해자였다(대부분이 절도 범죄). 이는 2011년에 비해서는 10%p 하락한 수치이다. www.inei.gob.pe
(9) 미 국무부 보고서에 의하면, 페루는 콜롬비아에 이어 세계 2위의 코카인 생산국이다. www.state.gov
박스기사
후지모리즘, 독재정권 10년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간 페루의 대통령으로 집권했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블라디미로 몬데시노스 국가정보부(SIN) 부장은 그의 심복이었다. 이 둘은 반인권 및 부패 혐의로 25년 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일본계 이민 2세인 후지모리 교수는 페루가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을 당시 혜성같이 등장해 단숨에 높은 자리까지 올랐다. 당시 페루 국민들은 2,000%의 기록적인 인플레이션과 10년 넘게 계속되던 무장 공산반군세력인 ‘빛나는 길(Shining path)’과의 내전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후지모리는 테러 소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1992년 4월에는 군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 정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후지모리는 ‘후지쇼크’라 불리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도입해 IMF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인 규제 완화, 민영화, 시장에서의 국가 역할 축소 등을 실행으로 옮겼다.
후지모리 집권 10년은 부정부패가 만연하던 시기였다.(1) 부정부패는 국가의 모든 계층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는데, 후지모리 정부는 최악의 후견주의로 점철된 부패 정부로서 페루 국민들의 기억 속에 각인돼 있다. 2000년부터는 잇따른 소송으로 정부의 주요 인사 10여 명이 부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여기에는 내무부, 국방부, 경제부, 농업부의 장관들, 군과 국가정보부의 수장들, 그리고 법관들이 포함돼 있다. 후지모리 집권기는 또한 반대파들에 대한 박해와 특수암살부대인 콜리나 그룹(2) 등 군사력을 동원한 권력 남용이 빈번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당시 페루 정부는 산아제한정책을 펼치면서 수만 명의 여성들에게 불임수술을 강요했는데, 이들의 대다수는 원주민이거나 빈곤층 출신이었다.(3)
2000년 후지모리는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페루 국민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한편으로는 후지모리는 빛나는 길의 수장 아비마엘 구즈만을 체포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테러리즘을 상징적으로 종결시킨 인물이자 페루의 경제를 회복시킨 장본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후지모리는 후견주의, 인권 유린, 독재 정치의 동의어다.
(1) 국제투명성기구의 2004년 부패 보고서에 의하면, 후지모리 정부가 빼돌린 자금은 무려 6억 달러로, 전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정부 중 하나로 꼽혔다.
(2) 1991년 바리오스 알토스 민간인 학살사건과 1992년 라칸투타 대학 납치 살해사건을 일으킨 무리
(3) <Defensoría del Pueblo>에 의하면, 27만 2,028명의 여성들이 불임수술을 받았으며, 이들 중 수천 명은 본인의 동의 없이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참조: 프랑수아즈 바르텔레미, <Stérilisations forcées des Indiennes du Péru (페루의 인도계 여성들의 강제불임수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4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