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더러운 전쟁’

2016-07-01     로라-마이 가베리오

쿠르디스탄노동당(PKK) 민병대와 전투를 벌여온 터키군이 2015년 가을부터 전개한 보복조치로 터키 남동부 지역이 폐허로 변하고 있다. 수많은 마을이 파괴됐으며, 현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민들 상대로 끔찍한 만행들이 발생했다.


터키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 실로피의 대광장에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인구 8만 명의 이 도시는 이라크 및 시리아 국경으로부터 15km도 채 떨어져있지 않다. 2015년 12월부터 2016년 1월까지 터키 치안병력이 이 지역 주민들과 쿠르디스탄노동당(PKK) 투쟁가들을 상대로 공세를 퍼부었다. PKK는 민주적 연합주의를 표방하는 조직으로, 쿠르드족이 중심을 이루는 지역들의 독립을 주장해왔다. 전투는 외부와 단절된 가운데 벌어졌다. 다른 여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실로피에도 수차례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총 37일 동안 지역이 고립됐다.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비롯한 터키 전역에서 군경을 겨냥한 테러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그럴수록 정부의 탄압은 강화되고, 이는 새로운 보복을 유발한다. 지난 6월 10일, PKK에서 분리된 급진단체인 ‘쿠르드 자유 매파(TAK)'는 이스탄불에서 경찰 차량을 대상으로 한 폭탄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며칠 전, 터키 정부는 일부 의원들의 면책특권을 쉽게 해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 목적은 바로 인민민주당(HDP) 소속 의원 59명을 탄압하는 것이었다. 봄날 아침, 실로피에는 긴장이 감돈다. 터키 경찰의 무장차량이 수시로 지나가고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선회한다. 전쟁이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상기시켜주는 광경이다. 접이식 탁자와 타자기를 들고 온 두 명의 대서사(代書士) 앞으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대서사들은 요즘 일거리가 늘었다. 파괴된 가옥과 관련된 양식, 교도소 소장에게 보낼 편지, 사망신고서 등 다양한 문서 작성을 요청받고 있다.    
60대 여성인 리스키예 세플렉은 전투가 벌어진 지역 한복판에 거주한다. “탱크가 우리 집 뒤에서 모스크를 겨냥했는데, 글쎄 포탄이 응접실을 뚫고 지나갔지 뭐예요!” 세플렉은 쿠르드 여성들이 많이 착용하는, 머리를 반쯤 가리는 베일을 쓰고 있었다. 레이스 달린 흰색 베일 아래로 보이는 그의 눈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플렉은 남편과 딸들, 손자들과 함께 정원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온 가족이 남자아이가 가져온 새옷들을 들여다보았다. 
“제 손자 테메르에게 주려고 준비했어요.” 세플렉 씨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16세인데 교도소에 있어요. 전에는 3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있었어요. 총알이 엉덩이를 관통했거든요.” 소년은 투쟁군도 아닌데, 어쩌다가 전투에 휘말리게 됐다고 한다. 실로피의 모든 주민들이 그렇듯이.
우리가 들른 터키령 쿠르디스탄의 모든 도시에서 이러한 증언을 접할 수 있었다. 어디서든 비슷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84년 발발해 4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분쟁을 끝내기 위해, 2009년 터키 당국과 PKK가 개시한 평화협상은 중단됐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2016년 5월 24일 새로 임명된 비날리 이을드름 총리는 “더 이상 PKK와의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청소’, ‘숙청’ ‘완전한 승리’ 등···. 이들이 구사하는 어휘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
2013년 봄, 협상이 진행되면서 쿠르드족 투쟁군이 이라크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이들은 시리아 내전의 여세를 버텨내지 못했다. 친 PKK계 시리아 쿠르드군과 이슬람국가조직(IS)이 맞붙은 코바니 전투로 긴장은 다시금 고조됐다.(1) 쿠르드족 거주 도시에서는 터키 정부의 소극적 대처를 비난하는 시위가 잇달아 벌어졌다. 정부는 IS와의 결탁을 의심받고 있었다. 2015년 7월 20일, IS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테러로 사망자 33명, 부상자는 100명 이상 발생했다. 시리아 국경 인근 도시인 수루치의 문화센터에 모여 코바니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길을 떠난 터키 및 쿠르드계 사회주의 청년들도 피해를 입었다. 이후 시위는 배로 증가했다. 테러 발생 이틀 후, PKK는 터키 정부가 지하디스트와 공모관계에 있다고 비난하며 남부 시리아 국경 인근 도시 제일란프나르에서 터키 경찰관 두 명을 죽였다. 그러자 터키 당국은 즉시 IS와 PKK를 동시에 겨냥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실제 목표는 쿠르드군이었다.

터키군에 의해 쑥대밭이 된 쿠르드 마을

지난 9월 이후, 쿠르드족의 주요 본거지에서 발생한 교전은 점차 격화됐다. 12월 초, 실로피에서는 애국혁명청년운동(YDG-H) 계열 조직들이 “터키 경찰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로에 참호를 파고 바리케이드를 세우고는 자치구역을 선포했다. PKK 본부가 있는 칸딜 산맥 등 이라크 지역에서 온 정예 전투원들이 신속히 젊은 병사들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았다. 이러한 도심 봉기에 맞서 터키는 장갑차와 헬리콥터를 대동한 보병대 병사 1만 명을 투입했으며, 곳곳에 상시 봉쇄 조치를 내려 자유롭게 진압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끔 했다. HDP 소속 페르하트 엔주 의원은 “통행금지가 도시를 파괴하는 기계로 변질됐다”고 말한다. 도심 전투가 한바탕 끝나고 PKK 병사들이 물러나자, 쿠르드계 도시 당국자들이 최전선에서 정부의 보복을 당했다. HDP에 당적을 가진 많은 시장들이 체포됐다. 실로피의 에민 에스메르 시장도 ‘반정부 무장 반란 선동’이라는 죄목으로 구금돼 사법 처리됐다.  
남동부 지역의 많은 주민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IS와 연계돼 있고,  쿠르드족의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 IS와 모종의 협정까지 체결했을 것이라 확신한다. 2015년 10월 앙카라에서 열린 HDP 집회 당시 발생한 테러로 97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범인은 체포도, 확인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이 의혹을 부추긴다. 또한 터키정보당국이 시리아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무기를 공급했음을 시사하는 영상을 보도한 일간지 <줌후리예르> 기자 2명을 기소하고, ‘국가기밀누설’이라는 죄목으로 실형을 선고한 것 역시 그렇다.(2) 교전 당시 정부군에 지하디스트들이 포함돼 있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쉬르 주민인 압뒬케림 F.(3)는 자기 집 응접실에서 기도 중이던 남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터키어를 쓰지 않았고, 아마도, 아제르어를 쓰는 듯 했다. 그리고 수염을 기른 모습이 IS 대원들과 흡사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기를 가득 메운 최루가스 때문에, 몇 주일 간 집을 떠나 있다가 신분증을 가지러 돌아온 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추측에 대한 확증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많은 관측요원들과 외교관들이 말하듯, 밀수원유를 수송하는 트럭들과 지하드 지원자들은 매우 쉽게 시리아와 접한 국경을 넘을 수 있다. 또한, 경찰과 헌병의 특수작전부대(각각 PÖH 및 JÖH)도 작전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도시 벽 곳곳에 서명과 함께 남긴 인종차별적, 성차별적인 문구들이 그 증거다. 가령 실로피에서도 이러한 글귀가 곳곳에 눈에 띈다. “나의 사랑하는 터키, 신의 이름으로 우리가 너를 청소한다. 우리는 JÖH. 당신들을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 찾아왔다!” 또한 폐허가 된 지즈레에서는 쿠르드 여성의 강간을 선동하는 표현도 볼 수 있다. “우리가 당신들을 교육시킬 차례이다! - PÖH ”, “여인들이여, 우리는 여기 있는데 당신들은 어디 있는가? - JÖH”   
한편, 헌병 정보수집·반테러활동기관(JITEM)이 해체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현지에서 만난 터키 기자들과 HDP 의원들로부터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이 조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농후하다. JITEM은 헌병, 군인, 그리고 극우민족주의 단체인 ‘회색늑대'(4)의 일원들로 구성된 비밀 세포조직으로 1990년대 쿠르드족 학살을 수차례 저질렀다. 이들은 자신들이 거쳐 간 마을 벽에 “늑대들이 피 냄새를 맡고 찾아왔으니 전율하라!”는 글귀를 남기곤 했다.    
쿠르드족 민간인들을 상대로 쓰는 수법은 20년 전과 다를 게 없다.  JITEM 소속을 자처하는 무리들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지속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포탄에 맞아 갈기갈기 찢어졌거나, 휘발유를 뿌려 태운 쿠르드족 투사들의 시체 사진을 게시하곤 하는데, 특히 여성들의 시신에 유난한 집착을 보인다. 
 터키인권재단(TIHV)에 의하면, 지금까지 발생한 사망자는 300~400명, 이주민은 약 60만 명이다. 지난 1월 말 국제엠네스티는 “터키정부의 공세로 약 20만 명의 목숨이 위험에 처해있다”며 비난했다. 이 기구는 이러한 상황을 일종의 “집단적 형벌”이라고 본다. 디야르바키르 지역의 오래된 성곽 마을인 쉬르는 터키령 쿠르디스탄의 수도로 여겨지는 곳인데, 마을의 서쪽 절반에서는 주민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을의 약 70%가 파괴됐고,(5) 접근조차 쉽지 않다. 경찰관 7명이 희생된 테러 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지난 4월 1일, 사임을 앞둔 아흐메트 다부토글루 당시 총리가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이곳을 방문했다. 그는 파괴된 지역을 대상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이 마련한 도시복구계획을 선전하면서 “쉬르를 새로운 ‘톨레도'로 만들겠습니다!”라고 외쳤고, 미리 선별된 군중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한 식당의 TV 모니터 앞에 젊은 종업원들이 기가 찬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자신들의 마을, 자신들의 삶을 싹쓸이 하겠다는 저들의 공약에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연설이 끝나고 관리들이 떠나자, 디야르바키르 주민들도 제약이 많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교차로마다 검문을 거쳐야 하며 집으로 못 돌아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이곳은 점령지구가 돼버렸어요!” 가푸르 S.가 짜증을 내며 말한다. 문학 교사인 그는 원래 화를 잘 안 내는 성격이다. 불에 타지 않고 남은 두 학교 중 하나인 자신의 일터로 가기 위해 그는 매일 아침 쉬르 진입로에 경찰이 쳐놓은 바리케이드를 통과해야 한다. 매일 그는 웃통을 벗고 수색을 당하고 자신을 잘 아는 똑같은 경찰관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그는 현대적인 도시에서 살만한 여력이 있다. 10년이 넘는 교직 경력으로 전근을 요청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아이들을 버릴 수 없어요. 그렇잖아도 쉬르는 디야르바키르에서 제일 가난한 동네입니다. 이 아이들도 터키의 다른 아이들과 같은 시험을 치러야 해요.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집이 폭격 당하지는 않죠. 서부의 터키인들과 쿠르드족이 교육에 있어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아이들도 엔지니어가 될 수 있어요. 그럴 기회만 있으면요.”
그 역시 길에서 쿠르드어로 말한다고 경찰로부터 구타를 당하던 세대이다. 또한 그들의 할머니들은 터키어로 의사표현을 할 줄 모른다고 병원에서 쫓겨나곤 했다. 오늘날 터키령 쿠르디스탄 주민들이 모두 그렇듯 가푸르 S.도 다시금 일상생활의 제약을 겪고 있다.    
전쟁이 재개된 이후, 보탄(터키 쿠르드인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역을 부르는 이름)의 모든 도로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통행 허가 여부는 경찰 마음에 달렸다. 디야르바키르에서 지즈레까지 평소에는 차로 4시간이면 충분했지만 몇 달 전부터는 7시간이 족히 걸린다. 2015년 12월 이후, 폭력의 수위나 당국의 기분에 따라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지는데 이는 몇 주일씩 지속되기도 한다. 우리는 전투가 휩쓸고 간 지즈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앞에 펼쳐진 광경은 폐허였다. 주민들은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티그리스강 좌안의 주디 마을에는 무너진 건물의 골조만 남아있었다. 포탄을 장착한 기둥으로 집중폭격한 결과다. 주거지역 면적의 80%가 완전히 파괴됐다.  
봉쇄조치가 해제되고 몇 달이 지났다. 주민들은 무너진 자기 집에 개인 물품을 가지러 왔다가, 시신 잔해를 발견하곤 한다. 완전히 고립돼 있던 79일 동안 터키 당국이 저지른 만행 중, 주민들의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야만의 지하실’이다. 최소한 두 번 일어난 일이다. 약 30명의 사람들이 갇혀있는 건물에 당국은 며칠 동안, 심지어 몇 주일 동안 폭격을 가했다. 터키군은 구급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행로를 차단했고 부상자들은 죽어갔다. 이른바 ‘반테러작전'이 종료되자 불에 타버린 시신들만이 남아있었다. 그 중에는 아이들도 있었다. 희생자들의 신원 확인을 위해 친지들은 DNA를 채취, 제공해야했다. 그들은 손에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나왔다. 그 중 17세 소년은 “타버린 5kg의 뼈와 살”을 들고 자기 아버지라고 했다.   
우리는 보스탄지 거리의 지하로 내려갔다. 3월 24일 현재 접근이 가능했다. 답답한 공간에 시체 냄새가 진동했다. 숨쉬기도 힘들었다. 바닥에는 타버린 시신의 흔적이 있었다. 잿더미 속에서는 아이의 뼛조각으로 추정되는 물체도 발견됐다. 8개월 이상 지속된 터키 쿠르드족에 대한 봉쇄조치가 이 공동무덤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곳은 그나마 추모지로도 남아있지 못했다. 우리가 다녀간 이후 당국에서 밀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난 4월 발표한 도시재건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 이런 모든 지하공간뿐만 아니라 전쟁범죄의 증거가 될 만한 모든 흔적은 불도저와 크레인으로 제거되고 말 것이다. 로자바(시리아 쿠르디스탄) 지역 주민들을 도우려는 터키 쿠르디스탄 자원자들의 모임인 ‘로자바 연대'는 코바니에서 매우 큰 활약을 벌여왔다. 이제 자신들의 땅에서 활동을 펼치게 된 이 단체는 봉쇄 해제 1주일 후인 지난 3월 9일 지즈레에 접근할 수 있었다. 우선적 임무는 주디 마을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버려진 창고를 거점으로 삼아 식량을 배급하는 것이었다. 정부의 권력 횡포에 저항해온 터키 서부의 진보주의 활동가들도 이들에게 힘을 보탰고, 로자바 지역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포탄 파편에 맞아 얼굴 반쪽을 잃은 페리드 B.는 로자바 연대 회원들에게 1990년대 정부군과 쿠르드 병사들 간에 일어간 첫 번째 ‘더러운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당시 PKK 편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장기간 투옥됐다. 그는 감옥에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을 수십 권 읽었다. “프랑스가 일으킨 게 민중혁명인지 부르주아혁명인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우리는 혁명에도 혁신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쿠르드족의 민주주의는 여성과 환경, 지역자치에 중심을 두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들이 우리 여성들의 훼손된 시신을 끌고 다니고, 우리 환경을 파괴하며, 우리의 시장들을 체포하는 겁니다.”  
통행금지의 어둠 속에 벌어진 새로운 ‘더러운 전쟁'과 그에 따른 집단적 형벌에 주민들의 당혹감은 커져가고, 쿠르디스탄과 다른 터키 지역 간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고 있다. 



글·셀라하틴 데미르타시 Selahattin Demirtas
터키 인민민주당(HDP)의 공동대표로 대국민의회(TBMM)의 HDP 원내대표이며 2015년 6월부터 이스탄불 주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디야르바키르(2007~2011)와 하카리(2011~2015) 주의원을 지냈다.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시리아령 쿠르드족 도시인 코바니는 2014년 9월 일부 지역이 IS에게 함락됐으나, 2015년 1월 쿠르드군이 탈환했다. 이후 쿠르드군은 계속 남쪽으로 진격 중이다.
(2) 편집국장인 잔 뒨다르와 앙카라 지국장 에르뎀 귈은 각각 5년 10개월과 5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3개월 후 터키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석방된 이들은 자유의 몸으로 항소심을 기다리고 있다.
(3) 우리가 만난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성(姓)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했다.
(4)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저격한 메흐메트 알리 아자도 '회색늑대' 소속이었다. 현재도 활동 중인 이 단체는 폭력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며, 정계 잠입을 시도하기도 한다. 
(5) 디야르바크르 시당국 2016년 3월 1일자 집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