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잔지바르

2016-07-01     마일리스 쇼벵
2016년 3월 20일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자치 군도(群島)인 잔지바르(Zanzibar)에서 실시된 총선에 문제가 제기됐다. 삼엄한 군대의 감시와 대다수 주민의 보이콧 가운데, 퇴임을 앞둔 대통령 알리 모하메드 셰인이 재선출됐다. 이에, 야당은 20%도 안 되는 주민들이 선거에 참여했다고 지적한다. 

야당 인사들과 운동가들, 기자들에 대한 위협과 박해 사건들로, 몇 달 동안 긴장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혁명당(CCM: Chama Cha Mapinduzi)’을 중심으로 50년 전 만들어진 탄자니아 정치 시스템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1992년 다당제가 채택됐음에도 불구하고, CCM이 ‘단일정당 겸 국가’로 기능하고 있다. 모든 것은 2015년 10월 28일 시작된다. 그때가 바로 야당인 ‘시민연합전선(CUF)’의 후보자 세이프 샤리프 하마드가 잔지바르에서 역사적 승리를 쟁취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선거위원회 위원장인 제샤 살룸 제샤가 군도에서 진행 중인 5개 투표소 중 3곳의 투표를 무효화해버린다. 잔지바르 사람들은 탄자니아 대통령과 국회의원, 그리고 잔지바르 대통령과 하원의원, 지방의원까지 투표를 통해 선출해야 한다. 이날 투표 진행은 정상적이었다고 국제 옵서버그룹이 강조했음에도, 마지막 투표소 3곳의 투표가 무효화됐다.
선거명부 등록기간인 2015년 6월부터 자카야 키크웨테 탄자니아 대통령은 잔지바르 군도에 군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좀비(Zombie)라고 불리는 젊은 민병대들이 야당에 우호적인 느감보(Ngambo) 지역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미디어 통제도 강화됐다. 인터넷 범죄 관련법을 집행하고, 잔지바르의 <HIT FM>라디오 방송국의 스튜디오를 방화하고, <마위오(Mawio)>신문을 폐간한 것이다. 권력의 음모는 거의 쿠데타 수준으로 전개됐다. 선거위원회 부위원장인 압델 하킴 아메이르가 체포되고, 선거결과를 확인하는 동안 관영미디어를 통해 투표 무효가 선언됐다. 이에 대한 항의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여러 국가들이 탄자니아에 재정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잔지바르 군도의 퇴임 대통령인 셰인은, 1964년의 혁명을 기념하는, 2016년 1월 12일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필요한 다른 정당들과의 대화를 단절해버렸다. 
주민들은 탄자니아 연합이 불법적인 결정을 내려, 잔지바르 군도의 일에 다시 끼어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정부의 결정은 정치적 변화를 방해함으로써, 잔지바르 군도가 주권을 더 확대해가는 모든 변화를 제지하고, 국가를 헌법적 위기 상황에 빠뜨리고 있다.
권력이 강경한 태도를 보인 때는, 2011년과 2014년 사이 헌법 개정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견해를 묻는 시기에, ‘인민의 헌법 옹호자’들이라는 우카와(Ukawa) 동맹의 출현 시기와 일치한다. 우카와 동맹에는 탄자니아 연합의 두 영토에 존재하는 4개의 거대 정당이 속해 있다. 이 중에는 CUF도 포함된다.(1)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은 영국령이었다. 현재 ‘메인랜드’라고 불리는 인구 4,800만의 탕가니카(Tanganyika)처럼 말이다. 그리고 1964년, 130만 명이 사는 잔지바르 군도의 합병으로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이 탄생했다. 잔지바르 군도는 북쪽의 펨바(Pemba)와 가장 인구가 많은 남쪽의 운구자(Unguja)라는 2개 섬으로 구성돼 있다. 운구자 섬에는 같은 이름의 수도가 있다. CCM에 의해 지배된 국가 역사에서 전환점으로 간주되는 우카와의 성공은, ‘시스템’을 뒤흔들고 있다. 이 ‘시스템’은 탄자니아의 정치놀이를 지칭하기 위해 탄자니아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2015년 총선 다음 날, 메인랜드에서 야당의 주요 정당(우카와 동맹의 샤데마)의 후보자 에드워드 로와사가, 탄자니아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존 폼베 마구풀리(CCM 소속)의 승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2015년 가을의 폭력사건에 대해, CUF는 대화를 제안했다. CUF는 2001년에 발생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궐기하라는 호소를 하지 않았다.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당시 60명 이상의 야당 인사들이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10년 간, 특히 1995년과 2000년의 선거 후에 CCM과 CUF는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러자 탄자니아는 마리드히아노(Maridhiano)라 불리는 ‘화해 프로세스’를 마련했다. 화해 프로세스는 국민투표에 의해 국가통합정부를 탄생시켰다. 처음으로 2개 정당이 권력을 분할했다. 당시 CUF의 사무총장이었던 하마드가 잔지바르 최초의 부통령직을 얻었다. 2015년 주도(主島) 운구자와 군도의 수도에서 하마드에 대한 지지가 상승했고,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할 것 같았다.
잔지바르의 최근 선거에서 혼혈 크레올 주민들을 겨냥한 인종차별적 벽보가 출현했다. 그러나 스와힐리 해변에 사는 주민들 대부분이 혼혈 크레올에 속한다. CCM의 지도자들도 혼혈인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런 공격은 하마드나 펨바(Pemba) 거주민들처럼 오만 출신 야당 인사들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게다가 새로운 선거 실시를 예고하는 1월 12일의 선택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잔지바르의 ‘아프로시라지당(ASP)’과 예전 탕가니카의 ‘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연합당(TANU)’의 민족주의 전략에 담긴,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적 분리 논리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 두 당은 1977년 CCM을 창당하기 위해 통합됐다. 1월 12일은 사실상 1964년 사건의 기념일이다. 1964년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ASP의 젊은이들이 잔지바르의 신(新) 왕정을 전복했는데, 왕정의 일부 지도부는 ‘아랍’ 출신들이었다. 아랍·코모로·인도계 주민들을 대량학살하자 수많은 주민들이 망명을 했다.
“1964년의 혁명을 다시 꿈꾼다. 혁명정부가 집권하는 데는 투표용지도 필요 없다.” 오늘날 CCM의 극(極)보수주의자들은 거침없이 이렇게 말한다. 미센자니(Michenzani) 지역 칠판처럼, CCM의 지역집회용 의자들 옆에 설치된 칠판들에는 글이 쓰여 있다. 그 내용은 “아프리카계 주민들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아랍권력’의 구현을 막기 위해, 아랍계 잔지바르 사람들과 CUF를 배척하고 인종차별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0월 28일의 선거 무효화와 1월 12일의 새로운 투표일 고지가 ‘제 2의 혁명’에 불을 붙이고 있다.
CUF는 CCM의 분리파들과 예전의 움마당 등의 조직들을 중심으로 1992년 창당됐다.(2) CCM과 반대이념을 표방하는 CUF는 시민권리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군도에 종속적 지위를 부여하는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제도들을 비판하며 당의 정책을 만들고 있다. 2015년 CUF는 운구자에서 당당하게 승리했고, 펨바(Pemba)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CUF 투표관리센터의 개표 결과에 의하면, 하마드가 2015년 10월 20만77표 대 17만8,363표로 유효표의 52.8%를 얻어 승리했고, 하원 후보자들이 의석의 과반을 차지했다. CUF의 이런 성공을 예측하지 못했던 CCM에서는 깜짝 놀랐고, 급진성과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2015년 총선은 탄자니아에서 정치적 변화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CCM의 헤게모니가 종말을 맞으리라는 가설은 우카와라는 동맹의 깃발 아래 창설된 야당의 통합전선에 의해 구체화됐다. CCM의 주요인사 중 한 명인 로와사가 샤데마(Chadema)에 합류했다는 것은, 국가의 두 영토에서 “국민의 힘” 또는 “변화” 같은 슬로건이 성공한 것처럼, 변화의 역동성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줄리우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 1922~1999)나 압베이드 카루메(Abeid Karume, 1905~1972년)처럼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그리고 ‘국가 조상들’의 유산으로부터 해방된 도시의 젊은이들이 등장했다.
잔지바르 군도와 대륙에서 야당의 승리를 폭력으로 빼앗은 CCM은 우카와에 참여한 정당들의 승리를, 특히 샤데마의 승리를 방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CCM의 방해공작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CUF가 인기를 얻고 있는 다르에스살람(Dar-es-Salaam)과 다른 해변도시들에서 CUF 소속의 시장이 선출될 수 없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투표방해, 투표준비 지연 등이 그 방법이다. CCM은 2015년 11월 새로 선출된 잔지바르 대통령이 부재한 상황에서 탄자니아 의회를 개원시키는 꼼수를 썼다. 그때 잔지바르에서는 선거가 부분적으로 무효화된 상태였다. 국가 통합과 평화의 보증인이며 국가수반인 마구풀리(Magufuli) 대통령은 3개월 간 침묵을 지킨 끝에, 잔지바르 선거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잔지바르 군도에 군대를 파견했던 퇴임 대통령 자카야 키크웨테의 정책을 이어받아 군사적 점령상황을 지속한다. 탄자니아 언론이 잔지바르의 사건들에 집중하는 동안, 더 큰 문제가 숨겨진다. ‘단일정당 겸 국가’, CCM의 위기가 감추어진 것이다. CCM은 내부분열 뿐 아니라, 메인랜드의 중산층과 젊은이들에게 강력하게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일당제 문화에 충실한 선택받은 엘리트들 덕택에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 CCM에 가입한 경찰과 군인 공무원의 충성심에 의해 보장된 행정적·영토적 조직망을 CCM은 마음껏 활용해 왔다. 이런 도식이 3가지 실체(예전의 탕가니카, 잔지바르, 탄자니아 연합공화국)로 형성된 연합국가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연합국가 내에서 잔지바르와 예전의 탕가니카는 훨씬 더 많은 주권을 누릴 것이다. 이 두 곳에서는 야당들이 강력하게 약진 중이기 때문이다. CUF의 이런 요구는 차후에구(舊)탕가니카에 존재하는 우카와 동맹 정당들에 의해 공유될 것이다.
잔지바르는 오래 전부터 메인랜드에서 흥을 깨는 방해자로, 탄자니아의 통합과 안정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돼 왔다. CCM이 잔지바르 군도에 군대를 체계적으로 파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민들은 “CCM은 사실상 잔지바르를 탄자니아 연합의 행정구역의 일부로 만들기를 원한다”고 종종 비난한다. 그러나 CCM의 억압전술은 그와 반대효과를 낳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양쪽 국민을 공유된 경험 속에 결집시키고, 탄자니아 전체에서 야권을 강화시키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2015년 11월 잔지바르 대통령을 제외한 상태에서 국회를 개원한 것은 야당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계단식 의원석에서 의원들이 “마림 세이프 하마드! 마림 세이프 하마드!”라고 외쳤다. 수백만 명의 탄자니아 사람들이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텔레비전으로 목격했다. 
“우리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진정하라고 요구한다. 지도자들이 속임수를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마구풀리의 당선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할 준비가 돼 있다. 잔지바르가 저항을 시작한다면, 우리도 뒤따를 것이다!”
샤데마의 세력범주에 속하는 아루샤(Arusha)에 거주하는 젊은 유권자가 2015년 12월 단언했다. 추후 현 체제는 양쪽 영토 주민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독재체제라고 불릴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표현의 자유가, 국민들에게 주어졌다.  


글·마일리스 쇼벵Maïlys Chauvin
세계 속 아프리카연구소(LAM)’의 객원지리학자,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위원

번역·고광식
파리 8대학 언어학박사로 대학에서 프랑스 언어를 가르치고 있다. <르몽드 세계사 3> 등의 역서가 있다.
 
(1) ‘우카와 동맹’ 혹은 ‘인민의 헌법 옹호자들’은 4개 정당으로 구성돼 있다. 샤데마(Chadema), CUF, ‘국가 민주주의 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 ‘건설과 개혁을 위한 국민의회’(National Convention for Construction and Reform, NCCR)가 여기에 속해 있다.
(2) 제라르 프뤼니에(Gérard Prunier), “다당제 시대를 맞이한 잔지바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6년 7월.


박스기사

‘단일정당 겸 국가’ 유지를 위한 인종차별


잔지바르는 아랍·인도·페르시아·아프리카계 공동체들의 결합과 유산을 바탕으로 하는 코스모스폴리탄 사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지바르는 인종기반에 근거한 영국의 보호령 때문에 경직화됐다. 1950년대 영국 지원을 받은 아베이드 카루메의 아프로시라지당(ASP)은 반(反)아랍 노선을 채택한다. ASP는 최초의 민족주의 정당인 ‘잔지바르 민족당(ZNP)’과 대립한다. ASP와 달리, ZNP는 권력의 비(非)인종주의를 표방하고 반(反)식민주의 통합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ZNP는 후에 보수 쪽으로 기울면서 여러 차례 반(反)아프리카 인종정책을 채택한다.
1961년 6월, ZNP와 ‘잔지바르와 펨바 국민당(ZPPP)’은 동맹을 결성해 2년 간 통치한다.(1) 그러나 두 당 지지자들 사이의 대립으로 인해 6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아랍계였다.(2) 1963년 12월 3일, 잔지바르는 회교군주국으로 독립을 획득하고 유엔의 회원국이 된다. 독립 후 첫 번째 주부터 새로운 체제는 억압적인 태도를 취한다. 대륙과 외국으로의 여행 금지, 정당과 신문사 설립 금지 법안을 제출한다. 또한 대륙출신 장교들을 해고하고 경찰을 재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1964년 1월 6일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움마당이 영국의 압력으로 금지된다.(3) 움마당은 그때부터 진보적 지식인들과 노동조합의 지지를 폭넓게 받는다.
4주 후,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ASP의 아프리카계 젊은이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사이드 잠시드 벤 압달라 입헌 군주와 그의 정부가 전복된다. 폭동은 아랍계·인도계·코모로계 잔지바르 인들의 대량학살로 이어진다. ASP와 움마당 인사들이 지배하는 혁명위원회, 그리고 카루메가 이끄는 ‘잔지바르와 펨바 인민공화국’이 창설됐다.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단체가 정부에 입성하자, 미국과 영국은 ‘동아프리카의 쿠바’격인 독립지역이 출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곤혹스러워한다.
이런 상황에서 두 명의 리더인 카루메와 줄리우스 니에레레는 국민들 간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범(凡)아프리카주의 논거를 바탕으로 탕가니카(1961년 12월 9일 독립)와 잔지바르를 통합하기로 결정한다. 대부분의 혁명위원회 멤버들은 이 안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은 우선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64년 4월 26일, 국가연합이 설립됐다. 이는 카루메와 니에레레에게 진보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 진보주의자들은 당시 탕가니카와 외국주재 대사관에 배치됐다.
지역으로 분단되고, 필수권력(경찰, 군대, 외교, 화폐 등)을 빼앗긴 잔지바르가 주권을 점차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시초였다. 당시 채택된 헌법은 잠정적 헌법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결코 바뀌지 않고 유지된다.(4) 2015년 선거의 주요쟁점 중의 하나는 이런 태만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카루메 안의 목적은 아프리카계 잔지바르 사람들에게 보다 공정한 지위를 보장하려는 것이다. 토지의 재분배, 주민들에게 거부당했지만 대규모 철거로 느감보(Ngambo) 지역에 공동주거지를 건설하자는 주택정책, 아프리카계, 아랍계 또는 인도계 간의 인위적인 결혼 등의 안이 이에 해당된다. 카루메 정권의 전횡으로 인해, 야당인사들이 투옥되고 행방불명됐다. 당시 수천 명의 잔지바르 사람들이 군도를 탈출했다. 그리고 경제가 붕괴됐다. 1972년 카루메가 암살됐을 때, 수백 명의 인사들이 체포됐고 예전 움마당의 간부들은 투옥됐다. 1970~80년대에 줄기차게 이어지던 망명행렬 속에는 지식인들과 최고 전문인력들이 상당수 있었다. 지금도 경제이민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 점이 시민연합전선(CUF)에는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에 맞서 혁명당(CCM)은 주민들로부터 점점 외면을 받는 인종주의 수사학에 매달리고 있다. 사실상 주민들은 ‘아랍의 봄’에 대한 소식과 소셜 네트워크, 온라인 미디어를 많이 접함으로써 정치의식을 높여가고 있다.  


(1) 미카엘 로프시(Micahel F. Lofchie), <잔지바르: 혁명의 배경>, 프린스턴 대학출판사, 1965년.
(2) 조나슨 글래스만(Jonathon Glassman), <말의 전쟁, 돌의 전쟁, 식민지 잔지바르의 인종주의 사고와 폭력>, 인디애나 대학출판사, 블루밍턴, 2011년.
(3) 암리트 윌슨(Amrit Wilson), <해방의 위협, 잔지바르에서의 제국주의와 혁명>, 플루토 출판사, 런던, 2013년.
(4) 1995년 하마드의 승리를 염려한 CCM은, 이 규칙을 메인랜드 출신 대통령 후보와 잔지바르의 부통령 후보로 구성된 파트너 시스템으로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