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습격을 받는 유럽의 언어들

2016-07-01     브누아 뒤퇴르트르

“영어가 더 폼 나잖아요!”

적합한 프랑스어 단어가 있음에도, 계속 영어 단어를 쓰는 조카에게 이유를 묻자 조카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카는 만족스러울 때면 양 주먹을 꼭 쥐며 “예스!”라고 외친다. 차 안에서 ‘펀 라디오(Fun Radio)’ 프로그램을 듣다가 조카의 말이 떠올랐다. 진행자는 낭랑한 목소리로 어린 청취자들에게 “라이프(Life)에 대해 말해보라”고 했다. 방송 진행자 역시, ‘라이프’가 ‘라 비(La vie)’보다 폼 난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노래가 한 곡 끝날 때마다 댄스 플로어(Dance floor)가 이어졌다. 이들은 영단어에 사전적 의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정작 영어권 국가에 사는 이들은 영어의 그러한 가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라이프’는 ‘인생’을, ‘댄스 플로어’는 ‘춤추는 무대’를 의미하는 단어일 뿐이기 때문이다. 조카는 프랑스의 사상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독창적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조카는 ‘총잡이 아저씨들(Les Tontons flingueurs)’에 나오는 미셀 오디아르의 위트 넘치는 농담을 매우 좋아한다. 그럼에도 프랑스어에 영어를 마구 섞어 쓰고, 인터넷에 종종 등장하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의 이름을 꿰고 있다. 나는 이렇게 분석한다. 조카의 ‘폼 난다’는 말은, ‘있어 보이는’, ‘시대에 걸맞은’, ‘요즘 유행하는’이라는 뜻이다. 영어는 이제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시대변화와 미래의 표상이며, 최신의 개념에 따라붙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라이프’는 ‘라 비’보다 신선하고 모험적으로 들리는 것이다. 

다중언어를 영어로 바꾼 ‘실용주의’

2014년 3월 26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권고사항을 전달할 목적으로 브뤼셀을 방문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참석 전, 오바마 대통령은 유럽연합의 지도자들을 만나 시리아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 그런 한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한층 강경한 대응을 요청했다. 또한, 유럽연합집행위원회 위원들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중요한 이슈인 범대서양 자유무역협정도 재거론했다. 
이 때 찍은 기념사진을 보면, 매력적인 미국 대통령 주변에 바짝 붙은 위원들의 모습이 마치 사장 주변에 모여든 의기양양한 부장들처럼 보인다. 이들은 물론, 미국 대통령이 제시한 모든 목표와 방법에 동의했으며, 회담은 자연스럽게 영어로 진행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존 F. 케네디 등 전 대통령들과는 달리, 먼 곳에서 온 집행위원들과 동석하면서도 독일어로 진행되는 연설이나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대화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 정치회담에서 주권국가 간 정상회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동일한 세계관과 목적을 가지고 모인 파트너들의 업무회의에 가까웠다. 유럽연합과 미국 간에는 군사협약이 없음에도, 구대륙 정상들은 NATO와 이해관계를 함께할 태세다. 이러한 시각의 합치는 의견합의를 통해 강요됐다. 미국으로부터 경제개념, 위생 및 안보법, 규제완화 및 민영화 목표, 심지어 달러처럼 두 선이 그어진 유로화 표기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그들의 공용어를 들여와 아무 망설임 없이 미국의 외교 및 군사라인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며 유럽의 국방 프로젝트를 교체하는 듯 했다.
실용주의를 앞세워, 유럽연합은 다중언어를 몇 년 사이에 영어로 거침없이 바꿔버렸다.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이러한 변화는 인터넷의 영향으로 급속도로 확산됐다. 구글, 페이스북, 야후, 트위터 등을 개발한 곳이 미국이므로, 온라인 소통수단은 자연스럽게 미국식을 유지한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자연스럽게 영어에 노출되고, 미국식으로 ‘사고’하도록 유도된다.
구글 뉴스 프랑스어판을 보면 느낄 수 있다. 재미 삼아 ‘문화’코너의 주요뉴스를 매일 기록한 적이 있다. 8월16일 ‘미셸 오바마: 건강유지를 위한 그녀의 힙합 플레이리스트’. 8월17일 ‘배우 리사 로빈 켈리 사망’, 8월18일 ‘저스틴 비버와 마이클 잭슨의 사후 듀오’…. 이러한 TV드라마 스타들의 소식, 스티브 잡스의 전기 영화 이야기가 물결치는 가운데,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열리는 영화제 및 음악축제 소식은 한참 아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물론 구글 담당자들은 프랑스 미디어가 뉴스들을 공정하게 선별하고 있다고 받아칠 것이다. 그러나 연예계 소식이나 ‘갈라’의 영향으로, 우리의 시선이 계속 비벌리힐스로 향하는 원인은 밝혀야 한다. 이렇듯 세계의 시각은 두 가지 요소로 인해 보편화되고 있다. 미국에서 수입된 국제문화, 그리고 각국을 지방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현지 뉴스가 그것이다.

영어일색으로 진행된 
‘유로뉴스’ 토론

2014년 유럽의회선거를 앞둔 4월 28일, 유로뉴스 채널(국적을 짐작하기 어려운 이름이지만, 프랑스채널임)에서 유럽연합 주요 정당지도자 토론을 주최했다. 후보자 4명의 국적은 벨기에 1명(기 페르호프슈타트), 룩셈부르크 1명(장-클로드 정커), 그리고 독일 2명(마틴 슐츠, 스카 켈러)이었다. 4명 모두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하며, 그 중 3명은 프랑스어도 가능하다. 9천만 명이 독일어를 쓰고, 7천만 명이 프랑스어를 쓰는 유럽에서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2대 모국어이자, 유럽연합 창시자들의 모국어로서 애초에 ‘비즈니스용 언어’로 지정됐다. 
그럼에도 토론은 미국과 영국 저널리스트인 크리스 번스와 이사벨 쿠마르의 진행 하에 완전히 영어로만 진행될 참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언론과 정치권의 반응이다. 반감이나 놀라움을 전혀 표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두 진행자를 언어와 뉘앙스에 있어 지배적인 존재, 마치 선생님처럼 느꼈을 뿐이다.
반면, ‘유럽연합 토론(EU Debate)’에 참석한 후보자 4명은 불완전한 발음을 감추지 못했고, 결국 명석하고 적극적인 ‘학생들’처럼 보였다. 이들 중 아무도, 농담으로라도 이 상황의 어색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모국어를 사투리 취급한 채 긴 영어문장들을 늘어놓으며, 세계 거버넌스 후보자라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상황이 이상하지 않은가. 이 토론은 전체적으로 CNN 선거 쇼를 모방한 것처럼 느껴졌다. 발표대 뒤에 선 후보자 4명이 기자 2명과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마치 유럽이 ‘미국의 형상을 본 딴 거대한 민주주의’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정치적 견해는 분분했지만, 모두 한 목소리로 핵심 위험요소인 ‘푸틴의 러시아’를 규탄했다. 또한, 녹색당 대표가 유럽이 “미국처럼” 러시아에 단호하게 대항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감을 표하자,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그리고는 모두 유럽의 위대함, 유럽의 독창성, 유럽의 지배력, 유럽의 영향력, 유럽의 목소리 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형식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외교적 발언에 불과했다. 유럽연합이 유일하게 “전 지구적 차원에서 권위를 지닐만한 규모의 공동체”임을 드러내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유럽이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중국, 미국, 러시아를 보라. 이들 국가에서 자국어 외의 언어를 사용해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들 국가는 모두 자국어를 중시한다. 따라서 중국은 북경어로, 러시아는 러시아어로, 미국은 영어로 나랏일을 꾸려간다. 이러한 점에서, 강대국 반열에서 역할을 감당하기 바쁜 유럽연합은 비교조차 되지 못한다. 자국어를 쓰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사용해 의사표명을 하는, 유일한 세계적 규모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창립국의 모국어인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제하고 오랫동안 유럽연합의 특성이었던 다국어주의 원칙을 포기했다. 그리고는 유럽연합의 턱걸이 회원이자, 언제 탈퇴할지 모르는 영국의 언어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영국이 탈퇴한다면, 더 이상 이 과분한 특혜를 설명조차 할 수 없어질지 모른다.  



글·브누아 뒤퇴르트르 Benoît Duteurtre 
<역전 뷔페에 대한 그리움(La Nostalgie des buffets de gare, Payot)>(파리 2015)의 저자.

번역·김혜경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