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노조적인 언론보도에 왜곡되는 정보

2016-07-01     세르주 알리미 외

대중들의 분노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 전, 마뉘엘 발스 정부는 “프랑스에서 노조 시위를 금지하겠다”는 지난 수십 년간 유례가 없었던 시도를 벌였다. 이런 권위주의적 변칙은 프랑스 주요 언론들이 이끌어 가고 있는 노사전쟁 분위기 탓이 크다. 사용자(使用者)들의 절대적 권한 하에 놓인 언론은, ‘정치적 자유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했다. 


“프랑스는 오늘날 두 가지 위협에 직면해 있다. 바로, 국가의 온전함을 위험에 빠뜨리는 다에시(Daech)와 노동총동맹(CGT)이라는 두 가지 위협이다.” 프란츠올리비에 지베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한다. 정치적‧재정적 지배 아래에 놓인 프랑스 저널리즘의 진실을 이처럼 밝혀줬으니 말이다. 시사주간지 <르푸앙>의 스타 논설위원 지베르는 ‘프랑스 불행의 진짜 이야기: 봉쇄, 폭력, CGT, 노사관계모델’이라는 제호의 서두에서 “이제 시작일 뿐이다. CGT와의 전투를 이어가자”고 말했다(2016.6.2).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 체결에 대한 국민투표부터 2005년 유럽헌법 제정과 관련한 국민투표에 이르기까지, 또 1995년 11~12월 파업부터 2016년 ‘노동법’ 반대 파업까지를 비추어 볼 때, 정보 이용자들과 분석가들은 실제 사회적 대립의 전개 양상과 그것이 대중 매체에 비추어지는 모습 사이의 왜곡을 가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학 도서관에는 기성질서의 반대자를 고려치 않은 채 <편향>, <일탈>, <불균형>, <이중 잣대>, <재구성>이라는 긴 시리즈물을 그럴 듯하게 비치해놓는다. 하지만 편집세계의 관례와 직업 규범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가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태생부터 정치와 자본의 세계(1) 양쪽에 끼인 언론은 스스로 교정하고 간극을 최소화해 규범을 따르고자 하는 충분한 자율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법’ 분쟁에 대한 미디어 보도와 내년 봄에 치러질 프랑스 대선을 목적으로 이를 다시 전달하는 활자 매체를 보면 언론에 그러한 자율성은 없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으나, 여전히 탐욕스럽고 동시에 국가 지원에 기대려는 언론 기업들의 편집 책임자들은 균형의 부재로 인해 과오를 범하는 게 아니다. 사실상 이들은 ‘균형’을 세우려 노력한 적이 절대 없다. 지베르가 인정했듯이 미디어는 관찰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투’를 주도한다. 그리고 정치 세력처럼 행동한다. 
‘거리의 법’(2016.4.7), ‘밤샘 우민정치’(4.27), ‘질서 바로잡기’(5.18), ‘사회 테러리즘’(5.24), ‘노동총동맹의 독재’(5.26), ‘공화국 파괴자들’(6.18)이라는 <르피가로>의 사설들은 “좌파를 돌려보내고 노조의 권력을 없애자”(6.10)고 촉구하는 다수의 전단과 비슷하며, 우파로 낙인된 신문의 역사적 연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에 해당하는 ‘노동법’ 반대자들, 특히 프랑스 최대 노조인 노동총동맹(CGT)을 겨냥한 이 전투적인 문체는 지금까지는 그 성향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매체로까지 번지게 됐다. 프랑스 공영방송 <France 2>의 정치부 책임자 나탈리 생크리크는 어쨌든 일반적인 파업의 권리 행사에 대해 “CGT는 모든 분야에 퍼진 과격주의와 잘 조직된 혁명의 기술을 갖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들이 한 나라를 마비시킬 수 있는지 모르겠다. (…) 필리프 마르티네즈가 이끄는 CGT가 모든 걸 다 폭파시키길 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5.23. ‘20시 뉴스’). 6월 15일 <i-Télé> 방송의 ‘오늘의 토론’ 프로그램은 “시위를 금지해야 하나”라는 주제의 방송을 내보냈다. <Europe 1> 방송의 장미셸 아파티 기자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아슬아슬한 수위의 글을 게재했다. “#CGT는 원자력 발전소와 전력분야로까지 활동범위를 넓히고 있다. 다음 단계는 내전인가? 무기를 들 것인가?”(5.25)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작품 <글쓰기의 제로 수준>(1953,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에서 스탈린식 어휘 논쟁을 관찰하며 “글쓰기란 결국 소송일을 절약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쓰기는 “결정된 형식 안에서 현실을 알려주고, 즉각적으로 선고문을 읽게 만드는”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BFM-TV와 <프랑스 앵포>에서 지속적으로 방송된 TV 패널식 발언과 반쪽 진리는 이러한 정의에 꽤 부합한다. “증오로 붉게 달아오르고,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무된 일부 시위대 파괴자들은 테러에 빠지는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다. 이들이 혹시라도 광신도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우려해야 한다”고 작가 파스칼 브뤼크너가 경고했다(<르피가로>, 5.21~22).  6월 15일, 제5 공화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좌파정부 노조 시위가 벌어진 다음날, 기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바로 시위대와 공권력의 충돌 때 파손된 네케르 병원 건물의 외관이었다. 논란은 그 전날 프랑스 국무총리와 대통령에 의해 촉발됐다. 병원 건물이 “황폐화”된 책임이 CGT에 있다고 말하면서 모든 노조 시위를 금지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France 2> 방송의 뉴스 진행자 다비드 퓌자다스는 스튜디오에 출연한 CGT 위원장 앞에서 “집회의 의미를 퇴색시킨 이러한 사건들”이라며 비꼬았다. 하지만 누가 ‘퇴색’시켰다는 말인가?
부처 장관실에서 편집실, 프랑스 산업연맹(Medef.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에 해당-역주)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언어 정보들’이 떠돌았다. 블라인드 테스트에 동원된 모르모트에게, “불량배나 테러리스트처럼 행동하는 노조원인 CGT의 협박과 폭력, 위협, 공포에 굴하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고 한 것이 성미가 까다로운 논설 기자인지, 정부 구성원인지, 경쟁 노조의 거물인지 아니면 경영자 측 대표인지를 알아맞히라고 할 판이었다.(2)
‘합리화된 의회 편중주의’, 다시 말해 엘리제궁의 선택에 종속된 의회를 향한 일간지 <르몽드>의 적대감은 오랜 시간동안 이 신문의 정치적 정체성을 구성해왔다. 이미 십여 년 전에 <르몽드>의 장마리 콜롱바니 편집국장은 “행정부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슈퍼파워 체제에서의 49.3조(3) 적용이 그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으로만 받아들여질 뿐이라는 것은 강력한 사실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2006.4.3). 이 석간신문은 화려한 정치적 전향을 선보이며 마뉘엘 발스 총리가 구현하고 있는 권위적 사회자유주의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2016년 5월 13일, <노동법> 통과를 위한 국회 토론의 속임수를 정당화하기 위해 <르몽드>는 “49.3조 만세!”라는 논설을 발표했다. “바로 거기서 민주주의의 부정을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뛰어넘기에는 부당하고 위험한 과정이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행정권은 일차적으로 공화국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나오게 된다. 완곡하게 말해, 이 권력은 노조권력, 다시 말해 거리의 권력보다 민주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노동법을 문제 삼겠다는 것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60가지 대선 공약에 포함돼있지 않았다. 2012년 6월 국회에 입성한 사회주의 국회의원들의 선거 공약에도 포함되지 않았었다. 만일 공약에 포함됐다면 이들이 선출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2015년, 사회당 회의에서는 오히려 이와 반대되는 내용의 결의안이 채택되기도 했었다.
언론은 정치 집단의 공명상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집단일까? 그 집단은 이름도 얼굴도 없다. 후보를 내놓는 법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집단은 행동과 의식을 조종한다. 적어도 그것에 집중한다. 이 질서의 당은 폭넓은 정치 스펙트럼에서 구성원을 뽑는다. 경영자 세계와 노조의 세계가 만나는 곳에서, 고위 행정기관에서, 금융계에서, 시장 저널리즘에서 그리고 힘을 가진 지식인들에게서 말이다. 이 집단이 만들어진 것은 1980년대 이후 프랑스에 이념적 범용화가 시작되고, 자유무역, 유럽연합 건설, 북대서양 조약기구 정책에 대한 동조, ‘인도주의’ 전쟁 등 반박할 수 없는 공통 과목을 중심으로 정부가 정당을 재정비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움직임은 당연히 언론으로 넘어간다. 1983년 전환기가 오기 전, <르몽드>, <르피가로>, <리베라시옹>, RTL, <프랑스 엥테르>의 대립에 의해 상당히 넓은 이념적 공간이 규정되던 세상에서, 주도권을 가진 미디어들이 이제 몇몇 사회 문제에 대해서 버티고 서있다. 다원주의는 이제 흔치 않은 독립신문들, 이견을 내세우는 보도 웹페이지, 대안 통신사 등 비주류에서만 정보를 얻는다. 이렇게 통합되고, 단순화되고 더 분명해진 ‘질서당’(프랑스 혁명당시에 은행가·대지주 ·산업자본가들이 힘을 되찾아 결성한 정당을 빗댐. 질서당은 온건한 헌법을 의회가 승인하게 함으로써 이 헌법에 따라 보통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됨-역주)은 한 마리 맹금의 오른쪽과 왼쪽, 양쪽 날개를 결합시킨다. 비공식적이고 애매하긴 하지만, 그들은 평소에 수용 가능한 대립과 토론의 틀을 정한다. 하지만 강력한 노사 대립이 터지면, 그리고 이것이 계층 간 분열과 권력의 결함을 다시 나타나게 하는 정치적 싸움으로까지 악화되면, 이 ‘질서당’은 끓는 기름에 넣어진 달걀흰자처럼 융합하게 된다.
“이 고약한 프랑스 국민들이 없었다면 통치라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겠는가!”라며 지베르는 탄식했다(<르푸앙>, 2016.3.10.) “프랑스는 도움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를 돕지도 않았다. 국민들의 수준이 높지 않다면, 적어도 아예 국민들을 바꿔버릴 수 있지 않는가?” 확실히 보수적인 사고에 반대하는 성향을 가진 이 국민들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원하는 수준으로 스스로를 끌어올릴 능력이 없으므로, 어떠한 존경도 받을 자격이 없다. 베르나르앙리 레비는 “절대 자신의 적수를 동물에 비교하거나 바보 취급하거나 육체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금과옥조다”(4)라고 말했지만 이 말이 노조운동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물며 그 대상이 필리프 마르티네즈라면 어떻겠는가. 베르나르앙리 레비는 CGT 위원장에게서 ‘매 맞은 개의 눈’을 보았다. “민중, 형태나 조직이 갖춰지지 않은 대중, 스스로를 왜곡시키고 있는, 사냥개 무리가 노릴 만큼 무르익은 민중”과도 같은 개의 모습을 보았다(<르푸앙>, 6.9). 이 수필가와 동일한 어조로 그에게 반박을 한다면, 전체주의나 역사상-가장-어두운-시간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반체제 인사들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방식 외에, 엘콤리 법안에 대한 미디어 보도 내용은 주요 인사를 매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먼저 이 투쟁의 쟁점을 재정의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신문·잡지라는 여과기를 거치면,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이들과 경영자 연합 사이의 싸움은 다양한 국민 계층 사이의 대립으로 변모한다.(5)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2016년 5월 26일 저녁, France 2의 20시 뉴스에서는 3분 20초를 시위소식에 할애했고 21분 25초를 ‘폭력’, ‘봉쇄’, 소기업 문제, 휘발유 부족 그리고 언론사 대표들에 대한 CGT의 ‘협박’에 할애했다. 마르세유에서 노조 바리케이드를 힘으로 부수려던 한 운전자에게 들이받친 CGT 노조원에 대한 소식은 겨우 8초만 나왔을 뿐이다. 피해자는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파업 노동자들과 축구팬들을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6월 10일 프랑스에서 열린 ‘유로 2016’ 개막식 당일, <레제코>의 1면에는 “노조의 협박으로 망쳐버린 축제”라는 기사가 실렸고, <르피가로>는 “격화되는 노조의 시위로 ‘유로 2016’ 개막이 빛을 바랬다”라고 표현했다. 
다음은 난투 장면을 통해 노동쟁의 행위를 와해시키려는 시도다. 마치 시위가 대혼란의 소용돌이를 합리적인 정부에게 안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2016년 5월1일, BFMTV에서 사회자인 아폴린 드말레브는 초대 손님으로 나온 반자본주의신당의 대변인 올리비에 브장스노에게 여덟 차례에 걸쳐서 그가 폭력을 규탄하는지를 묻고, 이어 내리 열한 차례 다음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재촉했다. “상점이나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시위 참가자들인가?” 하지만, 내무부 장관에게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행위에 대한 질문을 하는 상황이었더라면 목격하기 힘들었을 사회자의 악착같음은 답변 거부라는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언론의 장난에 대해서는 나도 조금 아는 바가 있다. 짧은 한 마디로도 나를 매장시킬 수 있다는 것쯤은 안다”고 말하며 브장스노는 사회자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시위의 쟁점에 대한 이야기는 4분간 지속됐고 초대 손님에게 시위를 규탄하도록 강요하는 시도는 11분 동안 계속됐다.(6)
1960년대, 급진주의 성향의 미국 대학생들이 봉기한 이후,(7) 사회적 격동 시기의 언론의 임무에 대한 분석은 계속되고 있다. 미디어들은 자신들이 미리 정해놓은 일부 선들을 절대 넘지 않는 움직임에 대해서만 호의를 보인다. 파업하지 말 것(하더라도 아무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됨), 시험을 중단시키지 말 것, 교통과 항구, 정유공장을 봉쇄하지 말 것,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하지 말고 연극 공연과 투르드 프랑스를 방해하지 말 것. 공화국의 대통령과 참모부가, 1789년 무기를 손에 든 ‘파괴자’ 무리들이, 국가 감옥을 공격한 사건을 매 해 7월 14일마다 거창하게 기념하는 나라에서 오늘날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명백한 사회적인 요구가 거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안다. 항의하는 이들이 합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도 그렇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노조 운동도, 자연보호 운동도, 미국에서 있었던 흑인과 동성애자의 시민권 요구 운동도, 낙태 합법화를 위한 여성들의 운동도 말이다. 하지만 당장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 사람들은 역사를 비웃는다. 이들의 이념적 경계를 넘는 자들은 이들의 논설을 통해 격렬한 비난이나 경고를 받게 된다.
2013년 2월, PSA-오네의(8) 파업 근로자 대표를 만난 장피에르 엘카바슈 기자는 인터뷰 진행자와 프랑스 혁명기 검사의 역할을 합쳐버렸다. 계속 노조 활동가의 발언을 끊으면서 그에게 ‘싸우다’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했다. “장피에르 메르시에, 이의제기란 유용한 것이 맞다. 하지만 고함, 욕설, 위협, 공격은 전혀 그렇지 않다!”(<Europe 1>, 2013.2.4.) 3년 후, 엘카바슈는 자신의 취향과 비교해 너무나 방임주의적인 교통부 장관을 질책했다. “국가가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국가가 지금 상황에 꼭 필요한, 징발을 결정했는가? (…) 벌금과 형사처벌이 동반되는 징발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8~24시간이라는 기한이 필요하다. (…) 그런데, 이러한 징발을 시행하기 위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당신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쓰레기는 쌓여가고 전염병이 퍼진다. 7백만 마리의 쥐가 지금 파리를 가로지르는 중이다. 그래, 그렇다. 파리 시민 한 명당 세 마리의 쥐가 있는 셈이다.”(<Europe 1>, 6.10)
그런데, 지베르와 엘카바슈가 상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저널리즘은 주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주주들 덕분에 유지되는 신문·잡지업계로만 한정시킬 수 있을까? 업계 공식 종사자가 3만 6천명에 이르는데도? 2차 세계대전 직후에 기자들은 주요 언론 기사 제목에 대한 보다 폭넓은 영향력을 가지게 됐다. 편집자 연합을 조직한 그들은 “이제, 대중에게 확실하고 완전한 정보전달을 보장하지 못하는 조직은 철저히 검증할 것이다.”(9)라고 말했다. 하지만, “언론에서 공공의 이익보다 개별 이익이 중시”되는 상황을 더 이상 지켜보지만은 않겠다던 그들의 결심은 불행하게도 독자 감소, 광고 수익 감소, 디지털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산업 집중화 등 통신 분야의 변화로 인해 1980년대부터 그 위용을 잃어갔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대항세력을 키우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이미지는, 소셜네트워크 상에서 화제가 되는 키워드에 따라 ‘컨텐츠’를 생산하도록 강요받는 멀티미디어 종사자의 침울한 현실과는 반대된다. 기자라는 직업의 ‘평판 하락’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로, ‘밤샘 시위 기자들’은 지난 5월 제보 요청문을 게시했다. “생산성 제고를 위해 끊임없이 압박을 받고 있는가(이와 관련해 많은 기사작성과 취재가 가능함).(…) 취재할 돈도 시간도 더 이상 없는가. 당신이 얻은 정보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돈도 시간도 더 이상 없는가. 예상 독자층에 따라 당신 기사의 주제를 정해야 하는가.”(10) 제보가 넘쳐흘렀다.
빵 한 조각을 위해 청산된 신문들, 불안정함을 걱정하는 소용돌이에 빠져 자신의 회사에 자금 지원이 가능한 기업들에게 무엇이든 양보할 준비가 돼있는 기자. 알력관계는 소유주 쪽으로 기울어져, 팀원들의 과반수 이상이 인정하지 않는 편집 지도부들도 주주들 덕분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6년 5월 11일에서 6월 10일 사이에 <롭스(L'Obs)>, 프랑스 텔레비지옹, i-Télé의 지도부는 자신들을 대상으로 한 불신임안이 제출되는 상황을 겪었다. 하지만 불신임안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2015년 10월, 최근에 파트리크 드라히에게 인수된 <렉스프레스>의 편집부에서는 크리스토프 바르비에 편집장에 대한 신임을 상당부분 거두었으나, 그 가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1년, 니콜라 드모랑 역시, 기자들의 거부 투표에도 불구하고 <리베라시옹>의 소유주에 의해 편집장에 임명됐다. 
빠르게 일소된 이런 식의 매정한 거절들은 신문사 소유주들을 더 담대하게 만들었고, 당연히 그들의 특권을 좀 더 크게 키워주게 됐다. 우파 상원의원 세르주 다소는 <르피가로>의 법적 분쟁이 <르피가로>에서 보다 비밀스럽게 다뤄질 수 있도록 (가능하면 아예 다뤄지지 않도록), 무기 수출 계약이 감격스럽게 환영받을 수 있도록,(11) 그리고 라팔 전투기 구매 국가들이 배려 받을 수 있도록 이미 조치를 취했다. 한 기자는 “우리는 다소 그룹이 사업을 하고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 이제 더 이상 나쁘게 말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12) 앞으로, 편집자 연합이 이와 관련한 비난거리를 찾아내는 것(당연히 그렇겠지만)은 차치하더라도, <르피가로>는 메트로놈 같은 규칙성을 가지고 억만장자 기업, 비행기 제작자의 친구이자 르피가로의 거대 광고주의 하수인으로 변모하게 됐다. 
벌거벗은, 노골적인 그리고 대개의 경우 입을 다물고 있는 이 권력은 굳이 스스로 말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람들은 그 권력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권력은 자신의 이유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그 권력을 두려워한다. <롭스>에서도 마찬가지다. 몇 해 전부터 이 잡지는 쇠락해가고 있다. 판매부수는 무너지고 있고, 영향력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좌파의, 시민을 위한, 현실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주간지라 자칭하면서, 2년 전, 편집장인 마티유 크루아상도가 “별 다른 의미 없이, 마뉘엘 발스와 새로운 경제부 장관이 된 에마뉘엘 마크롱의 완전한 성공”(13)을 희망했는데 어떻게 새로운 독자들을 사로잡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나 궁지에 몰린 권력이라는 견인차에 <롭스>를 매달겠다는 선택은 ‘완벽한 성공’으로 빛나지는 못했다. 2015년 12월, 판매 하락이 걷잡을 수 없이 계속됐다. 이에 주주들은 편집장에게 판매 재활성화를 위한 계획을 마련하라며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을 줬다.(14) 짧은 유예기간이었고, 주간지의 평판이 훼손된 만큼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임무 지시였다. 모두가 <롭스> 편집장으로서 크루아상도의 임기는 이제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크루아상도는 용기 있게 두 명의 부편집장 중 자신보다 더 좌파 성향인 오드 랑슬랭을 즉각 경질시키며 난관을 타개해갔다. 이 잡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16년 5월 11일, <롭스>의 기자들 가운데 80%가 크루아상도에 반대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자비에 니엘(베르나르 아르노의 딸인 델핀 아르노의 남편), 피에르 베르제, 마티유 피가스, 클로드 페르드리엘 등의 주주들은 크루아상도에게 자신들의 ‘절대적 신임’을 약속했다. 
크루아상도는 ‘경영차원의 결정’이라고 말했고, 페르드리엘은 이를 정치적으로 정당화했다. 페르드리엘은 랑슬랭이, 자신이 세운 신문사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지키지 않았으며, 뉘 드부 운동에 너무 깊숙이 관여했고, 그녀가 맡고 있던 지면에 자신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반민주주의적 기사들’을 실었다는 사실을 외부로 흘려보냈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에마뉘엘 토드,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글들이 실린 페이지였다. 하지만 피가스는 “나는 오드 랑슬랭의 정치적 노선에 이의가 없다. 나도 그녀와 같기 때문이다”(15)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3인조 공동 주주 중 가장 영향력이 센 니엘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의견 또는 판결을 내보였을까? 또한 당국의 회계, 행정명령 그리고 산업관련 결정에 좌우되는 언론 분야의 중요한 대주주인 니엘은, <롭스>가 신속히 급진 좌파를 몰아내고 대통령을 지지해주길 바라는 엘리제궁의 요구를 들어줬을까? <롭스>의 편집자 연합은 “대통령 선거를 1년 앞 둔 시점에서, 심각하고 용납할 수 없는 정치 개입 의혹”을 내세우며 니엘이 아마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언론의 독립성에 관한 헌장이 어떤 것이든 간에, 주주에 의해서 편집 책임자가 임명되고 더군다나 주주의 (타산적인) 너그러움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 편집장은 주주의 이익과 우정 그리고 변덕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따름이다.  
우리는 언론이 신자유주의를 우선시하는 경향으로 기울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존 노동법의 폐기와 관련해 그들이 보인 따뜻한 환대에서(16) 우리는 이러한 찬동이 맹목적인 복종으로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가늠했고, 정치적‧사회적 재앙이 야기될 만큼 이러한 경향이 확대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민중이 투표를 통해서 유럽연방주의를 담은 유럽헌법을 거부한 직후에 대중 매체가 민주주의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국가 비상사태에 대한 그들의 호의적인 동조, 그리고 1967년 이래 유례가 없었던, 주요 노조 연맹이 수도 안에서의 시위 권리를 문제 삼는 것에 대한 지지는 그들이 또 다른 단계를 막 넘어섰음을 시사한다. 민주적 권리와 대중의 자유를 수호하는 언론의 공통 이념 자산은 이제 더 이상 불가침의 성역이 아니다. 이제, 언론에서는 정부의 권위적인 변화 요구를 장려하고, 소유주 기업들이 채워준 쇠 목줄을 기꺼이 더욱 죄어 매고 있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Alimi, 
글·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기자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Patrick Champagn, ‘이중적 종속관계. 저널리즘에 관해(La Double Dépendance. Sur le journalisme)’, <Raisons d’agir>, Paris, 2016.
(2) 정답: 프랑스 산업연맹 회장인 피에르 가타즈가 그 주인공이다. <르몽드>, 2016.5.31.
(3) 총리가 법안 도입을 강제할 수 있도록 한 프랑스 헌법 49조 3항. 마뉘엘 발스 총리는 7월 5일로 예정돼있는 '노동법' 국회 표결 시 이 헌법 조항의 힘을 빌릴 계획이다. 
(4) 미셸 우엘벡, 베르나르앙리 레비, <공공의 적들(Ennemis publics)>,
     Flammarion-Grasset, Paris, 2008.
(5) 다음 기사 참고. Gilles Balbastre, '미디어, 사회 질서의 수호자(Les médias, gardiens de l’ordre socia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3년 9월호. 
(6) Cf. Frédéric Lemaire, Mathias Reymond, '노동법: 언론의 시위 죽이기(Loi travail : matraquages médiatiques sur les manifestations)', Acrimed.org, 2016.5.11.
(7) Todd Gitlin, <The Whole World is Watching. Mass Media in the Making & Unmaking of the New Lef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1980.
(8)  Cf. Françoise Davisse의 영화 <사자들처럼(Comme des lions)>, 2016.
(9) Jean Schwoebel, <언론, 권력과 돈(La Presse, le Pouvoir et l’Argent)>, Seuil, Paris, 1968. 다음 기사 참고. '편집자 연합, 기자들의 꿈(Sociétés de rédacteurs, un rêve de journaliste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7년 5월호
(10) Cf. 다음 사이트에 게재된 이들의 호소문. Journalistesdebout.com
(11) 다음 기사 참고.  '르피가로에서 라팔전투기는 신성불가침(Cet avion qui émerveille)' <Le Figaro>,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6년 4월호.
(12) <르몽드>, 2008.10.2.
(13) Matthieu Croissandeau, '사회당, 그들의 토템과 터부(Le PS, ses totems, ses tabous)', <롭스>, Paris, 2014.9.4.
(14) Cf. Enguérand Renault, '롭스 편집장에게 보낸 베르제-니엘-피가스 3인조의 최후통첩'(L’ultimatum du trio Bergé-Niel-Pigasse au directeur de L’Obs), <르피가로>, Paris, 2015.12.17. 
(15) <리베라시옹>, Paris, 2016. 5.20.
(16) 다음 기사 참고. Gilles Balbastre, '당신은 몇 페이지의 가치를 가졌는가(Combien de pages valez-vou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11월호, Julien Salingue, '노동법 반대 집회에 대한 3개월간의 미디어 보도(Trois mois de couverture médiatique des mobilisations contre la “loi travail)', Acrimed.org, 2016.6.6.


박스기사

두 개의 세상, 하나의 노선

유서 깊은 월간지 <르뷔데되몽드>가 반체제 과격주의의 뿌리를 뽑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다. “전체 근로자의 2.6%를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 노동총동맹이 한 나라 전체에 극단적 항쟁을 강요할 수 있나?”(2016.5.30) 1세기도 더 전인 1910년 10월, 프랑스 철도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 이후에도 <르뷔데되몽드>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했었다. “노동총동맹이 계속 활동을 하도록 내버려 두면 어떤 일이 또 일어날까? 그렇게 된다면 합법적인 정부는 공권력의 소극성으로 인해, 위엄과 대담성을 키우는 ‘반란정부’가 곁에서 활동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1910.12)

사회병리학

수차례의 시위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기쁨을 숨기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르몽드>의 프랑수아즈 프레소즈 논설위원은 낙담했다. “5월은 항거의 달이었다. 그러나 환희도 돌파구도 없는 항거였다. 이제는 거의 쇠퇴해버린 슬픈 항거였다. 노동개혁안인 엘콤리 법안에 반대하는 뉘 드부(Nuit debout, 밤샘 시위/역주)운동, 파업, 시위 그리고 법안에 대한 국회의 저항까지, 정부 정책에 대한 항의가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항의는 종종 증오와 폭력을 동반한다. 하지만 또 다른 길에 대한 개념 정의가 어렵기 때문에, 새롭거나 마음을 동요시키는 그 어떤 대안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로 인해 국가의 사기는 저하되고, 장기간의 치료를 요하는 질병과 비슷한 우울증에 빠지게 만든다.” (<르몽드>, 2016.6.3) 

다원주의

자유로운 노동법 개정에 찬성하고 있는 <르피가로>의 알렉시 브레제 기자와 토론을 하면서(<프랑스 엥테르>, 2016.4.2.), <리베라시옹>의 로랑 조프랭 편집장은 정부에게 ‘노동법’을 포기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정부는 지금 바로 자멸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포기하겠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안 된다. 난 그들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엘콤리 법의 개정 내용들은 허용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본다. 그 증거로 일부 노조들에서는 이 개혁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기고 있고 민주노동동맹(CFDT)에서는 법 개정에 찬성했다. 기업 차원에서든, 부처 차원에서든 아니면 정부 차원에서든 추가적인 협상을 한다는 사실, 난 이 변화가 꽤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꾼

2016년 6월 10일, <Europe 1> 라디오 방송에서 다니엘 콘벤디트 의원은 진행자인 토마 소토의 어깨에 기대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비밀 이야기를 해줄게요, 토마. 내가 아주 많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조사를 해봤답니다. 내가 보수 반동주의자가 됐냐고 물어봤죠. 왜냐면 나는 이제 파업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하거든요, 그 모든 게 아주 진절머리가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