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가?
인문학 100년사 1940~1950년 (5)
2016-07-01 성지훈 I 인문학자·본지 편집위원
1940년대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등 군국주의 국가들의 무자비한 전쟁과 인종 학살, 그리고 대량학살무기인 핵폭탄(히로시마, 나가사키) 투하로 점철된 고통의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국가 간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국제협력이 도모되던 때이기도 하다. 유엔(UN) 전문기구의 하나로,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1946년 설립된 유네스코(UNESCO)를 비롯해, 국제무역과 물자교류를 증진시키기 위해 1947년 23개국이 조인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보건·위생 분야의 국제적인 협력을 위해 1948년 설립된 세계보건기구(WHO) 등이 그 예들이다. 그러나 세계는 2차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5년 2월,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와 영국 총리 처칠, 소련 총리 스탈린에 의해 이루어진 얄타협정(1945)에 의해 동구와 서구의 이념적 장벽으로 양분되었다. 이후 미국의 주도 아래 설립된 국제통화기금(IMF,1945), 세계은행(IBRD,1947)의 적극적 개입 속에서 미국식 자본주의는 세계경제와 국제질서를 장악해갔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확산 속에 서구 지식인들은 마르크시즘과 실존주의라는 사상에 빠져들지만, 조지 오웰 같은 이들은 염세주의를 보이기도 했다.
자본주의의 예고된 운명?
2차 대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두 권의 저명한 책이 출간됐다. J. A. 슘페터가 1942년에 발행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칼 폴라니가 1944년 뉴욕에서(그 이듬해에는 런던에서) 출간한 <거대한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두 저자는 모두 과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으로서 나치의 손길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공통점이 있다(폴라니는 영국을 거쳤다가 미국으로 왔다). 그래서 두 사람은 소련 같은 파시스트 국가뿐 아니라 미국의 (뉴딜 정책을 통한) 1929년 대공황의 여파, 즉 정부 역할의 강화에서부터 거대 관료 조직의 부상, 보호무역주의의 증대 따위를 목격했다. 1944년 <노예의 길>을 펴낸 하이에크 등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회의적이었으나, 오히려 이 두 사람은 자본주의의 쇠퇴를 예언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즉, 자본주의가 이윤율의 지속적 저하 같은 엄밀한 경제적 모순 탓에 쇠퇴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슘페터의 경우 도덕적·사회적 기반의 약화, 폴라니는 현대사회의 사회보장제도를 향한 열망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위협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사점은 여기서 그친다. 문체로 보나 접근법으로 보나, 두 책은 완전히 다르다. 슘페터는 경제학자인 동시에 도발적인 사상의 소유자였다. 그가 자본주의 쇠퇴의 위험을 길게 늘어놓은 것은 결국 자본주의를 반성하기 위해서다. 자본주의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성과를 도모하는 것이다.
슘페터는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렀던 것일까? 그가 자본주의와 동류시한 ‘창조적 파괴’의 과정에 그 답이 있다. ‘자본주의라는 기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소비재, 새로운 생산방식 및 교통수단, 새로운 시장을 끝없이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결국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던 부르주아 사회의 가치들을 전복시키면서 자본주의 자체를 배반하게 된다.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핵심적 주체로 보았던 기업가는 사회의 적대감을 점점 더 가중시킨다. 한편 경쟁과 혁신의 추구는 한곳에 집중되며, 결국 공동소유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독점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언제쯤 사회주의로 전환될까? 만일 몇몇 곳에서 부드러운 전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판단된다면, 한 세기 이상 더 있어야 가능하다고 슘페터는 말한다. 그때서야 자본주의가 새로운 성장의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1945년부터 1975년까지 이른바 ‘영광의 30년’ 성장기 도중에 그 징후가 나타났다!),
폴라니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역학
슘페터의 책은 어마어마한 성공을 이룩했지만,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지 못했다. 일단 당시 여론의 관심사가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는 사실(종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외에도, 이 책은 주요 경제학적 견해와 정반대 입장을 표방했던 것이다. 이 책은 현대 사회의 위기를 과거 사회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분석했다는 것이 매우 독창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적인 동시에 인류학적인 행보를 보여준다. 이런 식의 전개를 통해 폴라니는 일반적인 전통적 경제학자들, 특히 아담 스미스 등이 보급한 경제적 전망에 이의를 제기했다. 시장경제는 인간에게서 추정되는 교환적 성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최근의 발명품이다. 그는 정확히 1834년을 이러한 시장 경제가 탄생한 해라고 보았는데, 바로 이 해에 그 유명한 ‘스핀햄랜드’ 법이 폐지됐기 때문이다. 이 법은 영국의 각 지방행정구에서 빈자의 최저임금을 보장해주었다. 하지만 폴라니는 이 법의 폐지가 노동시장 설립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보았다. 이는 가격이나 보수, 땅값, 이자, 임금 등을 통해 재화와 상품뿐 아니라 토지, 화폐, 노동력 등 모든 것을 사고 팔게 해주는 자기조정적 시장의 설립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상품의 교환이 결국 상호교환이나 재분배 등 다른 모든 형태의 양도를 대체하게 된 세계적 규모의 시장화 과정을 ‘전환(Transformation)’이라고 지칭했다. 통념과는 달리, 이러한 전환은 지역 시장의 확장이나 장거리 거래의 발달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보호무역 정책과 모든 종류의 규제를 통해 자국 시장의 설립을 가능케 했던 정부의 작용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재 상황을 전복시키기 위한 개혁은 전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이는 폴라니가 분석한 내용의 두 번째 면이기도 한데, 자기조정적 시장의 확장은 역방향의 움직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경제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보장제도의 확장을 향한 대중의 압력이 바로 그것이다. ‘거대한 전환’은 그 과정이나 다름없다. 이 전환은 1930년대 뉴딜 정책의 도입이 보여주듯 미국을 비롯하여 모든 현대사회에 관련된 사안으로, 경제자유주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단언하는 데 있어 폴라니는 슘페터를 비롯해 당대 수많은 지식인들이 취했던 진화론적 전망과는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다. 왜냐하면 폴라니는 자본주의가 결국 고작해야 백 년 남짓 이어질 역사 속의 한 과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그 이후(대처 및 레이건 체제에서 자유주의 정책으로의 회귀, 동유럽 사회주의경제의 붕괴)의 사실들은 슘페터 및 폴라니의 예측을 이중으로 반박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로부터 50년 후, 두 저작은 가장 주요한 참고문헌으로 남아 있다. 사실상 이 책들의 하나는 세계화 시대에 오늘날 사회들에 몰아닥친 새로운 ‘전환’을, 또 하나는 세계 자본주의의 역학에서 혁신 과정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에 활력이 되는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제공하는 셈이다.
철학이 강단에서 내려오다
자본주의 체제의 물신화는 철학적 사유에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실존주의는 1930년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현상이 첨예화된 것과 때를 같이하여 독일에서 처음으로 성립돼 발전하다가 이후 프랑스에 보급되면서 널리 확산됐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부르주아 지식인과 소부르주아 계층 사이에서 인기 있는 세계관 내지는 생활 태도로서 일종의 유행처럼 됐다. 40년대에 들어 급부상한 실존주의는 철학을 거리로 내려오게 했고, 연극 무대에 오르게 했으며, 출판계의 성공을 주도했다.
실존주의는 에드문트 후설, 이후에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대표하는 독일 현상학과 두 차례의 전문적 논전을 거치며 탄생한 까다로운 철학적 학설이다.
일반적으로 실존주의는 ‘실존’을 항상 인간의 ‘개별적 실존’으로 이해한다. 실존은 인간의 전형적인 존재 방식이다. 실존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실현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인간의 가능성이다. 실존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창조’한다. 또한 실존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따르면 인간은 보통의 경우처럼 ‘인간’이라고 불리지 않고, ‘현존재’, ‘실존’, ‘자아’ 등으로 불린다. 대표적인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적 체험’을 통해 실존 개념에 도달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경험을, 사르트르는 구토를, 마르셀은 인간의 종교적인 근본 체험으로서의 신비를, 야스퍼스는 죽음‧고통 등과 같은 ‘한계 상황’에서의 존재의 연약함이나 인간의 파멸을 실존적 체험으로 들고 있다.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의 학생에 불과했던 사르트르는 베를린에 갔다가 후설에 대한 회답 격인 <자아의 초월>(1936) 초안을 들고 돌아온다. 이후 사르트르가 실존주의 학설의 최초 기준을 세우게 되는 출판계의 대대적 사건이 두 차례 발생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위대한 저작물이다. 왜냐하면 정신은 자신이 이 세상에 던져지기 이전에, 그리고 자신의 본질에 정신을 부여하기 전에, 자신이 무엇인지에 관한 직관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문구는 실존주의적 사고에서 되풀이하여 등장하는 주제가 됐다. 이는 그 어떤 결정론도 인간에게 부과될 수 없고, 그 어떤 본질(신, 자연, 역사의 법칙)도 개인적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우리는 선택하고 의미를 만들어낼 전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르트르적 직관은 1938년 출판계의 두 번째 사건 덕분에 구체화됐다. 이는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첫 연구물의 출간이었는데, 실존의 단계 혹은 선택에 관련된 불안에 관한 그의 연구는 사르트르의 견해에 특히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카페 드 플로르는 성찰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고(사르트르는 이곳에 개인 전화선까지 갖추고 있었다), 1943년 실존주의의 선도적인 저서 <존재와 무>가 출간됐다. 이 책에서 사르트르는 1,000페이지 이상에 걸쳐 선택과 사회참여의 철학인 실존주의의 핵심적 개념을 발전시켜나간다. 여기서 우리는 실존, 의식, 투기(投企, projet)에 관한 그의 견해를 발견하게 된다. 투기란 어느 인간(어느 의식, 어느 주체)이 자신의 실존을 단언하는 행위이다. 투기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바로 이 행위가 우리의 실존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일단 아무것도 아니다. 개인적인 본질, 사전적 주체, 본질적 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나중에 돼서야 존재하며, 자신이 하는 행위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실존주의가 ‘분명한 자유의 철학’임을 보게 된다. 여기서의 자유는 달콤한 자유가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의 선택과 마주하는 불안에 빠뜨리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그리고 실존을 통해 순전한 인간성을 획득한다. 바로 이러한 면모 덕분에 사르트르는 1945년 이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실존주의 학파의 수장이 됐던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철학이라는 엄격한 틀을 벗어나 문화적인 운동이 됐다. 제일 먼저, 소설이 있었다. 사르트르의 소설뿐 아니라 카뮈, 보부아르, 말로, 생텍쥐페리, 모라비아 등의 소설이 나왔다. 실존주의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는 이야기의 구성을 담당하는 주요 의식을 만들어내길 거부하는 소설을 가리킨다. 사건들은 다양한 의식, 다양한 인물을 통해 소개되며 이 인물들의 각 반응은 실존적 투기를 정의하는 데 사용된다. 즉 이 인물들이 세상에 자신을 투기하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각 개인의 실존에서 오는 책임을 온전히 그들의 어깨에 실음으로써 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반면, 알베르 카뮈의 <전락>의 주인공은 아무 소용도 없이 자멸에 가까운 결과로 이어졌을 사건을 방조하고 넘어간, ‘비참여’의 끔찍한 책임을 치르게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일반화된 실존주의라는 철학은 1950년대 들어 생활양식으로 변화해나간다. 그것이 바로 생제르맹데프레(파리 라탱가의 한 구역) 신화의 시초이다. 실존주의자들은 같은 카페, 같은 재즈클럽을 다녔고 보리스 비앙의 트럼펫 소리나 마르셀 물루지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여기에는 물론 원로격인 사르트르뿐 아니라 ‘비버’라는 별명의 보부아르, 변덕스러운 비앙,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 샹송가수 쥘리에트 그레코 등이 있었다.
실존주의와 마르크스 주의의 관계
실존주의가 언론의 1면을 차지하는 등 센느강 좌안의 즐겁게 웅성대는 분위기 속에서, 어느 날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 저서 <존재와 무>가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못하는 책으로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그때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로 고개를 돌린 참이었고, 1960년에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출간한다. 이 책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실존주의라 할 만한 것의 가능한 조건들을 정의하고자 시도한다. 사실상, 개인적 의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마르크스주의를 재창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야심이야말로 우리가 실존주의와 당대의 다른 철학 사조들을 구분하는 척도가 됐던 것일지도 모른다.
라캉의 정신분석학과는 달리, 또 구조주의와는 달리, 실존주의는 인간을 운명에 따라야 하는 존재처럼 제시하길 거부한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실존주의는 일관성 있는 무신론적 입장의 모든 귀결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노력일 뿐”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니체가 예언했던 것처럼 “신이 죽었다”면,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자유롭도록 예정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결정론이라는 구실을 거부해야만 하며, 참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회참여와 전적인 자유의 가능성을 격찬하는 행위는 혁명적 운동, 특히 마르크스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혹자는 이를 두고 실존주의의 죽음 혹은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 간의 넘을 수 없는 모순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전후의 흥분한 젊은이들에게 실존주의가 불러일으킨 전례 없는 열광적 현상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심리학을 파고든 행동주의와 정신분석학
1947년 11월 28일, 다니엘 라가슈는 1949년 <심리학의 통일> 출간에 앞서 심리학 강의의 첫 수업을 소르본 대학에서 진행한다. 그는 에두아르 크라파레드의 질문, 즉 “심리학이란 단 하나인가 아니면 여러 가지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했다. 심리학의 통일을 꿈꿨던 그는 심리학이 서로 다른 계획과 방법론을 지닌 두 가지 사조로 구성됐다는 점을 인정했다.
첫 번째 사조는 그가 ‘자연주의적 심리학’이라 부르는 실험심리학이다. 실험심리학은 인간의 행위에서 기본적인 행동을 분리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실험실에서 인위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실험심리학의 방법론이며 인간 행동의 일반 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목표인 셈이다. 자연과학을 모델로 한 사조이다.
라가슈는 두 번째 심리학을 가리켜 ‘인문주의적 심리학’이라 불렀다. 주로 개인적이며 표준적이고 병리학적인 행동을 대상으로 삼으며, 설명이 아니라 이해가 그 목표이다. 방법론은 임상적, 즉 자연적 환경에서 인간의 행동을 관찰한 것을 기반으로 한다. 임상심리학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임상심리학은 의학과 정신의학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인문과학을 모델로 삼았다.
라가슈가 바랐던 심리학의 통일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제도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사실상 대립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험심리학과 임상심리학은 과학적 측면에서 서로를 무시하는 듯 보인다.
뒤이어 행동주의와 정신분석이라는 거대한 두 연구사조가 등장했다. 학습에 관한 행동주의적 연구는 한창 급증하는 중이었다. 학계에서는 지각과 동기, 언어, 주의력을 연구했다. 에드윈 거스리(1886~1959) 같은 일부 학자들은 왓슨의 원칙에 여전히 충실했는데, 왓슨은 학습의 기준이 내적 상태를 염두에 두지 않고 관측된 행동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러한 엄격한 견해와 거리를 둔 채 매개 장치를 참조하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냈다. 클라크 헐(1884~1952)은 제자인 윌리엄스와 페린의 연구 덕분에 허기의 강도가 학습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동기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에드워드 C. 톨먼(1886~1959)은 학습하고자 하는 개인의 목적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대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보상인 음식물을 직접 보지 않고서도 생쥐가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오늘날 행동주의는 그 힘을 다하기는커녕 주요 심리학적 접근법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50년대에는 버러스 스키너(1904~1990)가 신행동주의를 발전시켰고 이를 교육에 도입했다(프로그램 학습이론).
정신분석학의 보급과
다른 학문들과의 이종교배
종전 후 정신분석학은 새로운 발전의 시기를 맞이했다. 대대적인 대립의 시기(융, 아들러 등)를 겪은 후, 정신분석학이 널리 보급되고 다른 학문에 개방되는 시기가 찾아왔다. 나치즘을 피해 도망친 유대인 이민자들과 함께 30년대에 미국에 정착한 정신분석학은 교양 있는 중산층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은 유럽의 그것보다 훨씬 더 실용적이고 덜 이론적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유년기에 집중했으며(르네 스피츠, 브루노 베텔하임 등), 또 한편으로는 자아심리학과 자기심리학 등 자아에 관심을 두었다(안나 프로이트, 하인츠 하트만, 하인즈 코헛). 이러한 대대적인 보급 현상은 정신분석학이 다른 학문 혹은 운동과 결합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민족정신의학의 창설자 조르주 데베뢰(1908~1985)나 해리 설리번(1892~1949) 같은 일부 학자들은 정신분석학에 인류학적·문화적 접근법을 통합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외부 이론 및 철학적 틀과 정신분석학을 대면시키기도 했다. 빌헬름 라이히(1897~1957)는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 간의, 루트비히 빈스방거(1881~1966)는 정신분석학과 하이데거 현상학 간의 융합을 꾀하기도 했다.
사이버네틱스에서 인공지능까지
사이버네틱스(인공두뇌학)의 운명은 아주 기이하다. 노버트 위너가 1948년에 고안한 이 경계 영역의 학문은 40~50년대에 격동했던 기이한 생각들의 무게 중심이었다. 바로 이 사이버네틱스로부터 인공지능, 정보이론, 로봇공학, 시스템이론, 인지과학이 탄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이버네틱이란 단어 자체는 통용되지 않았는데, 그로부터 36년 후 과학소설작가 윌리엄 깁슨이 <뉴로맨서>(1984)에서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단어를 만든 덕분에 일부 재활용되기에 이르렀다. 어쨌든 처음으로 되돌아가보겠다. 1942년, MIT의 수학자였던 노버트 위너(1894~1964)는 동료 줄리언 H. 비들로와 함께 대공포의 자동 조준기기의 수정 작업에 참가한다. 두 사람은 ‘피드백’이라 불리는 조정과정에 힘입어 발사경로를 조정하는 기기를 구상했다. ‘피드백’은 행동 → 반응 → 행동 등으로 이루어진 순환 반응에 따른 균형 시스템을 유지하며, 온도조절장치의 원칙과 동일한 원리였다. 온도조절기는 외부 상태에 관한 정보를 받고(인풋) 그 결과 바라는 목표(온도, 대상)를 향해 상태를 유지하도록 반응하는 것이다(아웃풋).
다양한 관심사를 지닌 창조적인 연구자였던 위너는 다른 분야에 적용 가능한 메커니즘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비들로 및 신경생리학자 아르투루 호젠블레우트와 함께 그는 1943년 <행동, 목적과 목적론>이라는 논문을 펴낸다. 이 논문에서 그는 ‘피드백’의 개념을 보편화하고 자연에 존재하는 목표화된, 혹은 목적론적인 행동, 즉 인간 뇌의 생물유기체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이 개념을 이용한다.
호젠블레우트의 도움을 받아 위너는 자기주도적 시스템을 고찰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을 불러 모은다. 이처럼 귀중한 교류를 계속하던 중 위너는 정보이론을 수정 중이던 클로드 섀넌, 신경생리학자 워런 맥컬로, 수학자 존 폰 노이만(1903~1957)을 만난다. 이런 만남을 통해 아이디어들이 새로이 생겨나고 서로 오가며 무르익게 된다. 위너는 정보이론을 좀 더 풍요롭게 해주었으며(반작용 메커니즘이 정보이론 및 커뮤니케이션 이론으로 이어지는 데에 영감을 주었다), 맥컬로는 위너에게 반작용(‘피드백’)에 관한 아이디어 등을 제공했다.
메이시 콘퍼런스
1942년의 첫 세미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이 경험을 좀 더 대규모로 확장하고자 마음먹게 된다. 조시아 메이시 재단의 후원 덕분에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열 차례의 세미나가 계획된다. ‘메이시 콘퍼런스’는 수학자, 인류학자, 생리학자, 엔지니어 등 모든 분야의 연구자들이 뉴욕에 모이는 계기가 됐다. 미국 과학계의 최고 두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위너와 맥컬로 외에도 존 폰 노이만, 섀넌, 그레고리 베이트슨, 마거릿 미드, 탈코트 파슨스 등 여러 학자가 참석했다.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이례적인 과학적 공헌을 한 인물들을 한 명씩 살펴보자.
이 만남에 영감을 제공한 위너는 수학 연구에서부터 자신의 영역을 끝없이 넓혀온 인물이다. 1948년에는 <사이버네틱스>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사이버네틱’이라는 단어는 ‘키잡이’라는 의미의 그리스단어 ‘kubernetes’에서 따온 것이다. 위너는 이 ‘새로운 학문’을 ‘기계와 동물에 있어 조종 및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이라고 정의했다. 사이버네틱스의 적용 분야는 생리학에서부터 뇌 인식을 거쳐 공학에까지 이르며, 이후에는 사회 시스템에까지 확장됐다(<사이버네틱과 사회>, 1962년 출간).
맥컬로는 메이시 콘퍼런스의 주최자 중 하나이다. 이 신경생리학자는 뇌의 작동을 연구했는데, 수학자 월터 피츠와 함께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으며 복잡한 연산을 실행할 수 있는 작은 계산 단위로 구성된 장치를 구상했다. 그는 이 장치가 뇌의 작동 모델에 해당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맥컬로가 창설한 ‘연결주의’ 모형의 토대가 됐다. 그와 그의 팀은 1952년 MIT에 합류하여 의안(전자인공망막)의 개발에 착수했고 이를 통해 생체공학(bionics)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냈다.
메이시 콘퍼런스에는 존 폰 노이만도 참여했는데, 이 헝가리 이민자 출신의 천재수학자는 여러 과학 분야를 혼란에 빠뜨리는 중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앨런 튜링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어 최초의 컴퓨터를 고안해낸 인물이다.
이 당시 경제학자 오스카어 모르겐슈테른 또한 메이시 콘퍼런스에 참석했는데, 그가 만들어낸 ‘게임이론’은 미시경제를 혼란에 빠뜨리는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결정에 관한 이론이다. 그는 또한 수소폭탄의 발명으로 귀결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도 했다.
메이시 콘퍼런스는 인문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에게도 열려 있었다. 그중에는 마거릿 미드(1901~ 1978)와 그 남편 그레고리 베이트슨(1904~1980)도 포함됐다. 그들은 함께 발리와 뉴기니 아이들의 교육에서 개인 상호간 커뮤니케이션의 섬세한 과정을 연구했다(<네이븐>, 1936년 출간).
사이버네틱스에 매료된 베이트슨은 상호작용 및 ‘피드백’ 개념, 시스템 이론의 개념을 차용하여 개인 상호간 커뮤니케이션에 적용한다. 그는 돈 잭슨과 함께 팔로알토에 정신건강연구소를 창설하는데, 이곳에서 ‘가족체계치료’가 탄생하게 된다.
사이버네틱스의 주요 견해
메이시 콘퍼런스에 참석했던 연구자들이 모두 같은 견해를 지니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거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견해는 몇몇 핵심 개념을 맴돌았다. 먼저 계산과 전기기기의 결합 가능성이었는데, 이는 컴퓨터의 발명, 정보이론(섀넌), 뇌 세포의 일부 작동방식에 관한 이해(맥컬로)를 이끌어내는 핵심 개념이었다. 반작용에 의해 목적화되는 행동(‘피드백’)이라는 개념은 인공지능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던 또 다른 핵심개념이었다. 여러 요인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모형 및 시스템에 관한 개념은 이후 몇 년 뒤에 탄생한 시스템 이론의 모든 버전에 기초가 됐다.
인류학, 기능주의의 절정
1940년, 옥스퍼드에서 에드워드 에반스-프리처드가 수단에서 돌아와 에티오피아 국경으로 떠나면서 인류학의 고전으로 길이 남을 저서 두 권을 연이어 출간했다. <누에르족>과 <아프리카 정치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2년 후 코네티컷 주의 뉴헤이븐에서 그의 스승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가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 때로는 서로 대립하고 질투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과 제자는 서로의 목표가 동일함을 인정했다. 즉 비교적 신생 학문인 사회인류학의 성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었다. 20년 전부터 그리고 이후 20년 동안 이 사회인류학은 ‘기능주의’라는 학설과 동일시됐다. 영국에서 기능주의는 인류학을 탄생시키고 고찰하는 더 오래된 방식인 진화주의와 전파주의에 대항하여 가장 대대적인 인정을 받은 학설이었다.
사회인류학의 첫 정교수직
말리노프스키는 이러한 성공을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1922년부터 그는 여러 사회의 풍속이 각기 독특한 만큼 그것들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통해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는 사회의 제도와 신화, 의식, 신앙이 서로 연관돼야 한다고 계속 반복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이 다함께 기능적인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며 다시 말해 동일한 목적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1944년, 말리노프스키의 이론적 유작(<문화의 과학적 이론>)이 출간된다. 이 책에서 그는 문화의 최종 목표가 인간의 보편적 욕구(성욕, 보호욕, 종교욕, 지식욕)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던 두 인물은 모두 다 사회학자였는데, 기능 개념의 주창자 허버트 스펜서와 사회적 사실(fait social)에 포괄적으로 접근했던 에밀 뒤르켐이 그 주인공이었다. 말리노프스키가 성공을 거둔 이유는 그가 이 직업의 관행을 쇄신했기 때문인데, 멜라네시아에서 현지조사를 계속하여 써낸 단행본 <태평양의 아르고노트 낙지>(1922)는 성공적인 모범 사례가 됐다. 런던에서 사회인류학의 첫 정교수를 지낸 말리노프스키는 영어권 연구자들로 이뤄진 한 세대의 후학을 배출하여 현장으로 보냈다. 오드리 리처드, 레이먼드 퍼스, 아이삭 샤퍼라, 루시 마이어, 에반스-프리처드 외 다수의 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래드클리프-브라운과 지역비교연구
영국 전역의 대학들이 기능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1937년 이후 오직 한 사람만이 말리노프스키의 영향력을 약간이나마 퇴색시켰는데, 최고의 이론가인 앨프리드 R. 래드클리프 브라운(1882~1955)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래드클리프 브라운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후 동일한 수순을 밟았다. 안다만 제도에서 특별 현장조사를 한 후 곧바로 지역비교연구에 뛰어들었다. 가족과 혈족관계, 토템 숭배 등에 흥미를 가졌으며 이를 기능적 분석에 적용하려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아프리카의 혈족 구조에 관한 연구는 그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그는 혈족 집단이야말로 원시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이며 문화는 이러한 사회적 구성이 되풀이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사회적 사실에 관한 이러한 사회학적 관점은 사회적 구조를 논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사회적 관습이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이나 집단, 국민이 아니라 구조라고 보았다. 말리노프스키는 이를 인간의 욕구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던 반면, 래드클리프-브라운의 구조기능주의는 더욱 추상적이며 좀 더 사실임 직한 목적, 즉 정치적 단결, 제도의 재생산, 충돌의 축소, 사회통제 같은 목적들(<원시 사회의 구조와 기능>, 1952년 출간)에 기반을 둔다. 기능주의 사회인류학의 가장 큰 성취는 40년대 및 50년대에 시행된 혈족 제도나 정치 제도에 관한 분석이다. 혈족 제도를 연구한 래드클리프 브라운과 메이어 포츠는 이런 혈족 제도가 혈족 집단의 연대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아프리카의 정치 제도를 연구한 에반스-프리처드와 맥스 글럭먼, 존 미들턴은 특히 핵심적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충돌을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기능주의자들은 사회학적 관심사와 좀 덜 직접적으로 연관된 또 다른 주제들도 연구했는데, 예컨대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주술을, 에반스-프리처드는 종교를 연구하기도 했다.
신앙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은 이미 기능주의의 출구가 무엇일지를 예고한 셈이었다. 사회구조란 그저 사회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글·성지훈
파리8대학에서 유럽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불편한 관계에 관심이 많다. 앞으로 본지에 '인문학 100년사'를 연재하면서 오랫만에 오래된 책들을 다시 꺼내 새롭게 공부할 즐거움에 들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