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문화의 돌쩌귀 -‘근친상간의 금지’가 뜻하는 것-

이정우교수의 철학노트(마지막회)

2016-07-01     이정우
   
▲ 브론치노의 작품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알레고리>는 <아프로디테, 에로스, 어리석음, 시간>이라고도 불린다. 아들 에로스가 어머니 아프로디테와 입을 맞추며 아프로디테의 젖꼭지를 잡고 있는 모습이, 근친상간을 연상시킨다. 에로스가 깔고 앉은 붉은 방석이 암시하는 것도 성적 쾌락이다. 1545∼1550년 제작,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안젤로 디 코시모 알로리,1503~1572)

근친상간의 금지는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남매 간의 성교의 금지를 뜻한다. 하지만 이 말은 이상하다. 본래 금지는 위반과 짝을 이룬다. 금지가 있는 곳(따라서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곳)에 위반이 있고, 위반이 있는 곳에 금지가 있다. 그런데 부녀, 모자, 남매 간에는 애초에 성욕이 없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금지한다는 것일까? 위반할 것이 없는데 무엇을 금지한다는 것일까? 이 금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법이나 제도가 아니다. 그래서 이를 ‘천륜(天倫)’이라 한다. 근친상간을 금하는 것은 노모스가 아니라 퓌지스다. 이 점에서 이 말은 무척 묘한 개념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분명 근친상간이라는 현상이 존재한다. 이 현상은 이런 형태의 성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막기 위해서 이 금지의 개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이 개념은 별다른 철학적 의미가 없는, 단순히 어떤 생물학적 예외들을 제어하기 위한 법/관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깊이 있고 복잡하게 논의돼 왔다. 이 사실 자체가 이 개념에는 어떤 심대한 의미가 함축돼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근친상간의 금지’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무의식에서의 근친상간 극복: 
‘자아 형성’의 통과의례

일상적인 삶에서의 수준, 의식의 수준에서 근친상간의 ‘금지’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 개념은 무엇을 뜻하는가?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그것의 장소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옮겼다. 인간이란 의식의 차원에서 근친상간의 욕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차원에서 가진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이 이런 욕구를 가진다고 말함으로써, 이 금지를 어떤 개별적인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위치시킨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묻는다. “만일 근친상간이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것이라면, 어째서 수많은 신화, 전설, 소설 등에서 이 소재가 그렇게 자주, 반복적으로 나타나겠는가?” 근친상간이라는 욕구는, 지표면이 늘 어떤 광맥들을 밑에 숨기고 있듯 우리 의식의 저 아래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욕구를 지양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근친상간이 금지된, 더 정확하게 말해 금지할 필요가 없는(지양됐으므로) 의식의 차원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이론화/형상화한 것이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프로이트에게 근친상간에의 욕구는 ‘자연’의 차원이다. 그리고 그 자연의 차원이 지양됨으로써, 즉 근친상간의 욕구가 금지됨으로써 성립하는 차원이 ‘문화’/‘사회’의 차원이다. 프로이트에게서는 이렇게 자연은 연속성의 차원이고(금지의 선이 없으므로 모든 것들이 섞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혼돈의 차원이다(굵은 분절선들이 없다는 의미에서). 반면 문화/사회의 차원은 일정한 분절선들이, 금지의 선들이 그어짐으로써 성립하는 질서의 세계, 가/부(可/否)의 세계, 분절과 불연속의 세계다. 인간의 삶은 카오스의 차원을 극복함으로써 코스모스/노모스의 차원으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연의 세계가 인간에게 들어와 있는 차원, 인간의 내부이지만 아직 순수 인간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과 연속돼 있는 차원, 의식적 차원에서의 인간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자기’가 가지게 되는 욕망을 ‘욕동(Trieb)’이라고 부른다(흔히 ‘충동’이라 번역된다). 근친상간의 욕구란 바로 이 욕동의 차원에서, 인간 속의 자연의 차원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이 차원을 벗어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인간적인 욕망을 가진 ‘정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근친상간의 금지야말로 자연과 문화의 돌쩌귀에 놓여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근친상간의 금지를 무의식의 차원으로 옮겨놓음으로써, 그것을 현상학적 방식이 아니라 구조주의적 방식으로 해명해 나아갈 단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즉,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말이 전해 주는 어떤 의식적인 이미지들과 의미들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어디까지나 어떤 논리적인 구조의 차원으로서 해명해 나갈 단초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은 그를 이은 라캉에 있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구조는 라캉에게서는 ‘팔루스’의 개념을 중심으로 재정식화된다.
아이가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고 어머니는 그것을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곧 팔루스(Phallus)다. 팔루스는 생리학적인 신체의 특정 부위(성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호(Sign), 구조주의 용어로는 ‘기표(시니피앙)’를 가리킨다. 아이는 그 팔루스를 자신이 아닌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머니의 욕망의 충족은 자신이 아닌 아버지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팔루스는 ‘상실된 것’으로서 사라지고, 아이는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성장하게 된다(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은 의식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실제의 사건들이 아니라 무의식 속의 구조적인 사건들이다). 그러나 상실된 것으로서의 팔루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아이가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것으로서의 이 팔루스가 성장한 아이의 욕망의 구조를 지배한다. 욕망의 기표들(욕망하는 주체들을 대리하는 기표들, 예컨대 회사에서의 어떤 자리, 특정 브랜드의 상품 등)의 전체 구조가 이 팔루스(상실된 무, 결여)를 중심으로 구조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한 인간의 욕망은 결국 어린 시절 그의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났던 근친상간의 드라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 차원에서 근친상간에의 욕구를 가지며(인간 속에 들어와 있는 자연), 그 욕구를 극복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적인 욕망을 가진 정상인으로서, 그러나 팔루스가 잘려나간 흉터를 간직한, 그리고 그 흉터를 자신의 욕망의 중심으로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서 살아가게 된다.

구조주의적 무의식 이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적 정확성보다는 소설적 흥미진진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 생각을 좀 더 의미 있게 정식화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적 사유가 필요했다. 우리는 근친상간의 금지가 가지는 이런 의미를 구조주의 인류학에서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구조주의 사상에서 말하는 이 ‘구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 
구조주의가 초점을 맞추는 곳은 ‘상징적인 것(le symbolique)’의 차원이다. 이에 비해 현상학이 초점을 맞추는 곳은 ‘상상적인 것(l’imaginaire)’이다. 조심할 것은 이때의 ‘Imaginaire’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상상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적인 것’, ‘경험적인 것’, ‘현상적인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를 비롯한 고전적 철학자들의 용례에서도 ‘Imagination’은 현대적인 뉘앙스에서의 ‘상상’을 뜻할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오히려 지각을 뜻한다. 우리 신체가 대상들과 접촉해서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 그것이 곧 이미지작용(Imagination)인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상상적인 것’도 대개는 이런 뜻이다. 마지막으로 존재론이 초점을 맞추는 곳은 ‘실재적인 것(le Réel)’이다. 존재론은 ‘실재(Réalité)’를 찾아왔다. 이렇게 현상학과 상상적인 것, 구조주의와 상징적인 것, 존재론과 실재적인 것이라는 쌍이 성립한다. 현대 철학, 특히 프랑스에서의 철학은 현상학→구조주의→존재론(후기구조주의)의 과정을 밟아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구조주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들뢰즈와 바디우가 각 국면을 대변한다. 라캉 같은 인물은 이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유명한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사유(물론 일직선이 아니라 ‘보로메오의 매듭’이라는 점이 강조되지만)를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가 상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객관적 실재와 인식하는 주체의 이분법이 아니라, 바로 양자 사이에 상징적인 것이라는 차원을 매개해 삼원적 구도로 봄을 뜻한다. 그리고 객관적 실재와 인식하는 주체는 이 상징적인 것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기본 정향이다. 상징적인 것이란 곧 기표들의 체계이다. 구조주의자들에게 상징적인 것이란 단지 마음을 외화(外化)한 것도 아니고 실재를 재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상징적인 것을 경유해서 주체와 객체가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레비-스트로스의 토템 연구를 생각해 보자. 현상적인 것(상상적인 것)에 초점을 맞출 경우 예컨대 토템의 기능을 중시하게 된다. 토템은 해당 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 토템이 해당 부족의 중요한 먹거리일 수도 있고, 반대로 그 부족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피해야 할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어떤 부족에게 토템은 신성한 존재이고, 그들의 삶을 가능케 하는 초월적인 실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해당 부족과 그 토템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한 부족의 토템, 예컨대 늑대는 그 부족에게 어떤 기능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부족과 특별히 닮은 것도(그 부족이 늑대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그 부족에게 신성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부족은 왜 하필 늑대를 토템으로 삼을까? 구조주의자들은 각 부족과 그 해당 토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토템들의 체계, 토템 전체의 구조에 초점을 맞춘다.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현대의 토템을 생각해 보자. 프로야구구단 OB의 토템은 곰이고, 한화는 독수리, 삼성은 사자다. 그런데 각 토템과 각 구단들은 직접적 관계가 있을까? 아마 구단을 창설한 사람들의 심리적 선호도 정도가 관계가 있겠지만, 사실 어떤 본질적인 관계도 없다. OB 선수들이 미련한 곰들도 아니고(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지금 독자적인 1위를 달리고 있겠는가), 한화 이글스 선수들이 하늘을 막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고(오히려 바닥을 기고 있지 않은가),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이 모두 타 구단 선수들보다 힘이 센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질적인 것일까? 본질적인 것은 10개의 구단이 어떤 토템의 체계, 구조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10마리의 토템은 바로 프로야구라는 행위의 체계를 가능케 하는 어떤 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랑이, 곰, 사자는, 그 각각으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는 의미를 가지는 기표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 전체가 프로야구라는 체계 전체를 구조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론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구조주의 사유의 기초는 소쉬르가 말한 ‘자의성’이다. 기호와 사물 사이에는 단지 임의적인(Arbitraire) 관계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SK의 선수들과 와이번즈 사이에는 임의적인 관계밖에는 없다. 만일 새로 온 구단주가 말[馬]을 좋아해서 구단의 이름을 ‘SK 에쿠우스’라 바꾼다고 해서 사소한 것들 외에는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 또 하나 특히 중요한 것은 기표들은 개별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의 장(場)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의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기표들은 하나의 장 안에서 서로 변별적인(Differential) 관계를 가짐으로써 의미작용을 한다. ‘변별적인’이라는 말은 곧 ‘차이를 만들어내는’이라는 뜻이다. 구조주의가 생각하는 구조는 어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정적인 것이 아니다. 배구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이 배구공을 가지고만 있으면 배구라는 운동이 성립되지 않는다. A가 B에게 그리고 B는 다시 C에게 계속 토스를 해야 배구라는 운동이 성립한다. 이 토스가 바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즉 변별적인 작용이다. 하나의 구조는 단순히 공간적인 어떤 구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기표들이 변별적 운동을 하고 그러한 운동을 통해 의미가 생성하는 장이다. 
자크 라캉이 논했던 유명한 <도둑맞은 편지>를 생각해 보자. 이 단편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 계열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 이야기 계열은 편지를 읽다가 왕이 나타나자 당황하는 왕비, 아무것도 모르는 왕, 그리고 이 상황을 이용해 편지를 가로채는 대신으로 돼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 계열은 편지를 교묘하게 ‘숨긴’ 대신, 계속 허탕만 치는 경찰총감, 가지로 편지를 가로채는 뒤팽으로 돼 있다. 여기에는 각 개인의 복잡한 심리들이 작동하고 있지만, 사실 그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구조, 편지라는 기표가 계속 자리바꿈(Dépacement)을 행함으로써 변별적 차이가 생성되고, 의미 - 현상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구조주의적인 의미 - 가 생성되는 것이다. 

무의식의 구조와 근친상간의 금지

이제 구조주의라는 개념적 연장을 가는 것은 이 정도로 하고, 다시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 보자. ‘근친상간의 금지’란 무엇인가?
인류학의 경우 근친상간의 금지는 곧 자연과 문화 사이의 거대한 변별점이다. 그것은 자연과 문화 사이에 놓여 있는 돌쩌귀로서, 생물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친족체계의 기본 구조>에서 친족체계를 성립시키고 있는 복잡한 구조를 세밀하게 추적해 밝히고, 그런 분석의 결과 근친상간의 금지가 생물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논리학적인 것, 구조주적인 것임을 역설했다.
이런 논의는 정신분석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프로이트가 근친상간의 금지를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의 차원으로 옮겼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방금 우리가 말했던 구조주의 사유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적어도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구조’란 무의식의 층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무의식 개념과 구조주의 개념이 만나게 되며, 따라서 프로이트가 구조주의적으로 독해될 수 있게 된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여의도 광장 같은 곳에서 모두 모여서 “우리 문법을 이러저러하게 정합시다”, “영어하고 달리 동사를 뒤쪽으로 돌립시다”, “‘비로서’보다는 ‘비로소’로 합시다” 등등의 내용으로 의논한 적이 있었던가? 조선 시대 사람들이 언제 다 같이 모여서 “서양 사람들은 음식을 시간에 따라서, ‘코스’로 먹지만, 우리는 그냥 한 상에 다 차려서 먹읍시다”하고 약속한 적이 있던가? 구조는 무의식적인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의식적으로 약속을 하기도 하고, 그런 약속들이 우리의 문화를 지배하기도 한다. “스트라이크가 세 번이면 아웃”이라든가 하는 식의 노모스가 존재한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조는 퓌지스 자체의 차원에서, 무의식 속에 ‘주어진 것(The given)’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구조주의자들의 생각이다 
자크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돼 있다”고 말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의 구조주의적 개념화를 정초했다. 이렇게 구조주의적으로 볼 때, 앞에서 이야기했던 오이디푸스 드라마도 일종의 구조주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정상인’이 되는 과정은 곧 인류학적으로는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하는 과정과 유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팔루스’가 그토록 중요한 것은 <도둑맞은 편지>에서 편지(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가 핵심적인 것과 유비적이다. 프로이트의 사유는 구조주의를 흡수한 라캉의 사유를 통해서 보다 탄탄한 설명력을 갖는 데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근친상간의 금지는 아빠-엄마-나라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이라는 구조의 문제이며, ‘팔루스’라는 기표(배구공이나 라캉의 편지와 같은 핵심적인 기표)를 둘러싼 문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연과 문화를 변별하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실증 과학적 논의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포퍼,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의 비판이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근친상간의 금지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설명은 과학일까, 아니면 한 편의 재미있는 소설일까?  


글·이정우
1959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시민들을 위한 철학,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소운서원을 열어 연구와 후학 양성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 내 대안공간인 파이데이아 홍릉을 창설해 대학의 시민교육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소운 이정우 저작집(전5권)>,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세계철학사 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