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20년 투쟁, 일터도 지역도 살렸다

신화가 된 '불굴의 105인' 라시오타 조선소 점거 투쟁

2010-01-06     도미니크 프랑스셰티|노동운동가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이른바 ‘사회적’이라고 불리는 산업구조 개혁 바람이 불었다. 오펠, 필립스, 알카텔 뤼상, 몰렉스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노동자들은 적정한 퇴직 보상금을 받기 위해 싸워야 했다. 그러나 1988년 모두가 지중해 조선산업의 종말을 선언했을 때 일부 노동자들은 라시오타 조선소를 점거했다. 그들은 10년 동안 불굴의 투쟁을 벌여 조선소를 살려냈다. 그 투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프랑스 정부, ‘재산업화’ 명분 흑자 조선소 폐쇄 결정
관공서·은행 점거 등 저항 지속, 수천개 일자리 창출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세계 최초의 영화 <라시오타역에 도착하는 기차>를 촬영한 이후 프랑스 부슈뒤론 지역의 작은 항구도시 라시오타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조르주 프랑쥐가 “공포스러운 이미지”(1)라고 묘사한 50초 분량의 이 영화는 오랫동안 관객의 뇌리에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곳에서 불과 몇백m 떨어진 곳에서 같은 해, 길이 148m급 여객선 ‘르쉴리’호가 진수했다. 선주 레 메사주리 마리팀(2)의 주문으로 건조된 이 선박은 1836년 이래 라시오타 조선소에서 건조된 103번째 배였다.

이 조선소에서 노동운동의 역사상 가장 길고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프랑스 정부가 3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추진해온 계획의 최종 단계로 조선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하자, 프랑스 노동총연맹(CGT) 소속 노동자 100여 명이 10년 넘게(1988~99) 이어진 조선소 점거투쟁에 들어간다.

1975년 4만354명에 달하던 프랑스 조선산업 종사자 수는 1998년 6650명으로 84%나 감소했다.(3) 유럽의 생산량이 85%나 감소하는 동안, 한국의 조선산업 생산량은 7배나 증가했고, 일본은 전세계 선박의 반을 생산하고 있었다.(4) 1962년 790척에 달하던 프랑스의 화물선과 여객선은 1996년 210척에 불과했다. 조선산업을 제외한 해양산업 전체 종사자 수도 1962년 4만3천 명에서 1998년 8천 명으로 줄었다.(5)

브뤼셀에서 내려진 혹독한 결정은 프랑스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업에 대한 국가 지원 금지 원칙을 명시한 로마조약 제4조(1957)와 <조선산업 백서>(1959)는 조선산업의 구조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결정적 계기는 1977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제출된 ‘다비뇽 계획’(작성자 이름을 땀)이었다. 유럽연합 건설 프로그램에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들의 폐쇄가 포함됐다. 유럽연합은 지중해 연안의 ‘자연’을 관광지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계획을 입안한 에티엔 다비뇽은 1981∼85년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다양한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이었다(유럽기업인 모임의 회장, 벨기에의 소시에테제네랄은행과 포르티스은행·트락타벨의 회장, 아코르 부회장, 피아트와 BASF 페시네 페트로피나 이사 등). 그는 조선산업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철폐하고 생산량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폭력은 사회적 폭력에 맞선 저항”
1982년 피에르 모루아 정부는 덩케르·세인쉬르메르·라시오타 등 조선소 3곳을 통합하는 ‘라노르메드’(북부지중해조선소) 건설계획을 추진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시라크 정부의 알랭 마들랭 산업부 장관이 국가지원금 철폐를 선언함에 따라 라노르메드의 기업 청산 과정이 시작된다. 1986년 9월, 20여 년간 라시오타 조선소(CNC)의 이사를 지낸 장 뒤아르는 분노했다. “정부가 라시오타를 죽였다.(6) 라노르메드 창립 당시 덩케르크와 세인쉬르메르 조선소는 파산 상태였다. 반면 라시오타는 재정 상태도 좋았고 회사도 건강했다. 그 상태로 계속 갔다면 지중해 제일의 조선소가 되었을 것이다.” 1986년 초, 조선소 폐쇄 결정이 발표되자 설마하던 의심은 분노로 바뀌었다. 라노르메드의 노동총동맹(CGT) 대표를 지낸 조 로드리게즈는 이렇게 말했다. “경쟁력 있는 회사에 근무하던 4천여 명을 갑자기 해고하겠다는 결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1986년 6월부터 12월까지 라시오타의 거리는 연일 시위자로 가득 찼다. 시 전체 인구 3만 명 중 1만2천 명이 시위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 몇몇 ‘공격조’는 중앙정부와 시 정부의 상징물이나 은행, 언론사 등을 공격하기도 했다. 1987년 7월 마르세유에서는 라노르메드 노동자들이 주의회 건물을 점거하고 전투경찰들과 대치했다. 시위자들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불을 지른 후 라시오타 경찰청을 습격해 경찰들과 충돌했고 시 재정위원회 건물에도 불을 질렀다. 몇 주 후, <프랑스3 메디테라네> 방송사의 시위 관련 보도 태도에 분노한 시위자들이 보도차량을 조선소 크레인에 며칠간 매달아둔 일도 있었다. 장피에르 푸코가 진행하던 <TF1> 채널의 프로그램 <즐거운 저녁> 스튜디오에 시위자들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가 저지른 폭력은 우리에게 가해진 사회적 폭력에 대한 응답이었을 뿐이다.”

라시오타 시민 대부분은 조선소 폐쇄가 경제적인 실수일뿐더러 미리부터 준비된 사회적 범죄이자 5세기에 걸쳐 축적된 역사를 하루아침에 끝장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은 “라시오타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외치며 지중해에 마지막으로 남은 프랑스의 조선소를 폐쇄하려는 시도에 저항했다. 마지막 선박 ‘몬트레이’의 진수식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난 1988년 10월 8일, 조선소 점거 찬반투표에서 노동자 100여 명이 찬성표를 던진다.

훗날 ‘불굴의 105인’이라고 불리게 된 점거 노동자들의 투쟁을 주도했던 피에르 티다는 이렇게 회고한다. “조선소 격납고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뤼시앙 바뇰리(CGT 지역위원장)가 발언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찬성 표시로 손을 치켜드는 대신, 바닥에 그어진 하얀 선을 넘었다. 우리는 그렇게 투쟁의 첫발을 내디뎠다.”
현재 세미뎁사 기술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피에르 티다는 이사회 사무실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창밖으로는 길이 50m가 넘는 대형 요트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우리가 이끈 투쟁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관광지로 바뀔 뻔한 조선소를 우리 힘으로 지켜낸 것이죠. 오늘날 라시오타의 고급 요트 정비시설은 제노바, 바르셀로나와 함께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좌파 정부조차 집요하게 방해
35ha에 달하는 조선소에서 해양산업의 장래를 위해 노동자들은 20년이 넘도록 희망과 분노가 교차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 기간에 우파 정부는 물론 좌파 정부까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생산활동 재개를 가로막았다. 1989년 8월, 미국의 해양운수회사 렉스마는 라시오타 조선소를 사들여 35척의 이중선체 유조선을 건조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으로 2천 명의 고용 창출이 예상되었다. 조선소가 다시 살아날 거라는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미셸 로카르 총리와 로제 포루 산업부 장관, 자크 셰레크 국토개발부 장관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포루 장관은 이렇게 잘라 말했다. “정부는 이 조선소에서 선박을 건조하는 일을 지원하거나 동의할 입장에 있지 않다.”(7) 한편 포루 장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다. “시장 상황이 나아지고 있고 세계적으로 초대형 원유 운반선(이중선체 유조선)도 교체가 진행 중이다.” 실제로 1990년 프랑스 선주들은 주로 아시아 지역의 조선소에 30여 척의 선박을 주문했다. 총가격은 55억 프랑에 달했다.(8)

렉스마 프로젝트에 조선소 점거 노동자들이 지지를 보내자 포루 장관은 양손에 당근과 채찍을 든 조련사처럼 행동했다. “렉스마라는 장애물이 사라지고 사회 분위기가 진정되면 선진기업들이 투자를 하려고 몰려올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투자자들이 발길을 돌릴 뿐 아니라 조선소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한 ‘예외 실업자 조처’를 다시금 문제 삼게 될 것이다.” 예외 실업자 조처란 라시오타시로 들어오는 길목에 세제 혜택을 받는 기업단지를 조성하려는 것으로, 정작 조선소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1978년 ‘프랑스 조선산업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프랑스민주노동연맹(CFDT)이 발간한 문서에 미래의 국토개발부 장관 자크 셰레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투쟁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투쟁의 결과가 다른 많은 사안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효과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일궈낸 성과를 보존하고, 더 나아가 현재 제기되는 새로운 차원의 요구에 발맞추어 진보를 쟁취하기 위해서다.” 그로부터 10년 후 이 노동운동가는 장관이 되었다. 그의 레닌주의적 말투는 이제 기업주들의 대변지인 <라 트리뷴 드 렉스팡시옹>과 <르피가로>에서 신앙 고백으로 바뀐다. “라시오타의 조선산업은 경제적인 정당성을 잃었다. 우리는 더 이상 낡은 공장을 지키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다.”(9)

한편 1982년 제정된 지방분권법에 따라 부슈뒤론 지방정부가 국가 소유의 공공 해양산업을 관리하게 되었다. 지방의회를 이끌던 공산당과 사회당 의원들은 1989년 9월 회의를 열었다. 라노르메드의 CGT 대표이자 프랑스 공산당(PCF) 당원이기도 했던 조 로드리게즈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로베르 브레 공산당 지역위원장이 사회당 의원들에게 렉스마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7천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 라시오타에 2천 개 일자리를 창출하는 계획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공공 해양산업의 관리자로서 지방정부는 조선소의 경제·산업적 방향 설정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당 의원들은 전폭적 지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로베르 브레에게는 시 정부가 렉스마 프로젝트를 추진하든가 사회당이 다수당의 자리를 포기하든가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당시 사회당에는 공산당 의원들의 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9년 12월 22일 결국 지방정부는 렉스마에 6개월 계약으로 조선소의 수리와 관리를 맡긴다. 1990년 1월 렉스마는 CGT와 ‘불굴의 105인’ 재고용을 보장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1월 8일 오전 7시 조선소의 조업 개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전 도시에 울려퍼졌다.

거대 언론들, 정부와 한목소리 공세
그러나 생산설비가 없는데 어떻게 배를 만들겠는가? 렉스마가 라노르메드를 인수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로카르 정부는 당시 국유은행이던 웜스은행을 통해 렉스마가 제시한 700억 프랑보다 낮은 가격인 550억 프랑에 생산설비를 사들이게 했다. 이런 ‘생산설비 탈취 작전’에 맞서 노동자들은 두 번에 걸쳐 ‘정중한 태도’(?)로 웜스은행을 방문해 소란을 일으켰다.

피에르 티다가 보기에 당시 정부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단호한 투쟁 의지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조선소를 점거한 지 벌써 2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해고가 이어지고 마지막 선박 건조가 끝나면 노동자들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소를 지켰다. 주문이 계속 밀려드는 상황인데도 산업부 장관이 조선소를 철폐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자 노동자들은 분노했고 더욱 단결하게 되었다.”

정부는 경제적 관점에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 수 없게 되자 유럽연합을 핑계대기 시작했다. <라 트리뷴 드 렉스팡스옹>은 ‘렉스마의 라시오타 진입을 막기 위해 나선 브뤼셀’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냈다.(10) 거대 언론들은 정부와 한목소리로 공세를 취했다. 그들은 프랑스가 조선소 폐쇄 결정을 따르지 않으면 유럽연합의 제재가 따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레벤망 드 쥐디> 같은 주간지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부정사건”을 폭로하면서 CGT 소속 점거 노동자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유인원처럼 옆에 몽둥이를 놓고 앉아서는 누군지도 모르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고 묘사했다.(11)

장프랑수아 칸이 운영하던 <레벤망 드 쥐디>는 염탐 활동에서부터 마약까지 온갖 혐의를 들춰내며 렉스마 사장의 본심을 알아내려 애썼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렉스마의 사장이 그토록 거액을 투자하려는 데는 분명 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반면 로카르 정부에서 조선소 문제 해결 책임을 부여받은 베르나르 타피에 대해서는 어떤 조사도 진행되지 않았다.

상당수 ‘투자자’들은 35ha에 달하는 이 조선소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이곳에 마리나(요트와 모터보트 정박소-역자)와 고급 주택단지, 호텔 등을 건설하고 싶어했다. 더욱이 조선소 폐쇄는 로랑 파비우스 정부가 이미 1984년부터 추진해오던 철강·조선·탄광 산업의 재구조화 작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정부는 노사관계의 판을 다시 짜기 위해 수만 명의 노조원이 일하고 있는 이들 분야에 대해 ‘현대화’(12)라는 명분으로 재구조화를 단행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공동 인식이 농성 중이던 ‘105인’뿐 아니라 그들에게 지지를 보낸 사람들을 한데 묶는 힘이 되었다.

장폴 르루아(13)의 참여로 제작된 다큐멘터리에서 전 CGT 지역위원장 뤼시앙 바뇰리는 그들의 전례 없는 투쟁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설명한다. “그들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정치 지도자나 국가기관은 물론 우리 CGT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른 모든 기구처럼, CGT도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개시하기 위한 절차가 존재했다. 라시오타의 ‘105인’은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했다. 모두가 함께 모여 공동으로 결정을 내렸다.”(14)

피에르 티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각각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전례 없는 투쟁 의지로 단결했다. 초반에는 CGT 조합원이 아닌 사람도 있었다. 다른 동지들처럼 나는 조선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나중에 정계에 진출한 조합원들과 달리 이 ‘불굴의 105인’은 전투적 구호를 외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티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물론 우리는 불법적인 행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가 합법을 가장해 우리에게 가한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는 여러 번 라시오타역에 진입해 열차 운행을 중단시켰다. 총 600여 대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경찰에 연행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 카시스 경시청으로 항의 방문을 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경찰 순찰선을 탈취해 경찰 2명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요구했다.”

타 직종 연대투쟁에 정부도 현실 인정
다큐멘터리는 CGT가 ‘105인’을 위해 조직한 연대투쟁의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몇 주에 걸쳐 마르세유의 부두 노동자들을 만나 모금 활동을 벌였다. CGT 소속 노조가 있는 기업이나 관청에서도 비슷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우리가 조직한 ‘고용을 위한 행진’을 통해 80만 프랑이 넘는 돈이 모였다.”

‘105인’의 단호한 투쟁과 CGT의 연대투쟁 앞에서 정부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이길 가망이 없는 싸움’으로 시작된 점거 노동자들의 투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적·정치적 힘겨루기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싸움은 정부가 진지한 태도로 협상에 임하고서야 끝을 맺는다. 1994년 8월 17일, 중앙정부와 마르세유 지방정부, 그리고 라시오타 시 정부와 의회는 조선소의 재산업화를 담당할 ‘세미뎁’이라는 회사를 세운다. 피에르 티다는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지만 투쟁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었다”고 분석한다. 수년간 정치인과 국가기구를 상대로 투쟁을 벌여온 이들은 1994년 8월에 서명된 합의사항들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역설적이게도 첫 감시 대상은 새로 시 정부를 대표하게 된 공산당과 사회당 의원들이었다. 특히 1995년 시장에 당선된 공산당 소속 로시 사나가 그 대상이었다. 그는 라시오타시가 7억1500만 프랑(6.55957프랑스 프랑=1유로)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어 마르세유 지방정부의 관리하에 있던 시기에 시장이 됐다. 전 시장 장피에르 라퐁이 상수도와 정수 시설, 학교 급식, 가로등 시설 등의 공공사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부채가 발생했으며, 지방세 또한 급격하게 인상된 상태였다.

시 정부는 조선소 폐쇄에 따른 경제·사회적 위기는 물론 전 시장이 떠넘긴 금융위기까지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선거 전에는 부채상환 불능을 선언하겠다고 공약했던 공산당 의원들은 일단 시 정부를 이끌게 되자 은행 쪽과 구조조정 및 분할 상환을 놓고 협상하기 시작했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는 부채 관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공산당 정부는 은행과 마르세유 정부에 잘 보이려 노력했다. 그것이 재선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2001년 선거에서 대중운동연합(UMP) 후보 파트리크 보레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들의 실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 정부가 세미뎁에 고용한 컨설턴트는 조선소 노동자들을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결국 노조원들이 사무실을 찾아가 그에게 업무가 끝났음을 알리고 정중하게 시청 문 앞까지 배웅하게 된다.

노동자 투쟁에 의한 재산업화 성공
결국 재산업화에 성공하게 된 건 노동자들의 끈질긴 압력 덕분이었다. 1999년 모나코 항만 확장 공사에 쓰일 바지선 건조 계약을 따낸 것과, 1년 후 알스톰사의 주문으로 중국의 창장 싼샤댐 건설에 쓰일 터빈 제작 계약을 따낸 것도 그들 덕분이었다.

세미뎁과 합의 문서에 서명을 하고 5년이 지난 1999년 6월 ‘105인’은 클로드 카르델라 상공회의소장을 감금한다. 그는 100m 높이의 조선소 기중기 꼭대기에 갇혀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피에르 티다에 따르면, “1994년에 이루어진 합의가 구체적으로 실행되지 않은 것에 대해 공권력에 다시 한번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당시 경제장관과 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정당한 행동이었다.”

2000년이 지나고 나서야 조선소를 고급 요트의 수리와 점검을 위한 단지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이번에도 피에르 티다와 그의 동지들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모든 단계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가령 세미뎁이 선박용 엘리베이터 같은 첨단장비를 사들인다거나 새로운 해양회사들이 사업을 시작한다든가 하는 과정이었다.

모나코 마린사는 2001년 협상에 들어가 2004년부터 조업을 시작했다. 모나코와 라시오타에 6개 작업장을 보유한 이 회사의 창립자 미셸 뒤크로는 이 사업을 이렇게 평가했다. “규모와 지리적 이점으로 보건대 라시오타 단지의 잠재력은 제노바나 바르셀로나와 경쟁하기에 손색이 없다.” 현재는 이 산업단지에 28개 기업이 입주해 있으며 60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모나코 마린의 기술책임자 뱅상 라로크는 “충분한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10년 내에 라시오타 단지는 3천 개 일자리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첫 단계의 작업은 벌써 이루어졌다. 애초 설치돼 있던 대형 요트 시설과 함께 중형 요트 시설이 추가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편 정부는 여전히 일관적이지 못한 정책을 남발하고 있다. 장클로드 고댕 마르세유 시장은 중앙정부 산하 마르세유 항만공사와 마르세유 정부가 “10번 항을 중심으로 고급 요트 단지를 조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셸 뒤크로 사장에게 이 계획은 세미뎁이 아직 충분히 발전 역량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를 하나 더 조성하겠다”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불굴의 105인’의 라시오타 조선소 투쟁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까?

글·도미니크 프랑스셰티 Dominique Franceschetti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

<각주>
(1) 마리 마그들렌 브뤼만뉴, <프랑쥐-인상과 고백>, L’Age d’homme, Paris, 1990.
(2) 장클로드 리알, <라시오타, CNC의 메사주리 마리팀>, Caractéres, Marseille, 2008.
(3) 국제노동기구(ILO), <운송수단 생산 분야에서 세계화가 노동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 제네바, 2000년 5월.
(4) 다니엘 아비릭 & 자크 베버, <해양경제 연구의 중요성>, Ifremer, www.ifremer.fr, 2000년 9월.
(5) 장이브 아몽, 장클로드 뒤부아, 제라르 가스, <프랑스 상선의 미래: 공동의 이해!>, Conseil génénral des ponts et chaussées/ Inspection génénrale des services et affaires maritimes, 2000년 2월 25일, www.marine-marchande.net.
(6) <르 메리디오날>, Marseille, 2006년 9월 4일.
(7) <라시오타 시장님께 보내는 서한>, 1990년 7월 5일.
(8) ‘프랑스 선주들 선박 30여 척을 주문하다’, <르몽드>, 1990년 3월 16일자 참조.
(9) <라 트리뷴 드 렉스팡시옹>(La Tribune de l‘Expansion), 1988년 8월 1일자.
(10) 1990년 8월 1일.
(11) ‘렉스마가 전파하는 복음’, <L’Evénement du jeudi>, Paris, 1990년 1월 18~24일 주간호.
(12) 사회당의 ‘현대화’ 단어 사용에 관해서는 Patrick Braunsdml 논문 참조. <Die zeiten sind hart, aber ‘modern’. Sparchilde der sozialisteschen politik in Frankreich 1983-1986>, University of Konstanz(RFA), 1988.
(13) 뤼시앙 바뇰리 & 장폴 르루아, <라시오타 조선소 투쟁과 승리>, Connaissance du mouvement social 13, cms@free.fr에서 20유로에 구입 가능.
(14) ‘105인’과 CGT 중앙 지도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1990년대 말 결국 ‘105인’은 CGT 탈퇴를 선언한다. 2007년 6월 15일 열린 선박용 엘리베이터 준공식에 베르나르 티보가 참석한 것을 계기로 화해가 이루어졌다.

 


 

<반역의 도시, 라시오타>

라시오타는 반역의 역사 속에서 탄생했다. 1429년 라시오타는 세이레스트 도시의 지배에서 독립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두 도시의 갈등은 항구와 연안의 관리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세이레스트는 관리 책임을 회피했다. 15세기부터 조선과 어업은 이 지역의 주요 산업이 되어왔다. 뒤쪽이 산으로 둘러싸여 섬처럼 고립된 라시오타에서는 예로부터 모든 교통과 통신이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어업뿐 아니라 교통수단을 위해서도 선박을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라시오타의 조선산업은 전 유럽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으게 된다. 1853년 뮐루즈의 방직공장 단지와 함께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라시오타에 조선 노동자 거주지가 건설된다. 이런 가족 기업적인 분위기 때문에 1908년이 돼서야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19세기 조선기술의 혁신은 라시오타에도 산업혁명의 바람을 몰고 온다. 1835년 라시오타 출신의 사업가 루이 베네와 선박 설계사 방스의 가족은 지중해에서는 최초로 철제 증기선을 건조한다. 1851년, 현재 프랑스 우체국의 전신인 ‘메사주리 나시오날’은 라시오타 조선소에 상품과 우편물 수송 목적의 선박을 주문한다. 1870년 당시 라시오타 인구 1만 명 가운데 3500명이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이 건조한 선박들은 프랑스 국기를 펄럭이며 지중해와 인도양을 비롯해 중국해와 홍해, 흑해, 북대서양, 태평양 등 전세계 바다를 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