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인간의 희미한 경계

2016-07-29     아쉴 바인베르크 | 과학저술가

최신 연구들은 그동안 우리의 머릿속에 깊게 각인된 동물 대 인간, 인간 대 기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기존의 이분법을 폐기해야 할까? 아니면 각 존재들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재설정해야 할까?

 
우리 개는 ‘인격체’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모든 존재를 인간에 견줘 말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던 것이다. 나아가, “개는 가족의 일원”이라고 우기는, 반려견에 눈먼 이들처럼 취급되는 게 싫었다. 나는 결코 반려견을 자녀와 동일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제 내가 “개는 인격체다”라고 주장해도 예전처럼 비웃음을 사지는 않을 듯하다. 내 견해를 뒷받침해줄 법한 과학적 증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의 생태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개는 인격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 더 나아가 “동물은 인격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동물과 인간을 명목상 구분 짓던 기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내 반려견만 봐도 자명해 보인다. 내 반려견은 데카르트가 말한 ‘동물기계’와는 분명 다르다. 감정과 의식, 지성이 결여된 네 발 달린 자동기계가 아닌 것이다. 그는 사랑이 넘치고(작가 셀린느도 “사랑은 개도 가능한 끝없이 무한한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예절이 바르며(볼 일을 보고 싶으면 밖에 나가자고 한다. 소파 위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안다), 분별력이 있고(단단한 이로 커다란 뼈다귀는 콱 깨물지언정, 아이들은 조심조심 다룰 줄 안다), 약은 구석도 있다(큰 개가 나타나면 대개는 슬슬 피하지만, 줄에 묶여 있거나 쇠창살 뒤편에 있는 큰 개를 만나면 앞에서 살살 약을 올린다). 
 
그렇다고, 내 개에게 ‘사람’이란 타이틀을 붙여야 할까? 사실 이것은 끝이 나지 않는 논쟁거리 중 하나다. ‘사람’이란 개념 자체를 정의하기가 어려우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여하튼 새로운 시대에 맞춰 오늘날 개의 생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동안 인문과학용으로만 쓰이던 분석도구를 개에게도 확대 적용할 것을 주장한다. 개도 의지와 욕망, 심리적 표상체계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개에게도 ‘인문학’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베로니크 세르베와 그 동료들의 생각이다. 오늘날 심리학자나 인류학자들 가운데는 마치 직장 동료나 범죄자들을 연구하듯, 비록 활발한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개에 대해서, 개의 술수와 욕망, 세계관 등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던 기존의 경계는, 오늘날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이 현상은 철학과 과학, 법학, 윤리학 등 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간과 동물의 구분은 단순히 두 존재의 경계를 가르는 데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은 본능 대 지능, 선천성 대 후천성, 자연 대 문화, 몸 대 마음, 결정론 대 자유의지라는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개는 본능에 얽매인 자연적인 존재로 간주돼 왔다. 반면 인간은 어느 정도 본성에서 자유로운 문화적 존재로 널리 이해됐다. 이러한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마도 진화의 어느 단계에서, 유전자와 본능적 행동양태의 세계에 지능과 문화의 요소가 불쑥 출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자유의 영역이 필연성의 세계보다 훨씬 더 우월해졌으리라. 물론 두 패러다임의 대립(선천성 대 후천성, 자연 대 문화, 동물 대 인간, 몸 대 마음 등)이 인간의 의식 구조 속에 깊이 뿌리내리는 동안, 이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찰스 다윈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으로 통하는 이성적 추론, 언어, 의식 등 정신적 능력이 일부 동물들에게서도 기초적인 수준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였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점진적인 진화과정을 통해 커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1세기 뒤인 1970년 에드가 모랭도 <잃어버린 패러다임>에서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하던 기존의 이분법을 공격했다. 그러나 두 가지를 아우르는 절충적 이론은 끝내 주류 이론으로 편입되지 못했다. 과학이든 정치에서든 인문과학 대 자연과학의 이분법을 초월하려고 시도한 이들은, 항상 양 진영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한 채 고립됐다.
 
얼마 전부터 자연 대 문화의 이분법을 초월하려는 시도와 관련해 수많은 저작이 쏟아지고 있다. 주로 후성설(수정란이 발생하고 있는 동안 점차 몸의 각 부분이 특정한 조직이나 기관이 되도록 결정된다는 이론-역주)이나 가소성(Plasticity·기억, 학습 등 뇌기능의 유연한 적응능력을 의미-역주), 공진화(Coevolution·복수의 종이 서로 생존이나 번식에 영향을 미치면서 진화하는 현상-역주), 동물 문화, 인공지능 등 새로운 개념이나 모델을 다루는 연구서들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이 최신 모델들은 저마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던 기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후성설이라는 새로운 분야는 유전자와 환경이 조직 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기존의 이론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그렇다면 후성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20세기 유전학은 주로 ‘유전자 프로그램’ 모델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모델에 의하면, (DNA를 구성하는) 유전자는 오로지 DNA→RNA→단백질→세포→조직 등의 인과관계 순으로만 조직 형성에 관여했다. 말하자면 게놈 안에 이미 장미나 코끼리 혹은 인간을 만드는 제조 방법이 미리 프로그래밍돼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후성유전학에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바탕으로 그와는 반대 방향의 작용(RNA→DNA, 단백질→RNA 등)도 가능하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유전자 자체의 작용이 외적 요소들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견해다. 이러한 이론을 일컬어 이른바 ‘후성설’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생물학적 환경이 유전자의 작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줄기세포다. 사실상 우리 몸의 세포는 모두 똑같은 DNA를 가지고 있지만, 더 상위의 조직 형성 단계에서 비롯된 일련의 지시명령에 따라 신경세포, 조혈세포, 조골세포 등 다양한 세포로 분화된다. 오늘날 후성유전학은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혹 성장 환경에 따라 개가 인간으로, 인간이 개로 변신할 수도 있다는 말일까?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가능성의 영역일 뿐이다. 물론 늑대들 속에서 자라난 아이가 생존해 늑대의 습성(네 발로 기어 다니거나, 냄새를 잘 맡거나, 어둠 속에서 눈에 빛이 나는 등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도 역시 한낱 전설에 불과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날조다. 드디어 늑대 소년을 발견했다면, 오랫동안 야생아 이론가들을 들뜨게 했던 카말라와 아말라, 두 늑대 어린이 조작 사건을 한 번 보라.
 
후성설은 유전자와 환경 간의 인과관계를 뒤집거나 혹은 기존의 결정론을 완전히 폐기하는 그런 새로운 종류의 결정론은 아니다. 후성설은 선천성과 후천성, 자연과 환경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는 이론이다. 다양한 단계의 조직형성 과정에서 이 무수한 요소들이 복잡한 상호작용을 맺고 있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한편 뇌가소성 이론도 오늘날 선천성 대 후천성, 자연 대 문화라는 이원론의 폐기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각광받고 있다. 뇌가소성은 근래에 대두됐다. 1949년 캐나다 심리학자 도널드 헵은, (뉴런과 뉴런을 잇는) 시냅스 연결이 학습의 바탕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그에 의하면 시냅스 연결은 활성화될수록 강화되고, 많이 사용하지 않으면 쇠퇴한다. 1960년대 학자들은 쥐 실험에서, 뇌를 자극하면 시냅스 연결이 25%나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놀랍지 않은가! 그러니까 가소성은 결코 인간만 독점하는 특성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개도 어느 정도 가소성을 경험할 수 있고, 학습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가령 노스캐롤라이나주 워포드 대학의 연구진은 보더콜리종 견공 체이서에게 무려 1천 가지 이상의 사물 이름을 인지하도록 교육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체이서에게 각각의 사물 이름을 구분해 옆방에서 해당 사물을 가져오도록 훈련시켰다. 나는 교육 문제에 소홀한 탓에, 내 반려견에게 ‘일어서’, ‘앉아’, ‘손 내밀어’ 정도의 말밖에는 가르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가르쳤다면, 우리 개도 훨씬 더 많은 말을 배울 수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뇌가소성은 시냅스 가소성에서 뉴런 가소성, 기능적 가소성 등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곧 인간이 자유자재로 뇌를 새롭게 프로그래밍하거나 다시 조직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뇌의 회로는 굉장히 광범위한 영역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종의 진화나 태아 단계에서의 성장, 혹은 훗날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후천적 학습 과정 따위의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한다. 그러니 내 반려견을 열심히 훈련시켜 더 많은 어휘를 습득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태블릿 PC에 적힌 글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나도 개처럼 뛰어난 후각 능력으로 다른 동물의 뒤를 추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동물 문화의 발견 역시 자연 대 문화를 구분 짓던 장벽을 깨부수는 데 널리 기여했다. 1990년대 이후 수많은 연구를 통해 일부 동물에게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말하자면 어떤 동물들은 새로운 노하우를 개발하고 전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단순히 호두를 깨는 기술을 지닌 침팬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래에서 까마귀, 오랑우탄에서 깨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다른 종들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에서는 어미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다람쥐 혼자서 솔방울의 껍질을 깨는 법을 깨우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동물 문화는 동물지능이라는 거대한 영역에 속하는 일종의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오늘날 세상에 다양한 동물지능의 사례가 존재한다는 것은 더 이상 증명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윈이 주장한 것처럼, 동물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정신적 능력을 지니고 있음은 이미 자명한 사실로 밝혀졌다. 물개는 이성적 추론이 가능하고, 암탉은 일부 영장류에 버금가는 훌륭한 소통 능력을 지녔으며, 꿀벌은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다. 그러니 다양한 종류의 동물지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증명이 필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 각각의 동물지능의 사례를 종류별, 정도별로 분류하는 일이다. 가령 개미나 꿀벌을 놓고 과연 집단지성을 운운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들에게도 인공지능에서 사용되는 모델들을 적용할 수 있을까? 사실상 개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부지런한 동물은 아니다. 개미굴 안에 사는 개미의 절반은 하루 온종일 아무 하는 일 없이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기만 한다.
 
한 마디로 인간은 결코 지능을 독점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오늘날 심지어 ‘식물 지능’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자들까지 등장했다. 가령 신경생물학자 스테파노 만쿠소는 <빛나는 녹색>(2015)에서 식물 사이의 소통(아카시아나 포플라 나무는 메시지를 보내어 서로에게 위험 상황을 경고해준다)이 일종의 지능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니 미생물의 지능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그리 괴상한 생각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미생물이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고, 출구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인연>, 2016-채윤
 
그러나 모든 생명체에 지능이 있다고 인정하는 순간, 물질 대 정신이라는 오랜 이분법이 심한 타격을 입는다. 자연은 디스크에 정보를 새겨 넣듯, 문화나 지능을 한 겹씩 포개어놓은 물질로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살아 있는 물질들이 전체적으로 어떤 정보나 기억, 지적 능력 등으로 스며 있다. 따라서 생명체는 이제 기술의 집약체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은 나무 이파리도 광합성만 가능하면, 고도의 기술을 지닌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시인 월트 휘트먼도 “내 손의 가장 작은 관절이라도 그것을 능가할 만한 기계는 세상에 없다”고 썼다). 이처럼 살아 있는 자연을 기술과 동일시하는 시각은 결코 헛된 망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사실 이런 시각은 의생학(생명체를 모방하는 기술)이나 생체공학(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신체기관을 대체하는 로봇)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명과 기술의 융합은 우리를 사이보그, 휴머노이드 로봇과 같은 혼종의 존재, 합성생물학이라는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 영향인지, 오늘날 그와 관련해 형이상학, SF,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예언이 뒤섞인 저작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동물의 행동 양태, 살아 있는 생명체의 뇌가 기능하는 방식 등에 대해 한층 심도 높은 연구가 진행될수록, 인간 대 동물, 인간 대 기계, 자연 대 문화, 선천성 대 후천성과 같이, 기존에 우리의 현실 이해를 돕던 이분법은 너무도 진부하고 낡은 것이 돼 버렸다. 그러나 무조건 기존의 패러다임을 허물어뜨리는 것도 불편한 점이 많다. 우선 무수한 혼란을 야기한다. 누군가가 식물은 인격체(당근을 썰 때마다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어찌할 것인가!)이므로, 식물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고, 로봇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면? 나아가 포유류, 곤충은 물론 식물, 박테리아, 로봇에게까지 지능 개념을 무차별로 확대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형이상학적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기존의 패러다임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더 이상 유효성이 없는 낡은 이원론을 반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기존의 패러다임이 없어지면, 우리는 상대주의에 빠져 모든 일관성을 결여하게 되지 않을까? 더 이상 개와 휴대폰, 나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사물을 인식하는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할지 모른다. 동물 대 인간, 선천성 대 후천성, 자연 대 문화, 본능 대 지능이라는 일반적인 구분법은 자의적으로 설정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을 반영 한다기보다는,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 어떤 무형의 도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존의 이분법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일부 자연 철학자나 연구가들은 단호하게 ‘아니오’를 외친다. 그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철저히 깨부수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제3의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가령 <오늘의 선천성>에서 드니 푸레스트를 주축으로 한 과학철학자들은 생물학, 인지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기초로 ‘선천성’의 개념을 더욱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례로 새의 노랫소리를 연구하다보면, ‘선천성(생득성)’이라는 개념이 경우에 따라 매우 명확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둘기 고유의 구구거리는 노래 소리는, 아무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라더라도 똑같은 울음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천적이다. 반면 흰머리멧새는 자기 종의 고유한 노래 소리를 내기까지 다른 새들이나 혹은 심지어 다른 종이 내는 울음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그런가하면 그 외 방울새나 꾀꼬리 같은 새들은 다른 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노래를 배우는 것은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훈련을 통해 더 완벽한 울음소리를 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새들의 세계에서는 ‘선천성’과 ‘후천성’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광범위한 것이다. 선천성 대 후천성이라는 구분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중간적 상태들은 새가 노래를 하거나 둥지를 틀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데 관여하는 다양한 인과관계를 분석하기 위한 기준으로 사용된다. 물론 수세기 동안 우리가 선천성과 후천성을 놓고 논쟁을 벌였던 많은 주제들, 가령 인간의 언어, 질병, 정신질환 등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편 다른 많은 학자들도 보다 명확한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가령 인지과학에 있어서는 다니엘 앙들레르, 자연관리정책에 있어서는 라파엘 라리에르가 대표적인 예다. 오늘날 인간과 동물의 구분은 태양과 별(항성)의 구분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시각을 적용하면, 인간과 동물이란 개념은 훨씬 더 명확해진다. 가령 생물학자에게 ‘동물’이란 훨씬 더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동물의 세계는 확실하게 규정된 몇몇 특징을 근거로 식물의 세계와 확연히 구분된다. 먼저 식물은 무기영양 생물이다. 따라서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다. 생체 성분을 합성하기 위한 물이나 태양, 미네랄염 약간만 있으면 된다. 반면 동물은 종속영양 생물에 속한다. 혼자 광합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를 섭취해야만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기준에 근거해 우리는 해면동물, 해파리, 호랑이, 인간을 객관적으로 같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이처럼 일단 범주가 정해지고 나면, 동물의 세계는 다시 문(척추동물문 등), 강(조류동물강, 포유동물강 등), 목(영장목), 과(사람과), 속(사람속), 종(사피엔스종) 등 다양한 층위(계통)로 나뉜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단계는 그만의 고유한 특징과 특성을 지닌다. 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특성, 개의 특성, 오리너구리의 특성을 규정할 수 있다.
이제 비로소 나는 내 반려견과 구분되는 나의 고유 특성을 되찾았다. 물론 사회적인 성질을 지닌 포유류로서 우리는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가령 우리는 둘 다 감정을 느낄 수 있고(동물에게도 사랑과 우정이란 것이 존재한다), 일종의 소통 수단을 지니며(바디랭귀지나 애무처럼 대개 비언어적인 수단이다), 위계 개념을 인지할 수 있고(나는 내 반려견의 주인이지, 친구가 아니다), 노는 것을 좋아한다(우리는 함께 공놀이나 몸싸움, 잡기 놀이를 즐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으로서 우리는 분명 차이점을 지닌다. 인지능력의 차원에서 내 반려견은 나보다 훨씬 청각과 후각이 뛰어나다. 반면 나는 그보다 훨씬 우수한 상상력과 분석력을 지닌다. 아니, 적어도 그러기를 희망한다.  
 
 
이원론이란?
 
몸과 마음, 자연과 문화, 육체와 정신 등을 가르는 이원론은 단순히 르네 데카르트에게 물려받은 철학적 영역에만 속하는 이론이 아니다. 이원론은 인류학, 심리학, 제도 등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철학적 이원론
 
이원론은 몸과 마음을 구분했던 데카르트의 이론에 깊이 연관돼 있다. 그에 따르면 몸은 물질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갈릴레이가 발견한 낙체법칙처럼 물리적 원인에 따라 작동한다. 반면 마음은 ‘생각하는 사물’이며,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런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낳았다. 동물은 아무 생각을 할 줄 모르는 한낱 기계, 즉 살아 움직이는 자동기계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반면 인간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고 간주했다. 즉 인간은 몸(동물과 똑같이 작동한다)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마음도 지니고 있어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만나는 곳이 바로 뇌의 일부분인 송과선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데카르트와 서신을 주고받던 엘리자베스 드 보엠은 이런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비물질적인 성격을 지니는 마음이 물질적인 성격을 지니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가령 팔을 들어 올리는 행위처럼)? 이 질문은 훗날 이른바 심신문제(Mind/body problem)라는 화두를 제공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장장 3세기에 걸쳐 치열한 철학적 논쟁이 이어지는 단초가 됐다.
 
인류학적 이원론
 
필립 데스콜라에게 심신이원론은 단순히 데카르트의 이론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좀 더 심오한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인간 사회는 언제나 현실을 두 개의 실체로 구분했는데, 그것이 바로 몸과 마음, 물질과 영혼, 자연과 문화, 육체와 정신이다. 여기서 각 사회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마음’을 가진 존재들의 범위였다. 가령 애니미즘을 숭배하는 자들은 동물, 태양, 달을 ‘영혼’에 비유했고, 토테미즘을 믿는 자들은 인간, 같은 부족의 조상 및 숭배 동물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필립 데스콜라는 이원론을 애니미즘, 토테미즘, 아날로지즘, 내추럴리즘, 이렇게 모두 네 가지로 분류했다.
 
심리학적 이원론
 
미국의 심리학자 폴 블룸은 심신이원론이 단순히 보편적인 성질만 띠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아기들은 천성적으로 ‘데카르트적인’ 면을, ‘이원론적인’ 사고를 타고난다는 것이다. 가령 아기들은 어린 나이에도 이미 장난감, 식탁, 책 등 사물이 어떤 물리적 원인들에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한다. 물질적 성격을 띠는 사물들은 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안다.
반면 인간과 동물은 자신만의 의지나 목표, 생각에 의해 움직인다. 결국 그에 따르면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 정신과 육체 등을 구분 짓는 이원론은 단순히 데카르트 철학의 유산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뇌 속에 두 가지 사고 체계가 공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사고 체계에 따라 인간은 현실을 두 가지 종류로 인식한다. 첫째는 (어떤 물리적 원인들에 의해 작동하는) 사물, 둘째는 어떤 의사(의지, 욕망, 목표, 믿음 등)를 지닌 주체다.
 
과학적 이원론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 자연과 문화의 구분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구분으로 이어졌다. 즉 자연의 세계는 어떤 물리적 원인들에 따라 작동하는 반면, 인간의 세계는 욕망, 목표, 의사, 가치관, 믿음 등 어떤 정신적 실체에 의해 움직인다고 간주됐다. 이러한 구분은 빌헬름 딜타이가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이런 방법론상의 구분은 인문과학 안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흔히 인문과학 내에서도 사회학은 방법론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원인에 의한 설명 방식이고(에밀 뒤르켐은 “사회적 사실을 사물로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하나는 베버식의 이해 방식이다(어떤 행동을 이해하려면 그 행동의 목적과 그와 연관된 가치관을 바탕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글·아쉴 바인베르크 
<시앙스 위멘느(Sciences Humaines)>의 기자. 인간과 동물에 관한 과학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학교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