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가발, 권총, 그리고 구두 뒤축

2016-07-29     모나 숄레
 
1996년부터 2015년까지 미스 USA의 소유주였던 도널드 트럼프는 “수영복의 크기를 줄이고 하이힐의 높이를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2005년 미스 USA 행사에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천재를 보고 싶다면 오늘 저녁 굳이 TV를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엄청나게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싶다면 반드시 보셔야 할 겁니다.”(1) 
이 백만장자는 그동안 여러 차례 강간 혐의로 고소를 당했는데, 그 중에는 13세의 소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의 화려한 여성 편력과 왕성한 정력을 끊임없이 과시해온 그는, 2007년 ‘파티를 좋아하는’ 젊은 여성들을 기숙학교로 보내 “예의범절을 배우도록” 하는 ‘리얼리티 쇼’를 제작하기도 했다.(2)
 완벽한 여성상에 대한 그의 집착은 여성 신체에 대한 깊은 혐오로도 표출된다. 변호사인 엘리자베스 벡은 2011년 트럼프와 회의를 하던 중에 유축을 하러 가기 위해 잠시 회의를 중단하자, 트럼프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며 “당신 정말 역겹군요!”라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고 전했다(CNN, 2015년 7월 29일). 폭스 뉴스의 간판 앵커인 메긴 켈리가 방송에서 트럼프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졌을 때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당신 눈에서 피가 나오네요. 아마 다른 곳에서도 나오고 있을 것 같아요”라는 막말을 내뱉기도 했다(CNN, 2015년 8월 7일). 2015년 12월 21일에는 민주당과의 토론 도중에 광고 시간 동안 힐러리 클린턴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클린턴 후보가 지금 어디에 갔는지 저는 압니다. 정말 역겨워요.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니, 말하지 마세요.”
 마치 현실이 아닌 것만 같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선 후보로 지명된 클린턴이 이 심각한 여성 혐오증을 보이는 남자와 이제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이게 되다니. “다들 아시죠, 클린턴은 여성이라는 카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카드 없이는 절대로 이길 수 없을 테니까요.” 5월 7일에 있었던 집회에서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 정도는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여성이나 흑인 등 소수 그룹의 정치인이 정계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보이면 “우리는 정치적 논쟁에 왜 정체성 문제를 끌어들이느냐며 그 정치인을 비난하곤 합니다. 마치 그것이 핵심 주제들에 대한 주의를 흐리는 것처럼 말이지요.” 잭슨 카츠는 설명한다.(3) 그러나 그에 의하면 미국 대선은 ‘언제나’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단지 과거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대선에서 부각되는 정체성은 오로지 ‘남성’ 한 가지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백인 남성이었다.
 “10대 남자아이들의 인기투표보다 아주 조금 더 세련된 버전이라고나 할까요.” 카츠는 미 대선을 한마디로 이렇게 묘사했다. 고등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악은 “존재감 없는” 후보다.(4) 그리고 역시나 고등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자신을 부각시키려 노력하는 이들은 결국 아무런 관심도 동정도 받지 못하게 된다. 1988년, 당시 민주당 후보이던 마이클 듀카키스는 어설프게 탱크 위에 올라타 있는 모습을 촬영해 홍보 영상으로 배포함으로써 공화당 측에게 무한대의 네거티브 소스를 제공했다. 그가 탱크에 올라탄 모습이 마치 처음 회전목마를 타는 네 살짜리 남자아이처럼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았기 때문이었다. 2004년에는 존 케리 후보가 라이벌인 조지 W 부시의 카우보이 이미지에 대적하기 위해 오하이오 주에서의 사냥 장면을 촬영했다. 공화당은 카우보이가 되기엔 그의 조끼가 너무 새것 같다며 비웃었다.
 그러나 올해, 공화당 경선에서 맞붙었던 트럼프와 그의 라이벌들은 사상 유례없는 진흙탕 싸움을 벌이며 미 대선의 역사를 새로 썼다. 마르코 루비오는 5월, 구릿빛 피부의 이 나이 많은 플레이보이의 성기가 매우 작다는 말을 흘렸고, 트럼프는 자신의 정력을 떠벌리며 이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1월에는 트럼프가 루비오 후보의 굽 높은 부츠에 대해 빈정댔다. 이렇듯 정치적 논쟁이 날이 갈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자, 남성 우월주의자이자 공화당 지지자인 딘 에스메이도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부채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중산층도 몰락해가고 있습니다.”(5) 이런, 즐길 줄도 모르는 유약한 지식인 같으니라고.
 트럼프는 1월에 있었던 집회에서 “뉴욕 5번가에서 누군가를 쏘아 죽여도 단 1표도 잃지 않을 자신이 있다”며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설사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지라도 “망언을 일삼는” 최초의 대통령 자리는 이미 빼앗긴지 오래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2007~2012),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테러리스트들을 화장실에까지 쫓아가 죽여 버리겠다”고 했으며(1999년 9월),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라 쿠르뇌브 지역의 4000단지(대형 주거단지 이름)를 “카처(고압청소기)로 청소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2005년 6월 19일). 지난 5월 9일에 당선된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범죄자 10만 명을 사살하고 그들의 시체는 마닐라 만의 물고기들 밥으로 줄 것”이라는 공약을 내걸었었다.(6)
 이러한 남성주의(Virilism)가 극성을 부리는 원인은 각 나라 고유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미국에서는 리처 닉슨이 1970년대에 처음으로 노동자 계층에 속한 백인 남성들의 한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들에게 경제적 자존심을 회복해주는 대신, ‘가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또 그들의 분노가 자유로운 여성들, 히피, 소수 집단을 겨냥하도록 유도한 것이다.(7)
 로널드 레이건은 이 전략을 그 누구보다 성공적으로 구사했던 인물이었다. 이란의 미 대사관에 미국인 직원들이 무려 444일 동안이나 인질로 붙잡혀 있었던 사건 때문에 지미 카터의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던 와중에, 그는 1980년 미국 국민들 앞에 마치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할리우드 배우로 활동했던 경력 덕분에, 이 비정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백인 남성주의의 극치인 카우보이 신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1984년 재선 당시 그의 슬로건은 “This is Reagan country”였다. 카우보이를 내세운 한 유명 담배회사의 광고 문구 “This is Marlboro country”를 의도적으로 떠올리게 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현실과는 많이 달랐다. 레이건의 선거 진영에 몸담았던 전략가들 중 한 명은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있던 시절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기자 한 명과 같이 말을 타고 산책을 나가기로 했는데 레이건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승마바지를 입고 나타났다고 한다. 깜짝 놀란 고문관은 당장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했다. “누가 보면 우아한 마나님인줄 알겠어요. 캘리포니아 주의 유권자들은 당신이 카우보이이길 원한다고요!”
 미대선 후보에 관한 또 다른 일화 하나. 대통령 후보는 무조건 “내 가족을 보호한다”는 신념을 피력해야 했다. 1988년, 앞서 소개한 탱크 사건으로 인해 이미 큰 타격을 입은 상태이던 듀카키스 후보는, 그의 부인이 강간을 당하고 살해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사형제도가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고 대답을 하면서, 자신의 정치 인생을 스스로 마감해 버렸다. 수필가인 수잔 팔루디는 9·11테러 이후 안티페미니스트들이 급증한 사례를 들면서, 테러에 대한 반감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근육질의 영웅이 약한 여성들을 구해내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8) 자신들의 무능함과 연약함이 갑작스럽게 만천하에 드러난 데 대한 창피함이 결국 세계 최초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했다는 설명이다. 선전을 위해 다시 쓰인, 2003년 이라크에 파병 중이던 여군 제시카 린치의 구출 작전(9)은 1956년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The Searchers)’와도 일맥상통한다.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홍보 영상에는 9·11 테러로 어머니를 잃은 애슐리라는 소녀와 악수를 하는 부시의 모습이 비춰진다. 그리고 이 소녀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입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저의 안전뿐입니다.”
 이해는 할 수 있다. 누가 더 남성적인지에 대한 경쟁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 속에서, 민주당은 구조적 불리함까지 안고서 출발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카츠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해 냈다. 바로 많은 민주당 후보들이 공화당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클린턴 후보가 내놓은 외교 정책만 보아도 민주당이 모든 측면에서 보수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당의 특성상 뭐든지 조심스럽고 소심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또 다른 민주당 후보였던 버니 샌더스의 행보는 가히 혁신적이라 할 만 하다. 좌파적인 신념을 굳이 숨기지 않음으로써, 버몬트 주의 상원의원인 샌더스는 노동자 계층의 백인 남성들 중 일부를 민주당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아직은 성급한 판단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심지어 5월에 있었던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집회에서는, 자신이 과거에 “전형적인 GQ(남성 매거진)맨이었다”는 자조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데일리 리퍼블릭, 2016년 5월 19일). 샌더스의 인스타그램에는 강렬한 빨간색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올라와 있다. “드디어 GQ룩 완성”이라는 글과 함께. 테스토스테론의 대양에서는 보기 드문 유머와 재치가 아닐 수 없다. 누군가를 공격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글·모나 숄레 Mona Choll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기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앤드류 카진스키, <Donald Trump said a lot of gross things about women on “Howard Stern”>, Buzzfeed.com, 2016년 2월 24일
(2) 스티븐 자이트칙, <Trump's “Lady” comes to Fox>, Variety.com, 2007년 6월 12일
(3) 잭슨 카츠, Man Enough? Donald Trump, Hillary Clinton, and the Politics of Presidential Masculinity, Interlink Books, Northampton, 2016, 본 기사의 일화 대부분이 인용됨
(4) Cf. 스테판 J. 듀캣, The Wimp Factor. Gender Gaps, Holy Wars, & the Politics of the Anxious Masculinity, Beacon Press, 보스턴, 2004
(5) 한나 레빈토바, <Even some men’s rights activists are worried about a Trump presidency>, Mother Jones, 샌프란시스코, 2016년 5월 20일
(6) 해롤드 티보, <필리핀, “두테르트 해리”, 죽음의 분대를 지지하는 대선 후보(Aux Philippines, “Duterte Harry”, le candidat à la présidence partisant des escadrons de la mort)>, 르몽드, 2016년 2월 29일자
(7) Cf. 토마스 프랭크, 빈곤층은 왜 우파 정당에게 표를 던지는가?, Agone, 마르세이유, 2013
(8) 수잔 팔루디, The Terror Dream. Fear and Fantasy in Post-9/11 America, Metropolitan Books, 뉴욕, 2007
(9) 이그나시오 라모네, <국가의 거짓말(Mensonges d'Éta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3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