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포비아만으로 설명 불가능한 브렉시트
2016-07-29 폴 메이슨
영국민들이 지난 6월23일,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이른바 ‘브렉시트’는 전문가들 사이에 반이민정서 내지 제노포비아의 발로 현상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 장기불황에 따른 대량실업, 빈곤 노동계층의 급증, 그리고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영국민들의 삶을 짓누르는 현실에서 브렉시트는 차라리 저항의 몸짓에 가깝다.
웨일즈의 작은 기차역 매표소에서 내게 표를 팔던 여성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옆 자리 동료와 느긋하게 토론 중이었다. 동료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젠 여자애들에게 핑크색 장난감(유색인종을 뜻함)도 사줄 수 없고, 회색 장난감을 사줘야 하잖아.” 그러자 그녀는 대답했다. “골리워그(Gollywog)(1)란 단어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대형철도회사 유니폼을 입은 채, 표를 사는 고객들이 다 듣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브렉시트 캠페인이 진행되는 동안, 그런 종류의 대화는 들으려고 마음먹으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내뱉는 짧은 인종차별적인 발언들, 정치적 정당성(Political correctness)에 반기를 드는 말들이 도처에서 들려왔다.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던 소도시 출신인 나로서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최하층의 반발이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사회 진보적 엘리트들의 가치와 그들이 오랫동안 지향해왔던 EU 멤버십에 반기를 드는 저항이었다.
위의 대화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수많은 대화 속에서, ‘유럽’이란 단어는 필요 없었다. 국민투표는 “이제는 지긋지긋 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일 뿐이었다. 암울한 삶, 황량해진 중심가, 최저임금 일자리, 정치인들의 거짓말과 공포심 조장에 이젠 넌덜머리가 났다고 말할 기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날 밤, 노동당의 오랜 텃밭이었던 웨일즈 도시의 유권자 56%가 EU 탈퇴에 표를 던졌다.
이미 그 신호는 감지되고 있었다. 2016년 5월 지방선거에서 영국독립당(United Kingdom Independence Party, UKIP)이 과거 광산 계곡이었던 웨일즈 지역에 진출했는데, 이곳은 1901년 노동당이 결성된 이후 줄곧 노동당을 지지해오던 곳이었다. UKIP은 2014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영국 전역에 걸쳐 26%의 표를 얻었는데, 그들의 지지기반 지역의 이미지는 항상 비슷했다. 작고 특색 없는 칙칙한 도시들로, 저임금 일자리를 제공하는 민간 부문이 자리하며, 최저임금 수준으로 생활하는 동유럽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그런 도시들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오래 이어졌던 외국인 혐오 분위기가 노동당의 침체된 심장부까지 파고들어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교외 시골지역의 전통적인 민족주의와 결합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브렉시트의 핵심이다. 이는 지도상으로 투표 결과를 나타낸 모든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잉글랜드 도시 지역과 스코틀랜드 전 지역이 잔류를 택했다. 반면,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가난한 소규모 도시 및 마을들은 탈퇴에 표를 던졌다. 두 개의 대학, 다수의 아시아계 인구, 도시 경제의 활황조차 노팅엄이나 버밍햄과 같은 도시들이 EU 잔류 쪽으로 기울게 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탈퇴에 투표했고, 그럼으로써 수년간 기저에서 태동하던 반발이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이 돼버렸다. 그리고 여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신용으로 땜질하며 버텨 온 경제
첫째, 신자유주의가 무너졌다. 영국은 신자유주의의 실험용 쥐나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초, 마가렛 대처는 경기 순응적 정책을 사용했고, 그 결과 경기후퇴는 산업 및 사회 붕괴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노동자들의 결속력과 사회적 힘을 약화시키려는 목표가 있었다. 이는 이후 수십 년 간 임금 협상력을 압박하는 효과가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며, 임금 정체와 경제 성장 간의 간극은 여타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신용이 메웠다.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 부유하고 세계화된 도심에 편중된 부가 어떤 식으로든 빈곤한 지역으로 유입될 것이라는 ‘낙수 효과’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그러나 실상 그러지 못하자, 당시 재무 장관이었던 고든 브라운은 공공 지출을 통해 근로조건부 급여(In-work benefits) 및 공공 부문 일자리들을 막대하게 늘렸다. 그리고 그런 공공 서비스들(쓰레기 수거 등)이 대다수 민영화되면서, 가난한 마을의 사정이 나아지고 있다는 환상이 완전한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2008년 경제 위기 발발이 일어나기 전날 밤, 웨일즈의 골짜기 마을은 생산적인 공공부문 일자리를 잃은 채 범죄와 가난, 질병으로 찌들어 있었다. 쓰레기 수거 트럭들만은 신형으로 반짝반짝 윤이 나고 있었고, 최저임금 노동자들이 그 트럭들을 운전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근로조건부 급여와 정부의 지원으로 제공되는 보육, 정신보건 및 치안으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제위기가 찾아왔고, 토리당이 이끄는 정부가 들어서면서 긴축재정이 시작됐다. 긴축재정으로 근로조건부 급여와 공공 부문 임금이 대거 삭감됐다. 신용경색으로 중심가가 피폐해지면서 어렸을 때부터 죽 함께 해왔던 작은 상점들이 텅텅 비거나, 아니면 파운드랜드(Poundland: 모든 물건을 1파운드면 살 수 있는 가게), 캐시 컨버터(Cash Converters: 잡다한 물품들을 저당 잡히고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곳), 그리고 시민 상담소(Citizens Advice Bureaux: 아침에 줄 서서 채무를 정리하는 방법, 또는 집에서 쫓겨나는 것을 피하거나 자살 충동을 억제하는 법에 대한 무료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와 같이 가난한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가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섰다.
하지만 어디나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런던, 맨체스터, 브리스톨, 리즈 같은 도시들은 번영을 맞은 세계화 도시가 됐다.
그러나 그런 대도시에서도 ‘자라(Zara)’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여성이 ‘서브웨이(Subway)’에서 점심을 먹고, 서브웨이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남성이 자라에서 셔츠를 사 입는 경제가 기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둘에게는 임금보다는 집세가 문제였다. 3,750억 파운드에 달하는 양적 완화로 인해 주택 매매 및 임대 가격이 급등했다. 그 결과 런던에서 직장을 다니는 젊은이들은 방 하나를 둘이 나눠쓰게 됐다. 거실을 포함해 모든 방을 침실로 바꿔 각자 쓰던 ‘학생용 주택’에 거주하려면, 이제는 변호사 정도는 돼야 가능해진 것이다.
신자유주의 위기로 인해 젊은 세대의 미래가 산산조각 나고 빚에 허덕이게 된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이번 저항의 주요 결정타는 아니다. 애초부터 이번 저항은 신자유주의의 일시적인 처방들, 즉 인구가 밀집된 화려한 다문화 도시가 존재하지 않거나, 그런 처방들이 끈질긴 경제적 파국의 분위기를 저지하기에 충분치 않았던 곳에서 일어났다.
지독히도 낮은 임금
2003년 동유럽 8개 국가가 EU의 자유 이동 시스템의 일원이 됐을 때, 토니 블레어 정부만 유일하게 이에 대한 일시적 제한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노동부 장관은 약 30만 명의 이주자가 영국에 들어올 것으로 자신 있게 예상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현재 영국에 거주하는 EU출신 이주자들은 약 3백만 명에 달한다. 이 중 2백만 명이 영국 노동시장에 있다. 여기에 EU외 지역에서 꾸준히 영국으로 이주해 오는 인구를 더하면, 외국 태생 노동자들이 영국 노동인구의 약 20%를 차지하는 셈이다.
이러한 인구의 다수가 공공 서비스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지만,(2) 대부분 최저임금을 지불하는 민간부문의 일자리에 집중돼 있다. 통조림, 병조림, 포장 등 기초 공장에서 일하는 인력의 43%가 이주자들이다. 가치 사슬(Value chain)의 약간 윗단계인 제조 부문에서는 이주 인력이 33%를 차지한다. 나는 런던 남부에서 작은 립밤 용기를 제조하는 공장 인력이 모조리 리투아니아 출신 이주자로 채워진 것을 본적이 있다.
정치인들은 높은 비율의 이주자 유입이 불러올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뼛속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영국태생 노동자는 그런 일을 하기에 “너무 멍청하다”거나 그런 일을 할 “의향이 없다”는 믿음이 신자유주의 내러티브와 꼭 들어맞았다. 이주자의 증가가 지독히도 낮은 임금과 관련 있다는 의견은 신자유주의 내러티브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영국 소도시에 갑자기 폴란드 가게들과 포르투갈 카페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에 대해 대도시 엘리트층은 세계화의 마법이 이제는 보잘 것 없는 소도시의 삶에까지 뻗치기 시작했다고만 여겼다. 그러나 그곳에서 언론인들이 목격한 것은 극렬한 분노였다.
그리고 긴축정책의 시행은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에 기름을 들이 붓는 꼴이었다. 만약 동네 의원을 찾는 엄마들 절반이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면,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간호사를 고용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일자리 축소가 공공 서비스들을 대량으로 없애고 있는 시점에서, 이주자가 적어지면 상황이 덜 악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기 시작했다. 이런 질문을 대놓고 하는 사람들은 외국인 혐오자로 여겨졌다. 정치인들이 이러한 위험성을 거의 인지하지 못한 나머지, 보수당 정부는 신규 이주자들이 지역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특별히 마련된 공적 자금을 삭감해버렸다.
데이비드 카메론 전 총리는 순 이주 인구를 ‘수만 명’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작년 한 해 순 인구 이동은 33만3천 명에 달했다. 이 중 절반은 EU 회원국 출신이고, 나머지 절반은 고용주의 필요로 점수에 따라 이주자격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통해 영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브렉시트 운동에서 이 33만이라는 수는 곧 상징적인 숫자가 됐다. EU간 자유로운 이동으로 인해 3년 주기로 영국 인구가 백만 명 씩 증가할 수 있고, 노동 하위계층의 임금 상승은 불가능해 질 것이며 보수당 정부조차도 행동에 나설 의지가 없다는 논리들은 모두 이 숫자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EU 회원국 간 이동에 대해 정부가 미미한 수준의 제재라도 가할 수 있는지를 묻자, 카메론 전 총리의 답은 “아니오”였다. 2016년 2월 협상에서 그는 EU간 자유로운 이동과 관련해 원칙 변경에 대한 그 어떠한 공식적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주자 문제라는 틀 안에 기타 불만족스러운 이슈들이 모두 포함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적나라한 인종차별적 선전을 쏟아냈다. 젊은이들은 버즈피드(Buzzfeed)를, 노인들은 극도로 통제된 공공방송을 통해 뉴스를 접하는 도시지역에서, EU간 이동에 대한 반발이 얼마나 해롭게 번질지를 알아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용두사미가 돼버린 EU 잔류 캠페인
셋째, 내러티브들의 투쟁이 사라졌다. 국민투표 캠페인이 시작됐을 때, 카메론 전 총리는 그의 당이 브렉시트에 대한 공식 노선 없이 분열되도록 허용할 것을 강요받았다. 대신 그는 정부의 자원, 통계수치와 보고서를 동원해 캠페인에 힘을 더했다.
노동당의 경우 잔류를 지지하는 공식적인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지만, 그 지도부에는 오랜 좌익세력의 유럽통합회의론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꺾고 EU에 잔류하자는 캠페인을 벌였지만, 초당적인 ‘베터 인(Better In)’ 캠페인에 합류하는 것은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잔류 및 개혁(remain and reform) 캠페인을 더 선호했다. 그런 와중에 UKIP의 극우 유럽통합회의론자들 및 보수당 우파들은 끊임없이 이주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제 2의 탈퇴 캠페인을 벌였다.
결과적으로는 잔류 캠페인이 잠시 탄력을 받았다. 수백 명의 비즈니스 리더들, 과학자 및 사회 지식인들이 EU 지지를 약속했고 EU 탈퇴가 야기할 수 있는 경제적 혼란에 대해 권위 있는 경고를 하고 나섰다.
그러나 투표를 3주 남겨둔 시점에서 반대파들이 ‘공포 프로젝트(Project Fear)’라고 이름붙인 EU 잔류 캠페인의 기력이 갑작스레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 영국 재무장관이 브렉시트가 승리하면 가미가제식 긴축재정으로 경제를 파탄 내겠다고 맹세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영국을 다녀가고, 도널드 터스크(Donald Tusk) 유럽 이사회 상임의장이 핵전쟁을 경고했다. 이후 경고할 내용이 바닥나버렸다. 모든 공포 탄약을 써버린 것이다. 잔류 캠페인은 잘 나가다가 막판에 고꾸라졌다. 헐리우드식 표현으로는 “상어 위로 점프”(3)를 한 셈이었다.
노동당 운동가들이 투표 전 마지막 3주 동안 캠페인을 벌였을 때, 그들이 가지고 돌아온 이야기는 동일하면서도 섬뜩한 내용이었다. UKIP 당원들 및 인종차별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유권자들조차 “꺼져”라고 말한 것이다. 이슈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주문제였다. 이주문제는 영국의 소도시들이 이제는 신자유주의의 고통을 겪을 만큼 겪었다고 성토하는 하나의 수단이 됐다.
캠페인 마지막 주, 노동당이 EU의 자유이동원칙을 재협상하겠다고 약속하려 하자,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노동당 리더 제레미 코빈은 그 약속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고, 어쨌든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이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못 박았다.
그리고 투표 전 캠페인 막바지에 조 콕스(Jo Cox) 의원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주자에 반대하는 온갖 강도 높은 표현들이 많이 누그러지면서, 사람들은 EU 탈퇴 진영 측이 주장하는 매우 분명한 메시지를 듣게 됐다. “유럽을 떠나 EU 이주민 인구를 통제하라. 그렇지 않으면 끝도 없이 넘쳐나는 이주자들, 임금 억제, 문화적 긴장상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노동당의 좌익 정치인들을 포함한 엘리트 정치인들은 이 메시지가 40%대 중반의 득표까지는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33%에 가까운 아시아인들과 27%의 흑인 인구가 탈퇴에 투표하면서 최종적으로 52%가 EU탈퇴에 표를 던졌다. 젊은 세대의 75%가 유럽 잔류에 투표했으나 그들 연령대의 투표참여율이 유일하게 저조했다. 24세 미만 젊은이들의 투표율이 50%에 미치지 못했던 반면, 노년층의 투표율은 75%에 달했다.
좌파들에게 남겨진 문제
브렉시트가 영국의 좌파 프로젝트에 시사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보수 기득권층은 충격에 휩싸여 일관적 노선을 취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보면, 유럽 경제 지역(European Economic Area, EEA)에 잔류하는 계획을 중심으로 뭉쳐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EEA의 경우 EU간 자유로운 이동이 필수적이므로, 탈퇴 캠페인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이미 공언한 바 있다.
EEA에 잔류한다 하더라도, 1970년대 이후 모든 중도 좌파주의의 주요 전제로 자리매김해왔던 EU 회원국 자격, 사회헌장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긴밀한 연합이라는 가치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노동당은 새로운 현실에 맞서 당을 재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그 현실은 불확실하다. 금융권 엘리트 중 누구도, 어떤 방식의 경제 민족주의도 원하지 않는다. 실제로 EU 탈퇴를 지지하는 엘리트들은 영국이 싱가포르보다는 조금 규모가 큰 제 2의 초 글로벌 경제국가가 돼 주요 무역권 사이를 넘나 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왔다.
그러나 이는 실패할 것이다. 진정 브렉시트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금융자본이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제조업 투자들도 유럽의 심장부로 되돌아갈 것이다.
영국 정치권의 좌파와 중도 진보파가 안게 될 진정한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날 것이다.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 세력들은 브렉시트가 승리한다고 해서 그 기세가 약화되지 않는다. 규모는 작지만 잔인한 폭력이 우파가 타깃으로 하는 두 그룹, 폴란드인들과 무슬림들을 상대로 발생했다. 그러나 앞으로 경제가 불황으로 접어들면, 그와 견줄 수도 없는 무자비한 폭력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한편, 중산층들은 흥분상태다. 브렉시트 재투표를 요구하고, 의회가 브렉시트를 사보타주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또한 ‘우둔한’ 백인 육체노동 계급에 대한 증오가 쌓여가고, 젊은 세대들은 노년층에 대한 증오를 표출했다. 이 젊은 층들은 대다수 투표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투표는 그들 삶의 노선도 상당히 바꿔놓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스코틀랜드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진 중이다. 10년이 걸릴 것처럼 보였던 것이 이제는 3년이면 확실해질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국민투표가 시행될 것으로도 보이는데, 노동당을 지지해온 친통합론자들의 표심 상당수가 스코틀랜드의 EU잔류를 위해 노선을 변경하게 될 것이다. 결국 영국은 분열하게 될 것이다.
둘로 분열된 영국의 정치사회
좌파들에게 있어,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기회는 선거다. 카메론을 뒤이을 보수당 지도자가 선거를 공표할지는 확실치 않지만, 선거로부터 얻는 권한 없이 협상을 진행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선거가 치러진다면 노동당은 스코틀랜드 국민당(SNP), 웨일즈 국민당(Welsh national party Plaid Cymru), 녹색당(Green Party)과 함께 선거협약을 맺어야 한다. 그 목적은 UKIP이 의회에 확고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고 보수당 정부를 저지하는데 있다. 그 대가는 헌법 개정이 될 것이다. 비례대표 투표로 전환하고 스코틀랜드가 2014년 보수당과 잉글랜드은행이 협박했던 경제적 사보타주 없이 벌금 없는 독립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할 것이다.
독립할 경우, 스코틀랜드에게는 2014년 자본 도피의 위협을 받았던 상황이 역전된다. 영국 본토 내 EU의 전초지로서 스코틀랜드는 금융업과 생산성 높은 산업들의 투자까지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지금 현재 영국의 정치사회 전체가 둘로 분열된 듯하다. 한 쪽 반은 ‘폭력적이고 무례한 남성’으로 상징되는 그룹으로, 자신들이 일하는 차창에 영국국기를 붙이고 다니는 교육수준 낮은 육체노동자들의 무리, 나머지 반은 수염 기른 현대지식층으로, 미술 감상을 위해 베를린에 가고, 춤추기 위해 이비자(Ibiza) 섬에 놀러가는 이들이다. 그러한 자유로운 이동이 현재 문제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 우세하다고 여겨졌던 사회 자유주의와 반 인종차별주의가 위험에 처해 있다.
노동당이 안고 있던 기존의 문제는, 어떻게 이 두 사회학적 부류를 네 개 민족에 걸쳐 통합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불확실성의 파도에 휘청대는 사람들에게 사회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지 문제다.
영국은 예전에도 세계 질서에서 이탈한 적이 있었다. 1932년 당시 금본위제를 포기하는 결정으로 나라가 분열되고 붕괴됐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사회는 똘똘 뭉쳤다. 좌우의 갈등도, 노동자와 고용주간의 갈등도 항상 공동의 문화적 틀 안에서 봉합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영국은 진정 한치 앞도 모를 암흑 속으로 뛰어들었다. 경제적으로는, EU 탈퇴 후의 영국에 대한 설계가 하나도 돼 있지 않지만, 단기적 경기 침체가 거의 확실히 예상된다. 사회적으로 보면, 영국이 너무나 극렬하게 분열돼 있어서 마치 문화전쟁 중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스코틀랜드까지 독립을 추진하고 있는 지금, 영국은 해체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를 자랑하는 영국은 이제 둘로 나뉠 것이다. 문화적 내러티브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이는 데이비드 카메론이 일군 업적이다. 그리고 이를 조력하고 사주한 주체는 당내 전쟁을 치루고 있는 노동당, 그리고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들이다. 이토록 중요한 때, 젊은이들은 투표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글·폴 메이슨Paul Mason
<Post Capitalism: A Guide to Our Future>(Allen Lane, Penguin Press, Londres, 2015)의 저자.
번역·오정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검은 얼굴을 한 허구 캐릭터로 19세기 말 동화책에 처음 등장했다. 그 후 광고 회사 및 장난감 회사에 의해 “골리워그”라는 이름의 인형으로 만들어졌고, 1970년대까지 유럽과 호주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검은 피부에 하얀 눈동자, 광대 같은 입술, 더부룩한 검은 머리를 하고 있는 골리워그는 그 후 아프리카계 흑인들을 비하한다는 주장이 일고 인종차별에 대해 사람들이 민감해지면서 그 인기가 사라졌다. (참조: https://en.wikipedia.org/wiki/Golliwog)
(2) 공공 의료 서비스(NHS, National Health Services)에 종사하는 약 5만 5천 명의 EU출신 노동자들을 포함한 수.
(3) “jump the shark“이라는 표현은 시청률이 떨어지고 있는 TV드라마 등에서 시청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무모한 장면들을 삽입하는 것을 말함. 보통 잘나가다가 만회할 수 없는 하락세를 그리는 형국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