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북극 도시 ‘노릴스크’의 고통스러운 운명

2016-07-29     소피 호만 외

소비에트 연방은 매우 일찍 북극권에서 에너지 및 광물자원 개발을 시작했다. 지역 원주민이나 열악한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과 개척자들을 북극권에 강제로 파견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런 식으로,  보르쿠타 같은 러시아의 북극 도시는 결국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노릴스크처럼 지원자들을 바꿔가며 열광과 고통으로 가득 찬 모험을 이어갈 것인가.

툰드라(1)의 중심에 세워진 노릴스크 시는 모스크바에서 약 3,000km, 비행기로 4시간, 시베리아 남부 대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배로 4일 거리에 위치해 있다. 다른 러시아 지역과는 철도, 도로 등 어떤 연결망도 없다. 북위 69°에 건설된 북극도시 노릴스크는 세계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로서의 위상을 자랑한다. 겨울은 연 중 9개월간 지속되며 280일은 눈이 내리는데, 그 중 150일은 폭풍설(Purga)이 내린다. 거의 2개월 간 태양을 전혀 볼 수 없고, 1월 평균 온도는 영하 28℃를 넘지 않는다.
2015년 7월 18일, 해가 지지 않는 여름 날 과두재벌 블라디미르 포타닌이 시 당국과 함께 등장했다. 무려 120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러시아 최고 부호가 최악의 기후를 자랑하는 노릴스크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포타닌은 세계적인 니켈 및 팔라듐 생산업체인 노릴스크 니켈의 소유주로서 이 회사의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것이다. 레닌 대로에는 수천 명의 직원들이 지역 광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콤비나트(2) 내 여러 조합의 깃발들 아래서 행진했다. 기업정책에 따라 아이들도 축제에 참여했다. 그룹 주관 여름 캠프에서 돌아온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거리를 행진한다. 중앙광장 초입에 노릴스크 니켈 본사 건물이 우뚝 서 있는 곳에, 인기그룹을 위한 거대한 무대가 세워졌다. 이번 행사를 위해 휴관한 굴락(3) 기념박물관은 공연무대에 가려 아예 보이지 않았다.

노릴스크 시가 은폐하려는 수용소의 역사

강제노역과 집단수용소의 조직 체계는 아르한겔스크, 보르쿠타, 마가단 부근 콜리마 강 유역과 마찬가지로 노릴스크의 운명을 좌우했다. 1935~1955년 콤비나트를 거쳐간 수용자는 50만 명에 달한다.(4) 노릴스크 시가 은폐하려는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이다. 
노릴스크에는 아직도 소련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개척자 신화와 대규모 공업화의 가치를 기린다. 그러나 무(無)에서 시작한 영광스런 북극도시 노릴스크의 명성은 1991년 인구의 1/3 가량이 떠나면서(1989년 26만 7천 명에서 1991년 17만 명으로 감소) 실추됐으며, ‘러시아 연방에서 가장 오염된 도시’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중금속과 이산화황산 폐기물로 가뜩이나 메마른 식생이 황폐화됐다. 메스컴을 통해 더 잘 알려진 아랄해 사막화와 동등한 수준의 자연재해다.
1930년대 초부터 정치범이 대부분인 솔로브키 섬에서 온 수용자들이 예니세이 강 북쪽 유역에서 니켈, 구리, 팔라듐 광맥을 찾기 위해 임무를 수행했다. 노릴스크는 1935년 강제노동수용소로 세워졌다. 수용소 운영회사인 노릴락(Norillag)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 북쪽에 산재된 8개의 강제수용소를 관리한다. 주로 엔지니어로 구성된 수천 명의 자원자들이 도착하면서 수용소는 활기를 얻었고, 이들은 자유인 신분으로 일할 수 있게 됐다. 이곳 현장에 당도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름에 선박을 이용해 두딘카항을 거쳐 들어오는 것이다. 이 작은 촌락이 표시되어있는 지도는 그 당시 어디에도 없었다. 
1955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작업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노릴스크는 도시 신분을 부여받는다. 물론 닫힌 도시이기는 하지만 도시로 인정받았다. 아직까지도, 이곳을 방문하기 원하는 외부인은 항공기 탑승 전 보안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아니면, 여름철 예니세이 강에서 아직까지 운항중인 1950년대 동독 배편을 이용해야 한다. 일 년 내내 쇄빙선으로 북극해를 뚫고 이 곳을 경유하는 것은 화물뿐이다.
노릴스크 굴락은 신속히 해체됐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한 그 해 여름, 라브렌티 베리아 비밀경찰 총수가 일반법(Common law)에 의해 구금됐던 정치범을 우선적으로 석방하기 시작한 이후, 농성과 폭동이 줄을 이었다. 주로 우크라이나, 발트, 폴란드 출신 정치범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소련 강제수용소 역사상 최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1954~1956년, 그리고 1950년대 말까지는 조금 더 천천히 노릴스크의 ‘탈굴락화’가 시작된다. 수용소들은 규약에 따라 수용자들을 석방한다. 굴락에 수감됐던 이의 딸이자, 소련 시대의 권위주의와 러시아의 인권문제에 대한 시민단체 ‘메모리얼(Memorial)’의 엘리자베스 옵스트 협회장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노릴스크의 자유인 신분 주민들은 두려운 시선으로, 번호가 매겨진 제크(Zeks, 굴락 수용자)들이 노릴스크 중심가를 건너는 모습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약탈이나 싸움판이 벌어질까 걱정했다. 주변 거리는 수년 간 안전하지 못했다.”
굴락 수용자였던 이들의 대부분은 서러시아 방향으로 흩어지거나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굴락에 남기로 결정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이기도 했고, 광산채굴을 계속하기를 원해서이기도 했다. 노릴락은 사실상 지식인 수용소였다. 다수의 기술자, 지질학자 등 수용소에서 노하우를 습득한 전문가들이 있었고, 이들은 자유인 신분으로 계속 같은 일을 하면서 살기를 원했다.
수용소에서 태어났든, 수용소 폐쇄 이후 태어났든 전 수용자의 자녀들은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자랐다. 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 중, 소련 연방 곳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릴스크에 전 굴락 수용자와 자녀들의 주도로 메모리얼 단체가 설립된다. 운동가들은 스탈린주의 피해자들의 신분 인정과 복권, 추모정책 등을 요구했다. 소련이 붕괴되기 몇 주 전에 가결된 1991년 10월 18일 법은 ‘1917년 10월 25일 이후’ 러시아 영토에서 정치적 억압에 희생된 소련 국민에 대한 복권 및 재정적 보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4백만 명 이상이 유럽인권보호조약에 따라 복권됐다.(5) 메모리얼은 북캅카스 연방관구의 군 및 경찰 권력남용을 규탄하며 점진적으로 러시아에서의 인권보호활동을 확대해갔다. 이에 따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정권의 표적이 됐다.
노릴스크 지역구 협회 회원들이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동료들에게 항상 비판적 입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협회원들은 스탈린 체제에 대한 거부를 소련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그들은 개척신화를 전부 믿지 않았다. 스탈린주의의 ‘더 작은 악’의 선택이라는 역사적 합의에 울고 웃었던 그들이지만, 스탈린주의 피해자들은 2010년 푸틴이 노릴스크 수용소를 직접 방문해 내민 화해의 손길을 반겼다. 옵스트 협회장은 말한다. 
“푸틴 대통령은 역사적 진실을 감추지 않고, 후대에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역 관료들은 이를 은폐시키려고 한다.”
현지 메모리얼 협회 회원들은 수용소에 대한 은폐를 모스크바 중앙당국보다는 현지 당국의 시도로 보고 있다. 메모리얼 운동가들은 옛 ‘제크’들에게 빚을 갚으려는 투쟁에서 약소하나마 성과를 거뒀다. 지역 박물관이 수용소 기념관을 임시관이 아닌 상설관으로 전환하기로 한 것이 그 성과 중 하나다. 그러나 대형박물관과 기록보관센터에서 이 의견이 수용되기까지 더 기다려야 한다. 지독한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듯한 당국은 1990년 ‘골고다(Golgotha)’라는 별명의 초라한 추모관 하나를 세웠을 뿐이다. 각 종교단체와 국가기관은 콤비나트 지원금으로 작은 추모관을 하나씩 세웠다. 그러나 여기에 시의회의 재정지원은 없었다. 노릴스크 니켈 그룹의 인터넷 홈페이지 ‘역사’ 탭에도 수용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2015년 열렸던 50주년 기념식도 강제노역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기념식에 유일하게 설치된 기념패는 기술자들과 지질학자들을 태우고 1935년 처음으로 도착한 ‘스파르타크’ 선박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부심에 가득찬 세브리안들

지역당국에 의하면 노릴스크의 공식적 역사는 니키타 흐루쇼프가 공산당 ‘수령’으로 임명된 1953년부터 시작된다.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은 같은 해 새로운 이주정책으로 콤소몰(Komsomol, 공산당 청년조직 당원) 이주를 시행했다. 젊은 공산당원들은 사실상 시베리아, 그 이후에는 극동지방의 모든 대규모 건설현장에서 석방된 수용자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1956년, 제6차 5개년계획이 시행될 당시 2만9천 명의 청년들이 노릴스크에 정착했다. 이러한 청년유입은 훗날 ‘콤소몰 상륙’으로 명명됐다. 1930년대의 공황을 경험하지 못한 채,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힘입은 공업화 프로젝트에 투입된 애국청년들은 노릴스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노릴스크에 새롭게 유입된 청년들은 새로운 생활방식을 도입했다. 모스크바의 의류패션을 따랐으며, 공식적으로는 금지된 비틀즈 음악을 조용히 들었다. 실내 창틀에 꽃을 장식했으며 북극의 기나긴 겨울 동안 보관이 가능한 채소 캔을 마련했다. 콤비나트 뿐 아니라 노릴스크시 자체에도 매우 애착을 가지게 된 현 세대는 오늘날 스스로를 지역 역사 유일의 적법한 소유주로 간주하며, 예전 제크들을 경계한다. 
60대의 블라디미르와 타티아나(6)는 회상한다.
“우리들의 삶은 너무 좋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남들보다 먼저 누렸다. TV채널, 공연 등…. 상점에는 다양한 상품들이 있었다. 우리는 잘 차려입고 다녔다.”
타티아나의 부모는 남부 시베리아의 가난을 피해 콤비나트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군인이었던 블라디미르의 아버지는 노릴스크로 발령받았다. 두 사람 모두 유년시절의 일부를 콤비나트에서 보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교육을 받았고, 콤소몰로서 일하기 위해 콤비나트로 돌아왔다. 퇴직 후 두 사람은 극북이나 동시베리아 주민들이 서러시아라고 부르는 ‘육지(Materik)’로 이주했다. 러시아를 세계적 공업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과 연결된 사회적 특권을 지닌 이 두 전직 기술자는 콤비나트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불편하다. 그래서 여름이면 노릴스크로 돌아온다. 그리고  레닌 대로에 있는, 노쇠하지만 웅장한 스탈린 시대 신고전파 건축물 1번 집에서 거주하는데 자부심을 느낀다.
노릴스크는 이 세대가 소련 체제에서 기억하고 싶어 하는 상징물이다. 이 상징물 안에는 두 가지 믿음이 담겨있다. 우선, 고된 생활조건과 스파르타식 삶 속에서도 지식과 교육을 통해 발전하는 인간의 힘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자연을 제압해 산업개발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북극 지방 거주민들은 긍지를 가득 담아 스스로를 ‘세브리안(북쪽 사람들)’이라 칭한다. 이 세브리안은 집단 상상(Collective imagination) 속에서 매우 강한 장점을 지닌다.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신체적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북극의 각박한 여건 속에서 타인에게 호의적이며, 나누길 좋아하고 연대를 잘한다. 사회주의 구축이라는 공동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국가만을 의지해 생존하려는 자들은 경계한다. 세브리안은 또한 소련 산업화의 영웅인 지질학자나 전문기술자의 모습으로 대표된다. 남녀 불문하고 양성 평등을 추구한다. 개인의 자아실현에 초점을 맞춘 후기 사회주의의 미덕을 담고 있다. ‘소련식’ 소비사회와 여성들의 남성 직종 진출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소련 붕괴 이후, 개척자 신화는 어디로?

직업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성공적인 삶을 성취했던 노릴스크의 전성시대를 그리워하는 블라디미르와 타티아나에게는 노릴스크의 사회조직 분열이 개인적 비극으로 다가왔다. 친구와 동료들이 떠나며 대인관계도 끊어졌다. 이와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조국인 소련이 붕괴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진 혼란시기, 질병과 알코올중독, 자살 등으로 얼룩진 1990년대를 견디지 못했다.
개척자 신화는 이렇게 사라지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굴락과 콤소몰에 대한 기억에 맞서 제 3의 기억이 점차 형성된다. 페레스트로이카(1986-1991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경제재건 정책) 기간에 노릴스크에 도착한 경제이주민에 대한 기억이다. 에너지 및 광물 자원이 풍부한 다른 북극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노릴스크도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젠, 북캅카스(주로 다게스탄 지역), 그리고 중앙아시아, 특히 타지키스탄과 키르기스탄의 노동력을 끌어왔다. 1980년대부터 정착한 아제르바이젠 개척자들이 노릴스크에서 레스토랑, 카페, 나이트클럽의 대부분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아제르베이젠과 중앙아시아인 2세대가 남부에서 들여온 과일과 채소시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이주민들은 다른 주민들과 직접 접촉하며 매우 가시적인 직업에 종사하면서 시 공간을 변화시켰다. 도시 건축에도 새로운 요소를 도입해 1990년대 말 아제르바이젠 사업가에 의해 세계 최북단에 회교사원이 건축됐다. 사원의 운영은 주로 타타르스탄 이맘이 맡고, 북캅카스인과 중앙아시아인들이 주로 다녔다. 이주민의 대부분은 구시가지에 있는 채굴공장의 악취가 가득한, 칼바람에 노출된 콤소몰 숙소에 거주했다.
구소련 사회주의자 공화국 출신 주민 중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젠, 카자흐스탄인 전문 채굴 기술자들을 비롯한 소수만이 노릴스크 니켈에서 일한다. 이들 출신 커뮤니티 내에서는 콤비나트의 일원으로 일하는 것이 전문커리어의 정점에 달함을 의미하며 동시에 물질적으로 좋은 여건과 직업 안정성, 사회 특권을 보장받는 길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선택된’ 특권층에 속하는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서비스 경제를 장악한다. 새 이주민들은 이전 세대의 근면하고 검소한 사고방식을 높이 평가한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의 본래 경력과 동떨어진 분야에서 일하면서도 지역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이들의 사업은 수익성이 있다. 콤소몰 세대와 함께 성공한 기분을 공유한다.
1990년대 초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피해서 온 아제르바이젠인 나미그는 노릴스크 중앙시장에서 중고 옷을 판다. “여기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껴요. 러시아 다른 지역보다 수입도 괜찮은 편입니다. 최근 들어 상황이 더 어려워지긴 했지만요.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요.” 
과일과 채소를 파는 그의 동료 부가르도 말한다. “사는 게 쉽지는 않지요. 겨울에는 특히 힘듭니다. 그러나 그건 다들 그래요.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곳 이민자들은 모두 유라시아 남부 지역을 떠나 극북에 정착하며, 포스트 소련의 시장경제에 맞춰서 세브리안의 전설을 나름대로 재해석한다. 세대를 초월해, 노릴스크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극북은 기후, 환경, 물리적 제약을 이겨내며 용맹한 개척가가 된다는 느낌을 안겨주는 곳이다. 그러나 전망이 밝지는 않다. 러시아의 경제 위기, 광물가격 급락으로 인해 구소련 정부의 극북확장개발 사업 지원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북극 끝자락에 위치한 이 도시가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박스기사 

야말, 21세기 가스의 보고

일부는 얼고, 일부는 카라 해에 젖어 습지를 형성한 툰드라 지역. 이곳보다 가스가 풍부한 곳은 지구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야말로네네츠 자치구의 수도인 살레하르트 공항에서부터 한 지질학자가 재치 있게 한 마디 던진다.
“우리가 밸브를 잠그면, 유럽 전체가 추위에 떨 겁니다!” 바쿠가 20세기 초 석유경제를 상징했듯, 오비 강 삼각주는 신세기의 천연가스 경제를 상징한다.
러시아는 이란에 이어 세계 제2대 보고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이 북극지역에서의 최근 발견 덕에 전략적 강점까지 얻었다. 이 지역은 러시아 전체의 연간 천연가스 생산량의 83%에 속하는(1) 5,810억㎥(2)의 천연가스를, 야말반도까지 포함하면 2030년 경 연간 3,600억㎥를 추가로 생산하게 된다.(3) 2014년 프랑스 가스 소비량의 10배에 달하는 양이다.
지금까지도 순록을 기르며 사는 사모예드족인 네네츠인들만 거주하던 이 지역은 홀대받아 왔다. 그런 곳에서 가스 추출작업을 하려면, 인프라에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얌부르크 가스관, 그리고 야말반도의 석유탄소 밭을 유럽까지 연결하는 2500km 관이 필요하고, 여러 공항과 헬기장, 가스프롬(Gazprom)사를 라비트랑시(Labytnangui)와 보바넨코보(Bovanenkovo)로 각각 연결하는 525km 길이의 철도도 필요하다. 
북극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가스 길도 열릴 전망이다. 러시아의 노바테크(Novatek)사는 토탈(Total)사와 페트로차이나(PetroChina)사와 연계해 액화가스 연 생산량 1,650만 톤의 대규모 가스액화 단지 건설을 꾀하고 있다. 곧 철도가 설치돼 접근성이 용이해지면, 사베타(Sabetta)항구에 처음으로 15척 정도의 메탄 수송 쇄빙선이 정박할 예정이다. 첫 선박들은 연말에야 수주가 이루어지고 인도된다. 그런 가운데, 토탈사에 의하면 향후 20년 간 승선할 화물이 이미 다 팔린 상태라고 한다.
가스붐으로 인해 살레하르트와 노비 우렌고이(Novy Ourengoi)는 미래의 북극 도시로 부상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인구 이동을 위한 노력은 없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임시직의 형태로 일하며, 교대로 남부 지역에서 휴식을 취한다.  

(1) 국제에너지기구(IEA) 보고서, 2015년 7월
(2) BP Statistical Review of World energy, 2016년 6월
(3) Gazprom, “Yamal Megaproject”, www.gazprom.com


글·소피 호만
사회학자, 러시아 코카시안 중앙유럽 연구소(Cercec) 연구원. 저서로 <우즈베키스탄의 권력과 건강(Pouvoir et Santé en Ouzbékistan)>(Edition Petra, Paris, 2014)이 있음.

글·마를렌 라뤼엘
정치전문가, 조지워싱턴대학교 교수. 저서로 <러시아의 북극전략 및 극북의 미래>(M. E. Sharpe, New York, 2014)가 있으며, 장 라드바니(Jean Radvanyi)와 함께 <두려움과 도전 사이의 러시아>(Armand Colin, Paris, 2016) 공저.

번역·김혜경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Tundra, 주로 북반구의 극 지역에 분포하는 춥고 넓은 평원. ‘동토 지대’, ‘얼어붙은 평원’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1년 중 250일 이상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낮은 기온과 시도 때도 없이 몰아치는 강풍, 우박 때문에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이런 툰드라에서 그나마 활발하게 생명의 싹을 틔우는 것은 이끼류다.
(2) Kombinat, 구소련 내 동일업종 기업들의 연합
(3) GULAG, '수용소의 총 책임자’라는 뜻의 러시아어 'Glavnoe Upravlenie LAGerei'의 약자. 더 큰 의미로는 구소련 억압체제를 총칭한다. 최근 자료들에서 알 수 있듯 억압체제는 다양한 양상을 띤다. 20~40%의 수용자가 매년 석방되는 등 회전율이 높은 전적인 강제수용 형태의 ‘노동식민’이 일례다.
(4) 구소련 말에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1950년 굴락 수용자는 250만 명인데, 여기에 집단 수용된 ‘특별 이주민’의 수가 추가돼야 한다. <유산으로서의 굴락. 발자취의 인류학(Le Goulag en héritage. Pour une anthropologie de la trace)>(Edition Petra, Paris 2009)에서 니콜라 베르트의 <문서에 비춰본 굴락(Le goulag au prisme des archives)> 참조 
(5) 나딘 마리-슈와르츠젠버그, <법에 입각한 부흥(La réhabilitation au regard du droit)>, Le Goulag en héritage, op. cit.
(6) 본인의 요청에 따라 가명으로 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