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무장혁명군 대원들과 함께한 나날들

2016-07-29     로익 라미레즈
     

 

6월 23일, 콜롬비아 정부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간에 휴전 및 무장해제 합의가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반 세기가 넘게 이어진 갈등 상황 끝에 얻은 지속적인 평화 구축의 가능성은, 평생 게릴라밖에 모르던 이들의 삶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사방이 초록색이다. 정글 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30분? 1시간? 2시간? 드디어 숲 한가운데서 천막이 나타나고, 게릴라 부대원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원시적인 시설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고, 그리고 또 걸어서 수 시간을 온 뒤였다. 우리는 2016년 6월 29일, 콜롬비아 북서부 안티오키아 주에 자리 잡은 FARC-EP 제36부대의 야영지에 도착했다.
“이리오세요. 보여드릴게요.” 시기프레도는 우거진 풀숲을 지나 진흙을 피해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돌다리 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어두운 그늘 속에 위치한 진지가 보이고, 곧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40여 명의 청년들이 나란히 줄을 서서 한창 훈련을 받고 있었다. 모두 사복차림이었고, 어깨에는 소총이나 나무 막대기를 메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호기심어린 눈빛들을 반짝였다. 우리에게 미소를 보여준 몇몇은 훈련 중에 한눈을 팔았다는 이유로 지적을 받고는 입을 비죽거렸다. 
1950년대, 콜롬비아 농민들과 경제 엘리트들 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FARC가 1964년에 창설됐다. FARC가 가장 우선적으로 주장했던 것은 바로 영토의 공평한 분배였다. 52년이 지난 지금, FARC는 남미에서 활동 중인 마지막 무장혁명조직들 중 하나로 남아있다. 1964년 이래 정권을 잡았던 모든 콜롬비아 정부들이 마르크스주의적 봉기를 처단하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하자, 후안 마누엘 산토스(2010년 당선,  2014년 재임 성공) 대통령은 2012년 게릴라와의 협상에 돌입했다.(1) 그리고 2016년 6월 23일, 양측은 평화협정 체결에 앞서 우선 휴전 협정에 합의했다. 덕분에 갈등 상황은 몇 개월 전부터 대폭 약화된 모습이다. 국가 전체가 전례 없이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FARC는 조금씩 외부 기자들에게 자신들의 내부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최근 6개월 간 FARC를 방문한 두 번째 팀이었다.

무장해제한 무장혁명군들과의 첫 대면

부대원들 앞에 선 앤더슨 피게로아 사령관은 다부진 체격과 대비되는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현재 이 부대를 이끌고 있으며 ‘Efraín Guzman’블록에 소속돼 있다고 했다.(2) 훈련이 끝나자 부대원들은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다. “FARC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들은 거의 기계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부대원들은 모두 농민 출신의 청년들과 처녀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청소년기를 이제 막 벗어난 듯 앳된 인상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세상사에 대해 잘 몰랐다. 그들이 던진 질문들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프랑스에는 어떤 동물들이 사나요?” “당신네 나라의 풍경은 어떤가요, 시골 풍경은요?” “주로 뭘 먹나요?” “당신네 나라에도 게릴라가 있나요?” 책을 접해본 이는 거의 없었고, 조직 내에서 읽고 쓰는 것을 배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부대의 간부들 중 한 명인 마리벨라는 갈색 머리에 키가 작은 처녀였는데, 동료들은 그를 ‘마리’라고 불렀다. 인생의 절반을 게릴라로 살았다는 마리벨라는, 12세였을 때 농부였던 아버지가 군에 의해 사살된 후 FARC에 가담했다고 했다. 마리벨라의  두 남동생과 언니 역시 FARC 소속이었다. “13세 때부터 조직에 몸담아온 부대원도 있습니다.” 피게로아 사령관은 말했다. “FARC에 참여할 수 있는 공식 연령은 15세입니다. 물론, 본인의 참여 의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벨라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령관이 웃으면서 설명했다.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정치적인 이유로 조직에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저만 해도 불법무장단체들이 두려워서 14세에 FARC에 들어왔습니다.(3) 정치적인 의식은 그 이후에 생겨났습니다. 콜롬비아에는 내전이나 빈곤 때문에 오갈 데가 없어진 청년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우리와 같은 민병대입니다. 우리 조직에 들어와서 15세가 되면, 우리는 여기에 머물고 싶은지, 떠나고 싶은지를 묻습니다. 일부는 실제로 조직을 떠납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강제로 붙잡지 않습니다.”
그에 의하면, 15세 미만의 조직원들은 부대 내에서 특별 교육을 받는다. 전투는 전혀 하지 않고 공부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직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충분한 심사숙고의 시간과 언제든지 조직을 떠날 기회를 제공합니다. 예전 사례들을 보면, 실연당하고 온 사람, 가정사나 경제적인 문제로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참여동기가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늦기 전에 그들을 돌려보내야 합니다. 여기서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무판자로 만든 가구 위에는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텔레비전이 눈에 잘 띄게 놓여있었고, 노트북과 각종 디지털 기기들이 연결된 콘센트도 보였다. “전기는 공공 전력망에 연결해서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편안하게 전기를 써본 것은 처음입니다.” 피게로아 사령관이 말했다. 물가와 가까운 곳에는 주방이 마련돼 있었고, 바로 옆에는 천막이 있어 그 안에 쌀, 파스타, 야채, 과자, 각종 오일, 그리고 여러 개의 비누들이 보관돼 있었다. 
모든 부대원에게는 잠을 자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칼레타(Caleta)'가 제공된다. 칼레타는 나무로 지은 작은 공간으로, 플라스틱으로 간이 천장을 만들고 고리를 매달아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무기와 가방을 걸어 놓을 수 있게 해놓았다. 칼레타는 조직의 가장 작은 단위인 분대 별로 무리지어 위치해 있었다. 낮에는 두 시간, 밤에는 한 시간 간격으로 경비대가 끊임없이 순찰을 돌았다.

부대의 아침: 훈련-토론-아침식사-독서

다음날 새벽 4시 45분, 트랜지스터가 내뱉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아직 어두웠지만, 주방을 보니 이른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부대원들이 머리에 램프를 달고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직 내 모든 이들은 이틀에 한 번씩 두 명씩 짝을 지어 부대 전체를 위해 요리를 해야 한다. 그 시간 동안 나머지 부대원들은 공터에서 신체단련훈련을 진행한다. 하늘이 점차 붉어지고, 커다란 나무들 밑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아침 6시, 훈련이 끝났다. 부대원들이 차려 자세로 줄을 섰다. 모두 올리브 그린색 유니폼을 갖춰 입은 채로 어깨에는 FARC를 상징하는 색깔의 완장을 차고 있었다. 이 유니폼은 아침 시간과 목욕을 마치고 난 후 저녁 시간에만 아껴 입는다고 한다. 한 장교가 야영지 정비, 화장실 청소, 순찰 등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나열하고 팀을 정해주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흰색 철제로 된 컵으로 커피를 한 잔 했다. 나이 어린 로라는 수십 개의 감자 껍질을 깎는 임무를 맡았다. 로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12세에 들어왔으니 벌써 10년이네요. FARC에 대해서는 항상 잘 알고 있었지요. 저는 여기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게릴라였던 엄마를 따라 여기 왔어요. 그런데 엄마는 몇 년 전 떠나버렸어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저를 버리고 가다니, 엄마가 어떻게 돼든 이제 관심 없어요.”
아침 7시, 조직의 ‘학습 시간: 뉴스 취합’이라 명명한 시간을 위해 모든 부대원들이 중앙의 공터로 모였다. 제36부대 참모부 소속의 아니발은 토론을 이끌어 가면서 부대원 각자가 읽고, TV에서 보고, 라디오에서 들은 정보들을 발표하도록 유도했다. 발언 내용들은 서로 엇비슷했고, 주로 이곳과 관련된 정치적 상황을 담고 있었다. 방문객들을 의식한 결과였을까, 아니면 조직이 행한 이데올로기적 교육의 효과였을까?
평화 협정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질문들이 활발하게 오고 갔다. FARC와 산토스 대통령 정부는 전국적으로 23개의 ‘집결 구역’을 설정하는 것에 합의했다. 이 구역들 안에서 게릴라들은 UN군의 보호 하에 생활하게 된다. 대신 협정 체결일부터 180일 안에 무장 해제를 해야 한다. “우리를 군사적으로 굴복시키지 못하자 과두 정치로 전략을 바꾼 것일 뿐입니다.” 참모부의 마르셀리노가 주장했다. “천연 자원을 점유하겠다는 정부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기 없이도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항상 원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평화 협정이 체결돼도 FARC의 일부 부대원들은 여전히 무장한 범죄자로 남아있을 것이라 예측한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의 발언도 누군가에 의해 언급됐다. 이곳의 어느 누구도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모두들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이기를 희망할 뿐이다. 또 다른 부대원은 우버 그룹이 콜롬비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콜롬비아 역시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모델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아침 8시, 아침 식사 시간이 되면서 토론이 끝났다. 밥과 고기로 아침 식사를 한 후에는 신문과 잡지, 라틴아메리카 역사책, 맑시즘 분석 보고서 등을 읽는 개인 독서 시간이 이어졌다. 일부 자료들은 부대원들의 독서 수준을 고려했을 때 꽤 어려워 보였다. 부대원 두 명은 텐트 안에 앉아서 태블릿 PC를 통해 쉼표 사용에 관한 맞춤법 수업을 듣고 있었다.

혁명군은 농민의 가장 좋은 친구

2016년 7월 1일 금요일. 빗방울이 밤새 플라스틱 지붕을 두드렸다. 아침은 어둡고 습했다. 바닥이 진흙탕이 돼버려 오전 훈련은 취소됐다. 비로소 먹구름이 걷히고 한줄기 햇빛이 빽빽한 나뭇잎들 사이를 뚫고 들어오자, 부대원들은 서둘러 젖은 옷들을 빨랫줄에 매달기 시작했다. 조금이나마 더 잘 마를까 싶어 강기슭의 평평한 바위들 위에 속옷과 양말을 펼쳐놓는 이들도 있었다. “사복은 조직에서 제공해 줍니다.” 자클린이 말했다. 자클린은 직접 만든 진주 목걸이와 팔찌를 하고 있었다. 핑크빛이 감도는 풍성한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티셔츠나 바지를 골라 입을 수 있을 때도 있어요. 원하는 색상을 말할 수도 있고요. 귀걸이나 화장품도 마찬가지예요. 정식 부대원이 되면 손목시계를 받습니다.”
시기프레도는 설명한다. “외부에서 오는 모든 물건들은 검사 과정을 거칩니다. 왜냐하면 적이 손목시계나 장화 속에 우리의 위치를 노출시킬 수 있는 칩을 숨겨놓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물건들은 사용 전에 오랜 보관기간을 거치기도 합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위치추적 장치를 고장내기 위해 일부러 물에 담갔다가 사용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우리는 친한 농민이나 가족처럼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만 교류합니다. 상부의 보고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이곳에 반입이 불가해요. 샴푸, 반바지 등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관리인에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러나 휴전 상황이 되면서 이런 엄격한 통제는 사라졌다. 그런데  FARC 부대원들의 군복이 콜롬비아 군대, 즉 적의 군복과 비슷한 이유는 무엇일까? “콜롬비아 군대와 경찰의 물품을 파는 전용 매장에서 직접 구입합니다. 부정부패 덕에 가능한 일이지요.”
점심 식사 후, 우리는 올가를 따라나섰다. 사복을 입은 3명의 부대원들과 함께하는 농가 방문이었다. 현재 31세인 올가는 FARC에서 16년을 보냈고, 조직 내에서 간호사와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민간인들의 부대 출입은 금지돼 있기 때문에 그는 치과 진료를 위해 정기적으로 농가를 방문한다. 몇 분 걸으니 어떤 가족이 사는 언덕 꼭대기의 집에 도착했다. 닭과 돼지가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가운데 올가는 의료기기들을 꺼내 놓았다. 장갑, 주사기, LED 램프, 치석제거기 등 각종 기기들이 제법 충실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게릴라에게 물품을 대주는 의사 친구들에게 받은 것들이라 했다. 
올가는 방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진료를 시작했다. 바깥에서는 인근에서 온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올가 선생님!” 15살의 데이런이 웃으면서 침대 위에 앉았다. 이 소년은 원래 메델린에 사는데 휴가를 왔다고 했다. “올가 선생님이 FARC 소속인 건 알아요. 여기 사람들도  다 알지요. FARC는 농민들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충치를 치료하고, 교정기를 끼우고, 올가는 조수인 알레잔드라와 함께 오후 내내 진료에 몰두했다. 올가가 설명한다.
“여기 사람들은 치과에 갈 형편이 못 됩니다. 병원에 한번 가려면 생업도 중단해야 하고 치료비도 드니까요. 저는 돈을 위해서가 아닌 혁명적인 윤리 의식에 따라 일을 합니다. FARC에서는 늘 그렇게 가르칩니다.” 이 방문진료 서비스는 FARC가 민간인들로부터 지지와 환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다.
 
 

내전이 끝난다 해도, 
조직활동은 계속된다

매일 밤 비가 내렸다. 토요일 새벽 5시 30분, 부대원들이 일어나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땅이 질척이는 공터에 네 줄로 나란히 섰다. 장교가 인사를 하고, 위생(비누가 있는지, 탈크가 남아 있는지)과 부대원들의 건강(아프거나 잠을 잘 못잔 사람이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오늘의 할 일을 배분했다. 오늘은 부대원들 전체가 작업에 동원됐다. 다음날 다른 곳에서 훈련하다가 복귀하는 부대원들을 위해, 중앙의 텐트를 더 크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개미들처럼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부대원들은 기존의 텐트를 철거하고, 야영지 한가운데 있던 고목을 잘라내고, 원래 것의 두 배나 되는 새로운 텐트를 세웠다.
“이 정도 규모의 야영지는 매우 드뭅니다.” 피게로아 사령관이 설명했다. “양자 간의 휴전협정 덕분에 가능했지요. 하지만 이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오늘로 여기에 터를 잡은 지 20일이 됐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한 곳에 4일 이상 머무르지 않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1~2개월은 한 곳에 머물렀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은 마약과의 전쟁을 빌미로 콜롬비아 군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교육하는 ‘콜롬비아 플랜’을 추진하며 FARC와 첨예하게 대립해 왔다.(4) 2002년 알베로 우리베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미국의 개입은 더욱더 심해졌고, FARC와 군사적 대치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호안 마누엘 산토스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우리베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하면서(두 번째 임기는 2010년 종료), 게릴라와 좌파 진영 전반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지만 말이다. 
“최근까지 우리는 컴퓨터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군이 우리의 전자 기기 사용을 감지하는 비행기를 띄웠기 때문입니다. 정글 속에서 뭔가 포착되면 바로 폭파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컴퓨터를 잠깐만 사용한 후 부대와 먼 곳에 가져다두곤 했습니다.”
26세의 발렌티나가 담배를 건네며 예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군이 한창 공격을 할 때는 발각될까 두려워 밤에는 담배도 피우지 못했어요. 이동할 때도 불빛 하나 없이 했고요.” 발렌티나가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잠깐의 휴식을 즐기는 동안, 그의 동료들은 중앙 텐트 ‘Aula'를 세우는 마지막 작업을 하고 있었다. 11년 간의 게릴라 생활로 눈에는 날이 서 있었지만, 발렌티나의 화장품 가방 디자인은 꽤 독특했다. 한 쪽에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FARC의 슬로건이 적혀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미키마우스와 플루토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32세의 아리스티자발도 우리베 대통령 집권 당시의 내전 상황을 떠올렸다.
“그때 많은 이들이 조직을 떠났어요. 하지만 부대원들의 질은 더 높아졌습니다. 의욕과 의지가 충만한 사람들만 남았으니까요. 몇 날 며칠을 참호나 풀숲에 숨어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루에 세끼를 먹는다는 것은 사치였어요.”
이제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우리가 보기에도 부대 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여유로웠다. 부대원들은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고, 분주하게 일하는 도중에 서로 장난을 치기도 했다. “내전이 끝나면 뭘 할 거냐”는 질문에 부대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계속해서 정치적인 활동을 이어나가고, 조직의 형태가 어떻게 변하든 조직을 위해 계속 일할 겁니다.”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답변도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를 할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이들에게 불안감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FARC 대가족’에 소속돼 있다는 자부심 뒤에 철저하게 감춰진 듯 했다.
오후 4시. 몇몇은 공터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고 또 몇몇은 공사 마무리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작업을 진행한 덕분에 부대원들은 저녁 시간(오후 6시)에 맞춰 새로운 중앙텐트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저녁식사 후 부대원들 모두 새 텐트 안에 모여 TV를 봤다. 다큐멘터리든 아니든, 시청하는 프로그램은 투쟁의 메시지나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했다. 간혹 콜롬비아 축구팀의 경기를 보는 일도 있다고 했다. 
장교가 저녁 시간에 시청할 다큐멘터리를 찾으러 간 사이, 부대원들은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할리우드 영화가 나오는 채널을 발견했다. 모두들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부대원 한 명이 중앙아메리카의 토지분배를 둘러싼 갈등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담긴 USB를 TV에 꽂았다. 부대원들은 별 불만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가끔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소련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한 부대원이 말했다.
빗방울이 계속 지붕을 세차게 두드리는 바람에 TV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뒤쪽 줄의 부대원들은 장난치기에 바빴다. 서로 간지럼도 태우고 작은 목소리로 잡담도 주고받았다. 애정 표현은 조심스러워야 하며, 동료들 사이에서도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라, 진짜 커플들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옆 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목에 팔을 두르고, 허리를 감싸 안고, 귓속말을 하는 등 연인이 아니더라도 부대원들은 그들 간에 엄청난 친밀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조직에서는 동거를 허용하지만(커플들은 한 텐트에서 잘 수 있다) 난잡한 성생활은 금지한다. 다큐멘터리가 끝나자 FARC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인 뉴스가 나왔다. 밤이 깊어지면서 폭풍우가 더욱 심해져 부대원들은 곧 각자의 칼레타로 돌아갔다. 

내전의 종료가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2016년 7월 3일 일요일 새벽 4시 45분, 라디오가 켜졌다. 희미한 불빛이 비치고, 부대에 복귀한 40여 명의 부대원들이 이제 막 일어난 이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 또한 제36부대 소속으로, 미션 수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무리의 부대원들은 자리를 떠나, 강 하류 쪽으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야영지 공사를 시작했다. 아침 7시 30분, 커피를 마신 후 부대원들은 소속 분대 별로 모여 ‘정당 회의’를 열었다. 분대는 공산당(PC3)을 구성하는 소규모 단위이기도 하다. 부대원들은 10~12명씩 그룹을 지어, PC3 일간지 <Voz>에 실린 FARC 총사령관 티몰레온 지메네즈(Timoleón Jiménez)의 글을 함께 읽었다.
헨리는 그 중 한 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31세(게릴라 생활 13년)로, 좌중을 끌어당기는 편안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헨리는 열정적인 태도로 동료들이 의견을 내고 감정을 표현하도록 유도했다. 한 명 한 명, 꽤 수줍어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부대원들은 여러 의견들을 냈다. 하지만 의견들은 서로 엇비슷했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어, 논쟁이라 하기 어려웠다. 발언은 대부분 과거 공부한 적이 있는 문서들의 내용을 요약한 정도였다. 아마도 풍부한 경험을 가진 연장자들과 신참 젊은이들 간의 정치적 지식수준 차 때문에, 활발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공개석상에서 개인 의견의 표현을 꺼리는 분위기도 한 몫 한 듯했다.
아침 시간이 끝나갈 무렵, 한 무리의 부대원들이 사복을 차려입고 인근 마을 회의에 참석하러 야영지를 나섰다. 50여 명의 농민들이 풀밭 한가운데 있는 오두막에 모여 공동체 문제를 상의하고 있었다. 아이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 속에서, 의장이 개회를 알리고 의제를 발표했다. 회계와 조직구성에 관한 몇 개의 질문들이 오간 후, FARC 부대원들에게 발언권이 주어졌다. 그때까지 부대원들은 구석에서 조용히 회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니발이 일어나 우선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자고 제안했다. 농민들의 주요 관심사는 평화협정의 체결이었다.
한 농민이 물었다. “평화협정에 서명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누가 우리를 보호해주나요? 불법무장단체들이 활동을 계속한다면 우리 민간인들도 무기 소지가 가능해야 할 텐데요.” 아니발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50년도 넘게 그 일을 해오지 않았습니까? 같은 이유로요.” 그리고 강조했다. “평화의 구체적인 조건들이 명시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종 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다음, 부대 내에서 프로파간다를 담당하는 레오니다스가 일어났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어조로 농민들에게 설명했다. “내전의 종료가 곧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투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다국적 기업들은 우리의 강, 초원, 숲을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항할 수 있으려면 조직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일례로, 우리를 위협하는 문제들 중 하나는 바로 지드레스(Zidres) 법입니다.”
지드레스 법은 사기업의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한 법으로, 좌파 진영에서는 반대하고 있다. 우리가 만나서 대화했던 부대원들 중, FARC에 들어오기 전 청년공산당(Juco)에서 활동했던 이는 40대 가량의 레오니다스와 아니발 뿐이었다. 이들의 뛰어난 언변과 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는 분명 그런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레오니다스와 아니발의 발언 후, 부대원들은 양해를 구하고 회의 자리에서 먼저 빠져나왔다. 야영지에 도착하니, 저녁파티 준비가 한창이었다. 중앙 텐트에는 FARC의 창설자 마누엘 마룰란다 벨레즈(Manuel Marulanda Vélez)와 중앙참모부 간부였던 라울 레이즈(Raúl Reyes)의 얼굴과 함께 “평화를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커다란 군기가 달려 있었다(이 둘은 모두 2008년에 사망했는데 마누엘 마룰란다 벨레즈는 자연사, 라울 레이즈는 폭격으로 사망했다).

평화협정 체결 후, 그들은 어떻게 될까

저녁에는 옥수수로 만든 크레이프와 초콜릿 음료가 나왔다. 저녁 7시 경, 100명 가량의 부대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헨리가 이 ‘문화 행사’의 진행을 맡았다. 부대원들은 노래를 하고, 랩을 선보이고, 시를 낭독하고, 우스운 이야기를 발표했다. 모두들 신나게 즐기는 분위기였다. 부대원들이 소지한 소총들만이 내전 중인 현재 상황을 상기시켰다. 흥에 겨운 부대원들은 결국 의자들을 가장자리로 밀어버리고 텐트 가운데에 무대까지 만들었다. 정글의 침묵을 흩트리는 빠른 템포의 음악 소리는 자정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7월 4일 월요일. 전날 댄스파티의 흔적들은 빗물에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아침 식사 후 사령관은 부대원 전원에게 정장차림에 베레모 등 모자를 쓰고 공터로 집합할 것을 명령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시간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유니폼을 입은 100여 명의 부대원들이 정렬했다. 의장시범과 행진이 이어졌다. 부대원들은 사령관의 지시대로 정확하게 움직였다. 부대원 3명이 접혀진 깃발을 들고 줄에서 빠져나왔다. 이 깃발은 행사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곧 나무 막대기에 묶여졌다. 깃발이 올라가고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하자, 콜롬비아 국기 위에 FARC의 상징 문양이 덧붙여진 모습이 보였다. 두 개의 스피커를 통해 FARC 찬가가 울려 퍼졌다.
“이 곳에 오기 전에는 우리를 무서워했나요? 프랑스로 돌아가서 FARC가 당신들을 납치했다고 할건가요?” 24세(게릴라 생활 8년)의 청년 프랭키가 농담을 던졌다. 우리는 아니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이별의식이 끝날 무렵,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레오니다스는 평화협정의 중요성과 공산주의자 및 FARC 투쟁의 ‘보편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부대원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마지막 날에는 야영지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라도 하듯 장대비가 밤새도록 세차게 내렸다. 50년 이상 묵은 갈등상황이 종료되려면 아직 몇 주, 어쩌면 몇 달이 남은 현 시점에서, 부대원들의 앞으로의 삶을 예측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군인의 삶에서 민간인의 삶으로의 전이는 FARC 부대원들이 마주칠 수많은 도전들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집단주의적 생활에서, 개인주의적 생활로의 전환도 부대원들을 혼란에 빠뜨릴 것임에 분명하다.
“언론은 그동안 우리를 괴물처럼 묘사해 왔습니다. 하지만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우리의 참 모습을 알게 되겠지요.” 피게로아 사령관이 말했다. 이들은 과연 앞으로 자신들이 어떤 세계로 들어가게 될지 알고 있을까?  


글·로익 라미레즈 Loïc Ramirez
기자, <암살된 장미>(가브리엘페리재단 문서, Pantin, 2015)의 저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모리스 르무안, “누가 콜롬비아의 진실을 두려워하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6년 1월호.
(2) 각 블록은 5개 이상의 부대들로, 각 부대는 100개 이상의 소그룹들로 구성된다.
(3) 로랑스 마쥐르, <콜롬비아 내전의 잔인성(Dans l'inhumanité du conflit colombie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7년 5월호.
(4) 에르난도 칼보 오스피나, <콜롬비아 플랜의 경계에서(Aux frontières du plan Colombi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5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