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간지대 농업의 조용한 종말

2016-07-29     브누아 뒤퇴르트르

사람들은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하지만, 미국의 위생학을 모델로 한 유럽의 규범은 날로 증가하는 식품위생안전사고를 막지 못한 채, 전통적인 농업방식을 따르는 농민들만 몰아내고 있다. 조세트 앙투안느는 보쥬 산맥 어딘가에서 이런 상황을 견디는 중이다.

“아시죠, 할머니? 어르신이니 봐드리는 거예요. 나중에는 절대 안 돼요!”
위생점검원들은 인간적인 편이다. 지방농업감독청에서 현장으로 파견나온 위생점검원들은, 비록 위생규범에는 맞지 않지만 이 시대 최후의 산간지대 농부들이 고수하는 옛날 방식을 인정한다. 농업고등학교에서 공장형 축산방식의 장점과 ‘양돈산업’ 및 ‘가금류산업’의 전망에 대해 배운 위생점검원들 중에는 자신의 견해를 바꾼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유기농업이 ‘녹색경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신규‘산업’인 유기농업의 발전을 장려하고 있다. 
다만, 이 신규산업이 현행법상의 제약사항 -농업용-주거용 건물의 분리, 공장형 사육, 콘크리트 축사, 가금류의 개체이력을 추적하는 칩 부착, 품질인증을 받은 브랜드의 사료 사용, 농작물의 살균, 농부들의 위생장갑‧모자 착용 의무화 등- 을 준수한다면 말이다. 만약 위생점검원에게 “그러면 우주비행사복을 입는 건 어때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웃을 것이다. 위생점검원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규범을 지키는지 아닌지 살필 뿐이다. 

엄격한 규제가 위생사고를 
예방하고 있는가

조세트 앙투안느(60)의 경우, 규범을 지키는 수준은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조세트네 농장은 내가 살던 마을에서 몇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숲속 고지대에 있다. 이 농장의 암소와 송아지는 항상 집 안의 헛간에 있고, 토끼는 신선한 풀을 뜯어먹는다. 그리고 닭은 곡식과 지렁이를 먹고 음식 찌꺼기도 먹는다(가축에게 음식 찌꺼기를 주는 건 명백하게 금지돼 있다). 조세트는 큰 양동이에 갓 짜낸 우유를 팔고 있다. 아직 따뜻하고 거품이 이는 그 우유를, 조세트는 놋쇠단지에 채워 내게 건네준다. 그 우유를 창고에서 마실 때면, 제비가 헛간 들보에 튼 작은 둥지를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아마 조세트네 건초창고에는 들쥐 몇 마리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세트는 소금단지에 걸어놓은 나무 소쿠리에 치즈를 놔두고, 공기 중에 노출시킨 채 천천히 숙성시킨다. 이 모든 것은 위생점검원을 불편하게 한다. 위생점검원은 널빤지 위의 치즈를 보고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는지 조세트에게 따가운 시선을 던진다.
“지금은 그냥 넘어갈게요. 하지만 이런 방식은 곤란해요. 특별히 봐드리는 거라는 것, 잊지 마세요.” 그리고 못을 박는다. “나중에는 안 돼요!” 여기서 ‘나중’이라는 말에는, ‘당신이 죽은 후’라는 속뜻이 담겨있다. 위생점검원의 눈에는 이 치즈는 세균 폭탄이자, 시대에 뒤떨어진 농업 방식의 잔재다. 위생점검원은 이것이 조세트가 치즈를 만들어왔던 방식이고, 이 일이 새어 나갈 가능성이 낮아서 넘어가지만, 이런 방식은 조세트에서 끝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여름휴가철이면 식료품을 농가에서 사다 먹었다. 우유, 계란, 가금류, 토끼, 돼지, 치즈, 양상추 등. 하지만 식중독에 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여남은 계란 중(음지에 보관하려고 신문지에 싸뒀던) 하나가 썩는 바람에, 고약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말이다.
반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식품위생안전사고는 엄격한 규제 하에 있는 산업형 농업에서 일어난다. 산업형 농업에서 일어난 사고들을 보면, 미세한 오류가 거대한 참사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일례로 ‘가축전염병’을 들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질병과 가축의 사료섭취방식이나 집중사육조건과 관련된 문제다. 또한 ‘저온유통’이 미비하거나, 해동을 잘못하거나, 충분히 살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중독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세균과 질병은 병에 걸린 수천 두의 소를 소각 처리한 사건처럼 신문 1면을 장식한다.

생태학인가, 강박적인 위생학인가

이와 달리, 산간지대 농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현대적인 전문용어가 지칭하는 바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모범사례였다. 산간지대 농장은 혹독한 기후조건에 맞춰 가축과 건초창고를 집 안에 둠으로써, 열기를 유지하는 데 비용과 에너지를 절약했다. 그리고 우유를 담는 용기를 씻어서 재활용했기에, 노란 뚜껑이 달린 재활용 쓰레기통에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릴 일이 없었다. 남은 음식과 과일껍질, 채소껍질은 가축의 먹이가 됐기에, 녹색 뚜껑이 달린 일반 쓰레기통에서 썩을 이유가 없었다. 또한, 배설물은 두엄 더미에 던져져 밭을 기름지게 했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고대부터 민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인간과 동물의 신비로운 ‘대면(對面)’을 간직하고 있다. 새끼돼지를 도축하고 토끼의 목을 자르는 끔찍한 장면을 보며,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 곁에 있음을 깨닫곤 했지만 말이다. 따라서 소규모 농장은 실상 ‘녹색’농업, 즉 ‘지속가능하면서도 친환경적인 농업’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모델이 됐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생태학은 다른 농법처럼 전통적인 규범에 따라, 전문가인 농부들이 관리해 온 분야다. 따라서 화학비료와 유전자조작작물에 반대하는 생태학은, 미국과 북유럽에서 유래한 위생학과는 맞지 않는다. 농촌에 살균 마스크와 소독 및 저온살균 기술을 강요하면서 모든 자연 제품은  본질적으로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이 강박적인 위생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북미 지역의 도시에서는, 과일과 채소를 비닐 팩에 개별‧진공포장해서 진열하지 않는다. 이런 원시적인 매력을 간직한 프랑스 시장에 오면, 관광객들은 신선함을 느끼고 즐거워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북아프리카의 시장에서 향신료가 담긴 냄비와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린 달걀을 보면서 향수에 젖는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은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아직 이런 모습을 간직한 유럽의 구석구석에, 규범이 퍼져나가면서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해치고 있다. 규범이 해치는 것은 인간과 동물의 공존뿐이 아니다. 옛날 여러 동물이 사이좋게 뛰놀던 뜰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여러 종(種)의 공존도 해치고 있는 것이다. 
규범은 허용 안 된 식재료와 제품의 사용을 금지했듯, 위생장갑을 끼지 않고 농산품을 만지거나, 형광색 작업복을 입지 않고 밭에서 작물을 키우거나, 후진 경적 없이 트랙터를 운행하는 것을 금지하려 한다. 규범은 이렇게 많은 것을 금지하는 한편 시골을 도시 근교처럼, 농장을 양잿물 냄새가 나는 타일 깔린 실험실처럼 보이도록 새로운 관습을 강요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산간농가의 정취어린 모습들

롱쥬메르 호수(나무가 우거진 경사면 가운데 위치한, 보쥬 산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기슭에서 출발해, 나무들 사이로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어가면, 1천 미터 높이에 있는 넓은 터에 다다르게 된다. 바로 여기, 숌 농장에 있으면 숲으로 된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섬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방목장으로 덮인 호넥 산이 있는 동쪽을 제외하고는, 사방에 전나무 망토를 둘러쓴 둥근 ‘보쥬 산맥’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곳은 겨울이면 거대한 얼음으로 변한다. 이 지역 최후의 농장인 조세트의 농장에 올 때마다, 나는 잊지 않고 이 모습을 눈에 담아 둔다.
산에 있는 돌과 나무를 그대로 가져와 지은 집, 그래서 산과 어울릴 수밖에 없는 집, 오늘날 이런 마법 같은 풍경은 영화 속에나 있다. 아이들을 공상에 빠지게 하는 영화 연출자들은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에서 짚과 벽토로 된 집, 닭과 기러기, 오리와 돼지가 뛰노는 점토 바닥, 양배추로 가득한 커다란 통, 햄과 좋은 술로 가득 찬 식품창고 등을 멋지게 재창조한다. 하지만 21세기 청소년들을 매료시키기 위해 만든 그 세계는 헐리우드적 환상의 산물이 아니다. 최근 들어 사라져버린 삶의 방식에, 약간의 스타일을 더해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소쿠리에서 치즈가 계속 숙성되는, 산에서부터 시작된 시냇물이 외양간 근처에 놓인 그릇까지 흐르는, 퇴비의 제조‧보관 기준과는 무관하게 높다랗게 쌓아놓은 두엄 더미 위로 닭이 뛰어오르는 농장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내게 있어, 건초창고가 선사하는 시적인 정취만한 것은 없다. 어린 시절 마을 농장에 있는 창고에서 그랬듯이, 나는 이 꿈같은 창고에서 가끔 건초를 타고 오른다. 어린 시절, 7월이면 가족들은 초원에 모여 아직 파릇한 들풀과 들꽃을 가득 베어다가 마대자루에 담아 창고에다 쏟아 부었다. 계속 갈퀴질을 해서 건초를 꾹꾹 눌러놓으면, 그 넓고 어두운 창고 안에서 겨우 내내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건초로 언덕과 탑과 성을 쌓고, 그 풀내음 속에서 뛰어 놀았다. 
이런 생활방식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만한 귀한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이 생활방식을 없애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활용과 생산에 대한 모델로서 지지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는 시골 사람들이 도시에 사는 친척들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현재의 시골은, 자신들이 살기도 바쁠 것이다. 정부가 소규모 영농인에 대해 관심을 끊고, 우유병 수거가 중단되자(내가 어렸을 때는 길 밑에 다 먹은 우유병을 담는 큰 통이 있었다), 위생학자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박물관에서 사진으로나 만나게 될, 이 시대 마지막 산간지대 농가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있다. 
기껏해야 10년 후면 조세트는 은퇴할 것이다. 조세트의 아들이 농장을 물려받을 것이고, 행정권고에 따라 농장 내부와 축사·토끼장과 치즈저장실을 없앨 것이다. 그리고 신규 규범에 맞춰 콘크리트로 된 공장형 축사를 집 밖에 지을 것이다. 중세시대, 수도승들이 깊은 숲을 개간하며 시작된 산간지대 농업의 역사는 이렇게 막을 내릴 것이다. 다른 대규모 종말이 그렇듯, 산간지대 농업도 무관심 속에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선택임을 깨닫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유럽적인 풍경을 없애는 유럽재건 정책

내가 사는 집에서는 마을과 붉은 기와로 된 종탑이 있는 산 속 교회가 내려다보인다. 농장과 예수 수난상, 시청, 사제관과 독일풍의 이름이 붙은 위령비가 있는 풍경. 지극히 유럽적이다. 유럽 저쪽 끝에 있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여행하면서 아주 비슷한 고장을 방문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캐나다의 숲과는 전혀 다른, 도로와 촌락이 있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형성된 듯한 농촌이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유럽을 재건’하는 척했던 지난 몇 십 년 간, 이런 풍경은 전혀 ‘유럽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변했다. 평야에 집중돼 있고 전 세계 시장과 연결된 집약형 생산방식이 도입되면서, 각각의 지역 기후에 맞춰져 있던 고장 특유의 농장은 문을 닫았다. 주차장을 연결하는 아스팔트길만 남겨놓고, 목초지와 길은 가시덤불 밑으로 사라지거나 버려졌다. 예전에는 벌목꾼들이 세심하게 숲을 관리했었다. 그러나 바퀴자국을 남기며 돈이 될 만한 나무만 뽑고 나머지는 방치하는 거대한 기계가 들어온 이후, 세심하게 숲을 관리하던 것도 끝나버렸다. 
누군가가 강으로 떨어지면 시에 민원을 제기할 수 있으니,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을 따라 보호벽을 세우는, 이상한 규제가 강요됐다. 예전에는 강가를 따라 걸으며, 헤엄치는 송어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곳도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사전예방의 원칙’이 적용된다. 이 원칙이 생활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우연들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경제적 규제는 완화하면서도 일상적인 생활은 규제하는 상황 속에서 유럽은 신세계의 지방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역자연공원’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 마을은 내가 매년 잠시 머무르는 곳으로, 이 고장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곳 중 하나다. 이 마을은 아름다운 경치와 폭포, 아담한 호텔을 갖추고 있어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35년 동안 재임해 온 이 마을 시장의 신조는, “현재로도 나쁘지 않으니 ‘조금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자”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 추진 열풍이 불어, 옆 마을에서는 분양지가 마구잡이로 생겨났다. 구불구불했던 길이 점차 반듯하게 펴져서, 중앙분리대가 있는 도로가 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예전에는 모퉁이를 따라 집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직선 도로 위로 흉측한 가로등 불빛이 비치고 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매력에 별반 관심이 없는 시장들은 교외지역에나 걸맞은 지역개발계획으로, 유권자들의 환심을 얻으려 한다. 
내가 어린아이였던 1960년대, 내 또래 마을 아이들은 아직 거칠고 험했다. 외딴 농장에서 살던 아이들은 공립초등학교에서 실시하는 합반 수업을 듣곤 했다. 그들은 겨울이면 눈 속을 걸어서 학교로 왔다. 그 아이들은 자라서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어떤 이들은 노동자가 됐고, 또 어떤 이들은 엔지니어가 됐다. 농장은 그들의 부모와 함께 쇠락해갔다. 장성한 아이들 중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산 위에 현대식 주택을 지었다. 이들 중 은퇴를 앞둔 몇몇 사람들은 암소를 한 마리 살까 생각한다. 이들은 향수에 젖어 학교로 가는 눈 덮인 산길을 떠올린다. 그럼에도, 그들 중 이전 세대와 같은 삶을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옛날에는 이 거칠고 험한 산을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이곳에서는 사회질서와 종교적 영향 때문에 정신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또한 어른들이 재미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괘종시계의 추 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이 느꼈던 지루함처럼 가난을 부정할 수 없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옛 평야와 산간지역의 이 빈곤이, 도시 외곽지역의 빈곤이나 리얼리티 방송이 가진 빈곤보다 더한 것일까? 외부와 단절됐던 그 세상이, 자동차로 이 상업지구에서 저 상업지구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지금 세상보다 살기 힘들었을까?  


글·브누아 뒤퇴르트르 Benoît Duteurtre 
작가. 이 글이 실린 <어른을 위한 책(Livre pour adultes)>(갈리마르 출판사, 파리, 8월 18일 출간예정)의 저자

번역·이연주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