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에 취한 전쟁의 부조리

2016-07-29     크리스토프 뤼캉

제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매일 군인 6,400명(민간인까지 헤아리면 이 수치의 2배)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전쟁을 견디기 위해, 알코올을 장려한 군 지휘부는 군 부대에 절대 포도주가 부족하지 않게 조달하며 프랑스 군인들을 포도주에 빠져들게 했다. 몇 년 만에 포도주는 장점을 고루 갖춘 애국적 음료의 지위에 올랐다.

“전쟁 중, 군인들이 가장 고대했던 보급품은 단연코 포도주였다. 군인들은 포도주를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포화 속으로 내달리고, 상대편 병사와 맞붙었다. 군인들에게 포도주는 군수품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전투병에게 포도주는 체력은 물론 정신력까지 끌어올리는 효과적인 활력제였다. 포도주는 그렇게 나름의 방식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지 17년 이후 나온 선전물에서의 포도주에 대한 찬사는 가벼운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라울 뒤피의 눈부신 삽화가 담긴 소책자의 서두에 실린 이 짧은 글은, 당시 구국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필리프 페탱이 썼다. 그러나 서정적인 감성이 담긴 이 글 뒤에는 더할 수 없이 폭력적인 현실이 감춰져 있다. 그것은 전례 없이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포도주를 중시한 군인 수백만 명의 일상이었다. 
 
1914년 8월,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포도주는 생필품이 됐다. 전선을 지키는 군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양의 포도주를 공급받았다. 접전지 후방 인근에 머물러 있던 주민에게 사거나, 소행상 또는 전쟁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무리에게 사들였다. 특히 군 경리단이 수천 대의 탱크 트럭으로 조달한 포도주는 수백만 군인들의 목을 한껏 축이고도 남았다. 그들은 포도주를 ‘피나르(Pinard; 포도주의 속어) 성자’나 ‘피나르 사제’라고 찬사했다. 종전이 될 때까지 포도주는 전선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고, 군인들에게 물이나 음식이 부족할 때는 있어도 포도주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급속도로 대량 생산된 포도주는 전시에 대중적인 음료로 자리 잡았다. 앙리 라브당은 <일뤼스트라시옹>지(1917년 10월 13일자)에서 “포도주는 커피를 뛰어 넘는 음료다. 가장 위대한 주스, 군대를 위한 음료가 됐다”고 적었다. 
 
알제리산 포도주가 화물선에 실려 날마다 세트 항구로 들어오거나 포르투갈, 스페인, 특히 랑그독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주는 벌크 상태로 철도를 통해 군사지역까지 운송됐다. 시고 떫거나, 거칠고 시금털털하고 씁쓸한 맛이 나는 저급의 적포도주였다. 군인들은 맛없다고 불평했지만 그나마 없으면 아쉬웠기에, 곧 이 맛에 적응했다. 맹탕에 불순물이 많았고, 향도 별로였고, 흥분성 화학물질이 들어있는 듯했다. 가짜 포도주도 많았다. 조잡하게 생산돼 라벨도 없고 천연 포도주의 풍미를 흉내내는 화학물질로 맛을 낸 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주는 사병에게 미친 영향력으로 정계와 군부는 물론 과학계에서까지 인정을 받았다. 1915년에 이미 아르망 고티에 박사는 “포도주는 높은 강도로 신속하게 일해야 하는 사람들, 특히 전쟁터의 군인에게 꼭 맞는 음료다. 평범한 사람들이나 전투병에게 매일 500~750ml 정도의 포도주를 공급하면 오한, 기관지염, 폐렴, 설사 등의 병을 예방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입원일수를 줄일 수 있고, 전투병의 체력과 기분을 양호한 상태로 유지하면서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프랑스과학아카데미 논문집에 발표했다. 

1차 대전 참전병의 피 속에 흐르는 포도주

 
전장에서 포도주는 마음을 달래고 용기를 준다. 그리고 공격의 순간 격렬하게 일어나는 공포심을 잠시나마 유예시킨다. 극도의 잔혹함과 죽음이 일상이 돼버린 전쟁터에서(1)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필연적으로 불러온 일탈 중에는 알코올을 통해 해방 상태를 느끼는 것도 포함됐다. 사람들에게 포도주 소비는, 점점 불합리해지고 의미를 잃어가는 전쟁을 버티는 수단이 됐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집단 간 결속은 물론 연대감과 정체성까지 강화시킨다. 때로는 서로 다른 사회적, 문화적, 지리적 출신의 전투병들 사이의 상호 교류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포도주다. 포도주는 공동의 행동과 가치와 담론을 부추긴다.
 
참호에서 포도주는 의미를 부여하고, 때로는 목숨을 지킨다. 앙드레 브리두는 <죽은 이들의 시간을 기억하다>에서 “인간도 포대처럼 가득 차야 서있을 수 있다”고 적었다. 1918년 휴전 이후 포도주는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르포르타주, 기사, 수많은 게시문, 엽서를 통해 전쟁 내내 포도주를 중심으로 유지된 강력한 프로파간다를 이어가며 ‘승리의 포도주’로 승격됐다. 즐거움과 기분전환을 연상시키는 이 음료는 너그러운 시선을 받았다. 전선, 야영지, 후방 어디에서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포도주를 볼 수 있었다.
 
포도주는 흔히 담배, 독주, 연애와 연결된다. 많은 엽서들이 “포도주여, 사랑이여, 파이프 담배여, 영원하라!”, “침대에서 너를 내게 주면 네게 포도주를 줄게”같은 문구를 담고 있었다. 포도주 병 모양의 대포에 포탄인 술을 채워 장전하는 그림 옆에 언어유희도 다채롭게 시도됐다(프랑스에서 구어로 포도주와 대포는 같은 단어다). 보건위생 개선을 위한 운동 단체와 금주론자 집단과 애국조직 등 모든 이들이 포도주를 ‘애국 음료’로 추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1차 세계대전 중 포도주의 기능과 소비 조건, 포도주가 폭력에 미치는 영향과 폭력의 수용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사료 편찬 중 어디서나 등장하는 마지막 주제는 역사학자 사이에서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군인의 개인적 폭력과 공공의 폭력을 인간의 잠재적인 ‘전쟁 문화’의 존재로 설명하는 이들도 있고 인간에게 주어진 다양한 형태의 제약을 탐색하는 이들도 있다. 동의와 강압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포도주에 대한 연구는 인간이 계속 전투를 하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전면전을 위해 전국에서 사람을 모으고 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상황에서 끊임없는 병사의 탈영으로 골머리를 앓는 군사정치당국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였다. 따라서, 대규모의 군인 공급은 전략적으로 중대한 일이었다. 
 
1914년 8월 말 프랑스군의 절망적인 상황은 이후 군 최고사령부의 선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강력한 독일군은 프랑스 동쪽 전장에서 프랑스 보병을 몇 주 만에 초토화시켰다. 쏟아지는 포탄 앞에, 프랑스군은 무력해졌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힘을 잃었다. 며칠 만에 프랑스군의 손실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8월 22일까지 사망한 프랑스 군인은 2만 7천 명이었다. 월말에 가면 사망자가 8만 4,500명에 달했다. 중경상을 입은 이들도 프랑스 측만 15만 명이었다. 장성들의 고집은 단시간에 피해 규모를 키웠다. 프랑스 전략가가 지휘한 야심찬 공격은 차례로 실패했다. 전쟁에 투신한 사람들에게 전쟁은 그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들 중 수만 명이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적군이 수 킬로미터 밖에서 쏜 포탄에 맞아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순식간에 시작된 프랑스인의 패주는 퇴각과 침공의 전주곡이었다. 

탈영을 막는 포도주, 반란을 일으키는 포도주

연이은 패배로 인한 혼란은 모든 군부대를 위협했다. 몇 주간의 참혹한 전투로 인해 물리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군인들은 사기가 떨어져갔다. 그들의 새로운 생존 조건과 존재적 불확실성은 긴장감을 키웠고, 특히 상급자와의 마찰이 두드러졌다. 명령불복종 사례가 점차 늘었다. 고위층은 모든 이들이 지휘부를 불신한다는 사실을 덮기 위해 정치적 이유를 댔지만, 군 기강이 흐트러지는 상황이 걱정스러웠다. 그들은 탈영한 병사들이 갑자기 복귀하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곧 혁명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북부와 동부에서 전쟁에 참여한 보병 대부분이 서민층이라는 점에서 근거 있는 두려움이었다. 
 
군 기강을 재확립하는 일이 관건이었다. 군법에서 정한 강도 높은 형벌을 넘어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즉각적인 조치를 마련했다. 그것은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선에 있는 병사들에게 포도주를 충분히 공급해서 탈영을 막는 것이었다. 도수가 8~9도로 낮고 전국적으로 상당량이 생산되는 포도주는 전투병들의 문제에 대한 즉각적이고 완벽한 해결책이 됐다. 무엇보다 병사와 직접 접촉하는 하사관에게 질서와 사기를 유지할 수 있는 방책이었다.
 
1914년 가을, 국가 기관은 포도주의 중앙 수급과 운송, 모든 전선의 병사에게 보급하는 전반의 일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고 대량 소비를 장려했다. 군 수뇌부의 추진에 힘입어 연말에 포도주의 배급량이 처음으로 증가했다. 당시 총사령부에서 후방지휘소로 발송한 지침에 이 점이 명시돼 있다. “긴급 - 병사당 현재 일일 배급량의 절반에 상응하는 양을 추가로 지급하는 일이 가능한지 검토 요청 드립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1914년 포도 수확량이 늘어나 남프랑스 포도재배자의 기부가 이어지면서 1915년 초 포도주 배급량은 두 배로 증가했다. 병사의 일일 정식 배급량은 250ml에서 군행정부에서 지급하는 500ml로 증가했다. 그렇지만 전방에서는 다른 조달 방식을 이용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매일 1~1.5리터의 포도주를 구할 수 있었다. 전투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장기전 태세로 접어들었다. 합의가 무너지고 전선이 붕괴될 위협이 커지자, 군 당국은 대규모 알코올 중독 정책을 유지했다. 
 
1916년부터 시작된 ‘포도주 위기’와 전국 생산량 급감에도 불구하고 전선에서는 포도주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1918년 패배로 인해 노이로제에 걸린 프랑스 정치당국과 군 당국은 군에 투입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포도주를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매년 12~17억 리터의 포도주가 군대에 공급됐다. 일일 배급량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전쟁부장관까지 우려를 표명하며 1915년 3월 9일, 후방지휘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전선에 있는 병사의 일일 포도주 배급량은 500ml로 결정된 사항인데, 아직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이 결정을 따라야 할 중대장들이 포도주 대신 다른 물품 구입에 자금을 쓰는 일이 빈번합니다. 병사들은 약속된 것보다 적은 양의 포도주를 배급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종료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길 바랍니다.” 
 
서부 전선에서 전쟁 기간 내내 만취 상태가 일상이었다. 부사관이나 장교보다 병사들이 훨씬 더 많이 취해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확인된 단체 행동”에 대한 수많은 증언이 포도주 과음 세태를 보여줬다. 356보병대 소속이었던 마르셀 파피용은 “식사 때마다 포도주 1리터를 마셨다. 전쟁 이후, 나는 주정뱅이가 됐다”고 증언했다.(2) 알베르 뫼르제는 1917년 9월 13일자 편지에서 “내가 이렇게 많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베르됭과 솜에서 일어난 대접전 이후, 전쟁의 부당함과 고통은 병사들이 감당하기 버거운 지경에 이르렀다. 군 당국이 제공하는 일일 최소 배급량은 1인당 1리터였다. 하지만 참호에 주둔 중인 모든 병사에게는 알코올 배급량이라고 해서 새벽녘에 매일 1인 당 62.5ml가 추가배급 됐다. 실상 포도주는 균일하게 배급되지 않았다. 참전 중인 각 부대의 상황이 미치는 파장을 고려해 장군의 재량껏 제공됐다. 상부에서 관련 지침이 내려오기도 했다. 1915년 4월 9일자 장군들에게 전달된 공문에서 조제프 조프르 총사령관은 “상황에 따라, 장군들이 현행 규정에 의거해 포도주 배급량을 필요한 수준까지 무상으로 추가제공할 재량권이 있다”고 했다. 습격이 임박한 경우 매일 제공되는 포도주에 추가로 ‘독주’와 증류주를 배급했다. 독주와 함께 마시거나 강한 알코올이나 에테르를 섞은 포도주는 흥분과 해방감을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 모리스 기요토는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마실 것을 나눠줬는데 그게 우리를 미치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3)
 
군지휘부는 참전 병사의 공격성과 폭력성을 끌어올리고, 인간 내면의 야성을 끄집어내기 위해 포도주를 사용했다. 알코올은 기대했던 대로 군인들의 폭력성에 불을 붙였다. 신무기를 구비하지도, 압도적인 기술적 혁신도 이루지 못해 전투에서의 승리가 어려워지자, 프랑스군은 비등비등한 군사의 대치 상황에 발이 묶인 가운데, 유일하게 승리를 가능하게 할 변수로 여긴 병사에게 노력의 대부분을 쏟았다. 그러던 중에, “음주로 인한 정신착란”으로 불복종 행위가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이런 행위들이 1917년 반란으로 이어지자, 군 수뇌부의 우려가 시작됐다. 보티에 장군은 1915년 7월 1일 전쟁부 장관에게 공문을 보내,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했다.
 
“군인들이 주둔 중인 지역의 자기 자리에서 지휘체계도 무시하고 사라졌다가 30분 후에 완전히 취해서 돌아옵니다. 부상당한 병사들은 감독관을 속이고 술을 마시러 외부로 나가거나 허가를 받아 외출을 나갔다가 취해서 복귀합니다. 명백하게 취한 상태로 공공장소에서 경범죄를 저질러 기소되는 건이 빈번하며, 휴가나 허락을 받고 외출하거나 불법으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면서 술에 취해 거리를 헤매는 군인을 마주치는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2년 후 페탱 장군은 “병사들이 정식 배급량을 넘어서는 양의 포도주를 과도하게 마셔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조치가 시급한 실정입니다. 군사법원에 접수된 사건 서류만 검토해 보셔도 대부분의 범법행위가 음주 상태에서 일어난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라며 걱정했다. 과음으로 인한 첫 번째 사망 사건은 1914년 여름 말에 발생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어지는 가을, 전쟁부 보건국은 알코올 과다 섭취로 인한 “정신이상흥분” 사례가 수천 건이라고 집계했다. 그러나 보건국 장교와 군인들의 경각심을 일깨운 것은 포도주의 잠재적 중독성이었다. 엘리 방드랑은 1915년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독주를 너무 많이 줘, 이러다가 다들 알코올중독자가 되겠어”라고 썼다.(4)
 
환각, 불면증, 구토, 식욕 감퇴 등의 증상이 가장 흔했다. 알코올중독 치료를 제대로 받기 위해 후방으로 이송된 병사도 있었다. 군지휘부는 후방에서 발송되는 보급품에 환각성 물질을 숨겨 아편틴크나 아편을 포도주에  섞어 마시는 경우가 있다고 경고했다. 전선출장 의사 등 외부관찰자들은 병사들이 겪는 문제들의 다양성과 빈번함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알코올 과다 섭취라는 것을 파악하는 이는 드물었다. 군 보건국 내에서 알코올과 알코올중독을 문제 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포도주는 그 자체로 건강하고 ‘위생적인’ 음료였기에, 포도주를 비난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승전이 확실시되면서 ‘승리의 포도주’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 5년 동안 프랑스 군인에게 힘이 돼준 애국적 음료라는 포도주의 이미지는 다양한 글과 노래, 그림을 통해 열렬하게 찬양되면서 꾸준히 유지됐다. 포도주를 바라보는 시선은 신화적 유래에서 출발해 시공을 초월한 국가적이고 애국적인 문화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 중 계속 소비가 증가한 포도주가 전국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모든 가구를 점령하면서 막을 내렸다. 또한 원산지명칭통제에 관한 1919년 5월 5일 법의 기본원칙을 유럽과 세계에 적용되는 주요협정에 포함시키면서,  프랑스 포도 재배와 포도주 양조업계의 지평을 다시 쓰는 계기가 됐다.  


글·크리스토프 뤼캉Christophe Lucand
역사학자, 부르고뉴 프랑슈콩테 대학교 연구교수, 저서로 <참전 군인의 포도주. 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포도주의 역사(1914~1918)>(디종대학출판사, 2015)가 있다.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자크 부베레스, ‘비극의 카니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11월호.
(2) 마르셀 파피용, ‘바라던 대로 내가 돌아왔다’, <전장과 후방에서 보낸 편지, 1914~1918>, 그라셋, 파리, 2003년.
(3) 프랑수아 루 <미지의 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군에 대항한 병사들>, 에디시옹 드 파리-막스 샤레이, 에세이 및 다큐멘터리 총서, 파리, 2006년.
(4) 마리 조엘 구아티 방드랑, <전쟁을 하기엔 너무 좋은 날. 오베르뉴 출신 농민 엘리 방드랑이 전쟁 중 보낸 편지 (1914년 8월~1916년 10월)>, 에디시옹 라 칼리포트, 베르테종,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