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레이 북친의 생태주의 또는 야만주의
쿠르드족 코뮈날리즘의 기원
2016-07-29 뱅자맹 페르난데즈
사회 생태론 및 자유주의적 지역자치주의 이론가인 머레이 북친이 사망한 2006년, 그의 사상에서 영감을 얻은 쿠르드노동자당(PKK)은 총회에서 확고한 민주주의 연방을 구축할 최초의 공동체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의 철학가이자 행동주의자인 북친은 평등주의와 무정부주의, 인본주의를 위한 계획의 중심에 생태학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이목을 끌지 못했던 그의 사상은 뒤늦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2014년 1월 6일, 시리아령 쿠르디스탄 로자바 지역은 자치코뮌으로 연방을 조직했다. 로자바 지역은 주민총회를 기반으로 직접민주제와 평등한 자원관리를 골자로 한 사회계약을 채택했다. 쿠르드족 운동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인 압둘라 오잘란은 머레이 북친의 저서를 여러 권 읽었고, 종신형으로 터키감옥에 수감된 후 북친과 교류했다. 그 영향으로 오잘란에 의해 창설된 쿠르드 인민노동자당(PKK)은 초기 사상이었던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뛰어 넘는 이데올로기적 대전환을 겪게 됐다. 2005년에 PKK와 시리아 민주연합당(PUD)의 지도자에 의해 채택된 ‘민주적 연방’을 위한 국제주의적 계획은 민주적이고 다문화적이며 생태학적인 지역연방에 근동의 쿠르드족을 결집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1921년, 유대계 러시아인 이민자 출신의 혁명가 집안에서 태어난 북친은 미국 노동자 투쟁의 중심이었던 뉴욕 브롱크스에서 성장했다. 아주 어린 나이에 공산당 청소년 조직에 가담했으나,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1936년 공산당을 떠난다. 이후 그는 산업별 노동조합(CIO)과 인종평등회의(CORE)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그는 1945년 제너럴모터스(GM) 대파업 기간 중 자동차산업 노동자였다. 후에 머레이 북친은 독학을 했고, 뉴저지 소재 라마포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그는 20여 권의 책과 수백 편의 글들을 남기고 2006년 7월 30일 생을 마감했다.
1971년, 버니 샌더스에게
친환경 정책 요구
급진적 생태학자인 그는 칼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자본주의의 비합리성과 치명적 결함이 필연적인 자기파괴적 성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과의 대립, 즉 자연과 인간의 건강을 동시에 파괴하는 성장 논리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64년, 그는 소책자 <생태론과 혁명적 사고>에서 다음과 같은 사회 생태론의 기본 사상을 구축했다. 바로 “인간의 자연지배는 철저히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1) 앞서 언급한 인간지배는 성과 민족, 인종뿐만 아니라 계층에 대한 지배를 포함한다. 그래서 그는 급진적 사회 생태론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2) 또한, 그는 상호적인 사회혁명이 생태학적 변화의 열쇠라고 생각했다. 1965년부터 그는 지구 온난화의 위험성이 자연과 사회의 균형에 미칠 영향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자원개발과 경쟁을 중시하는, 자연에 ‘완전히 반동적인’(3) 과학에 대항해, 북친은 자유의 윤리를 토대로 ‘창조적이고, 협동적이며, 적용범위가 넓은’, 자연계에 대한 논리적 인식을 제안했다. 그는 ‘우열을 정하는’ 위계구조가 ‘다양성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71년, <탈희소성 아나키즘(Postscarcity Anarchism)> 모음집을 출판하며 북친은 뉴욕 급진주의 중심인물의 반열에 올랐으며, 미국 신좌파의 지지를 얻었다. 이 저서에서 그는 기술로 얻은 부의 풍요가 인류의 ‘사회·문화적 잠재성을 실현’시키기 위한 역사적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을) 해방시키고, 지방 분권화된, 생태학적 기술은 자본주의적 도시화에서 올바른 민주적 도시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북친은 노동 계급을 조직화하는 것보다, 생태학적 쟁점에 대응해야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에 의하면 혁명의 주체는 착취 당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지배 받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따라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위계조직과 지배’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젊은이들을 위한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해결책으로서 아나키즘을 새롭게 정의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기술에 관한 그의 입장은 기술을 두려워하는 반문화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환경보호주의’, 즉 자연을 개발가능한 자원의 보고로 여기는 ‘녹색 자본주의’(4)를 반대했다. 또한 그는 권위주의의 ‘우려스러운 징후’가 보이는 ‘심층 생태론’도 비판했다.(5) 이러한 사조의 선구자 중 한명인, 미국의 생물학자 파울 에를리히는 그의 저서 <인구폭탄(The Population Bomb)>(1968)에서 생물계를 위협하는 것은 인구과잉이라고 주장하며, 산아제한을 ‘강제’할 것을 권장했다. 그러나 북친은 ‘환경보호를 위한 독재’가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북친의 견해에 의하면, 생태위기는 위계구조와 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된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수집단이 자원을 독점하고 고갈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교화적인 연설과 투쟁하면서, 환경보호운동이 기업계 엘리트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노동자들과 흑인들이 환경보호운동을 ‘백인 특권층과 엘리트들의 음모’라고 규탄하는 것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상 자원낭비의 책임이 ‘거대 기업의 경영진’에게 있지만 말이다.
1971년, 북친은 뉴욕을 떠나 당시 프리 버몬트 코뮌운동센터가 있던 버몬트 주의 벌링턴에 정착했다. 미국의 급진적 사상이 ‘버몬트의 아르카디아(목가적 이상향-역주)’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976년 그는 사회 생태학 연구소를 설립해, 학생들에게 유기농업 및 재생 가능한 에너지뿐만 아니라 급진적 사회이론과 혁명기 역사에 대한 기초를 가르쳤다. 사회 생태학 연구소는 대안교육센터로서, 이 곳에서 이네스트라 킹의 에코페미니즘과 같은 여러 운동들이 출현했다. 벌링턴 그린 환경협회와 함께 북친은 여러 친환경 캠페인을 추진하고 시의회선거에서 도시제도에 대한 민주화 계획을 제안했다. 또한 그는 벌링턴 시장인 버니 샌더스에게, 구역총회를 고려하고 발전소 건설과 샹플랭 호 연안의 부동산 계획을 포함한 대형프로젝트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듯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북친은 사회 생태론을 위한 정치 프로그램을 고안해냈다. 바로 ‘자유주의적 지역자치주의’,(6) 즉 ‘연방형태로 점차 확대되는 도시 단위의 직접민주주의’(7) 계획이다. 그는 활동가들이 지역제도의 ‘급진적 재구성’을 실현하고, 민회를 창설해 제도화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자유정체(政體)’, 민회는 자본주의를 철폐하기에 충분히 강력하며, 온갖 형태의 지배를 막기 위해 충분히 합법적이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에 의하면, 활동가들은 시의회선거에 입후보하고 경제를 시의 통제 하에 두며, 다른 공동체와 연합할 사명을 가진다. 이는 ‘국민국가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막기’ 위한 대안적 권력을 형성하기 위함이다. 1977년부터 북친은 반핵운동단체인 조가비연맹(Clamshell Alliance)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연맹 창설자인 하위 호킨스와 함께 환경보호 좌파조직 ‘레프트 그린 네트워크(Left Green Network)’를 설립했다.
이 시기, 북친은 1983년에 연방의회에서 27석을 얻은 독일 녹색당 지도자들을 만났다. 북친은 이들에게 녹색당이 획일화되는 것을 경계하라고 촉구하며, 유타 디트푸르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유타 디트푸르트는 오슈카 피셔가 사회 민주당(SPD)과의 연합을 주장하자, 1989년에 녹색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녹색당은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적녹연정’을 구성하게 된다. 생태학자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하면서 실패하자, 북친은 크게 실망한다.
북친은 아나키스트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 미하일 바쿠닌, 표트르 크로포트킨 혹은 네스토르 마흐노의 전통에 따라, 아나키스트들이 자유주의적 지역자치주의, 자치지역연방을 큰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1984년, 그는 베니스에서 열린 ‘안녕, 아나키스트(Ciao anarchici)’ 국제회의에 초대됐다. 20년간 북친과 협력하며 그의 일대기를 쓴 자넷 빌은, 북친이 셔츠 주머니에 기계공 볼펜을 꽂은 채, 녹색 작업복 차림으로 연단에 올랐을 때의 모습을 이야기 했다.
“북친은 여성해방과 자연보호, 지방자치를 지지하는 운동으로 생태계에 적합한 지방 분권화된 인간 공동체를 창설해야 하며, 마을과 도시를 민주화하고, 연합시키며, 국가에 대항하는 이중권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청중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회의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시민과 소규모 의회의 평의회를 통한 도시정부도 국민국가의 축소판일 뿐이라는 이유로 북친의 사상을 반대했다. 참가자들은 다수의 횡포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다수결 투표원칙을 거절했다. 이를 계기로, 북친은 아나키즘이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와 양립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국민이 아닌 ‘인간’의 주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는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단순한 국소주의, ‘라이프스타일’의 추구에 그친다고 보았다.(8) 북친은 결국 정치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대 지중해에서 일어난 노예반란부터 파리코뮌을 거쳐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아나키스트의 참여까지, 국민국가와 패권을 다퉜던 ‘자유정체’의 역사인 혁명운동에 관한 연구에 여생을 바쳤다.(9) 사회주의 혁명이 국가 권력의 장악에 의해 일어났거나,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제3의 길이 존재한다. “민중을 동원할 수 있는 투쟁의 장에서 혁명을 이끌고, 혁명이 그 자체로 강화되고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항해 새로운 공공권을 고안해내는 반권위적인 정책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10)
이것이 바로 ‘코뮈날리즘(Communalism, 통치 권력에 있어 지방 분권을 주장하는 주의-역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와 같은 정치투쟁의 정의를 통해, 넷으로 나뉜 쿠르디스탄이 이슬람 국가 조직(IS)과의 전쟁 최전선에 서서, 자치를 위해 활동가들을 동원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오잘란에 의해 약속된 ‘민주적 연방제’의 원칙에 따라, 자지라, 코바니, 아프린 주는, 코뮌총회로부터 위임받아 주민 평의회(‘민중회관’) 대표자들로 구성된 연방행정조직을 가지고 있다. 연방은 방어 및 보건, 교육, 근로, 사회문제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각각의 평의회는 자치적이고 협동적이며,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농업 및 에너지 자원을 관리한다(로자바 지역은 석유가 풍부하지만, 통상금지로 석유를 수출할 수 없다).(11) 터키 북부의 쿠르디스탄에서, 민주적 공동체를 위한 회의(DTK)는 2010년부터 도시 및 지방, 지역구 단위의 평의회를 연합시켰다. 평의회는 501명의 대표자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 중, 60%는 공동체 출신이며, 40%는 정부의 공식기관 출신 당선자들이다. 각각의 평의회가 동등한 대표권을 가지고 하나의 합의체가 되길 바라는 DTK는 분쟁으로부터 도망친 아르메니아, 아람, 예지드파, 알레비파, 투르크메니스탄 공동체 대표자들도 동등하게 받아들였다.
북친은 정치를 포기했었지만, 그의 저서가 번역되면서 그의 사상이 퍼질 수 있었다.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에 반대하는 시애틀 시위가 일어날 당시, 반세계화 운동 활동가들이 그를 초청해 강연을 부탁했다. 그렇지만 그는 혁명을 부르짖는 폭력적인 아나키스트 단체나 인터넷 상의 유사 단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단체들이 ‘민회’처럼 지속적이고 안정된 대안적 제도인 ‘자유정체’를 구축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봄의 반격’이 ‘여름 바캉스’가 지나도록 이어지는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북친은 대규모 시위 그 자체만으로 사회적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12)
직접민주정치에 대한 요구를 강하게 표출한 민회 운동은 북친의 계획에 새로운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2015년, 북친의 저서와 글들이 재발간됐다. 그 글 모음집은 2015년 <다음 혁명(The Next Revolution)>이라는 매력적인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우리는 이 책의 서론에서 “파리코뮌 구역부터 월가시위 총회까지, 자체 조직된 민주적 평의회는 레드라인처럼 역사를 관통한다.”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13) 이 책은 ‘비폭력 혁명 전문가’인 북친을 선구자로 찬양하며, ‘21세기를 위한 정치’에 대한 그의 계획을 보여준다.
북친의 사상,
반국가주의의 한계와 그의 믿음
지칠 줄 모르는 활동가이자 타협하지 않는 비평가인 북친은 이 민회운동이 직면한 상당수의 문제들을 예견했었다. 합의를 실행하는데 내재된 어려움이 있으며, 정립되지 않은 임시회의가 국민의 권력을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정치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임시회의가 구역과 마을에서 공동체를 중심으로 지역총회로서 제도화돼야 한다.
한편, 이 운동들이 급진적인 북친의 제안과 부합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특히 국가 및 자본주의 체제와 비교해서, 어떻게 코뮌의 안전을 보장할 것인가? 북친은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시의 통제아래 있는 경제를 방어하기’ 위해서 ‘민병대’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테네의 시민병(완전무장한 보병)과 마크노의 우크라이나 혁명군인 마크노브치나(1918~1921), 혹은 1937년 카탈로니아 아나키스트 정부의 노동자와 농민 민병대를 모델로 삼았다.
앞서 언급했듯, 자넷 빌은 북친의 사망 후 10년에 걸쳐 그의 일대기를 썼다. 그리고 이제 사회 생태론의 주요인물이 된 그는 자신의 오랜 멘토인 북친의 타협하지 않는 반국가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자넷 빌은 “국민국가의 틀 없이, 어떻게 사회 불공정성을 바로잡고,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며, 지구 온난화를 제한하거나 사회 안보를 보장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미국 남부에서처럼, 몇몇 소도시가 반동적이거나 다른 도시에서 자연보호활동을 반대해 연방정부가 강요할 때만 가담하는 상황에서도, 코뮌이 민주적이고 평등하며, 친환경적이고 합리적인 곳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14)
북친은 이러한 문제들이 실천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종종 동시대인들로부터 이상주의적이며,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너무 비판적이라고 평가 받는다. 자넷 빌은 북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민주적, 합리적, 비종교적이며 위계가 없는, 절대자유주의적이며, 친환경적인 좌파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는 국제주의자이자 반군국주의자였다. 그는 이론적으로 일관성이 있었다. 그는 인간적이고 윤리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였다.” 북친은 인간이란, 자신이 소중히 여긴 자유와 온당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글·벤자민 페르난데즈 Benjamin Fernandez
진보매체에 생태주의 관련 글들을 자주 기고하고 있다.
번역·김세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머레이 북친, <Au-delà de la rareté>, Ecosociété, 몬트리올, 2016. www.ecologiesociale.ch 사이트에서 프랑스어로 번역된 텍스트 제공.
(2) 머레이 북친, <Qu’est-ce que l’écologie sociale?>, Atelier de création libertaire, 리옹, 2012.
(3) 머레이 북친, <Pour une société écologique>, Christian Bourgois, 파리, 1976.
(4) 뱅상 제르베르와 플로레알 로메로, 머레이 북친, <Pour une écologie sociale et radicale>, Le Passager clandestin, 뇌비 앙 샹파뉴, 2014.
(5) 자넷 빌의 <Ecology or Catastrophe: The Life of Murray Bookchin>에서 인용.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6) 자넷 빌, <Le Municipalisme libertaire: la politique de l’écologie sociale>, Écosociété, 1998.
(7) 머레이 북친, <From Urbanization to Cities: Toward a New Politics of Citizenship>, Cassell, 런던, 1995.
(8) 머레이 북친, <Social Anarchisme or Lifestyle Anarchism>, An Unbridgeable Chasm, AK Press, 샌프란시스코와 에딘버러, 1995.
(9) 머레이 북친, Third Revolution: Popular Movements in the Revolutionary Era, 2권, <Cassell>, 런던과 뉴욕, 1996년과 1998년.
(10) 자넷 빌의 <Bookchin breaks with anarchism>에서 인용. 2007년, https://theanarchistlibrary.org.
(11) <Janet Biehl / David Graeber: impressions et réflexions du Rojava> 참조, 2015. 1. 3. www.ecologiesociale.ch
(12) 머레이 북친, <Spring offensives and summer vacations>, Anarchos, 뉴욕, 1972. 6.
(13) 머레이 북친, <The Next Revolution: Polular Assemblies and the Promise of Direct Democracy>, 베르소, 뉴욕, 2015.
(14) 자넷 빌, <Ecology or Catastrophe> 앞에서 언급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