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아로스타미의 죽음, 영화의 한 시대가 막내리나?

2016-07-29     전찬일

 

지난 7월 4일, 76세로 고인이 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내 뇌리와 심상을 차지하고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에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1)와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로 이어지는 ‘지그재그 3부작’ 혹은 (영화가 펼쳐지는 이란 북부 마을 코케를 가리켜) ‘코케 3부작’ 등으로 그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켰다.

칸 영화제가 50회를 맞이하는 1997년, 일본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와 영예의 황금종려상을 공동 수상한 <체리 향기>를 기점으로 자기 자신은 물론 이란 영화를 전 세계의 수많은 국제 영화제들의 중심에 위치시켜온 세계 영화계의 거목, 키아로스타미.
그의 거목성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가 20회를 맞이해 특별 발간한 <아시아영화 100>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특정 권역의 작품이나 감독에 표가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급적 광범위한 지역으로부터 위촉”한 세계 각국의 감독, 평론가, 영화학자, 영화기자 등 전문가 73명으로부터 ‘TOP 10’ 리스트를 받아 취합, 합산해 최종적으로는 영화 113편, 감독 104명을 선정했다(동점이 많아서다. 가령 100위에 해당하는 영화들이 무려 48편이나 된다. 그들은 공동 66위에 올랐다). 키아로스타미가 오즈 야스지로, 허우샤오시엔에 이어 3위에 등극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4위), 미조구치 겐지(공동 8위) 등 세계 영화역사의 거장 중 거장들을 제치고 말이다. 참고삼아 영화 톱 10을 밝히면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를 필두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왕가위의 <화양연화>, 사트야지트 레이의 ‘아푸 3부작’(<길의 노래>/<아파라지토>/<아푸의 세계>),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아키라의 <7인이 사무라이>,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페이무의 <작은 마을의 봄>과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공동 8위), 김기영의 <하녀>와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공동 10위)이다. 
어지간해서는 ‘나이 든 죽음’에 감정적 동요를 보이지 않는 나를 이토록 오래 사로잡고 있는 까닭은, 비단 키아로스타미가 거목이어서만은 아니다. <디어 헌트>, <천국의 문> 등으로 유명한 마이클 치미노도 그보다 며칠 전 이 세상을 떠났지만, 워낙 그 색깔이 다른 만큼 논외로 친다. 거장성은 말할 것 없고 영화적 실험성, 감독으로서 스타성·영향성 등에서 그보다 대 선배인, 프랑스 ‘누벨 바그’(새 물결) 대표주자 자크 리베트(<파리는 우리 것>, <미치광이 같은 사랑>,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누드 모델>, <알게 될거야>…)도 올해 1월 영면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난 2007년 7월 30일 같은 날 저 세상으로 떠난, 그토록 좋아하고 존경했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정사>)와 잉마르 베리만(<제7의 봉인>) 두 거장의 죽음도 나를 이렇듯 강력히 뒤흔들지는 않았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거장과의 개인적 추억과, 그가 세계 영화사에서 차지하거나 하게 될 위상과 의의 등이다. 생전에 그를 국내외에서 몇 차례 만난 적이 있긴 하나, 그 으뜸 추억은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칸 정상을 밟고 부산을 찾은 50대 후반의 그와, 예의 월간 스크린에 실을 인터뷰를 위해 한 시간 여를 함께 했던 때로. 빈말이 아니라, 한 시간 남짓한 그와의 만남은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을, 내 삶의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당시 나는 30대 중반으로, 데뷔 4년 차의 혈기왕성한 열혈 영화 평론가였다.
게다가 나는 특정 영화의 텍스트 층위보다는 콘텍스트나 상호텍스트를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평론가가 아닌가. 근 20년 전의 과거지사라 적잖이 잊혔지만, 나는 의당 인터뷰의 주가 돼야 할 <체리 향기>나 감독 개인의 영화 철학·미학 등이 아니라, 당국의 극심한 검열 하에 놓인 이란 영화에 대한 전반적 상황이나 모흐센 마흐말바프 등 다른 동료 감독들과의 비교·관계 등부터 짚으면서 인터뷰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헌데 그는 답변을 거부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좋은 인터뷰어라면 질문을 그런 식으로 해선 안 된다는 충고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나는, 호기롭게도 혹은 주제넘게도 그의 충고를 수용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거장이라곤 하나 그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초반의 약 30분은 신경전이 펼쳐졌다. 화해의 계기는, 예나 지금이나 그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 걸작이라고 여기는 <클로즈업>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뤄졌다. 그는 내가 한국에서 개봉도 하지 않은 그 영화를 봤으리라고는 예상하진 못했다면서, 호의적 태도를 보였다. 그 이후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인터뷰가 진행·마무리됐다. 말미에 충심 어린 사과를 했음은 물론이다. 그때 나는 그의 개방성·관용성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열려 있음’은 그의 필모그래피 및 영화 세계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당시로서는 미지의 감독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인식하게 된 건, 나 또한 1996년 8월 17일 국내 개봉돼 2달 보름에 걸쳐 7만 명 이상을 불러 모으며 대 파란을 일으킨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통해서였다. 무심코 가져온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어딘지도 모르는 산 너머 친구의 집을 힘겹게 찾아가는 소년을 축으로 펼쳐지는 다큐성 휴먼 감동 드라마. 이 영화 및 감독 키아로스타미가 세계 영화계에 급부상하게 된 계기는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인 황금표범상을 거머쥔 1989년, 3등 상인 청동표범상을 수상하면서였다. 칸, 베를린, 베니스 등 소위 세계3대영화제도 아니고, 그것도 1등도 아닌 3등상을 받았건만 그 이후로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물론, 1979년 이란혁명 이후의 이란 영화를 향한 세계 영화제 등에서의 러브콜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효시 격인 다리우스 메흐르지 감독의 <소> (1969)를 기점으로 크고 작은 관심을 불러일으켜왔던 이란 뉴웨이브 영화들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그 결과 이란영화는 1990년대를 거치며 전 세계 영화제에 가장 많이 초청되는 내셔널 시네마가 됐으며, 키아로스타미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체리 향기>의 1997년 칸 정복은 그와 같은 맥락 하에서 접근·이해돼야 한다. 그것은 곧 그 해의 칸 황금종려상은 <체리 향기> 한 편이 아니라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게, 나아가 이란 영화 전체에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의 죽음을 접하면서, 다른 많은 이들처럼 나 역시 “영화의 한 시대가 저물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는 이른바 ‘현대 영화’(Modern Cinema)의 어떤 총화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명실상부한 현대 영화의 대명사라 할 장 뤽 고다르가 영화는 데이비드 워크 그리피스 감독(<국가의 탄생, 1915>)으로 시작해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으로 끝난다고 진단했다더니만, 그건 과찬은 아니다. 현대 영화의 경향 내지 특징으로는 크게 몇 가지가 거론된다. 영화가 더 이상 현실임을 주장하지 않고 영화임을 확연히 지시하는 자기반영성(Self-reflexivity), 영화의 효율성, 경제성 등을 위해 할리우드 영화를 대표로 하는 주류 영화에서 사멸된 시간과 공간의 복원, 포스트모더니티 및 변방성 등으로 대변되는 탈-중심성(De-Centeredness) 등이다. 그런 현대 영화의 특징들을 키아로스타미만큼 전형적으로 체현하는 감독이 거의 없다면 과장일까?
키아로스타미를 ‘출세’시킨 코케 3부작을 포함한 그의 전작(全作)에서 그 점은 명백해진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무대였던 코케 마을에서 1990년 대지진이 발생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다. 키아로스타미는 코케 3부작 2탄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 그 영화에 출연했던 두 아역 배우의 생사를 확인하러 길을 나선다. 그리고 <올리브나무 사이로>에서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연출하는 케샤바르즈 감독(모하메드 알리 케샤바르즈 분)이 신혼부부로 등장할 아마추어 연기자를 찾는 과정을 담는다. 이들 영화에서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는 완전히 와해된다. 어느 지점이 현실이고 영화인지를 구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미지만이 아니라 사운드 층위에서도 매한가지다. 
하지만 오해는 금물이다. 현실과 허구 사이의 모호함은 키아로스타미 영화만의 특징이 아니라, 상당수 이란 영화들의 어떤 경향이라는 것이다. 이란 영화의 다큐 전통은 그만큼 유구한 바,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이다. ‘차일드 시네마’ 전통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영화계에 전격 투신하기 이전 이란의 청소년지능개발연구소 카눈(Kanun)에 20년이나 몸담고 있었고, 그곳에서 제작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어린이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었다지만, 그런 관심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당장 비평적으로만이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천국의 아이들>(1997)을 떠올려보라. 
키아로스타미가 즐겨 아마추어 배우들을 기용했고, 세트 아닌 로케 촬영을 선호했으며, 시나리오대로 촬영하지도 않았다는 연출 성향도 새로울 것 없다. 그는 세계의 수많은 감독들처럼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 “극사실적으로 이란의 현실을 그리면서도 권위주의 정부의 검열과 정치적 논란을 피했다”(중앙일보 7월 6일 자 참고)는 것은, 이란의 현실 정치와 크고 작은 갈등·충돌을 빚어 망명하거가 투옥된 모흐센 마흐말바프, 자파르 파나히 등 동료 감독들과 비교하면 자랑거리가 아니다. 언뜻 건조한 듯한 영화들에 슬쩍 자리하는 서정성·감성성 등이나, 현실 정치를 넘어 일상으로서 정치성의 내포 등도 그만의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위 모든 경향·특징을 동시에 모두 담거나 드러내는 감독은, 내가 아는 한 현대 세계 영화사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밖에 없다. 그러니 어찌 그의 죽음과 함께 영화의 한 시대가 저버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그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전찬일
영화 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전 부산국제영화제 연구소장. 2002년부터 2008년까지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활동하다가 2009년 부산영화제에 전격 합류, 2016년 6월까지 프로그래머, 마켓 부위원장, 연구소장직 등을 수행했다. 아직 부산영화제에 몸담고 있긴 하나, 몇 개월 이내로 영화제를 떠나, 새로운 '모험'을 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