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보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세뇌하다

2010-01-06     가엘 브뤼스티에|정치학 박사

출판사에 대박 안긴 ‘왕초보 시리즈’, 뭐든지 쉽게 쉽게
논쟁적 요소 생략한 채 ‘설교’만… 단순한 만큼 맹목적


수영복을 입고 <왕초보를 위한 역사>(L’Histoire de France pour les nuls)를 열심히 읽고 있는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당수의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잡힌 때는 2006년. 이 사진으로 올랑드는 자신도 모르게 ‘왕초보를 위한’ 책 시리즈를 홍보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나온 ‘왕초보 시리즈’는 1990년 초 ‘컴퓨터를 가정에서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돕는 노하우’를 담은 <왕초보를 위한 DOS>를 첫 권으로 내놓았다. 현재 ‘왕초보 시리즈’는 스페인, 불가리아, 중국, 영국, 네덜란드, 에스토니아, 독일, 그리스, 포르투갈, 러시아, 세르비아 등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프랑스에서는 2000년 퍼스트 출판사가 ‘왕초보 시리즈’ 판권을 사들였다. 퍼스트 출판사는 <왕초보를 위한 PC>와 <왕초보를 위한 인터넷>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같은 흐름을 재빨리 파악한 퍼스트 출판사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다른 주제들을 ‘왕초보 시리즈’로 내기로 했다. 그래서 <왕초보를 위한 세금 적게 내는 법> <왕초보를 위한 신나는 커플 생활> <왕초보를 위한 성경>이 잇달아 출간되었다.

 

“어떤 주제도 복잡하지 않다”
‘왕초보 시리즈’는 구성도 잘돼 있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독자가 무엇이든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생각이죠. 그래서 이 시리즈는 어떤 주제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는 원칙에서 출발합니다. 진지한 주제를 쉽게 다루자는 것이죠.”(1) 뱅상 바르바르 편집 책임자의 말이다.

2006년에 <왕초보를 위한 역사>는 무려 70만 부가 팔려나가면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이 책은 번역본이 아니라 프랑스 내에서 자체적으로 출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마침 프랑스에서는 ‘왕초보 시리즈’를 단순히 번역본뿐만 아니라 창작본으로도 내자는 생각이 있었다. 이때부터 퍼스트 출판사는 정치적 주제도 ‘왕초보 시리즈’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 흐름에 맞춰 2007년에 <왕초보를 위한 정치>가 출간되었다. 2008년에도 ‘왕초보 시리즈’는 200만 부나 팔려나갔다. 그야말로 출판사에는 슈퍼 베스트셀러인 것이다. “전에는 유명한 전문가들이 저희 출판사와 함께 작업하기를 꺼렸는데 이제는 그분들이 저희 출판사에 함께 일하자고 먼저 찾아옵니다.”(2) 뱅상 바르바르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출판사는 독자에게 실력 있는 저자들과 함께 일하되, 그들의 지배적 사상을 일방적으로 전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정치 문제를 다룬 몇몇 ‘왕초보 시리즈’는 그 내용이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왕초보’ 독자들은 다른 책으로 유럽의 현실을 이해한 다음에야 사회주의나 제5공화국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왕초보 시리즈’ 책들은 나름대로 역사적 사건을 쉽게 재구성한다. 음식도 패스트푸드로 가고 있는데 이제는 생각도 ‘패스트’의 옷을 입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이 책들을 한번 죽 읽어보면 지식의 대중화를 이끈다는 느낌은 든다. I-텔레의 니콜라 샤르보노, <르피가로>의 편집장 로랑 기미에가 집필한 <왕초보를 위한 제5공화국>(3)은 소수 정치 기자들만 알고 있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설명해준다. 에피소드라고 하는 방식을 통해 역사를 다룬다. 바로 이 책이 가진 장점이다. 매우 새로운 방식은 아니지만 독서를 즐겁게 해준다. 하지만 저자들은 대통령 중심제나 의회제도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이끌어가지는 않는다.

 

사회주의는 순치된 모습으로
2009년 프랑스 라로셸에서 열린 사회당 여름학교에서 베스트셀러로 평가받은 <왕초보를 위한 사회주의>(Le Socialisme pour les nuls)(4)의 경우를 보자. 이 책은 사회당의 두 지식인 알랭 베르구니우와 드니 르페브르가 공동 집필했다. 우선 이 책을 읽으면 사회당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알 수 있다. 2008년 6월에 채택된 사회당의 선언서가 간추려져 있다. 또한 마르틴 오브리 사회당 대표의 주도로 최근 개정된 이 책은 시장주의를 받아들인 사회당의 변화를 아첨하듯이 지지하고 있다. 한편 드니 르페브르는 한 대학의 사회주의 연구소에서 책임자를 맡아 <사회주의 백과사전> 출간을 이끌어가고 있다.

‘왕초보 시리즈’에서 아쉬운 것은 저자들이 자신의 분야는 잘 알지만 몇 가지 역사적 부분은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민감한 부분은 그냥 넘어가는 점이 아쉽다. 1971년에 사회당이 창설된 에피네 전당대회의 내용이 대표적이다. 책은 에피네 전당대회에 대해 상세히 다루지 않는다. 베르구니우와 르페브르가 집필한 <왕초보를 위한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심도 있는 토론의 싹을 제거한 채 사회주의를 쉽게 알리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주의 이념을 홍보하는 책인 것이다.

2007년부터 약 1만4천 부가 팔려나간 <왕초보를 위한 유럽>(5)은 실비 굴라드의 진심을 알려준다. 시민단체 유럽운동(Mouvement europeen)의 대표이자, 올해 중도파 소수정당인 민주운동(Modem) 소속 유럽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그녀는 평범한 행동파가 아니다. 그녀는 로마노 프로디 유럽위원회 집행위원장의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파리 시앙스포(정치학교) 국제관계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왕초보를 위한 유럽>은 참여를 호소하는 책이며, 적어도 자세히 다룰 만한 가치는 있다. 통합 과정을 활성화하고자 여러 가지 이론과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는데다, 유럽 정치 분야에서 애독서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실비 굴라드는 인격주의 사조와 비순응주의 사조가 기여한 바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1930년대 유럽운동이 처한 운명을 제대로 보지 않고 지나친다. 유럽연합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이같은 사조들과 운동의 덕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왕초보를 위한 유럽>이 눈을 끄는 이유는 미디어에서 차지하는 저자의 위치 때문이다. 실비 굴라드는 ‘브라보 우에스트 프랑스’라는 제목으로 프랑스 일간지 <우에스트 프랑스>에 상을 수여했다. <우에스트 프랑스>의 사설에는 ‘프랑스’라는 단어가 무려 1788번, ‘유럽’이라는 단어가 1787번 사용되었다. 미디어가 유럽 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에스트 프랑스>는 정당과 정파에 관계없이 유럽의회 의원들과 유럽연합의 고위 관료들을 초청해 유럽에 관한 세미나를 연다.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 세미나도 연다. 이런 식으로 하여 유럽식 사고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국수적 유럽중심주의 강조
이런 지배적 입장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자칫 ‘죄인’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심지어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식의 외국인 혐오증에 대한 비난도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가 1957년 1월 18일에 한 발언은 실제로 왜곡되었다. 밀려드는 이탈리아인 이민자들에 대한 단순한 두려움, 로마조약에서 나타날 수 있는 독재적인 면에 대한 비난 정도로 축소되어 실리고 있는 것이다. ‘왕초보 시리즈’는 객관적 연구보다는 설교를 중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드골 장군의 유럽 정책도 단순하게 소개되었다. 가령 “드골 장군은 버터와 버터 살 돈을 요구했다”라는 식으로 단순화된 것이다. 하지만 굴라드는 유럽중심주의와는 또 다른 입장을 보이며 혼란을 준다. 그는 프랑스의 외교 전쟁에 반감을 보이기도 했는데, 2003년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지나치게 반미에 치우쳐 있어 합의를 도출해 협력할 기회를 잃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왕초보를 위한 유럽>은 유럽중심주의라기보다는 서구중심주의를 추구하는 것일까?

‘왕초보 시리즈’는 자칫 지배적인 생각을 전달하는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지배 주류층이 그야말로 왕초보 독자에게 책으로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이야기하면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지배적인 생각이 왕초보에게도 세뇌되어 그야말로 지배적인 중심사상으로 공고해지는 것이다.

글•가엘 브뤼스티에 Gael Brustier
정치학 박사. 자유기고가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등 진보 매체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 <절망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다>(Recherche le peuple desesperement·2009)가 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한불상공회의소 격월간지 <꼬레 아페르> 전속 번역. 번역서로는 <여성의 우월성에 관하여>(2009) 등이 있다.

<각주>
(1) <르피가로>, 2007년 10월 15일 파리.
(2) <르피가로>, 2007년 10월 15일 파리.
(3) 니콜라 샤르보노, 로랑 기미에, <왕초보를 위한 제5공화국>(Editions First·2009).
(4) 알랭 베르구니우·드니 르페브르, <왕초보를 위한 사회주의>(Editions First·2008).
(5) 실비 굴라드, <왕초보를 위한 유럽>(Editions First·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