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에 대한 잘못된 은유
2016-09-01 마크 빌로 외
미국의 작가 수전 손택은 그의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1979)을 통해, 암을 비롯한 중병들을 그와 연관된 많은 부정적 이미지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다. 암과 관련된 담론에는 언제나 전쟁, 반사회성, 광기 등을 떠올리게 하는 은유적 표현들이 사용되곤 한다. 종양의 발달 메커니즘이 점점 밝혀지고 암종학 역시 맞춤의학이 돼가는 오늘날, 암과 관련된 이미지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쓰이고 있는 이미지들은 암에 대한 대중의 이해와 환자의 인식을 왜곡하며, 암의 치료전략 및 보건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비유 중에서도 다음 세 가지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첫 번째, 신체 내 세포와 조직을 통제하는 법칙을 거스르고 장기의 서열 구조를 따르지 않는 ‘소시오패스’ 같은 악성세포가 나타난다는 비유다. 이 세포는 다른 세포들과의 관계를 망가뜨리며, 악성세포의 증식을 막는 신체의 신호를 전부 무시한 채 계속 사라지지 않고 불복종한다. 그리고 신체 내 자원을 독차지하면서 필수영양소에 대해 마치 마약을 찾듯 중독성을 보인다. 결국 악성세포는 면역체계가 인식하지 못하도록 더 이상 신호를 보내지 않고 스스로를 은폐한 채 신체조직을 끊임없이 파괴한다. 두 번째, 이 악성세포를 다른 정상세포들과의 접촉을 모두 끊어버리는 ‘사이코패스’처럼 표현하는 은유다. 심지어 변신에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 역시 악성세포의 본질적 문제점을 보여준다. 마지막 세 번째, 이 세포를 ‘방랑자’이자 ‘영토 확장자’로 그리는 경우다. 악성세포가 모든 경계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다른 조직으로 건너가 새로운 식민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뒷받침하는 특징들은 실제로 우리가 암에 대해 연구하면서 알게 된 암의 특징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 속에서 종양 세포는 범죄자이면서 동시에 정신병자, 마약중독자, 이민자와도 같은 성격을 지닌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결국 그에 따라 나타날 거부반응을 무릅쓰면서까지 과학적 소견의 허구적 배경에 여러 사회적 공포를 압축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신화>(1957)를 통해, 신화란 사회적 사실에서 역사적 내용을 빼내어 그것이 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지도록 하는 언어의 역할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암에 대한 은유 역시 신화나 다름없다. 다만, 이 신화는 자연적인 현상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다른 신화들과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암이 잠재적으로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병인만큼, 이렇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질 법도 하다. 하지만 암은 부자연스러운 발현이 아니다. 병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인체가 조직 대부분이 줄기세포를 통해 재생되는 다세포 동물이기 때문에 발현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암의 내밀한 메커니즘 역시 우리 몸을 진화하는 생명체로 만드는 이러한 특성에서 기인한다.(1) 암세포는 내성적이지 않다. 끊임없이 주변의 미세 환경과 협상하고, 세포증식을 막는 물리적 또는 대사적인 제약에 매우 유연하게 적응한다. 따라서 암세포를 중독증에 걸리거나 무질서하게 확장하는 광기어린 방랑 세포처럼 표현하는 용어들은 부적절한 것이다.
이 세포가 병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고, 죽음에 이르게 할 위험을 지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위험이나 정신병 등과 연관된 이미지를 사용하고, 암 선고나 암 소탕 따위의 도덕적 표현을 사용하는 등 과학적 서술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필연적으로 환자에게까지 번진다. 이런 표현에는 이미 암에 걸린다는 사실을 일종의 잘못, 치욕과 연결하는 의미가 내포돼 있지 않은가? 프랑스에서 암을 흔히들 ‘길고 고통스러운 병’이라고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 아니겠는가?
‘암과의 전쟁’을 선포해야만 할까
이처럼 악성세포를 낯선 침략자나 위험한 인물로 여기는 이미지들을 따르면, 자연스럽게도 군사적 형태의 전면적인 대응을 요하게 되기 마련이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1971년 당시 서명한 국가 암 퇴치법(National Cancer Act) 이후, 그 계보를 이어가듯 여러 보건 관련 글이나 언론 매체들은 암을 몰살해야 할 적군으로 나타내는 수없이 많은 군대식 표현들을 사용해왔다. 이미 ‘암 퇴치 운동’이나 ‘암 치료 무기’, 심지어는 종양만을 골라 파괴한다는 ‘마법의 탄환(Magic bullet)’ 등의 표현들이 널리 쓰이고 있지 않은가? 생물학계와 의학계에서 발전시킨 암과 관련된 개념들이 오히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표현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역으로 의학적 표현이 전쟁으로 넘어가 1차 걸프전 이후에는 ‘외과적 공습’이라는 군대표현이 생겼고, 최근에는 ‘테러조직의 세포’(2), ‘테러의 전이’(3)등의 표현까지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법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4) 우선 전쟁은 적군의 전멸, 또는 최소한 적군의 제압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현재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아마 암의 영향력도 계속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암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사실도 패배로 여겨야 할까? 또한, 암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 적의 무력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환자에게 선제 타격을 집중적으로 날려야 할까? 암으로 변하기 이전 상태의 병변을 모조리 제거해버리는 치료전략은 과잉치료가 될 가능성이 높고, 전립선암의 경우처럼 때로는 심각한 병리적 결과를 낳기도 하는데 말이다.
실제로 적을 섬멸하듯 종양을 파괴해야만 하는 것일까? 임상에 따르면 오히려 반항적인 암세포들을 선별해 치료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악성세포가 화학요법에 적응한다는 점을 고려해 확산을 억제하는 다양한 도식들이 제시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런 호전적인 방식은 여러 치료 매뉴얼 중 단 한 가지 방법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전쟁의 비유를 따르려면, 종양학 연구자들을 마치 암세포를 죽이기 위한 생명파괴적 무기를 만들어내라는 명령을 하달 받은 군사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그럼 과학의 원칙을 따르는 지적 모험, 미지와의 도박, 기존의 이론적 모델에 대한 의문제기 등은 어떻게 되겠는가? 과학자들이 발견에 대한 열망과 공격적 이성의 힘을 버린 채, 신체의 방어에만 헌신하는 공무원이 돼야 한단 말인가?
암을 전쟁으로 비유하는 것은 결국 치료적 관계의 결과에도 실패를 가져다준다. 환자가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암에 맞서 싸우는 것이고 그렇게 맞설 용기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환자는 군인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다. 그 자신과 분리된 참모의 명령을 받는 것도 아니다. 환자가 예후를 두려워하거나, 신체적 고통에 겁을 내거나, 신뢰와 보호, 안심을 열망하거나, 무용지물이 된 치료를 그만두고 싶어 한다고 해도, 누구도 그의 무력감과 항복을 비난할 수는 없다. 또한 자신의 존재 자체나 때로는 자신을 형성하는 모든 가치들까지 뒤흔들어놓는 이 병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암을 낯선 적의 모습으로만 여기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암의 만성적인 특성과 잠재적 재발 가능성에 맞서기 위해서는 전기적(傳記的) 동화의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최근 “암에 대한 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신문기사의 경우처럼,(5) 기존의 군사적 비유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닉슨 전 대통령은 당시 수십 년 내에 암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하고 군사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베트남 전쟁과 의학 및 산업계의 로비 등의 상황 속에서도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결국 내부의 적을 이기기 위해 보건관련 문제에 국가 전체를, 말 그대로 ‘동원’한 셈이다.(6)
암에 대한 은유를 모두 없애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 비유는 암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를 높이고, 환자는 물론 나아가 의료진이 직면하고 있는 ‘암’이라는 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수전 손택은 “어떤 질병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큼 억압적인 일은 없다. 그 의미가 항상 도덕적인 차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연구자, 의료인, 언론인, 정치인들에게는 암에 대한 군사적 비유를 사용하지 않을 책임과, 암을 사회적 공포가 응축된 이방인으로 그리는 표현을 확신시키지 않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글·마크 빌로 Marc Billaud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부장, 리옹암종학연구소 소속
쥘리 앙리 Julie Henry
철학자, 레옹베라르 암퇴치센터 소속
피에르 쉬조베르 Pierre Sujobert
혈액학자, 리옹남부의료센터 소속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학교 불어불문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파괴적 혁신>등이 있다.
(1) Jean-Marie Blanchard, <Le Cancer, une maladie de l’immortalité. Les mécanisme moléculaires de la carcinogenèse(불멸의 병, 암 : 암 형성과정의 분자 메커니즘)>, ISTE Editions, Londres, 2015
(2) <Le Monde>, 2016.3.30.
(3) ‘Nathalie Goulet, sénatrice: “Le terrorisme est un cancer qui se métastase”(나탈리 굴레 의원 “테러는 전이되는 암과 같아”)’, <Europe 1>, 2015.11.1.
(4) Marie-Christine Pouchelle, ‘Postures guerrières de la médecine (의학계의 군사적 자세)’, Guerre et Médecine, Pairs, 2015.2.7.
(5) <Les Echos>, 2015.2.6.
(6) Michel P. Coleman, ‘War on cancer and the influence of the medical-industrial complex’, “Journal of Cancer Policy”, vol.1, no.3-4, Philadelphia, 2013.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