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내 침묵깨기’, 민주주의를 구한다!

2016-09-01     윌리엄 J. 애스토어

현재 미국은 승리가 요원해 보이는, 영겁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라크는 혼란 속에 전쟁의 상처로 신음 중이다. 리비아도 마찬가지다. 시리아는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다. 

15년이 지난 지금, 탈레반이 최근 점령한 지역들을 수복하려는 노력이 계속 실패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거둬들이고 있다는 “진전”은 언제든 원상 복귀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히 입증됐다. IS 조직이 붕괴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다양한 IS의 세력들은 그들의 분신을 만들어 공격을 감행할 획기적이고 무시무시한 방법들을 찾고 있다.
참 이상한 것은, 그러한 안타까운 결과를 낳은 전쟁에 수 조 달러를 쏟아 부었음에도, 미군의 핵심 지도자들이나 거대 안보국가 및 군산복합체(줄여서 ‘복합체’)의 관료들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재임기간 중 발생한 이 끔찍한 상황에 대해, 단호하고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 그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너무나 빤한 일들에 놀랄 만큼 입을 꾹 다물어 왔다. 그러한 집단 침묵은 전쟁벌이기를 좋아하는 미군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전쟁에 목맨 미군 전사들과 전투원들은 자신들이 “언제든 싸울 준비가 돼있다”고 하겠지만, 군 병력들은 쉽게 싸움에 뛰어들지 않는다. 또한 복합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정부 결정을 되돌리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이런 ‘집단 침묵’의 원인이, 돈과 권력을 좋아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전쟁도발로 인한 위기가 불 보듯 환한데도, 특히 군에서 그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이에 관해, 이등병에서 장성에 이르는 군인들이 현 상황에 대해 복잡하고도, 종종 비판적인 심경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왜 그들은 남들 앞에서 비판적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런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대나 안보국가 기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동의하지 않는 정책들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개인적, 정서적, 그리고 제도적 이유들이 한데 얽혀 있는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잘 알고 있는 이유는 군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가진 의구심에 대해 침묵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몸소 체험한 ‘스타워즈’

냉전 말미에 공군 중위로 복무하던 젊은 시절, 나는 스스로 혐오해 마지않는 우주공간의 전장화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당시 미 공군은 높은 고도 상에서 F-15 전투기가 떨어뜨리는 위성공격용 미사일(ASAT)을 테스트할 예정이었다. 그 미사일은 저궤도를 날아 적군의 위성들을 공격하도록 설계됐다. 소련군이 ASAT 능력을 이미 갖췄다는 소문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소련이 능력을 갖추면, 우리는 그 이상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이 신조를 우리는 ‘억지’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스타트렉(Star Trek)>의 고전적인 에피소드들을 접한 이후, 나에게 우주란 ‘마지막 프런티어’이자, 전쟁으로 몸살 앓는 지구와 비할 수 없이 좋은 곳, 무엇이나(평화까지도) 가능한 곳이었다. 따라서 나는 우주의 전장화가 가장 무용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1986년 당시, 나는 샤이엔 산(1)에 있는 우주감시센터에서 테스트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성공했다면 우주를 또 다른 전쟁지로 만들어버렸을 테스트를 위해 말이다.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반발심을 느꼈음에도, 테스트에 강력히 반대하지 못했다는 것이 별로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불만과 의구심을 마음 속 깊이 묻어두었다. 그리고 나는 내 본분을 다 하고 있을 뿐이며,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 행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내린 결정들을 문제 삼을 위치에 있지도 않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모든 결정마다 군인들이 딴죽을 건다면 군대의 통솔과 기강이 해이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명령은 복종하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당시 비록 ‘차가운(Cold)’이라는 형용사가 붙긴 하지만 미국과 소련은 엄연히 전쟁 중이었으므로, 우리의 몫은 왜 그런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대로 실행하는 것, 또는 죽는 것. 둘 중 하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미래 우주에서 벌어질 무력전쟁을 부추기는 행위에 대해 내가 느끼는 우려는 묻어뒀었다. 실제로 나는 당시 ASAT 테스트가 순조롭게 진행돼 내가 일에 대한 성취도가 높은 사람으로 비쳐지기를 바랐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천상 군인인 듯하다.
F-15 ASAT 프로그램은 결국 취소됐지만, 나는 그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었다. 그러한 계급 사회에서 우선순위 임무와 군사적 명령은 도덕성과 비판적 사고를 억제하는 강력한 요소라는 점이다. 애초부터 반대 의견을 공공연히 표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시스템에서, 저항하고 사람들 앞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보다 임무를 수행하고 순응하는 것이 훨씬 쉽고 또 ‘당연한’ 일이다. 결국, “우리는 지원자들이다. 그러니 상황을 받아들여라. 그게 싫으면 떠나라”는 신조를 지닌 군대라는 조직은 그 창설자들의 의도대로 반대 의견을 억제하기 딱 좋은 곳이다. 
계급 체계가 있는 권위적인 조직을 경험해본 사람들에게 그런 교훈은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젠장, 나는 가톨릭 신자로 자랐고 군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조직 내에서 남들과 똑같이 순응해서 행동해야한다는 압박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교회에서는 지혜의 시작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가르친다(적어도 내가 어렸을 때는). 내가 만난 ‘구세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은 항상 그런 두려움을 선동했다. 군대는, 기초 훈련 첫 날부터 잠자코 있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가르친다. ‘불평불만 금지’. ‘투덜대기 금지’. 그리고 ‘네, 교관님’, ‘아니오, 교관님’,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교관님! 이 세 가지로만 답하기’, ‘협력하고 졸업하라’ 등등. 계급과 지위에 상관없이, 그러한 순응적 사고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변화시키기는 쉽지 않다.
이 모든 것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군 병력들은 원래 통제하기 불가능한데다가, 그들에게서 응집력 있는 군부대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는 복종과 규율은 신속한 행동에 필수적이다. 그렇다 해도, 미국에 필요한 것은 복종이 아니라 반대의 의견을 내는 목소리다. 미국 시민들은 물론, 군 내부에서 나오는 반대의 목소리 말이다. 불행히도, 9·11 공격 이후 우리는 군대를 “가장 위대한 국보(최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레온 파네타전 국방 장관이자 CIA국장이 한 말)”라고 칭송하며 숭배해왔다. 실제로 미 정치권에 있어서 군대의 중요성은 매우 커졌는데,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처럼 민간인 군 통수권자를 꿈꾸는 사람들은 그 지위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기 위해 예비역 장군들에게 의존한다(트럼프의 경우 마이클 플린 중장, 힐러리는 존 앨런 장군이 있다). 
펜타곤은 사실상 미국의 국립 성당이 돼버렸다. 펜타곤을 계속 숭배할 것이라면, 적어도 그곳 성직자들에게 최소한의 정직성을 요구해야 한다. 무장화된 지금의 미국에서 제기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그 정직성을 장려할 것인가다. 이를 ‘애국적 이의제기’라 할 수 있겠다. 이의제기라 함은, 계속되는 전쟁의 위험과 참상, 그리고 어떻게 그런 전쟁들이 실패해왔고, 형편없이 망해가고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밝히는 정직한 이야기를 말한다. 우리는 군과 복합체 내부에 내용을 잘 알고 있는 비판론자들과 회의론자들이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계속되는 폭격과 전쟁으로부터 미국이 발을 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반대 의견을 피력할 수 없는 7가지 이유

이를 위해서는 방해요소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예를 들어, 내부 고발자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면서, 제 1차 세계대전 시대의 ‘간첩법’을 그들에게 행사하고 최고 수위의 보안을 자랑하는 교도소에 첼시 매닝(2)을 평생토록 가둬두는 그런 정부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꿔 안보국가 내부의 비판적 사고와 공공연한 의사 표현을 장려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외에도 정부의 “네번째 행정기관”(3) 내에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많이 존재한다.
우선, 군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군대 내에서 이의를 제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하기 어렵다. 수많은 압박감들이 한데 모여 비판적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짓누르는데, 그 종류는 충성심과 애국심부터 출세에 대한 걱정과 처벌에 대한 우려까지 매우 다양하다. 나도 그런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내 경험은 꽤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군에 대한 비판적 생각들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은퇴하고 나서 2년이 지난, 2007년부터였다. 
왜 늦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변명이 아닌 해명을 할 수 있다. 군에 몸담아 본적이 없다면 군 생활이 얼마나 당신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치는지, 얼마나 심신을 지치게 만드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특이하게 표현하자면, 아마도 미국의 진정한 사회주의에 가장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계급에 따라 제공되는 기지 숙소, 정부 소속 의사들, 모두에게 제공되는 ‘사회’ 의료보장제도, 기지 내 학교에서 자녀들에게 제공하는 교육, 기지 내 예배당에서의 종교 활동 등등. 이렇듯 군인들이 영위하고 있는 삶의 배타적인 성격은, 해외의 ‘리틀 아메리카(독일의 람슈타인과 같은 기지들)’로 발령받을 경우 한층 강해진다.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팬이라면, 람슈타인 및 그와 유사한 세계 곳곳의 미군 기지들을 미국 생활방식의 ‘보그 큐브’(4)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무리에 자동적으로 동화되는 그런 장소 말이다. 그런 벌집 같은 생활 속에서 저항은 거의 부질없는 짓이다.
이런 효과는 전쟁의 동족의식에 의해 더욱 강해진다. 늘 강조하는 부대원들의 단결은 포화 속 임무(그리고 동료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모든 것을 소진하면서 극에 달하게 된다. AK-47의 총부리를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사색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도움이 돼서도 안 된다.
그러나 군의 배타성, 부대에 대한 충성, 그리고 전투의 압박은 차치하고, 내가 경험한 기타 7가지 원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원인들이 군대 내부의 반대 의견을 짓누르고 있다.

1. 출세지향주의와 야망: 더 이상 미군은 반항할 가능성이 있는 징집병들로 구성된 조직이 아니라, “지원자들”로 채워져 있다. 과거 징집병들 중에는 군에 회의를 느끼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많은 군인들이 그저 군복무기간을 잘 견디고 빨리 군에서 나가고 싶어 했다. 오늘날의 지원자들은 보통 군 신봉자들이다. 대부분 군대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군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한다든지 너무 솔직히 말을 뱉는다는 평판을 얻으면 빠른 진급과 핵심 임무를 누릴 수 없다. 커리어 지향적인 군인들은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해서 스스로 무덤을 파기 보다는, 차라리 군을 떠나 지금보다 나은 일자리를 꿰차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재빨리 파악한다. 못 믿겠다면, TV에서 보는 미국의 실패한 전쟁의 장군들, 지나치게 많은 훈장을 몸에 달고 있는 그들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2. 은퇴 이후의 출세와 야망: 군 생활을 그만둔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민간 직업 중에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제한적이다. 그러나 방위 산업체에서 해외 군사 컨설턴트나 고문으로 일한다면 군에서 받던 연봉의 두 배, 세 배를 받을 수 있다. 이럴진대, 무엇하러 “까다롭다”는 평판을 얻어서 미래의 돈벌이 기회(기밀취급인가조차 당신과 당신을 고용하려는 회사에는 수만 불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를 날리겠는가?

3. 다양성의 부재: 미군은 다양한 사람들이 혼재하는 미국의 축소판이 아니다. 이미 의심을 품는 자들과 반항자들 대부분을 걸러낸, 선택적으로 샘플링된 조직이다. 물론, 고의적인 조치다. 베트남 전쟁 이후, 군 최고 사령부는 전장 내에 있었던 반대의 목소리가 절대 나오지 않게 하겠노라 단단히 마음먹었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 밖에 다른 계획들과는 다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한번 생각해보라. “전사들”과 비 직업군인들 중 누가 더 다루기 쉽고 입을 닫고 있겠는가? 

4. 묵묵히 일함으로써 시스템 내부로부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믿음: 이를 해롤드 K. 존슨 효과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존슨은 베트남 전쟁 당시 육군 장군으로, 가망이 없는 미군 작전에 대한 항의로 사퇴를 고려했었다. 그러나 계속 4성 장군직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고, 사임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나중에 이 결정을 깊이 후회했다. 사실, 군 시스템은 내부 반대의견을 상쇄하거나, 매장시키거나, 아니면 이를 다른 곳으로 돌려서 군에 해가 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을 오랜 세월에 걸쳐 테스트해왔다.

5. 군대의 지속적인 영웅화: 9/11 공격 이후, 대통령과 기타 정치인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군 지지 발언들은 군대 내부에서 생겨나는 솔직한 의심들을 잠재우는데 일조해왔다. 대통령과 의회가 미군을 최고의 군대, 인간의 해방을 위한 군대, 미국의 가장 위대한 보물이라고 생각할진대, 이에 동의하지 않는 당신은 얼간이 일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과거 미국은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곤 했다. 우리 선조들은 상비군이 민주주의에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고 여겼다. 물론 많은 미국인들이 인디언들에게서 땅을 빼앗는데 혈안이었고, 그 와중에 쿠바와 필리핀 등의 국가에 독립을 약속해놓고 뒤통수를 치긴 했지만, 제 2차 세계 대전까지 미국은 제국주의보다 고립주의를 더 선호했다. 미심쩍다면 지난 세기 초 수십 년을 해병사령관으로 지내고 명예훈장을 두 번이나 받은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의 저서 <전쟁은 사기다(War is a Racket)>의 일독을 권장한다. 현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에서 상비군은 필요악이며, 군비는 문명에 대한 역진세라고 보면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 지출에 대해 철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인류로 비유한 것은 유명하다. 
지금처럼 군대를 끊임없이 칭송하고 가장 위대한 군대라고 치켜 세워주면(무하마드 알리가 자신이 가장 위대한 복서라고 호언장담했을 때, 군대보다 훨씬 많은 대의명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쏟아졌던 격렬한 비난들을 기억하는가?) 군대는 기분이 좋을 수는 있겠지만, 미군과 미국이 그들 자신의 과오를 직시하게 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6. 동료에 대한 존중의 부재: 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내가 은퇴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런 글을 쓰기가 망설여진다(어떤 내용이라도 군을 비판하는 사람은 반 미국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내오는 증오에 찬 메일들을 받는 것은 달가운 경험은 아니다). 비판적 생각을 갖고 있어도 군에 몸담고 있는 동안에는 잠자코 있는 현실이 전혀 놀랍지 않다.

7. 영원히 따라다니는 ‘군인’이라는 꼬리표: 군 기지에 안가본지가 꽤 됐고, 2005년 퇴임식 이후로 유니폼을 입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가끔 사람들은 나를 “중령님”이라고 부른다. 내가 아직 군에 “소속”돼 있다고 점을 상기시켜주는 말이다. 나는 군대를 떠났더라도, 군대는 나를 계속 따라다닌다. 나는 지금도 신속히 차렷 자세를 취할 수 있고, 경례도 할 수 있으며, 장교 선서를 암송할 수도 있다.

군인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장려하자

요약하자면, 나는 전(前) 장교가 아니라 퇴역 장교인 것이다. 내 제복은 지하실에서 먼지가 쌓여가고 있지만, 제복을 입었을 때의 느낌을 나는 아직 잊지 않고 있다. 군인이었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다 그럴 것이다. 그 강력한 소속감, 정서적인 유대감은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가 군인들에게 정직성을 요구하고 더 많은 반대의견을 촉구하고는 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여전히 일말의 망설임이 남아있다. 알아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보너스로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면, 군인들이 반대 의견을 서슴없이 표현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의구심이다. 미국인들이 과연 자신들의 말을 들어 줄지, 들어준다고 해도 이에 공감하고 이해해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군대 내 동료들과의 사적인 자리에서나 지역 내 참전용사협회에서 다른 동료 참전 군인들에게 마음 속 불만을 털어놓는 것과 군 외부 사람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 문제다. 특히 전쟁의 희생과 참상들을 온전히 전달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그것들을 다시 되새기는 것도 종종 트라우마를 유발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국가로서 우리는 참전 군인들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 참담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만든다고 해도 그들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법을 스스로 익혀야 할 것이다.
IS, 러시아, 그 밖의 외부 위협들보다도 계속되는 전쟁이 미국의 민주주의에는 훨씬 더 큰 위협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의 실체를 몸소 익힌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자면, “미국인들만이 미국을 곤경에 처하게 할 수 있다.” 
군대, 그리고 날로 세력이 커지고 있는 안보국가 조직 전체는 단 하나의 목적, 국가의 수호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즉, 헌법과 국민의 권리,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제 의무를 다하는 일이며, 그래야만 칭찬(숭배는 절대 말고)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제 일을 다 하지 못할 경우에는 비판받고, 개혁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보다는 미약하게, 그러나 덜 제국적인 방법으로) 다시 뜯어 고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절차는 우리의 지도자들이 끝나지 않는 전쟁을 계속 벌이고 국방부가 전쟁에 쓸 무기와 돈을 더 요구할 때마다 국민들이 “아멘!”이라고 계속 칭송하는 한, 시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점차 무너져가는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려면 미국인들이 가장 신뢰한다는 기관, 즉 미군 내에 자유를 부여하고, 군인들이 솔직해 지도록 도모할 필요가 있다.(5) 반대의 목소리는 반드시 장려돼야 하고, 반대 의견들은 계속되는 전쟁을 거부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받아야 한다.
틀림없이 일부에서는 군대 내에서 애국적인 반대 의견을 장려하는 것이 오히려 전투능력의 효율성을 약화시키고 국가 안보를 위험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스파르타를 따라가는 것이 현명한 민주주의가 됐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완벽한 보안이라는 것이 언제 가능해질까, 아니 가능하기나 할까?  



글·윌리엄 J. 애스토어 William J. Astore
퇴역 미 공군중령으로, 펜실베니아 공과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힌덴부르그: 독일 군국주의의 아이콘(Hindenburg: Icon of German Militarism)>(2005, 포토맥 출판사)의 저자. <톰 디스패치>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며, <브레이싱 뷰(Bracing View)>에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번역·오정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미국 콜로라도 주의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위치한 산. 과거 미국 우주 사령부가 이곳에 있었다. 
(2) 위키리크스에 미국 군 기밀사항이 포함된 자료를 제공한 내부 고발자.
(3) 입법, 사법, 행정 기관 이외에, 9/11 이후 급부상하고 있는 안보국가를 말하는 것으로, 1947년 제정된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에 의해 창설된 기관들, CIA나 국방부 등을 일컫는다.
(4) 스타트렉의 보그 종족이 타고 다니는 우주선.
(5) 2011년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기관은 미군으로 나타났다. 78%의 미국인들이 미군을 상당히 신뢰한다고 응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