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칠줄 모르는 미 제국주의의 욕망

2008-10-29     에릭 홉스봄 | 역사학자

군사력 앞세운 미 제국의 헤게모니, 세계에 혼란과 야만 키워
영토·연혁·이념·무역 등… 영국 깨친 '제국의 한계' 미국 알지 못해

16세기 스페인과 17세기 네덜란드는 각기 강력한 제국을 구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18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대영제국이, 그 이후는 미국이 각각 세계에 분산된 강력한 자원 기지와 광대한 군사력을 앞세워 국제적 야심을 불태운 글로벌 유일 제국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해군의 패권이 대영제국의 파워라면, 미국의 능력은 폭탄을 이용한 파괴력이었다. 그렇지만 군대의 승리가 결코 한 제국을 영속시킬 수는 없다. 왜냐 하면 미·영 제국의 영속성은 우선적으로 그들 주변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대영제국과 미국은 글로벌화한 경제 틀 안에서만 존재하는 부가적인 혜택을 누렸다. 두 나라 모두 세계 산업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는 우선 막강한 생산 기기를 활용해, '세계의 공장'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1920년대 그리고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세계 산업생산의 약 40%를 차지하게 된다. 오늘날도 여전히 그 수치가 22%와 25%대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그래서 두 나라는 다른 나라들이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모델들이 됐다. 이 두 나라는 국제교역의 흐름을 좌우하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어, 그들의 예산, 재정 그리고 무역 결정이 국제 교역의 흐름의 내용, 규모, 목적지까지도 좌지우지했다. 특히 이 두 나라는 불공평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가공할 만한 영어 사용권의 확장을 통해 그 힘을 과시한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과는 달리, 두 나라 간에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눈에 가장 띄는 부분은 '덩치'다. 대영제국은 대륙이 아닌 섬나라다. 그리고 한 번도 미국식 개념의 국경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이 나라는 로마 시대, 노르망디 정복 이후, 그리고 1554년 마리 튀도르가 스페인 필립 2세와 결혼했을 당시, 잠깐 동안 다양한 유럽 제국에 편입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유럽 제국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 대신 잉여 인구가 생겼을 때는, 해외 이주를 떠나거나 식민지를 건설했고, 자신이 지배한 섬들을 중요한 해외 이민의 터전으로 삼았다. 반대로, 미국은 기본적으로 이민자들을 환영하는 나라였다. 자국의 인구 증가와 거대한 이민의 물결을 한껏 이용해 광활한 공간을 채웠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주요 이민자들이 서유럽 출신들이었다. 해외 집단 이주를 경험하지 못한 유일한 제국이 러시아와 함께 미국이다. 미 제국은 하나로 합치된 국가와 대륙의 일체감을 토대로 확장된 자연스런 결과물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 밀도에 익숙했던 유럽 이민자들에게 미 대륙은 분명 끝없이 넓고, 황량해 보였을 터였다.

게다가 이주 노동자들이 자의든 타의든 전염시킨 질병들 때문에 지역 주민들이 거의 몰살당해 황량하고 삭막한 인상을 한층 더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이 그들에게 영토를 선물했다는 사실이고, 유럽인들이 새로운 경제 시스템과 집약농업을 도입시키며 유랑민들을 쉽게 처리해줬다는 점이다. 그러나 미국 헌법은 '자유가 주는 혜택인 자연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만든 정치 집단에서 인디언들을 노골적으로 배제하였다.     

대영제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달리, 미국은 비슷한 힘을 지닌 국가들이 국제 시스템을 형성하고, 자신도 그 속에 편성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해 본 적 없다. 캐나다를 포함한 북아메리카 대륙 전역이 결국 한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개념도 전통적인 것과는 달랐다. 미국은 하와이를 제외하곤, 앵글로 색슨족이 이미 식민지화 시킨 푸에르토 리코, 쿠바 혹은 태평양 섬들이나 주민들이 많지 않은 지역을 합병하려고 결코 애쓴 적이 없다. 미국의 헤게모니는 자국의 영토와 대륙을 벗어난 영국식의 식민지 제국이나 '코먼 웰스' 형태를 띨 수 없었다. 미국은 자국민을 한 번도 세계의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본 적이 없었다.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한 이래, 미국은 법률적·정치적, 심지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조차 단일한 국가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대신, 미국의 범지구적 파워는 오직 위성국가나 가신국가 체제 속에서만 국경 밖으로 표출될 수 있었다.

 

미, 역사가 없는 '이상주의' 제국

두 나라의 또 다른 차이점이 있다. 한나 아렌트는 "미국은 18세기 유럽 계몽 시대의 희망의  도화선이 된 모든 혁명들보다, 어쩌면 더 오랜 기간 지속된 혁명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만약 미국이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구세주가 되겠다는 확신 속에서 다른 모든 사회보다 월등한 '자유로운' 사회, 그래서 세계의 모델이 되는 제국 건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토크빌은 만약 이런 시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선동적이고 반 엘리트주의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대영제국은 16세기와 17세기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혁명은 불완전했다. 근대성을 지향한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성됐지만, 대지주 가족들이 20세기까지 그 체제를 지배했기 때문에 무척 계급주의적이고 불평등했다. 아일랜드에서 입증된 것처럼, 그러한 구조 속에 제국주의가 완벽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물론 대영제국도 여느 사회보다는 월등하다고 스스로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구세주가 되겠다는 확신이나 외국 국민을 영국 정부의 방식에 걸맞게, 혹은 신교도로 개종시킬 의지조차 없었다. 대영제국은 선교사가 세운 것도 아니고 그들을 위해 세워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영국의 주요 영토였던 인도에서는 선교사들의 활동이 노골적으로 저지당하기도 했다.

11세기에 제정된 덤스데이 이후 잉글랜드 왕국과, 1707년 이후 대영제국은, 각기 강력한 법과 중앙정부 시스템을 갖추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를 구축한 바 있다. 특히 역사적 연혁에 있어 두 나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국에는 그야말로 신화를 따올 만한 역사가 없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고사하고, 1941년 독일 침공에 맞서 국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스탈린이 주저 없이 알렉산드르 네브스키의 추억에 불을 붙였던 소비에트 공화국보다 미국의 역사는 빈약했다. 가장 오래된 조상이라고 해봐야 초기 영국 이주민들이 고작이었다. 청교도들 스스로 인디언들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나섰기 때문에, 나라를 세운 선조들 가운데 원주민들과 노예들은 '국민'에서 배제됐던 것이다.
히스패닉 계열의 서인도 제도 사람들이 잉카 제국이나 아즈텍 제국처럼 사라진 제국에서 영감을 얻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독립 투쟁을 하다 사라진 제국들로부터도 영감을 얻어 낼 수 없었다. 사실 미국은 영국인들을 상대로 치른 혁명 와중에 생긴 나라이기 때문에, 옛 조국이라 할 영국과 딱히 연결할 만한 끈을 찾는다면, 영어라는 언어가 고작이다.

요컨대 미국의 정체성은 대영제국과 한때 공유했던 과거사와는 별개였다. 그보단 자신의 혁명적인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공화국의 제도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이웃과 적을 구분하면서, 자신들을 규정한다. 하지만 남북전쟁을 빼고는 단 한 번도 외부 세력으로부터 위협받은 적이 없는 미국은 지정학적·역사적 측면에서 적을 규정할 수 없으므로, 이데올로기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미국적 삶의 방식을 부정하는 나라들이 적인 셈이다.

 

영 '대외 지향', 미 '내수 지향'

어떤 의미에서든 '제국'은 영국의 경제 발전과 국제적 힘을 구축하는 한 요소였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여느 보통 국가들처럼 그저 그런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대 대륙에 걸 맞는 대국이 되는 것이었다. 바다가 아닌 대륙이 그들 발전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미국은 항상 팽창을 지향했다. 그러나 16세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17세기 네덜란드나 영국이 그랬듯이, 항상 본토를 보잘 것 없는 크기의 국가로 방치한 채 해외 영토 확장에 나섰던 해상 제국의 방식과는 달랐다.

미국은 그보다는 발트 해에서 흑해 그리고 태평양까지 바다를 낀 거대한 평야 지대를 가로 질러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러시아와 훨씬 닮았다. 비록 미국은 제국을 거느리고 있진 않지만, 서반구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지구상에서도 세 번째로 많은 나라다. 이에 반해, 영국은 국제적으로 평균치의 경제력을 지닌 국가였고, 스스로도 그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세계인구의 1/4를 지배할 때조차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국 경제가 대부분의 국제 교역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이 19세기 세계 경제 발전의 핵심 요소였다는 점이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막대한 대외투자의 3/4이 개발도상국에 집중됐다. 게다가 1·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국 수출의 과반수가  영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산업화되자, 영국은 '세계의 공장' 노릇을 그만두었다. 그 대신, 국제 수송망을 진두 지휘했다. 또한 세계를 상대로 협상가와 은행가 역할을 하며, 최초의 자본 수출국이 됐다.
미국 경제는 세계 경제와 이런 관계를 맺어 본적이 한 번도 없다. 다만 세계에서 감히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가장 막강한 산업 국가가 됨으로써, 자국의 거대한 내수 시장만 가지고도 의미심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870년대부터는 테크놀로지와 노동 운동 부문에서의 미국의 비약이 모델로 등장했다. 특히 첫 대중 소비 사회로 거듭난 20세기에 더욱 그랬다. 1·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엄격한 보호무역 기조에서 미국 경제는 자신만의 자본과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눈에 띄는 성장을 했다.

실제로 영국과 달리 미국은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원자재 수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단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잡동사니들과 함께 보잘 것 없는 수준의 자본을 수출했을 뿐이다. 산업 강국의 정상에 있던 1929년에조차, 미국의 수출은 국민총생산의 5% 밖에 되지 못했다. 당시 독일의 수출 비율은 12. 8%, 영국은 13. 3%, 네덜란드는 17. 2%, 캐나다는 15. 8%였다. 1880년대부터 세계 생산량의 29%를 차지하며, 산업 부문에서 확고하게 제왕으로 군림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수출은 대공황이 닥친 1929년 직전에 비로소 영국의 수출 물량을 따라 잡게 된다.

'누구도 세계 주인 못 돼' 깨달아야

실제로 미국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실상 옛 대영제국 권역을 지배하게 된 것은 냉전 시대에 들어서다. 그러나 그 지배력이 얼마나 오래 갈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빅토리아 시대의 대영제국은 당시 유럽과 미국이 급속히 산업화되자, 항상 자본 수출의 선두 자리를 고수해 왔던 영국은 이에 맞서 제국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에 투자를 집중했다. 이에 비한다면, 21세기 미국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더욱이 세계 1차 대전 종전부터 1988년에 이르는 기간을 빼면, 미국은 줄곧 채무국이었다.

그리고 글로벌 화된 세계 속에서, 미국 문화의 지배력이 경제적 지배력의 동의어로 쓰이던 현상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미국이 슈퍼마킷을 창안해 냈지만, 정작 라틴 아메리카와 중국을 정복한 것은 카르푸르다. 영국과의 이런 본질적 차이 탓에, 미 제국은 자신의 경제를 떠받치기 위해 항상 힘자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대영제국은 현대 미국의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이해하는 모델로 간주 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은 자신의 한계, 특히 군대가 지닌 힘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중량급 국력으론 세계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주인이 되겠다는 과대 망상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영국은 그 어떤 나라도 소유하지 못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 할 광활한 제국을 소유했다. 하지만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결코 그렇게 하려는 시도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20세기 중반 해상 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자, 대영제국은 다른 식민지 강국들보다 앞서서 변화를 감지했다. 영국의 '파워'를 좌지우지한 것은 군대의 힘이 아니라, 무역의 힘이었다. 그래서 18세기 미 식민지를 잃고 심각한 위기에 처했지만 잘 견뎌냈던 것처럼, 훨씬 수월하게 제국의 손실에 적응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이러한 교훈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세계 유일의 최강 군사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혼란과 알력 그리고 야만을 가중시키며 세계를 지속적으로 지배하려고 애를 쓸까?

 

글 ㅣ에릭 홉스봄 Eric John Ernest Hobsbawm

영국계 유대인인 에릭 홉스봄(1917~2012)은 세계적인 역사학자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혁명의 시대』 (1962), 『제국의 시대』 (1987), 『극단의 시대』 (1994), 『미완의 시대Interesting Times』 (2002) 등은 20세기 를 다룬 생생한 역사서로서 세계 지성계의 필독서로 자리잡고 있다. 이론과 현실의 조화를 추구했던 그는 이 방인의 입장에서 제국과 권력에는 비판의 칼날을, 노동계급과 제3세계의 삶에는 따스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 다. 1982년 런던 대학 버벡 칼리지에서 정년퇴직한 뒤 숨을 거두기 전까지 고령에도 세계 곳곳을 순회하면서 강의와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