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 음악이 시카고를 빛낼 때

2010-01-06     알렉상드르 피에르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일하고 거주했던 지역 근처인 시카고의 남부 빈민지역이 그가 당선된 이후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흑인이 대부분인 이 지역 주민들은 빈곤과 고립 속에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사회화 과정을 거쳐 왔다. 음악이 때로는 이들을 결속하는 고리가 됐다.

정장을 한 신도 몇 명이 시카고시 사우스사이드 거리 45번지 근처 워배시가에 위치한 삼각형 외관의 성 베드로 그리스도하나님교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소형 아이스크림 트럭이 짤랑짤랑 방울 소리를 내자, 다람쥐들이 나뭇가지와 전깃줄을 타고 급히 땅으로 내려왔다. 만약 이런 풍경이 황량하지 않다면, 시카고는 최고의 북미 도시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1)

시카고의 다른 지역 주민들은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가 아니면 사우스사이드 지역에 갈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모험하는 셈 치고 그곳에 가본다면, 이들은 그 빈민가가 평판만큼 형편없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곳이 식료품 상점이나 약국, 병원이나 은행 그리고 대중교통 수단도 없는, 거의 인적이 드문 장소로 전락했지만, 신기하게도 아직 그곳에는 대부분 상처받은 남녀 실업자 수십만 명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으로 찾아가는 흑인 음악인들
2009년 5월 바로 그 일요일, ‘창조적 음악가 진보 협회’(AACM) 임원들은 워배시가 맞은편에 있는 2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에 새 사무실을 마련하고 모임을 열었다. 플루트 연주자 니콜 미첼, 드럼 연주자 마이크 리드, 가수 사아릭 지야드, 첼로 연주자 토메카 레이드를 비롯해, 협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교장이자 타악기 연주자인 코코 엘리스 등이 최근 AACM 집행부에 새로 합류한 신세대 연주자다. 이들이 첫 번째로 시도한 것은 콘서트와 워크숍을 시카고 전역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이 협회에 몸담고 있는 음악가와 구성원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일을 추진해왔다. 더 이상 가족들이 음악학교로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직접 찾아나선 것이다. 이들은 사우스사이드 지역에 뿌리내리고 뒤엉켜 산다는 것,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이 지역을 개방한다는 것, 그리고 이 지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의 해체 반대 투쟁을 벌인다는 것이 항구적 도전임을 인식하고 있다.

트롬본 연주자이자 민속음악가(2)인 조지 루이스에 따르면, 1965년 AACM을 창단한 멤버들 대부분은 20세기 초반(3) 미국에 대거 이민와 중서부 지역에 정착한 흑인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다. 이들 가정은 음악이 신성한 것이든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든, 혹은 대중적인 것이든 실험적인 것이든, 교육적 가치를 가졌다고 믿었다. 모든 이들이 음악을 집, 거리, 바 그리고 교회에서 듣고 연주했다. 흑인 빈민 공동체 안에서 음악은 직장을 찾아주는 사회적 활로인 동시에 대안적 사회화 방식이었다.

AACM은 조직이 단일화 및 위계화가 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며, 음악에 대한 방법과 연구를 다양화했다.
색소폰 연주자 더글러스 이와트는 “합동연주를 하는 것이 (이들의) 가장 큰 도전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실험이며, 스스로를 개발하고 서로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동적인 합동연주 속에서, 각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타인에게 기여하고, 타인의 기여를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는다”고 평가했다. 타악기 연주자 카힐 엘자바르는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이뤄졌다. 개인과 그룹의 자유를 제한하고, 개인을 다스리고 집단을 쪼개기 위한 정치였다. 우리는 창조와 공유 그리고 책임 같은 전통의 상징이었다. 우리가 전파하는 진중한 쾌락의 이미지에 맞춰 조각한 정치 시스템을 상상해보라”고 했다.

협연은 창조·공유·책임의 정치
1960년대 빈민 공동체가 분열되면서 시카고 사우스사이드 지역의 음악가들은 끔찍한 빈곤과 예술의 표준화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루이스가 이들의 예술을 표준화해 자본주의 대량생산 방식으로 음반을 찍어내며 하위 공연산업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루이스는 분업 작업을 심화시켰다. 특히 그는 그룹 리더와 단원의 분업을 장려하는 것을 비롯해 즉흥 재즈 연주회 때 단원들 간에 헛된 승부욕 때문에 생기는 경쟁 연주를 못하게 말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단원 간의 이런 비공식적 즉흥연주가 점점 더 경쟁의 향연 모델로, 그리고 바람직한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1965년 AACM 창립 당시, 일부 음악가들은 오히려 분업보다는 자신들의 사회음악 활동의 특징인 협동관계를 심화해 시장에 대응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들은 앤더슨이 운영하는 ‘벨벳 라운지’에서 표현과 개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독창적 음악을 만들어내며 음반 제작과 배포 수단을 장악하기 위해 다각적인 시도를 했다. 이를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도 AACM의 무명 단원들이 세운 전략 중 하나가 모든 형태의 보조금 거부였다. 이들은 오랜 기간 보조금을 거부했기 때문에, 직접 여러 현장에서 뛰며 고통을 분담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지역(1977년 AACM의 제2막을 시작하며 시카고 및 중서부 그리고 뉴욕) 및 국가(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국제(서방과 그 밖의 세계) 공연을 개최했다. 엘자바르는 “우리는 다양한 시각, 즉 다양한 문화 교류에 대한 인식을 터득하는 동시에 세계에 우리를 던져 다른 현실과 접촉하도록 훈련받았다”고 했다. 색소폰 연주자 어니스트 카비어 도킨스는 “무엇보다도 사업 능력이 중요하다. 따라서 예술과 경제활동을 성공시키려면 다각적 접촉과 제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의 운명을 쥐고 있는 지금, 이런 전략은 과연 어떻게 될까? 실용주의 노선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이와트는 “우리는 오바마 프로그램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지만, 현재로선 자유의 아이디어가 그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대규모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노예 시대부터 줄곧 그랬던 것처럼, 필요하다면 ‘시끄러운 광신도’(holy rollers)(4)와 ‘재수 없는 것들’(hoodoo)(5)의 후손이 일으키는 경기(驚氣)를 통해서라도 자유의 아이디어가 최대한 실현되는 방향으로 발전을 지속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시카고 출신 오바마에 거는 기대
비록 오바마가 시카고 시절 보안이 철저한 하이드파크 지역에 거주하면서 자식들을 사립 명문 시카고대 랩스쿨에 등록시키거나 사회복지사 행세를 했지만, 음악가들이 볼 때 그것은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도시 중 한 곳인 시카고(6)에서 자신의 정치 경력, 즉 래퍼들의 길거리에서 싹튼 신뢰성에 상응하는 정치적 신뢰성 확보가 목적이었다. 색소폰 연주자 데이비드 보이킨은 “시대는 흘렀어도 흑인한테 변한 것은 없다. 특히 흑인 음악가들을 대하는 시각은 변한 것이 없다. 우리는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유럽인이 노예무역을 시작한 이래, 줄곧 사회·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 우리 문화는 때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때로는 매력적이기까지 한 억압받는 민중의 문화다”라고 평가했다. 대다수 흑인 음악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본업과 연관이 있든 없든 간에 의무적으로 부업을 하거나 혹은 유럽 무대에 진출했을 때면 원치 않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창조적 흑인음악은 기적의 무기”
이런 활동 속에서 AACM은 꾸준히 자신들의 작품과 가사를 구상하며, 음악을 문화 교류의 수단이나 풍습의 가치처럼 여겼다. 언젠가 존 세노이 잭슨이 AACM 일원의 절반은 창작음악 활동에, 나머지 절반은 사회계몽 활동에 몸을 바치고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도킨스도 미국 뉴저지주 북동부 앵글우드 지역에 여러 해 머물며 신세대 음악가를 주축으로 그룹을 결성해 파리 외곽의 클리시수부아 고등학교나 혹은 요한네스버그 외곽에 있는 색소폰 연주자 짐 응카와나의 사회주의 생활공동체와 함께 다양한 문화 교류 프로그램을 도입한 적이 있다.

도킨스는 엘자바르가 ‘한밤의 음악’이라는 단체의 초청을 받아 10여 년 전부터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주에 있는 학교와 보르도음악원에서 펼치고 있는 프로젝트에도 참가했다. 그는 “지역이 주도한 엔터테인먼트 사업 덕분에 무명의 ‘시카고의 사우스사이드’ 음악가 그룹을 국제적 그룹으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엘자바르는 정보와 마인드컨트롤 전쟁이 치열한 지금, 창조적 음악은 비판적 사고와 창의력을 결합하는 법을 일러주는 “기적의 무기”가 된다고 했다.

많은 AACM 일원들은 조만간 자신들의 학교를 세울 생각으로 학교 문화 교류 프로젝트에 개입하고 있다. 아프리카인과 라틴아메리카인이 뒤엉켜 거주하는 지역의 J. N. 소프(Thorp)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니콜 미첼이 그런 경우다.

현재·미래 아우르는 사회적 실험
니콜 미첼은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10살 남짓의 아이들을 교실에 모아놓고 탕부랭(프로방스 지방의 가늘고 긴 북)을 치며 음악을 가르친다. 그녀가 북을 치며 부르는 노래에 아이들도 이제 친숙해졌다. 그녀는 장단을 맞추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 타악기를 나눠준다. “만약 너희들이 음악에 집중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장단을 맞출 방법을 찾는다면, 내가 악기를 주겠다”고 하자 아이들은 손을 들었고, 나눠준 악기로 장단을 맞추자 리듬도 다양해졌다. 노래 가사가 책임감을 강조하는 것도 있지만, 음악 자체가 교훈이 된다. 이들은 호소와 화답, 화음 및 이음성(異音性)과 다음성(多音性) 그리고 가속과 완속 등의 음악 체계를 통해, 사람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성찰·참여·공유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미첼이나 드럼 연주자 하미드 드레이크 같은 음악가들이 며칠 간격으로 ‘불량 아트’(Rogue  art) 레이블 음반 두 장을 녹음하기 위해 평판이 나은 시카고 북부 지역에 있는 녹음실을 찾은 것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다. 불량 아트는 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일부 국가를 ‘불량 국가’(Rogue states)라 지칭하며 훈계한 데서 착안했다. 음악 프로듀서 미셸 도르봉은 “오늘날 경제적 검열도 정치적 검열만큼 효과적일 수 있다는 의미로 보면, 소외받고 쇠퇴한 예술 형태들이 존재한다. 점점 더 경제적 판단이 음반의 품질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싸게 잘 팔리는 음반은 당연히 ‘멋진’ 음반이라는 소리를 듣고, 잘 팔리지 않거나 아예 팔리지 않는 음반은 좋지 않다는 ‘의심’을 산다. 재즈 음악은 결코 어떤 시스템에 통합되거나, 그 어떤 권력에 추파를 던진 전력이 없다. ‘단순히’ 자신들이 누구인지 표현하려던 개인이 만든 지난 세기의 중요한 예술혁명 중 하나가 재즈다. 불량 아트를 주제로 제작된 음반들은 예술이 마치 권력의 시녀처럼 이용되는 폐쇄된 보수적 공간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오늘날의 재즈 속에 살아 숨 쉬는 것을 옹호하고 있다”고 했다.

드럼 연주자는 멜로디와 리듬 구조를 조정할 수 있다. 그는 조정한 멜로디와 리듬 구조를 그룹의 각 구성원에게 제공해 연주뿐 아니라 연주 속에 담긴 정보를 변형할 수 있게 한다. 그는 독주·듀엣·합주 등 즉흥연주를 가능케 하며, 함께하는 음악 지도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다. 그는 시차를 두고 작업을 지속할 수 있다. 요컨대 그가 음향 담당이나 프로듀서들과 의견을 조율해 음반의 일부를 따로 녹음한 뒤, 합성과 혼성을 통해 음악에 새로운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카고 음악의 형태와 구조에 내포된 창조성과 공동 책임감은 음악 차원의 실험을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아우르는 사회적 실험으로 만들고 있다.

글•알렉상드르 피에르퐁 Alexandre Pierrepont
민속학자. 주요 저서로 <재즈의 장>(Le Champ jazzistique·2002) 등이 있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1995년 2월과 2003년 11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글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시각’과 ‘미국의 초콜릿 도시, 바닐라 위성도시’ 참조.
(2) ‘A Power Stronger Than Itself. The AACM and American Experimental Music’, <시카고대 프레스>, 2008년 참조.
(3) Nicholas Lemann, <The Promised Land: The Great Black Migration and How It Changed America>, Vintage Books, 미국, 1992.
(4) 신도들이 오순절에 성소를 찾아 땅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 행위.
(5) 아프리카에서 도입된 신앙심과 관습, 관행이 유럽이나 쿠바에서 도입된 것들과 섞이고 인도의 생활 풍습과도 통합됐다.
(6) 1994년 4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세르주 알리미의 글 ‘시카고 대학, 잘 보호된 작은 천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