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를 선뜻 지지 못하는 이유

2016-09-01     존 R. 맥아더

 

2016년 5월 24일자 <뉴욕타임스> 사설에서 보수 성향 논평가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왜 힐러리 클린턴은 이토록 인기가 없을까?”라며 궁금해 했다. 그는 그 해답을 클린턴의 정치활동 이력에서 찾는 대신, 그의 심리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힐러리 클린턴은 어떤 것에 즐거워하는지, 누가 말해볼 수 있을까?”


전직 퍼스트레이디 힐러리 클린턴이 좀처럼 사람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기질 때문이라고 브룩스는 진단한다. 항상 자신의 커리어를 우선시하는 힐러리 클린턴은 삶의 즐거움을 모를 것이라는 주장이다. “클린턴이 인기가 없는 것은, 일중독자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은 일에 빠져있다 보니, 친밀감과 연약함에 가치를 두는 소셜네트워크 시대의 풍속과 괴리를 보인다”고 말한다. 친 공화당 성향을 가진 논객이 민주당 대선주자에게 이처럼 관대한 진단을 내렸다는 게 놀라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처럼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기이한 동맹이 등장하는 것은, ‘도날드 트럼프만은 안 된다’는 인식이 그만큼 강하다는 반증이다.
브룩스의 글을 읽다보면 마치 힐러리 클린턴이 이제 막 정계에 입문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미국 대통령 영부인에서 시작해 상원의원, 국무장관까지 지낸 인물인데 말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고, 골드만삭스 은행 직원들 앞에서 세 번의 연설을 하면서 매번 22만5천 달러의 강연료를 챙겼으며, 자유무역협정들을 한결같이 찬성했고, 리비아 국가수반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 전복에 힘을 보탰다는 사실을 잊었단 말인가? 게다가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재임하던 당시, 클린턴 일가가 운영하는 일종의 다국적 자선기관인 클린턴재단과 이해관계 충돌도 있지 않았던가? 2015년 10월 18일자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클린턴재단 임원들은 클린턴 국무장관을 통해 치열한 로비활동을 벌였고, 연방정부의 르완다 에이즈 퇴치 예산을 자신들의 교육비로 전용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월스트리트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교두보가 되는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선거운동이나 재단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기도 한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도 2009년 클린턴재단에 10만 달러가 넘는 기부금을 낸 바 있다. 사실 백만장자 트럼프는, 2005년 1월 자신의 세 번째 결혼식에 클린턴 부부를 초대할 정도로 오랫동안 그들에게 인정 넘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예식이 열린 교회에서 '빌과 힐러리'는 첫 번째 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만면에 미소를 띄운 모습을 보건대, 그들 부부는 그 자리에서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 힐러리 클린턴은 바로 이런 곳에서 즐거움을 누린다.
 
 

힐러리를 선택한다면, 
‘클린턴 부부’를 선택하는 것

오는 11월, 힐러리 클린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곧 뗄래야 뗄 수 없는 두 사람, 서로 가장 가까운 조언자 역할을 하는 부부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아도 힐러리 클린턴은 이미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밝혔다. 자신이 당선될 경우 경제정책은 남편이 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2016년 5월 15일 켄터키 주 선거유세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빌 클린턴이 경제를 살리는 임무를 맡을 것이다. 그는 그 방법에 대해 잘 안다”고 말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자신이 아이들의 삶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미지를 주고 싶어 한다. 이러한 바람은 30여 년 전, 남편이 미국 남부 아칸소 주지사로 재임하던 시기에 생겨났다고 한다. 그는 ‘베풀 줄 아는 여성’이라는 신화를 구축할 희망으로 ‘어린이보호기금’ 같은 자선단체들의 활동에 동참했다. 하지만 정작 이 시기에 그가 시간을 쏟아 부은 일은 따로 있었다. 그는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로스 법률회사에서 특허 및 지적재산권 전문변호사로 일했다. 아칸소 주의 정경유착을 증명해보인 이 로펌의 고객 중 월마트가 있었다. 아칸소 벤톤빌에 본사를 둔, 세계 각국에 진출한 이 대형마켓 체인은 노조를 미워하며, 노동착취 국가에서 저가로 생산된 제품을 사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1)
힐러리 클린턴은 변호사 활동 덕분에 월마트의 사외이사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재직하면서 매년 1만 8천 달러(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3만 1천 달러)의 보수를 받았다. 예의바른 클린턴은 월마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사안은 공개적인 언급을 꺼렸다. 특히 월마트의 임금감축정책에 관해 함구했다. 현재 월마트 계산원의 연간 평균소득은 1만 9,427달러로, 자녀들을 부양하기 여전히 힘든 수준이다. 작가 폴 서룩스는 2015년 아칸소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 “짐바부웨의 마을처럼 버려지고 포위당한 도시들을 봤다”고 말했다.(2) 그는 또한 클린턴재단이 ‘아프리카 코끼리 살리기’ 같은 활동을 주요 프로그램으로 삼아 적극 추진하는 반면, 정작 빌 클린턴의 고향인 아칸소 주의 흑인 빈민 가정에는 무관심하다고 꼬집었다.   
재임 1기 초반부터 빌 클린턴 대통령은 당시 대형 기업노조에 지나치게 의존적이던 선거자금 모금방식을 개선하는 데 골몰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민주당을 우파친화적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그는 그 일환으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공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데, 다국적기업들은 이를 환영했으나 민주당 유권자들은 반발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NAFTA에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1992년 9월 29일 빌 클린턴 대통령은 버지니아 주 알링턴 쉐라톤 호텔에서 열린 회동에서 전임 조지 W. H. 부시 대통령이 협상한 NAFTA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중요한 자리에도 힐러리 클린턴이 함께했다. 이후 힐러리 클린턴은 반대하는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전략 구상에도 동참했다. 클린턴 행정부에 몸담았던 토마스 나이즈는 “어떤 의원을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 결정한 후, 한 명씩 공략하는 일을 했다”고 훗날 밝혔다.(3) 1993년 11월, 미국 하원의 공화당 2인자였던 뉴트 깅리치의 지지에 힘입어 NAFTA는 비준됐다. 1996년 3월 6일 힐러리 클린턴은 “NAFTA가 그 효율성을 입증해보였다”며 만족스럽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자유무역정책의 성공으로 의기양양해진 빌 클린턴은 1930년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정책 추진 당시 마련된 미국 복지의 핵심 원칙들도 점차 손보기 시작했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후 하원의장에 선출된 공화당의 뉴트 깅리치가 이번에도 도움이 됐다. 클린턴 대통령은 1천1백만 이상의 빈민 가정에 지원을 끊는 내용을 담은 공공복지 개혁안을 밀어붙였다. 힐러리 클린턴이 아끼는 어린이보호기금 창설자의 남편인 피터 에델만은 이에 항의했고, 기획평가 차관보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는 1997년 3월 시사월간지 <디애틀랜틱>에서 “이러한 법은 노동을 장려하는 게 아니라, 수백만 명의 빈곤 아동들에게 피해를 끼칠 것”이라고 했다. 흑인 및 라틴계를 중심으로 많은 아이들이 자기 남편의 정책 때문에 피해를 보는데도, 이번에도 역시 힐러리 클린턴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몇 년 후, 클린턴 대통령은 이번에도 공화당 ‘정적’들의 협력에 힘입어 월스트리트 규제완화를 단행했다. 1999년 11월 그는 소액예금자들의 돈을 이용한 투기를 억제하고자 1933년 제정된 글래스-스티걸법을 폐지했다. 오늘날 공화당의 존 맥케인을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이 이 법을 되살릴 것을 제안하고 있으나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이를 원치 않는다. 그의 경제 고문인 앨런 블라인더는 2015년 7월 13일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글래스-스티걸법의 부활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힐러리 클린턴의 입장 전환, 그리고 해명

힐러리 클린턴이 본격적으로 정치 이력을 쌓기 시작한 것은 2000년이다. 남편과 민주당 내 강력한 지원군들이 제공한 낙하산 덕분에 살아본 적도 없는 뉴욕 주에서 상원의원 선거 후보로 출마한 것이다. 그리고는 당선되자마자 부시 행정부와 유난히 죽이 잘 맞는 모습을 보였다. 힐러리 클린턴은 2002년 10월 10일 상원 연설에서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며, 사담 후세인의 이른바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백악관의 온갖 거짓말들을 고스란히 읊었다.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선제전쟁'이라고 주장하며, 1999년 남편 클린턴 대통령이 결정한 세르비아 폭격과 동일 선상에 놓았다. 
힐러리 클린턴에 의하면, 세르비아 폭격은 “1백만 명이 넘는 코소보 거주 알바니아인들이, 인종 청소와 박해를 중단하게 하려는 숭고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그는 또한 “8년 동안 백악관에서 남편이 우리나라가 당면한 도전과제들에 맞서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이, 아마도 내 결정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고 덧붙였다. 그 발언은 그다지 페미니스트적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트위터 계정에서 자신을 ‘아내, 엄마, 할머니’라고 소개하는 한 여성에게서 나온 말이니,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 
힐러리 클린턴이 2002년 상원에서 한 연설에서는 진부한 표현들이 돋보였다. 그에게 왜 그런 연설문을 썼냐고 탓할 필요는 없다. 힐러리는 관례적으로 대필 작가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명을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영부인 시절, “아이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다룬 저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4)를 발간했다. 바바라 페인만 토드 교수가 “내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다”며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과연 힐러리 클린턴이 자신의 회고록(5)을 직접 집필했는지도 불확실하다. 국무장관 재직 기간을 회상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도서전담팀’까지 꾸렸지만, 이 팀에 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6)  
어쨌든 간에 그가 미국 외교수장으로 재임한 4년 동안의 이야기는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2011년 리비아 반군이 세력을 확대하는 동안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무척이나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2011년 3월 11일 미 의회의 한 위원회에 출석해, “미국이 국제사회의 승인 없이 독자적인 행동을 취한다면, 이 나라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얼마 후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내게 연신 군사적 개입을 제안했다. 그는 역동적이고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으로 행동의 중심에 서기를 좋아한다. 그는 프랑스 지식인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영향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독재자의 폭정 아래서 리비아 국민이 겪고 있는 고초에 깊이 공감했다.”
이 둘의 주장에 매료된 힐러리 클린턴은 “인도주의적 재앙”을 피하기 위해 개입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과 손잡고 미국을 새로운 전쟁으로 내몰았다. 헌법이 요구하는 의회의 승인 절차도 생략한 채 말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다행히도 순조롭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72시간 만에 (카다피 정권의) 대공방어망은 무너졌고 벵가지 시내가 파괴되기 직전 주민들은 구출됐다.” 책의 나머지 부분도 같은 얘기다.
힐러리 클린턴은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공략하는 데 자신의 친우파적 이미지가 걸림돌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민주당 경선에 경쟁자로 나선 사회주의자 샌더스가 일으킨 돌풍에 자극받아 좌파적 색채를 보완한 클린턴은, 최근 다양한 진보주의 정책들을 내놓았다. 부채비율이 지나친 은행들을 과세하거나, 최저시급을 12달러로 끌어올린다거나, 부모의 소득에 따라 자녀의 대학 등록금에 차등을 두는 방안 등이 대표적이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자유무역에 대한 입장 반전이다. 2012년 11월 15일 그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자유롭고 투명하며, 공정한 시장 조성을 위한 최고의 자유무역협정 모델”이라며 감탄했다. 그러나 3년 후 태도를 바꿨다. TPP에 대한 트럼프와 샌더스의 비판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듯하자, 힐러리 클린턴은 2015년 10월 8일, “TPP는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자면 지지할 수가 없다. 내가 설정한 높은 수준의 요구를 이 협정이 충족시킬 것 같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TPP 반대를 자신의 대선 공약으로 삼기는 거부하고 있다.

“이토록 극단적 선택지를 
제시한 선거는 처음”

하지만 적어도 힐러리 클린턴은 ‘급진 무슬림’과 ‘이민자’들에 대해 과격한 언사를 쏟아내는 트럼프처럼, 종잡을 수 없는 후보는 아니다. 그의 침착함과 중용을 좋아하는 공화당원들도 있다. 2012년 대선 보수진영 후보 윌러드 밋 롬니의 공동 자금담당책을 맡았던 휴렛패커드 CEO 멕 휘트먼도 클린턴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역시 롬니의 전직 자문이었던 로버트 케이건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부시 가문도 이번 선거는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미디어 권력집단도 힐러리 클린턴을 야만에 저항하는 마지막 보루처럼 소개하며 확고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지금껏 이토록 극단적인 선택지를 제시한 전국적 선거가 있었던가?” 미국 주간지 <더뉴요커> 2016년 6월 20일자에서 편집장 데이비드 렘닉이 던진 질문이다. 그는 “가장 위험하고 가장 예측 불가능한 후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품위든 뭐든 그 어떤 한계선도 기꺼이 무시할 선동가를 이기기 위해 클린턴은 힘과 결의를 다해 선거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주장은 2002년 프랑스 대선에서 맞붙은 자크 시라크와 장마리 르펜의 대결을 떠올린다. 당시 프랑스 좌파는 나라를 ‘파시스트적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파 후보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자크 시라크는 대외정책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힐러리 클린턴보다 한층 진보주의적이었다. 이번 미국 대선은 차라리 앙겔라 메르켈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대결로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미국 좌파는 ‘메르켈’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글·존 R. 맥아더 John R. MacArthur
<하퍼스 매거진> 발행인 대표. 저서 <오바마라는 허상. 어느 미국 자유주의 지식인의 기록>, Les Arènes, Paris, 2012.

번역·최서연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21세기의 다국적 기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1월 특집기사 참조.
(2) Paul Theroux, 'The hypocrisy of “helping” the poor', <The New York Times>, 2015년 10월 2일.
(3) John R. MacArthur, <The Selling of Free Trade : NAFTA, Washington and the Subversion of American Democracy>, Hill and Wang, New York, 2000 인용.
(4) Hillary Rodham Clinton, <It Takes a Village : And Other Lessons Children Teach Us>, Simon & Schuster, New York, 1996.
(5) Hillary Rodham Clinton, <Le Temps des décisions. Mémoires.(결단의 시간. 회고록) 2008-2013>, Fayard, Paris, 2014.
(6) Paul Farhi, 'Who wrote that political memoir ? No, who actually wrote it ?', <The Washington Post>, 2014년 6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