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발칸주의
2016-09-01 로랑 게스렝
서구의 시선은 ‘움마(Omma, 국적·혈연·정치권력과 무관한 전체 이슬람 공동체)’에서 실천되고 있는 이슬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슬람을 유럽 남동부에서 찾으려는 지속적인 의지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이런 시도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알바니아 민족주의 설화 속에서 ‘벡타시즘’(15면 어휘해설 참조)이 수행하는 중심역할에서 이런 시도가 작동되고 있음을 이미 볼 수 있었다. 벡타시즘과 수니파 이슬람을 분리하려는 경향은, 적어도 1967년 모든 종교의 실천이 금지되기까지, 엔버 호자(Enver Hoxha)의 자급자족적이고 독재적인 공산주의에 의해 또 한 번 강조됐다. 벡타시즘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지배하는 터키에서 수피파가 금지된 후인 1927년 철저히 중앙집권화 된 벡타시스트 전(全)세계 지도부가 티라나에 자리를 잡으면서 일종의 민족 종교가 됐다.(1) 사실상 벡타시스트 종파는 알바니아 민족을 표명하는 중요한 중계자였다.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부터 이슬람 공동체와 완벽히 분리된 벡타시스트 종파의 위계질서를 재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실패한다. 2011년의 설문조사에서 오직 1.9%의 알바니아인들만 자신이 벡타시스트 종파라고 선언했다.
이슬람 수도승들과 수피파 신도들은 자주 관용의 모델로 간주되지만, 발칸에서 거대 종파들의 조직과 위광은 오스만터키제국의 군대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근위보병의 엘리트집단 성원들이 전통적으로 벡타시스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종파들은, 특히 강력했던 나크시반디(Naqshbandi) 종파는, 1920년대에 아타튀르크가 옹호한 근대적이고 세속적인 터키에 반대하며 칼리프직 유지 원칙을 옹호한 최후의 종파들이었다. 사실 수피파 이슬람은 항상 두 개의 얼굴을 가졌었다. 하나는 신비주의적 얼굴로 이단적이고 자발적인 반항아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군사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얼굴로 아프리카나 터키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얼굴이다. 나크시반디 종파가 전쟁이 끝난 후부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급속히 부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크시반디 종파는 군부 출신 간부들과 예전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만든 민주주의 행동당(SDA) 간부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즈바토비카(Ajvatovica) 같은(2) 수피파의 성지순례는 애국적인 기념행사로 여겨지고, 이런 기도 장소에 자주 가는 것이 정당이나 행정부에서 승진하는데 유리하다.
1990년대에 발칸의 이슬람을 특화시키려는 의지가 아주 구체적인 정치적 요구와 맞아 떨어졌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분쟁은 알제리의 내전과 동시대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세상을 해독해야할 복잡한 현실의 총체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는 인과관계의 연속으로 간주한 상당수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있어, 좋은 이슬람과 나쁜 이슬람을 대립시킬 수 있는 적절한 기회였다. 사람들은 (마치 모든 터키인들이 결코 라키(Raki, 중동산 독주) 한 잔도 마시지 않는 것처럼) 전통적인 무슬림인 보스니아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황홀해하기까지 했다. 부분적으로는 ‘무슬림’의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 신앙을 혼동했던 사람들은 특히 자신들의 종교를 실천하지 않았던 무슬림들을 ‘근대적’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세례 받은 가톨릭 프랑스인들이 금요일마다 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 놀라야만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 하에서 시행된 세속화 과정은, 본래 이슬람 주민들에 의해 실천되고 경험된 이슬람의 존재와, 사회주의 국가의 분열과 전쟁에 의해 촉발됐던 종교적 실천의 부흥을 이해할 수 없게 방해했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자기 종교의 의례적 규율에서 해방된 무슬림의 원형이 됐고, 이슬람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주의에 사람들이 대치시킬 수 있는 모델로 간주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십 년 동안 수많은 발칸의 젊은 무슬림들이 세계화된 지하드 진영에 참여했다. 그 수가 시리아에서만 800명이 넘는다.(3)
이런 식의 이념 구분은 발칸 자체에 대한 서구 시선의 불확실성과 연관되어 있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기본 노선을 따르는 불가리아 인류학자 마리야 토도로바(Marija Todorova)는 ‘발칸주의’라는(4) 개념을 만들었다. 유럽에 의해 상상된 동양은, 서구의 환상을 투사하는데 사용되는 유토피아이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 상상의 차원’일 것이다. 반면 발칸은, 정확히 서구와 동양 사이의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조물주로 생각하는 서구가 2세기 전부터 통제하고 그 형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현실의 차원에 속할 것이다. 1999년 코소보 전쟁이 끝난 후, 유럽 통합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대두된 ‘발칸의 유럽화’라는 사고는(5) 이런 기나긴 전통의 최근 변형에 불과하다. 그런 사고는 유럽이 발칸에 접근함으로써 발칸 사회를 변형시키고, 또 발칸 사회로 하여금 잘못된 통치, 부패, 독재 성향 혹은 무질서 경향 같이 발칸의 문화적인 특질들로 정의된 것들을 포기하게 만들 것이라고 가정한다. 발칸에서 이스마일 카다레(Ismaïl Kadaré) 같은 작가는(6) 훨씬 더 멀리 나아간다. 카다레의 입장에서는 알바니아 사람들이 이슬람 신앙을 내던져버리고, 유럽적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조상들의 가톨릭으로 모두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도식적 전망에서는 비잔틴 제국의 유산인 그리스정교처럼 이슬람이 부정적 이타성의 동질적 표지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발칸에서 고려해야만 하는 하나의 중요 요인이다. 그러나 이슬람 혐오증이 관통하는 서구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지위를 이슬람에게 인정해야 하는가? ‘유럽의 이슬람’이라는 사고가 이런 물음에 정확히 응답해 준다. 여하튼 ‘유럽의’ 발칸에서 ‘모범적인’ 이슬람을 상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칸에서 체험되고 실천되는 이슬람의 현실은 급진성과 온건성을 대립시키는 단순화된 이항대립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발칸의 이슬람은, 자신의 특수한 역사를 쌓아가면서, 이슬람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모순과 긴장을 늘 겪게 될 것이다.
글·장아르노 데랑스Jean-Arnault Dérens
로랑 게스렝 Laurent Geslin
번역·고광식
(1) 나탈리 클레이에(Nathalie Clayer),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기원. 유럽에서 구성원 대다수가 무슬림인 국가의 탄생>, 카르탈라, 2006년.
(2) 문헌상으로 15세기부터 시작된 이 성지순례는 공산주의 권력들에 의해 금지됐다. 전쟁이 끝난 후부터, 이 성지 순례는 프루삭(Prusac) 마을에 수천 명의 순례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로돌포 토에(Rodolfo Toè), “이슬람: 아즈바토비카,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가장 큰 모임”, <발칸통신>, 2011년 7월 8일.
(3) “외부 전사들: 시리아와 이라크로 들어오는 외부 전사들에 대한 최근 평가”, 수판그룹(The Soufan Group), 뉴욕, 2015년 12월.
(4) 마리야 토도로바(Marija Todorova), <발칸에 대한 상상>, EHESS 출판사, 파리, 2011년.
(5) 마리잔느 칼릭(Marie-Jeanne Calic), “‘또 다른 유럽’을 유럽화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9년 7월.
(6) 이스마일 카다레(Ismaïl Kadaré), <무질서, 자기 자신과 직면하게 된 알바니아>, 파이아드, 파리,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