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모래성을 쌓았나

2016-09-01     피터 할링

미국과 미 동맹국들이 군사적 침공을 강행한지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라크는 혼란과 폭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국가조직(IS)이 영토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라크 정부와 정치인들은 무능함을 드러내며 국가 통일과 그대로 방치된 국민들의 안전 보장에 손을 놓고 있다.  

이라크의 전력망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럴듯한 수사를 이용하는 것이 제격이다. 풍부한 석유자원을 가졌고 큰 강줄기들이 영토를 관통하여 흐르며 (마치 에덴동산처럼) 햇볕마저 잘 드는 나라에서, 인간 활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에너지 접근성 문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문제여야 할 것이다.(1) 그러나 이라크의 전력 공급 상황을 보면 이라크 정치 체제의 무능함과 악순환이 잘 드러나고 있다. 
먼저, 이라크 정부는 낮 시간에 한정해 아주 짧은 시간만 전력을 공급한다. 시아파가 압도적으로 많은 지역이라고 해서 상황이 나은 것은 아니다. 이런 기능적 문제의 원인이 전력 시스템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막대한 석유 자원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라크 남부의 대도시 바스라에서 현지 지역 당국은, 기온이 50도를 웃도는 환경에서 여름 동안의 단전에 대한 반발로 일어날 수 있는 소요사태를 예측하고 이웃인 이란에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중앙 정부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민영화와 무질서한 지방분권의 결과로 인해 이라크인들은 무계획적인 공동 시스템에 기댈 수밖에 없다. 모든 마을에는 커다란 발전기들이 구비돼있어 거리 단위로 일대에 전기를 공급한다. 발전기에 연결된 수많은 전선들은 과거와 현재에 이 발전기를 사용해온 많은 개개인들의 흔적을 보여준다. 발전기 중 상당수가 고장이 나 작동되지 않지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흙이 쌓이고 쌓이는 퇴적 작용처럼, 별 다른 효과는 없지만, 다른 발전기를 더 추가하면 되니 말이다. 
개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도 많다. 공동 발전기가 고장 날 경우에 대비해 집집마다 별도의 발전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 발전기도 연료와 관리가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아직까지 어둠 속에 앉아 텔레비전 화면의 정지된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며 어디에선가 무언가가 다시 작동하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 비유하자면, 13년 전 사담 후세인 정권이 전복된 이후 이라크인들은 이렇게 살고 있다.(2)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불필요하게 중복 가동되는 것들이 이라크인들에게 필요한 에너지들을 다 소비해버리고 있다. 
국민들에게 스스로 융통성과 재능을 펼쳐 보일 것을 강요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쓸데없고 복잡하다. 이러한 상황이 애매한 것은, 사람들의 수고가 다 체제의 일부이며 어쨌든 간에 사람들의 수고 덕택에 체제가 돌아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예전 정부 시절 유행하던 속된 농담이 이 원칙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사담 후세인이 바그다드에 위치한 티그리스 강 횡단 교량들에 대한 통행세를 부과하며 이라크인들의 인내심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후세인의 하수인들은 돈과 체증에도 사람들이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세금을 또 올리고 계속 올렸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짜증이 난 후세인은 교량 관리자들에게 교량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강간하라고 명령했다. 교통체증은 늘어만 갔다. 분노가 터져 나왔고 사람들은 드디어 이렇게 항의했다. “강간범의 수는 언제 늘릴 겁니까?” 
지금 이 순간, 이라크에서 정치 계급과 관련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발언을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들은 모두 경멸의 대상이다. 2011년 12월 18일 미군이 철수한 뒤 이라크는 만성적인 폭력을 마주하고 있고, 지속적인 정치 위기를 경험했으며 그 결과 국회에서 논의된 모든 주요 법안은 계류 중이다. 이런 저런 인물들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일부 향성(向性)도 그 인물들이 대체 가능하다는 판단 앞에 완전히 사라졌다.
환멸을 느낀 한 지식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상, 대립을 넘어서서 보면, 그들은 정상에 위치한 동료들일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주위를 분산시키기 위해 싸움을 조장하고 국민들이 서로 미워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종파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퍼센티지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 한 가지에는 동의를 했다. 바로 체제 유지다.”
이렇듯 만성화된 피로는 이라크 사회를 훨씬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격렬한 당파주의와 함께 꼭 등장하는 연설의 단골 주제는 바로 평범한 이라크인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낳았고 대표자들에게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 부당한 분열에 관한 것이다.(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석유 판매 이익을 인기주의식으로 분배하기만 하는 경제에서, 2015년 8월 이후 탄화수소 시세 폭락에 의해 촉발된 시위들이 별다른 공감을 얻은 것은 아니다.(4) 국민 대다수는 혼돈 상태로 인한 위험보다는 불규칙적인 시스템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몇몇 한직에 금세 만족을 하거나 해외 이민을 고려하고 있다. 
 
미국 지원의 역효과

젊은이들에게는 활동가라는 선택지도 있다. 신념에 의해서든 아니면 단순히 사회적 지위를 얻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 이쪽이든 저쪽이든 한 파벌과 함께 싸우러 가는 것이다. 이슬람국가조직(IS)이 제일 늦게 참여한, 끝이 없는 전쟁은 체제유지에 필수적인 기능들을 다하고 있다. 전쟁은 사람들의 정신을 빼앗고 권력의 악습을 교란시킨다. 전쟁은 최소한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열정을 고무시킨다. 그리고 전쟁은 경제 후퇴를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보안 기관과 민병대들이 실업을 흡수해버린다. 시아파 사령관들은 유행하는 레스토랑을 개업하며 전리품을 세탁하고, 수니파 수장들은 (보충부대의 자금 지원을 정당화할 수 있는) 전투와 (새로운 계약 성사를 가능케 하는) 파괴된 도시 그리고 (모금액을 횡령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인류 위기를 이용한다. 정치권에서는 실제 대립이라는 미명 아래 그 누구에게도 돌려주지 않을 약탈을 위해 필요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얻는다. 
13년 전부터 가능한 빨리 이라크 침공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생각밖에 하지 않는 미국은 별 다른 의지가 보이지 않는 노력과 미봉책만을 펼 뿐이다. 미국은 언제나처럼, 현재 운영되고 있는 체제는 공격하지 않은 채, 이 영원한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이라크 부대들을 육성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이런 방침을 더욱 공고히 하려 한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테러와의 전쟁을 가장 우선시 하도록 한다. 오바마 행정부는 수니파의 정치 참여 요건을 완화했다. 자신의 본거지에서 떠난 몇몇 유명 인사들이 모인 그룹에 참여할 수 있는 요건을 단순화한 것인데 이는 차례로 이라크 수니파와 연합한 주요 도시들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했다.(5) 2003년 미국의 개입 당시 지배적이었던 편견들 속에서, 미 행정부는 수니파 전체를 불신했고, 시아파의 전투적인 태도를 받아들이며 위험하게도 쿠르드 족의 활동을 부추겼다. 
어찌됐든 간에, 이제 쟁점은 더 이상 거대 민족-종파 단체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6) 많은 국민들 사이에서 현재 상황은 확고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IS를 복수심에 불타는 수니파의 결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IS는 억압적이고 자주 자리를 비우는 국가가 남겨놓은 빈틈에 들어온 것뿐이다. 쿠르드족들이 얻는 이득에 대해서 이라크 정치 조직의 고위급에서는 아직 논란이 일지만, 근본적으로 쿠르디스탄은 이제 더 이상 이라크에 속하지 않는다.(7) 이라크는 공동체간 긴장 상태 측면에서 보자면 안정돼가고 있다. 예를 들어 전방에 시아파 민병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실제 현장에서보다 디지털 세상에서, 추방된 이라크인들과 다른 나라 국적을 소유한 무슬림 사이에서 끊임없이 당파주의를 부추긴다. 지금의 상황은 이상하리만치 1990년대의 흑백 사진과 닮아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남부에서 이는 시아파의 저항을 가혹하게 억압했고, 정권에 불성실하다고 판단해 국민들을 무시했다. 오늘날 수니파 지역에서 자행된 것처럼 도시들이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종려나무 숲이 파괴됐다. 권력의 하수인들은 시아파의 ‘대표자들’을 이용했고 이 광신도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근거지와 관계를 끊게 되었다. 행정부와 군대는 포용적인 상태를 유지했지만 수니파 문화가 지배적이었다.(8)
하지만 이제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어디에서든 남부지역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링구아프랑카(모국어를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에 의사전달 수단으로 쓰이는 공통 언어-역주)는 남부지역 방언의 특색을 띠고 있다. 또한, 서로의 역할이 완벽하게 뒤바뀌면서, 수니파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이라크인들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살아가는데 좀 더 편리하다면 이름이나 주소, 억양을 조금씩 고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아파가 권력을 잡았다”라는 뜻은 아니다. 예전에 수니파도 그랬었다는 것 뿐이다. 요즘에는 모두가 나라의 부유함을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는다.
흘러가는 시간과 그 시간이 허락하는 퇴보와 함께, 현 정치 체제의 윤곽은 분명해진다. 우두머리는 없고 수많은 조직들이 침투해 국가를 와해시키려는 모습이다. 국가의 자원과 조직들은 문제의 하부 정치 집단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주 다양한, 여러 레퍼토리에서 기인하는 모순된 현상들이 생기고 마치 이라크 정치는 일종의 역사적 문법을 지키면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일례로, 미국 침공 덕분에, 민족 분산으로 나타난 사람들이라든지 사다(Sada)부족 출신이라든지, 하층 부르주아계급 등의 일부 국민 계층이 선지자와의 혈통을 내세우며 권력층으로 상승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유동성은 바트당이 출현했을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지방의 하층 계급에 뿌리를 둔 바트당은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 창설된 기관들에 진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9) 쿠트시의 한 공무원은 이렇게 강조한다. “차이점이라면, 이념을 중심으로 한데 모인 바트당원들은 기능 본위 국가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파괴된 나라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연구원인 룰루와 알라시드는 수니파 부족들의 셰흐(원로, 수장-역주)들이 “군주제 시절의 대지주들과 비슷한 지위를 누리고 유사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10) 그들은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져 권력 주위를 맴돈다. 자신의 근거지에는 일개 촌민 무리들만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이용만 할뿐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모든 부족들은 사담 후세인이 다시 활성화시킨 전통을 되풀이하고 있고, 사법부를 경매장처럼 취급하는 나라에서 부족법이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누구를 산 채로 또는 죽은 채로 찾고 있다는 “Matloub dem” 또는 “Matloub ‘asha’iriyan”이라는 담벼락의 글귀를 보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또한, 영향력 있는 셰흐에게 매달 돈을 내며 필요한 경우에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일종의 보험에도 가입할 수 있다.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관습은 더 이상 전통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란의 영향

다른 조직들은 부분적으로 외부 권력과 결속하기도 한다. 안전장치를 구성해야하는 미국의 경우, 이라크에 중계자들을 만들어 뒀다.(11) 바로 이들을 통해서 미국이 제한된 수단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미 공군의 지원 없이는 별다른 능력을 내보이지 못하는 이라크 부대들과 일치협력하면서 말이다. 
이란도 이라크에 자기 편 사람들을 보내뒀다. 바로 테헤란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이슬람 지지자 세대인데 이들이 너무나 조직적이어서 오히려 이란에게는 문젯거리가 돼버렸다. 이란의 한 대학교수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우리의 이라크인 친구들은 우리나라에 아주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를 할 줄 안다. 모든 주요 인사들과도 친분을 쌓아서 웬만한 이란의 고위급 인사보다 훨씬 더 쉽게 최고 지도자를 만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들은 우리 두 나라 사이에 자리한 국경을 지워버렸다. 그래서 가끔 나는 우리나라 국가 기관들이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인지 아니면 오랜 동지애를 위해 결정을 내리는지 자문하곤 한다.”
이러한 분열된 현실 속에서 이라크는 두 가지 중대한 위험에 맞닥뜨렸다. IS의 골치 아픈 위협이 사소해질 수 있을 만큼 중대한 위험이다. 먼저, 이라크의 경제는 사실상 지속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12) 고액 임금을 받고 있는 공무원들은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국가의 부담만 가중시켰다. 배럴당 석유 값이 100달러를 넘어갔던 영화로운 몇 해 동안에도 터무니없이 과도한 운영비 지출과 떠들썩한 횡령 사이에서 국가 예산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지금 이 시간, 금융위기는 위험하고 불확실한 요인이 됐다. 아직은 부차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통제가 어려워질 수 있는 대중들의 항의가 계속되고 있고, 폭력 경제를 부추기고 있다. 또한, 점점 축소되는 부패 산업의 “시장 점유율”을 놓고 싸움을 벌이는 엘리트 집단 사이에서 상업적 경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라크 외부의 협력자들에게는 힘이 된다. 특히 미국처럼, 이라크가 적자를 메우기 위해 필요로 하는 세계 금융 거버넌스 시스템을 다방면으로 관리하고 있는 경우에는 말이다. 
두 번째 위험은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시아파 리더십에 대한 것이다.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 공동체는, (룸펜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젊은이들의 참여 시위들로 표출되는) 뿌리 깊은 계층 간 분열, 국가에 대한 환멸, 이슬람 대표들의 최후의 신뢰 상실, 대중의 강력한 신앙심, 시아파 민병대 지도자들의 커져가는 야망, 절제와 민족주의, 교리의 신뢰성을 결합한, 마지막 이라크인 아야툴라 알리 알시스타니의 사망과 함께 절정에 달하게 될,(13) 점점 약화돼가는 시아파의 전통적, 종교적 리더십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러니 많은 이라크인들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IS의 패배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것도 없다. 과연 누가 승리를 거머쥘 것인가?   



글·피터 할링 Peter Harling
국제위기감시기구(ICG)에서 아랍국가 전문가로 일했고,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사회적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22세기 세계> 등의 역서가 있다.
 
(1) 이라크는 전 세계 석유 매장량 가운데 10%를 보유하고 있고(1,500억 배럴) 하루 평균 250만 배럴을 생산한다. 탄화수소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이라크 국외 수입의 95%를 차지하고 있다. 
(2)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연합군의 이라크 침공은 한 달 뒤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를 가져왔다. 도피 후, 쇠약해진 대통령은 2003년 12월 13일에서 14일로 넘어가는 밤에 붙잡혔고 이라크 법원에 의해 사형이 선고된 뒤 2006년 12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3) 2003년 이후 이라크인 희생자 수는 20만에서 70만으로 다양하게 추정되고 있다. 2013년 과학잡지 <Plos Medeine>은 희생자의 수가 50만 명이며 1,000명당 사망률이 2002년 5.5%에서 2006년에는 13.2%로 늘었다고 발표했다. 이라크 언론에 따르면, 2008년 이후 종교 대립으로만 매해 1만~1만 5,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4) 2016년 4월과 5월, 시아파 시위자들이 정부가 자리한 요새화된 녹지대를 포위하는 일이 있었다. 눈길을 끄는 일임은 분명했으나, 이맘인 모크타다 알사드르가 이끈 이 항의 운동은 나머지 국민들의 마음까지는 얻지 못했다. 
(5) IS가 점령한 여러 곳의 수니파 도시는 치열한 전투와 엄청난 피해를 낳으며 탈환됐다. 한편, 시아파 민병대들은 IS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부당 징수를 하기도 했다. 
(6)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시아파 60%, 수니파 30%의 분포에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권력층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는(1932-2003) 영국이나 오스만의 이라크 점령 시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 
(7) 2014년 7월, 이라크 쿠르드 자치 지역의 마수드 바르자니 대통령은 쿠르드 분리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개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방법이나 일시는 언급하지 않았다. 
(8) Cf. Hosham Dawod, Hamit Bozarslan, ‘이라크 사회. 공동체, 권력 그리고 폭력 La Société irakienne. Communautés, pouvoirs et violences’, Karthala, Paris, 2003.
(9) 1947년 다마스쿠스에서 창설되어 시리아와 이라크 두 개의 분파로 나뉜 바트당(아랍부흥사회당)은 1968년부터 2003년까지 이라크를 통치했다. 
(10) 1921년에 만들어졌으나 실제적으로는 1932년에 창설된 이라크 왕국은 1958년 쿠데타로 인해 권력에서 축출된 하심 왕가의 통치를 받았다.  
(11) 미국은 자국 군대의 공식 철수 이후, 이라크 부대 교육 목적으로 3천5백 명의 미군을 이라크에 남겨두고 있다. 
(12) 탄화수소 분야에 전체 예산의 83%가 쓰이고 있으나 해당 분야에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국민은 1% 밖에 되지 않는다. 경제 다각화 노력은 30년의 전쟁과 위기로 발이 묶였고, 국가 재건 비용은 4천억 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13) 1930년 이란에서 태어난 알시스타니는 1961년에 나자프에 정착했다. 이라크 시아파 성직자 중 가장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