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난민들의 잠깐의 휴식

2016-09-01     실비 라세르

가파른 계단을 따라 구불구불 돌아 올라가자, 돌벽 뒤쪽으로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자그마한 벽돌집들이 보인다. 조금씩 올라가다보면 황혼녘 안개에 휘감긴 아자드-잠무-카슈미르(AJK)의 주도, 무자파라바드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에 떠있는 연들의 생생한 빛깔로 전경이 더욱 환해진다. 한 남자가 양떼를 몰고 있다. 여기는 1947년 분할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인도-파키스탄 분쟁에 희생된 카슈미르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난민촌 10개소 중 한 곳이다. 양국은 모두 예전에 카슈미르 지역을 다스렸던 왕국의 맥을 잇는 나라가 자국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카슈미르 일부는 인도가, 나머지 지역은 파키스탄이 지배하고 있다. 인도령 카슈미르는 잠무카슈미르라고 불린다. 파키스탄이 실효 지배하는 카슈미르 영토는 길기트 발티스탄(또는 북부 지역)과 아자드 카슈미르(‘아자드’는 ‘자유로운’이란 뜻)로 나뉜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아자드 카슈미르. 두 지역 중간에는 740km에 달하는 상흔이 놓여있다. 바로 인도 영토와 파키스탄 영토를 가르는 통제선이다. 
 
 이곳이 난민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파키스탄 정부는 난민들에게 가족단위로 집 지을 땅을 배분했다. 집은 오랜 시간 버틸 수 있도록 지어졌다. 언제까지 분쟁이 지속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을 쪽을 바라보는, 테라스가 딸린 진짜 주택들이 세워졌다. 지붕 위에 있는 저장탱크를 보면 각 가정에 수돗물이 공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현재 142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2000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경비가 삼엄하게 이루어지던 통제선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1)라 칭한 바 있다. UN평화유지군이 옵서버로 주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4년 후, 인도군은 이곳에 지뢰, 열카메라, 움직임감지센서, 경보기가 설치된, 높은 가시철조망으로 된(면도날이 장착된) 이중 담장을 설치했다. 사실상 국경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통제선은, 인도가 1948년에 채택된 UN 결의안(국민투표 실시)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은 아니다.  
 
 70도에 육박하는 가파른 비탈을 계속 오르자 테라스가 나온다. 카슈미르 계곡과 산악 지대의 빼어난 전경이 우리를 맞는다. 앙증맞은 원피스를 입은 어린 여자아이 두 명이 얼굴을 내민다.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들은 여인네들은 재빨리 부엌으로 사라졌다. 힘이 세보이면서도 인자해 보이는 거구의 남성이 우리를 반기며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곧바로 그는 행복감이 묻어나오는 어조로 어머니가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오셨다고 말했다. “24년 만의 상봉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 굴바르(2)는 바지 아랫단을 걷어 올리며 의족을 찾는다. “지뢰를 밟았어요!” 그는 의족을 떼어내고 절단 부위를 보여줬다. “인도 군대 때문이죠!” 경계선을 넘다가 입은 상처다. 굴바르는 참담했던 그때를 회상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1990년대 초반에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3년간 친구집, 부모님집 등 여기저기 숨어있었어요. 그러나 인도군은 매번 제 흔적을 찾아내더군요. 결국 더 이상의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어요. 어머니는 제가 어디 숨어있는지도 모르셨어요. 어머니께 인사를 드릴 겨를도 없이 떠났죠. 그냥 내 목숨만 구하고자 했던 거죠. 우리는 이틀 걸려 경계선에 도착했어요. 지뢰를 밟았을 때 파키스탄 군대가 우리를 보호해줬죠. 파키스탄군병원에서 정성스런 치료를 받고 무자파라바드로 이송됐어요. 내 죄명이요? 단지 1990년 시위에 참여했다는 거죠. 시위를 주도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인도군대에게는 다 똑같아요. 시위 주도자건 아니건 간에 그들은 시위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체포했어요. 우리의 유일한 죄는 우리의 자결권을 주장한 겁니다.”
 
 1987년 인도 정부의 부정 선거에 분노한 잠무카슈미르 무슬림들은 일련의 시위를 벌였다. 1990년 1월 20일 인도 군부대는 스리나가르 가우카달 다리에 있던 시위대에 발포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은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인도군은 부상자들에게 총알을 한두 발 더 쏴 확실히 숨통을 끊었다. 어떤 이들은 학살을 피해 다리에서 뛰어내려 익사했다. 공식 사망자 집계는 28명에 불과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50~287명이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수개월간 외국 특파원들의 카슈미르 체류가 금지됐다. 바로 이것이 오랜 악몽의 시작이다. 공습, 임의 체포, 강제 실종, 고문…. 1987~1995년 7만6천 명 이상이 체포됐는데, 그 중 2%만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고 2003년 발간된 국제위기감시기구(International Crisis Group)의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한 젊은이가 차를 가져왔다. 한 소녀가 얼굴을 내민다. 굴바르는 여섯 아이의 아빠다. 어떻게 생활 할까? “파키스탄 정부는 난민 1인당 매달 1,500 루피씩 생활보조금을 줍니다. 저는 적십자사에서 사용하는 보철기구를 제작했었지요. 그러나 3년 전 이 프로젝트가 끝난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성말랐지만 귀티 나는 노부인이 들어와 우리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양탄자에 앉았다. 굴바르의 모친인 아미마(70세)다. 그는 15일 전 처음으로 아자드 카슈미르에 발을 들였다. “제가 여권 발급을 신청할 때마다 아들이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결국 이사해서 새로운 주소로 다시 여권 발급을 신청했어요. 이번에 드디어 여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어요!”
 
 아미마는 국경초소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아들을 즉시 알아봤다. “우리에겐 엄청난 순간이었어요. 24년 만에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굴바르는 그 순간을 회상했다. 2개월간의 비자 유효기간이 끝나면 노모는 경계선 저편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는 아들을 보러 오지 못할 터이고, 모자는 또다시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화는 항상 굴바르가 해야만 한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는 전화를 걸 수 없기’ 때문이다. 만난 지 2주 밖에 안 된 할머니에게 한 소녀가 와서 기대어 앉는다. “이곳에 정착할 수는 없나요?” 노부인은 미소 짓는다. “그쪽에는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아들이 있어요. 제 형제도 사촌도 다 그쪽에 있습니다. 여기에 머물 수는 없지요.”
 
 아미마 역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남편은 세상을 떴습니다. 셋째아들은 인도군에게 살해당했고요. 4년간 숨어 지내야만 했어요. 상황이 안정됐을 때 한 아들이 감옥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심문을 받았어요. 또 다른 아들인 굴바르는 저쪽에 살고 있고요. 손자들 얼굴도 몰랐어요!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우리가 자유를 요구하기 때문이겠지요.”
 
 아미마도 고문을 당했을까? “말할 수 없어요. 할 말이 없습니다.” 굴바르는 어머니의 팔을 가리킨다. “이쪽 팔 근육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면서 팔 일부분이 기울어져 있어요.” “굴바르가 어디 있는지 묻더군요. ‘아들이 숨어있는 곳을 말해! 굴바르가 어디 있지?’ 하지만 전 몰랐어요! 인도 군대는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아요.” 아미마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들은 창문 유리를 깨고, 집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문을 부쉈어요. 심지어 나이에 상관없이 아이들과 여자들도 때렸어요! 심문 때 그들은 우리를 남자 취급했어요. 제 이웃 중 한명은 체포돼서 끌려갔는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때가 1994년 아니면 1995년 이었어요. 우리가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서 느끼는 것들을 저쪽에서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저쪽 상황은 완전히 정반대에요. 인도가 아무리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랑하지만 말입니다. 아자디(자유)!” 
 
 굴바르의 집에서 나설 때 이미 해가 기울어 맞은편 산에서 불빛이 반짝거렸다. 별처럼 말이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비탈진 경사면에 세워진 집들이기 때문이다. ‘지상 낙원’이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가운데 하나로 느껴졌다.
 
 무자파라바드의 다른 난민촌에서 굴바르의 사연과 유사한 수많은 이야기를 접했다. 어떤 이는 자매, 형제, 어머니를 다시 보지 못했다. 혹은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 야스민(3)은 후자의 경우다. 1990년대 초 부모와 함께 인도령 카슈미르를 떠나왔다. “우리 가족은 스리나가르 근처에 살았어요. 아버지는 양복점을 하셨죠. 인도군은 제 남자형제들과 아버지를 잡아가서 며칠 동안 심문했어요. 해가 지면 외출하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우리가 인도군대에 잡혀 실종될까봐 학교에도 못 가게 했어요. 우리는 한밤중에 스웨터도 걸치지 않은 채 빈손으로 집을 나섰어요. 인도군이 우리 마을을 공습하려고 해서요. 저는 그때 일곱 살이었어요. 우리는 이틀간 걸어서 경계선 저편인 아트무캄에 도착했어요. 한 가족이 우리를 맞아줬고, 그 집에서 1년을 머물렀어요. 그러나 인도군이 경계선 저편에서 끊임없이 발포해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포탄에 맞아 돌아가셨지요.”
 
 사미르(4)는 1990년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학생시위대를 이끌었다. 그는 당시 스리나가르에 거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조직한 집회 이후 즉시 집에 포탄이 날아들었습니다. 모든 지도자들과 친구들이 체포됐죠. 저는 3번이나 가까스로 피했지만, 결국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에요. 매일 길가에 시체들이 놓여있었어요. 제 친구도 4명이나 죽임을 당했죠. 누군가 시위 연설을 하면 바로 그 사람에 관한 정보카드가 작성돼요. 인도군은 우리 모두를 알고 있었어요. 체포하면 산으로 끌고 가서 죽여 버리죠. 그리고 길가에 시신을 버리는 겁니다. 시신을 되돌려주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사미르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인도인들은 가짜 민주주의를 떠벌리고 있습니다.” 카슈미르 분쟁으로 잠무카슈미르에서 7만 명이 숨졌고, 셀 수 없이 많은 인권침해와 실종이 보고됐다. 실종자부모연합(APDP)에 따르면 1989~2006년에 실종된 인원이 8천~1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대부분 젊은이들이다.
 
 최근 몇 년간 상황이 호전됐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교전이 벌어지면서 카슈미르인들의 삶을 어둡게 했다. 300개소였던 구금센터 수가 줄었고, 피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악명 높았던 고문센터 3개소가 재건축됐다. 
 
 2003년 이래 인도와 파키스탄은 휴전 중이지만, 잠무카슈미르 소재 7개 도시에서는 여전히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있다. 2005년 자녀와 생이별을 한 부모들이 오갈 수 있도록 버스 노선이 도입됐다. 버스는 매주 월요일, 스리나가르에서 차코티를 거쳐 무자파라바드를 왕복한다. 그러나 이 왕복 버스는 1947년에 헤어진 가족들만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도망간 사람들의 가족은 이용할 수 없다. 이들 가족이 여권을 발급받는다 해도 엄청 돌아서 가야 한다. 아미마처럼 라호르와 암리스차르 사이에 있는 와가 국경초소를 거쳐서 말이다. 
 
 2010년 카슈미르 계곡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무장이 잘된 곳이다. 공식 소식통에 따르면, 70만 명의 무장 병력과 군대식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고 한다. 파키스탄에서 2월 5일은 ‘카슈미르의 날(Kashmir day)’이다.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카슈미르 문제를 외교적으로 협상하겠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얘기하고 있다. 지금도 수많은 가족이 이산의 아픔으로 신음하고 있다.   


글·실비 라세르 Sylvie Lasserre  
저널리스트

번역·조승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Jonathan Marcus, ‘The world’s most dangerous place?’, BBC News, 2000년 3월 23.
(2), (3), (4) 안전상의 이유로,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모두 본명을 공개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몇몇 이름은 다른 이름으로 대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