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쇠한 세상과 바다

2016-09-01     장바티스트 말레 외
 
원양어업의 세계는 무자비하다. 2015년, <뉴욕타임스>의 이안 우르비나 기자는 직접 원양어선에 올라 탐사한 내용을 발표했다. “매년 적지 않은 수의 아동을 포함해,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빚에 떠밀려, 또는 강제로 선박 위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대형선박은 평균 4일에 한 번 꼴로 침몰한다. 해마다 2천 명부터 6천 명까지 죽어나가고 있다. 이들은 충분히 살 수 있었음에도, 미흡한 안전조치로 인해 죽어간 것이다.”
 
우르비나는 선단에 만연한 폭력행위를 고발하기 위해, 인도양에서 난파선 잔해를 붙들고 바다 위에 떠있는 어부들을 총으로 살해하는 동료 어부들의 모습을 영상촬영해 공개하기도 했다. 어부들 간의 과도한 경쟁을 잘 보여주는 잔인한 장면이었다.(1)
 
프랑스에서는 2016년 2월 출간된 카트린 풀랭의 소설 <위대한 선원(Le Grand Marin)>(올리비에 출판사)이 선단의 난폭한 세계를 묘사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젊은 여성 릴리는 알래스카의 ‘마지막 해협’ 근처에서 고기잡이를 위해 프랑스를 떠난다. 사실, 릴리는 위조신분증으로 아메리카 해안에서 십 년 간 선원생활을 했던 작가 자신의 상상 속 분신이다. 미국에서든, 프랑스에서든 선원이란 생명을 건 위험한 작업이다. 사고율이 매번 높아지는 이 직업을 마주한 릴리는 선박 위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여성혐오를 발견하게 된다. 선원들에게는 바닷물의 소금기로 피부가 좀 먹어가고, 생선의 피를 뒤집어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고된 작업에 지쳐가는 이들은 신참들을 모욕하거나, 반대로 선배들에게 모욕을 당한다. 수많은 사고를 겪고 항구에서 죽거나 자살하기에 이른다.
 
작가의 문체는 격렬하고 말하는 방식은 건조하다. “처음에는 동물처럼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오고가는 말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몸은 늘 고되다. 조타수나 남자들이 소리치며 무언가를 지시하면 그걸 그대로 해내야한다. 난 복종했다. 고함에 반응하는 법을 배웠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도록 말이다.”(2)
 
작가 카트린 풀랭의 말이다. 그렇듯이 작품 속의 젊은 여성, 릴리도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 작가는 TV프로그램 <위대한 서점>에 출연해, “모욕적이지만 당연한 일이다. 릴리는 초보자다. 견습 중인 것이다. 그렇게 배워가야 한다”고 말한다.(3) 작가는 자신의 작중인물이 열망하는 것은 “죽음도 존재하는 진짜 삶”을 찾는 일이었다고 언급한다(<프랑스 퀼튀르>, 2016.4.24). ‘진짜 삶’이든 ‘현실’에 대한 끝없는 협박이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외면한 채, 자신만의 세상에 편히 처박혀 있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죽음을 다루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삶이 모든 가치와 아름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죽음으로부터다”라고 작가는 믿고 있다(<프랑스 퀼튀르>, 2016.4.24). 인도양의 파도가 삼켜버린 어부들은 아마 이런 미학적인 부분에 공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언론은 이에 공감했다. 언론은 <위대한 선원>이 출간되자마자 열광했다. <르푸앙>지는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은 마치 대양의 바람이 갑자기 우리를 에워싸듯 나타났다”고 표현했고(2.11), <롭스>지는 “조지프 콘래드와 허먼 멜빌의 야성적 승계자”라고 했다(2.11). TV프로그램 <위대한 서점>의 사회자 프랑수아 뷔스넬은 “이 책에 반해버렸다. 아주 훌륭한 책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자이자 작가인 에릭 포토리노 역시 “정말 훌륭하다”고 감탄했다. <르피가로>지에서는 “신선한 돌풍, 현대 문학에서 얼마나 환영받을만한 일인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2.4). 7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책은 프랑스 모험작가상, 렉스프레스-BFM TV의 독자소설상을 연거푸 받는 등 수많은 영예를 안았다. 작품의 문학적인 훌륭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에 쏟아지는 이런 식의 찬사가 이 소설에서 과장하고 있는 원양어업이라는 노동 그 자체 때문일까? 카트린 풀랭은 작품 속에서 이야기 한다.
 
“배를 타는 것은, 배를 위해 일하는 동안 배의 운명을 따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나만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큰 도박과도 같다. 그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 멋지다.”(4)
 
그토록 멋지게 일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 <레제코>지에서는 문학란에 이런 언급을 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최고의 프랑스 소설이다. 작가주의가 강하고 자기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프랑스 문학이 드물게 다른 세상으로 문을 열었다. 드디어 이번에는 해냈다. 카트린 풀랭은 콘래드와 잭 런던뿐만 아니라 맬컴 라우리, 잭 케루악의 깃발 아래 항해하고 있다. (…) 뭍에 내려도 동화 속 낙원은 아니다. 술과 마약, 성적 타락, 자살이 있을 따름이다.”
 
이 경제 일간지는 “아름다움과 폭력으로 숨이 멎을 듯한, 환각에 사로잡힌 듯한 텍스트들”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1.29). <라크루아>지는 “멜빌처럼 절대적인 것을 찾는 콘래드의 승계자”에게 갈채를 보내며 “카트린 풀랭은 칼끝으로 배를 갈라 뼈가 드러날 때까지 인간의 조건을 낱낱이 해부했다”고 강조했다(2.11). 찬사를 가득히 담아, 카트린 풀랭의 소설을 조지프 콘래드, 허먼 멜빌, 잭 런던, 맬컴 라우리 등 거장의 작품들과 비교한 것은 풀랭을 우상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러한 비교가 정말로 일리가 있는 것일까? <올메이어의 우행(愚行)>에서 <바다의 거울>에 이르기까지 콘래드의 작품은 선장이든 선원이든, 명예를 지키든지 되찾든지 이 ‘명예’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멜빌은 <백경>에서, 선원들 중 특히 가장 예민하고 특이한 선원들을 희생시키는 부조리함에 집중한다. 맬컴 라우리는 <울트라마린>을 통해 선원들의 난폭함과 맞서 싸우는 한 개인을 보여주며 멜빌을 계승하고 있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런던의 경우, 자전적 소설 <존 발리콘>에서 술로 맺어진 선원들 간의 인위적인 동지애를 규탄하고, <마틴 이든>에서는 어떻게 자신이 선원들의 난폭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풀랭의 이 작품 <위대한 선원>이, 인간이 야만적인 본성에 맞서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는 해양소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진짜 삶’이라는 묘사에 빠질 수 없는 “힘이 곧 법이다”라는 법칙은 소설 속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항구에서는 모두 술에 거나하게 취하고, 배 위에서는 오직 힘과 계급, 남성성만이 군림한다. 섬세함은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카트린 풀랭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배라는 공간은 남자들의 세계다. 사람들은 간혹 배에서 생활하는 여자들의 조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만 남자들의 조건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어쨌든 남자들에게 속한 세계인데 말이다. 그들만의 세상을 존중해줘야 한다.”(5) 
 
소설 속에서는 생선 배를 가르는 작업이 일관되게 이어진다. 작가의 분신은 생선의 심장을 날것으로 먹고, 맨손으로 코를 푼다. 하지만 예정된 것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을 때는 고개를 숙인 채 저항하지 않는다. 릴리는 이러한 특징을 분명하게 내보인다. 그녀는 아름답고 다정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와의 관계가 시작되면 포기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릴리는 스스로, 관계를 맺었던 자신의 <위대한 선원>을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일로 몸을 혹사시키는 편을 택한다. 언론에서 수없이 언급했던 책의 뒤표지에는 아이슬란드의 통조림공장, 미국의 선박 제조 현장, 캐나다의 농촌, 홍콩의 술집 등에서 일했던 카트린 풀랭의 경력이 무공훈장처럼 나열돼있다. 현재 그녀는 프랑스에서 목동 일을 하며 포도밭에서 일하고 있다.
 
육체는 기쁨이 아닌 고통과 시련에 바치고, 사랑과 즐거움, 본능은 거부한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쓴맛(amer)’(6)이다. 목사의 딸이었던 카트린 풀랭은 오래 전 자신의 고향 마노스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래스카로 떠났다. 그런데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궁금한 점이 있었다. ‘진짜 삶’이라는 묘사는, 노동을 단지 개인적인 고행, 인간을 본질에 다다르게 만드는 수단으로만 치부해버리는 고통주의의 부활을 내포하고 있는 건 아닌가? “릴리는 결국 자유를 찾았는가?” 프랑수아 뷔스넬은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카트린 풀랭이 출연했을 때 그녀에게 물었다. 카트린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릴리는 하루하루, 시간 속에서 일관성을 찾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게 만드는 노동을 만났고, 남자들의 격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주 강렬한 유대감과 동질감을 얻었으며, 그리고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준 그녀의 육체를 발견했다.”
 
작가의 분신은 결국 자신의 육체를 ‘발견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인생의 시련을 맛보게 해주고 자기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해주는”(7) 노동의 거대한 고통 덕분에 말이다.  
 
 
글·장바티스트 말레 Jean-Baptiste Malet
기자
글·필리프 블랑숑 Philippe Blanchon
작가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이안 우르비나, ‘The Outlaw Ocean’, <The New York Times>, 2015.7.17, 20, 27, 28.
(2) <르몽드>와의 인터뷰, 2016.2.18.
(3) <위대한 서점>, France 5, 2016.2.18.
(4) Ibid
(5) Charlemagne 서점에서 있었던 작가의 발언, Toulon, 2016.2.24.
(6) ‘amer’는 배의 항해에 사용되는 항로지표를 뜻하기도 한다. 
(7) Charlemagne 서점에서 있었던 작가의 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