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기,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삶

2016-09-01     플로랑스 들레

열정적인 논객이자 극단적인 가톨릭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1888~1948)는 참여주의적 성격이 강한 작품을 남겼다. 베르나노스의 작품에서는 빈틈없이 치밀한 면모가 느껴지는 한편, 사상적 단절도 눈에 띈다. 조국의 명예와 기독교의 이상향을 앞세운 그는 한때 샤를 모라스를 중심으로 한 극우 사상을 따르며 반유대주의를 신봉하고 프랑코 장군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베르나노스는 후에 노선을 바꿔 우익 단체 ‘악시옹 프랑세즈’와 결별하고 스페인 파시즘 정권을 규탄했으며, 이를 지지했던 교회를 비난했다.

“살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일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이 간결한 한 마디 말을 내세운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분명 과격한 사람이었다. 그의 작품을 읽는 것에는 어느 정도 불편함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그의 책을 읽어야 할 때가 왔다. 갈리마르 출판사의 ‘라 플레이아드’ 총서 시리즈로 <베르나노스 소설 전집>(전2권)이 발간됐기 때문이다.(1) 기존에 나온 ‘라 플레이아드’ 총서에서 평론가 가에탕 피콩(1915~1976)이 쓴 서문 ‘소설가 베르나노스’를 유독 좋아하던 사람들이라면 이번에 출간된 책에서 질 필립 교수가 쓴 서문이 다소 생소할 수 있다.
하지만 서문의 첫 장에서 ‘천사와의 싸움’이라는 제목만 보더라도 저자의 의도는 쉽게 파악된다. 1926년에서 1943년 사이에 나온 7편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의 우화를 동원한 필립 교수의 의도는 분명 베르나노스의 표현주의 작품을 수식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서문에서 그는 “시대의 부침 속에서 탄생한 베르나노스 작품의 특성을 규정할 만한 명확한 용어가 없다”고 적었다. 또한,  베르나노스는 성난 시민처럼 무력함을 내세우며 현실과 타협하고 외면하는 세태에 분노했고, 그의 과격함은 곧 1차대전 직후 평온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본능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더더욱 그의 책을 외면할 수 없다.

“작가는 아니지만, 글쓰기는 피할 수 없다”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일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베르나노스의 작품에서 이 문장은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어느 날 밤>이라는 초기 단편 소설에서 나온 것이었고, 두 번째는 <기쁨>이란 소설에서였다. 전자는 파라과이 삼림을 개발하러 온 냉혹한 프랑스 청년에 관한 이야기이며, 후자는 기쁨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남자 클레르주리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쥐새끼 같은 몰골로 어둡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불쌍한 중생이었다. 그의 걱정거리 또한 쥐새끼의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렇듯 클레르주리는 계속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인물이었다.
베르나노스에게 있어 명예로움의 기준은 곧 신과 조국이었다.  전자는 초자연적인 준거였고, 후자는 자연적인 준거였다.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3번이나 거부했는데, 내 좁은 소견으로는 ‘레지옹(Légion, 영어 독음은 레기온. 다수, 군단, 무리를 뜻함-역주)’이라는 단어가 ‘악령에게 사로잡힌 남자’를 연상시켜, 그의 명예 관념에 위배됐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누가복음 8장 30절을 보면, 예수가 그에게 이름을 묻자 남자는 “내 이름은 ‘레기온’이다. 우리는 다수의 무리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는 악령들에게 남자를 떠나 저 멀리 있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라고 명한다. 2천 마리에 달하던 돼지 떼는 레기온의 악령에 사로잡혀 바다로 뛰어들고, 곧 수장된다. 이렇듯 베르나노스는 삶의 위기를 해결하기보다 명예욕을 쫓기에 급급한 사람들을 향해 돼지나 쥐새끼 등 가차 없는 비유를 사용한다. 
우리는 종종 음유시인들의 시로부터 이들의 삶을 상상해내고, 성인들의 행적으로부터 이들의 삶을 유추해내며, 누군가의 몇 가지 특징적인 양상과 결정적인 순간들만으로 허구의 삶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성인이나 위선자, 약물 중독자, 범죄자의 삶을 기술함에 있어 베르나노스는 대개 장문의 대화를 이용해 삶의 주요 순간들을 풀어놓는데, 간혹 대화가 너무 오래 이어져 깊은 산중에서 길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서는 항상 한 줄기 빛이 비춰지면서 이내 주변이 환해진다. 베르나노스는 (유년기를 보낸 아르투아의 환경이었으리라 추정되는) 주변 풍광과 기후에 대한 묘사도 풀어놓는다. 어쩌면 작가는 주변의 이런 자연환경 또한 우리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그는 신부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21세 때 베르나노스는 신앙적 스승이자 베네딕트 수도사인 돔 베스에게 편지를 쓴다. “문인이라는 직업이 그리 내키지도 않지만, 저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즉 저를 살아가게 해주는 유일한 방편이니까요. 누구나 내면의 인격을 풀어놓고 해방시킬 수단은 필요한 법이죠.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제 정신적 삶의 조건입니다.”
일을 삶의 대척점에 두며 거부했던 그였기에, 베르나노스는 작가라는 호칭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일기를 쓰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는데, 다만 소설은 ‘정신적인 모험’으로 받아들여, 소설가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만큼은 자인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베르나노스는 “나는 작가가 아니다. 종이 한 장만 봐도 정신이 피곤해진다”며 거듭 부정한다. 

1차대전의 상처, 
그리고 페즈릴 신부와의 만남

1926년에 발표된 첫 번째 소설 <사탄의 태양 아래서>는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해 차분히 다룬 작품이다. 이 주제를 선정한 이유를,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쟁이 끝난 후, 모든 게 무너져버린 가운데 그 어떤 말도 의미 없는 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사람들은 영웅주의를 우려먹고 있었으며, 나약하게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한 명의 성인을 내세워 이 모든 것에 맞서도록 하고 싶었다.” 
소설은 의외의 성공을 거두었다. 늘 각지를 떠돌아다니던 베르나노스는 첫 소설의 성공 후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아내의 건강 문제로 시부르에 거처를 마련한 베르나노스는 이곳에서 두 번째 소설 <위선>의 집필을 시작했다.(2)  
1910년, 22세의 나이로 군복무를 마친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자원했었다. 그는 일개 하사로 참전했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여단장 지위까지 올라 무공훈장도 받는다. 하지만 1차대전이라는 비극이 끝난 후 저 유명한 ‘광란의 20년대’가 시작된다. 모두가 쾌락적 삶에 빠져들며 문화와 예술에 심취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베르나노스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베르나노스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온 가족이 ‘아무 이유도 없이’ 몰살된 그 사람은 이 ‘아무 이유도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 맞서기 위해 가톨릭 사제가 되는데, 그는 바로 훗날 베르나노스와 만나게 되는 페즈릴 신부였다. 생테티엔-뒤몽에서 보좌 신부로 활동하던 페즈릴은 이 지역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세례 증서를 발급해주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는 야드 바셈 기념관에서 그를 ‘열방의 의인’으로 추대하는 이유다. 프랑스 지식인 가톨릭 중앙회에서 성직자 고문을 맡고 있던 페즈릴 신부는 1948년 병상에 있던 베르나노스의 간호를 맡았고, 임종의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킨다. 특히 <윈 씨의 노트>라는 특별판이 출간되는 데는 그의 공이 컸다.(3)
이 책의 왼쪽 페이지에는 최종 원고가 인쇄돼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욥의 오물’이라며 쓰레기 취급을 받는 초고가 실려 있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평소 카페에서 주로 작업했던 습관대로) 커피 테이블 위에서 작업을 하거나, 초등생용 공책에 푹 파묻혀 글을 쓰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작가는 앞으로 나갔다가, 뒤로 쳐졌다가 암중모색하듯 한 발 한 발 힘겹게 나아갔던 게 분명하다. 심지어 그의 거친 숨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이번에 출간된 ‘플레이아드’ 시리즈에 들어갈 <윈 씨> 원고를 정리하기 위해, 모니크 고슬랭노아도 휘갈겨 쓴 글씨와 낱장의 원고 묶음 22개를 ‘판독’해야 했다. 고슬랭노아는 이 과정에서 페즈릴 신부가 기존에 판독해둔 자료들이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됐었는지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고슬랭노아는 좌절과 절망과 대가인 주인공에 대한 연구 논문까지 작성한다. 초고의 표지에는 ‘장편소설 <윈 씨>’라는 펜글씨가 쓰여 있었다. 작업은 끊어지기도 하고 문제가 생기기도 해, 1931년에 집필을 시작한 이 작품은 1940년이 돼서야 마무리된다.  

무셰트를 통해 보여주는 ‘명예로운 저항’

무셰트와 도니상, 슈방슈, 샹탈 등 작가가 사랑해마지 않는 인물들이 벌이는 투쟁은 영혼의 투쟁이었다. “영혼의 투쟁은 물리적인 전투 못지않게 격렬하다.”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중 작품 ‘고별’의 이 문장은 자주 인용되는 구문인데, 베르나노스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여기에서 끝나면 안 된다. “그러나 정의의 시각은 오직 신만의 유일한 즐거움”라는 그 다음 문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의가 신의 왕국에 속하는 것이라면 스페인 교회가 공화국에 맞서 민중을 옹호한 것은 곧 하나의 치욕이다. 이 때문에 베르나노스는 소설 집필을 그만둘 정도로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는 오로지 투쟁 관련 저술에만 전념한다.
당시의 상황을 한 번 짚어보자. 1934년, 베르나노스는 가족들과 함께 발레아레스에 정착한다. 이곳에서는 생활비가 적게 들었기 때문이다(사실 베르나노스는 거의 만성적으로 재정난에 시달렸다). 1936년 9월, 군대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후 내전이 시작되자 마요르카 섬 주교의 승인 하에 프랑코 장군파의 민병대가 끊임없이 학살을 자행한다. 이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베르나노스는 이후 1937년 1월에도 ‘달빛 아래 공동묘지’에서 휘발유가 뿌려진 시신 수백 구가 불태워지는 것을 목도한다. 마지막 단편 <무셰트의 새로운 이야기>를 끝낸 후 그가 <달빛 아래 거대한 공동묘지>를 집필하기 시작한 이유다.
베르나노스는 당시의 이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만일 트럭에서 실려 온 사람들이 다음날 아침 선 채로 총살당하는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끔찍한 상황에서도 스페인 사람으로서의 패기를 잃지 않고 고개를 뻣뻣이 든 채로” 처형되던 그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베르나노스가 부당하고 불행한 현실에 쫓기며 강간당한 소녀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무셰트가 자살을 택한 이유는, 다른 인물들처럼 현실에 좌절해서가 아니다. 자신에게 약속됐던 사랑이 보장되지 않고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찬 세계를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무셰트가 보여주는 이 저항의 몸짓을 가장 좋아한다. 무셰트는 명예로운 인간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상을 떠나던 해, 베르나노스는 “내가 소설을 집필할 수 없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신은 알고 계신다. 나로서는 굉장한 희생을 한 것”이라고 심경을 털어놓는다.
 베르나노스의 용기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과, 그리고 그 자신과 싸운 대가로 힘들게 얻어낸 것이다. 병약한 몸으로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정신적인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는다. 첫 번째 고린도 전서의 한 대목에서 성 바울은 선수들의 규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경기장의 모든 선수들이 열심히 달리지만, 그 중 1등의 영광을 얻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니 이기기 위해 달려라. (…) 내가 달리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을지니 무작정 앞만 보며 달리니라. 내가 격투기를 할 때에도 이와 같을지니 무턱대고 허공에 손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주먹을 날리느니라.”

감옥에서의 정치적 전향, 레지스탕스 지지

끝으로 베르나노스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앞서 주지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그의 삶에 대해 개괄적으로밖에 살펴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스로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작가로서, 그리고 (오랜 기간 가톨릭의 반유대주의에 빠져있었던) 프랑스의 가톨릭 신자이자 시민으로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살펴본 것이다. 부침이 많은 인생 여정을 걸어온 그는 뜨겁게 삶을 살아간 인물이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왕정주의자 샤를 모라스가 결성한 왕당파 과격단체 ‘악시옹 프랑세즈’에 가입한 뒤 감옥에서 전향해 이후 모라스에게 등을 돌리며 보수파의 두려움을 비웃은 뒤, 프랑스 우파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프랑코 정권 치하의 ‘민족해방당’(4)에 동조한 교회를 힐난했다. <달빛 아래 거대한 공동묘지>가 출간됐던 1938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포르투갈에 갔다가 이후 브라질에 간 그는 해묵은 꿈을 떨쳐버리고 열대의 태양 아래 교구를 구축하며 전원의 목자가 된다. 그가 마르세유를 떠나기 전날이었던 7월 19일, 호세 베르가민(Jose Bergamin, 스페인 내전 이후 남아메리카로 망명한 스페인 작가)은 툴롱에 가서 그를 만나 ‘스페인 국민을 대신해’ 감사를 표한다.
세바스티앙 라파크의 명저 <망명의 태양 아래>(5)는 베르나노스가 브라질로 떠나서 남기고 간 행적을 뒤따라가는 작품이다. 드골의 1940년 6월 18일 호소문을 듣고 드골주의자가 된 베르나노스는 이후 브라질 언론에서 끊임없이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지지한다. 1945년 드골 장군으로부터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우리 곁입니다”라는 전보를 받은 베르나노스는 그제야 비로소 브라질을 떠난다. 브라질에서 베르나노스는 비록 꿈의 집까지는 아니었을지언정 최소한 “스스로의 삶과 가장 비슷한 집”은 발견했다. “문에는 자물쇠가 걸려있지 않고, 창문에는 유리창이 없으며, 방에는 지붕이 없다. 지붕이 없으니 다른 집에는 숨겨져 있는 모든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베르나노스가 바라던 삶은, 하늘을 지붕으로 삼는 삶이었다.  



글·플로랑스 들레 Florence Delay
소설가 겸 수필가.  <연극 같은 인생(La vie comme au théâtre)> 등의 저서가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22세기 번역> 등의 역서가 있다.


(1) 조르주 베르나노스, <소설전집 및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1권: 피에르 질 및 미셸 콜하우어 정리 및 감수 & 2권: 자크 샤보 및 모니크 고슬랭노아 정리 및 감수, 갈리마르 출판 <라 플레이아드> 총서, Paris, 2015년 참조: <Essais et écrits de combat>, tomes 1&2, 갈리마르 출판 <라 플레이아드’ 총서>, 1972년과 1995년.
(2) 해당 정보는 그의 손자 질 베르나노스가 작성한 연표를 참조했다. 
(3) 조르주 베르나노스, <윈 씨의 노트>, 다니엘 페즈릴 정리 및 소개, Seuil, ‘Le don des langues’ 컬렉션, 파리, 1991년. 
(4) ‘Movimiento Nacional’; 1937년에서 1977년 사이 프랑코 독재 정권 치하의 스페인 정부 기구 공식 명칭. ‘국민운동’, ‘민족해방당’ 등으로 번역된다.
(5) 세바스티앙 라파크, <망명의 태양 아래(Sous le soleil de l’exil)>, Grasset, 파리, 2003년.